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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그리고 4월 민주혁명 ■박기성 목사<크리스찬투데이 발췌>
역사의 기록은 항상 승자(勝者)의 입장에서 조명되어진다. 그 상대가 패자(敗者)가 아니어도 역사의 헤게모니(Hegemonie)를 붙잡은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남겨지는 생명체와도 같은 것이다.
아주 작은 관점의 차이가 한 시대의 역사를 거꾸로 기록하게도 하고 불의와 정의가 전혀 다른 입장에서 다루어지게도 한다. 결국 선인(善人)도 악인(惡人)도 없는 것이 역사가 된다. 왜냐하면 주인이 바뀌면 그 내용 자체가 다르게 해석되어지기 때문이다.
★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그는 누구인가?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은 ‘남북분단의 뿌리이며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무소불위의 독재자’, ‘6·25 한국전쟁의 정보를 알고도 무참하게 당하게 만든 장본인, 억울한 국민들을 참살한 거창양민 학살사건과 제주 4·3사건의 주범, 각종 비리와 부정의 온상, 정치파동(발췌개헌, 사사오입, 부정선거), 언론탄압의 주역 등’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9차 개정으로 만들어진 ‘헌법 전문’에도 ‘개헌국회’나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 이것은 국회가 스스로 국회의 설립을 부인하는 것이며 또한 대한민국의 건국이 빠진 것은 대한민국의 뿌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과연 ‘이승만 대통령’은 공(功)이 없고 과(過)만 있는 반역사적, 반민족적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워버려야 할 만큼 ‘중죄인’인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과거에 묻혀 버린 역사를 끄집어내는 것도 미래를 위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등대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이승만’은 한국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거목(巨木) 가운데 거목이다.
그의 위대함을 작은 원고에 담는 것이 너무나 역부족임을 먼저 고백한다. 이 글을 이렇게라도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짧게는 6개월이고 길게는 16년 혹은 30년이나 걸렸다. 1984년 가을, 개인적인 꿈을 찾고 이루기 위하여 무작정 상경하여서 만난 선생님이 계시다.
그는 1975년 언론파동으로 인하여 해직된 조선일보의 기자 출신이었다. 그 분이 주도하는 아카데미에 참석하고 스텝으로 섬기면서 ‘기자’가 무엇인지 배웠고, 이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1960년대의 세계 학생운동들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는 기회도 있었다.
이 시기에 필자 나름대로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격동기에 대한 정리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이승만은 남북분단의 고착화의 주범, 한국전쟁, 부정, 불법의 정치인이다’는 기사를 작성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와 인물의 평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2000년 4월 11일, 당시 ‘크리스찬 대학신문’의 주필로 있으면서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4·19혁명을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입장’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하여 ‘이화장’을 방문하여 ‘이인수 박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지면에 의도된 내용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2016년 4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하여 처음 글을 쓴지 30년, 특집을 다룬지 15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특집을 다루어 본다. 이를 위해서 2015년에 틈틈이 찾아서 읽었던 자료들이 있다.
10여 권의 책과 20여 편의 논문을 통해 만난 이승만 대통령 앞에 자연스럽게 머리가 숙여지는 숙연함과 엄숙함이 있다. 영어와 한글로 번역된 그의 일기에서도 조국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큰 파도가 되고 태풍이 되어 나의 심연을 요동치게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建國)대통령이며 진정한 국부(國父)로서 존경받아야 할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그와 그의 정부는 업적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탑을 쌓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그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탑이 무너지기는 쉽고 무너진 다음에는 그 과정의 수고와 노력보다는 무너진 그 사실 때문에 혹평을 받게 된다. 또한 누구든지 상대방의 단점을 찾아내거나 판단하는 것은 쉬우나 그의 장점을 찾아내고 그를 높이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남의 실적을 부정하고 공격하기는 쉬우나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일에는 인색한 면이 많이 있다. 그러나 최소한 역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깊은 생각이 있는 자라면 어느 누구나 갖고 있을 공과(功過)를 편향(偏向)이 없는 자세로 분석하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 인간 이승만의 생애
조선 왕조 3대 임금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경선(李敬善, 1839∼1912)은 2남 2녀를 출생했으나 두 아들을 모두 잃었다. 서당훈장 김창은의 외동딸인 그의 아내는 아들을 다시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중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슴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고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 이름을 ‘승룡(承龍)’이라 지었다(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안골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되던 해에 서울의 남대문 밖 ‘염동’(현, 마포구 염리동), ‘낙동’(현, 명동일대)을 거쳐서 ‘도동’(현, 동자동 일대)으로 이사하여 양녕대군의 후손이며 판서를 지낸 이근수의 서당에서 수학했다.
이곳은 남산 아래에 있는 ‘우수현’이라는 곳인데 그는 이곳을 잊지 못해서 성년이 된 다음에 “남산 ‘우수현’에서 살았다”는 뜻으로 우남(雩南)이라는 호를 짓게 된다.
16세(1890년)에 당시 풍습을 따라 어른들이 주선하는 대로 박춘겸의 딸인 동갑내기와 결혼하였다. 박씨는 남편의 이름 ‘승’자를 따서 ‘승선(承善)’이라는 신식 이름을 갖기도 하였다. 이들은 1898년에 아들 ‘봉수(鳳秀, 아명 泰山)’를 얻었다. ‘승룡’은 조선왕조의 혈통을 이어 받았으나 ‘몰락한 가문이라는 피폐함’이 그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의 부친은 족보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늘 족보타령을 하면서 그것에 묻혀 살았지만 그는 그의 부친이 생명처럼 여기는 족보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부친은 양녕대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모르지만 그의 눈에는 생활력 없는 무능한 부친의 모습에 불과했을 수 있다.
늘 그의 모친의 삯바느질을 통해서 생활했기에 그가 가지는 불만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에는 그 마음의 풍랑을 스스로 잠재울 수 없으며 불평과 불만이 더 크게 드러나는 법이다. 그에게는 왕족이라는 허울보다는 현실적 삶의 처절함이 가져다주는 괴리감이 더 컸다. 그리고 이런 힘든 삶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절제되고 통제된 가르침으로 학문에 전념한 것이 어린 소년 ‘승룡’에게는 큰 위안이었고 꿈이었다. 그의 모친은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6대 독자인 승룡을 잘 키워보겠다는 염원과 열망으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같은 마음으로 이사도 했다.
또한 손수 천자문과 시를 짓는 법과 공자의 도를 가르치는 등 교육열이 특출했다. 쇠락한 가문의 중흥을 소망하는 마음은 부친보다 모친이 더 강하였다. 과거시험에 응시할 나이가 차지 않았지만 승룡에게 과거 시험에 수차례 응시하게 하였다. 물론 당시 타락한 사대부의 불의로 말미암아 그 꿈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된다. 조선 사회에서 양반의 입신양명(立身揚名)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과거 시험이다.
그런데 승룡이 19세 되던 해인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승룡이 늘 꿈꾸던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말았다. 이에 승룡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절망은 아니었다.
이후에 그는 자서전을 통하여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영어와 서양문물을 배우는 전환점이 되었다”라고 회고한다. 즉 과거시험의 폐지가 막힌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이 되었다.
배재학당, 그것은 ‘승룡’에게 이 세상을 포효(咆哮)하는 기회가 되었다. 승룡이 20세 되었을 때에 부모님의 맹렬한 반대가 있어서 쉽게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배재학당에 다니고 있었다(1895년 4월).
그는 이 때부터 이름을 ‘승만(承晩)’으로 바꾸었다. 이는 승룡이라는 이름이 용꿈을 꾸고 태어난 것을 너무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늦을 만(晩)자를 써서 별도로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다. 배재학당은 ‘이승만’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만난 최초의 선생은 노블 박사이며 그의 솔직함을 좋아했다. 노블박사는 이승만에게 서양의 문물, 정치, 경제, 기독교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고,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노블 박사의 이야기는 이승만에게 충격적이었고 조선과 중국과 일본이라는 세계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깨우쳐 주었다.
청년 이승만에게 서양의 역사와 국제정세에 눈을 뜨게 해 준 또 다른 인물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던 서재필(徐載弼) 박사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으로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개화파 지식인이다.
1985년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미국인 부인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배재학당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개념을 처음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1896년 그의 지도로 당시 배재학당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토론단체인 ‘협성회’는 계몽적인 주제를 시작으로 정치개혁과 외세 배격에 이르는 사회문제를 다루었고 이승만의 정치의식은 급성장하게 된다.
이승만은 그의 자서전을 통하여 “내가 배재학당에 입학한 것은 영어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어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자유의 개념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배재학당의 교장인 아펜젤러 박사는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됨을 강조하며 학생 스스로 학교 신문을 만들도록 권장했다(1898년 1월). 이에 이승만은 서재필의 지도하에 학생들이 만든 ‘협성회 회보’의 주필이 되었다. 이것은 이승만이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 주필, 기자의 1인3역으로 활동하면서 외국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저항하는 내용을 연이어 게재하여서 그들의 야욕을 막아내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어서 ‘제국신문’ 창간에 참여여 주필에 취임하였다.
1890년대 말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는 최초의 대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가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서울 종로에서 열렸다.
당시 23세의 청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회원으로 열강들의 침탈에 대하여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만민 공동회’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기회가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대한민국 중추원 의관(종9품)’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898년 11월 28일). 이런 그의 활동은 급진주의 박영효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고종황제 퇴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서 한성감옥에 투옥(1899년 1월 9일)되어 5년 7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한편 부인 박씨는 이승만의 체포 이후에 1주일 동안 덕수궁 대한문 앞에 거적을 쓰고 앉아서 남편의 무죄를 주장하며 석방해 줄 것을 탄원하는 등 범상하지 않은 여인의 대범함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부모와 처자를 내버려두고 혁명가의 길로 뛰어든 남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경하였다. 이승만은 감방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1917년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로 출판됨).
다른 이와 다르게 종신형이 선고되었기 때문에 무거운 형틀을 쓰고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극한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의 길을 걷게 된다. 선교사들이 넣어준 신약성경으로 동료 죄수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등 열악하고 비참한 옥중 생활을 신앙의 강인한 힘을 키우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간수장(김영선)의 허락으로 옥중학교를 개설하여(1902년 10월) 글을 깨우치지 못한 어린이 13명과 어른 40명에게 한글과 한문, 영어, 국사, 지리 등을 가르쳐 주고 성경과 찬송가도 가르쳐 주는 등 옥중선교의 일도 하였다.
또한 간수장의 배려로 옥중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는데 1903년 영한사전에 편찬하여 A에서 F까지 완성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중단하고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1904년). 그리고 옥중에서‘대한매일신보’도 창간하는 일을 하는 등 언론인의 사명도 잊지 않았다.
1904년 8월 9일, 29세가 된 이승만은 석방되었고 남대문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교장에 취임하지만 고종황제의 밀사가 되어 ‘한미수호통상조약’에 명기된 상호방위조문의 발동을 탄원하기 위해 고종황제의 밀서를 휴대하고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의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만나게 된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 일행은 ‘워싱턴포스트’지에 일본이 한국을 불법으로 침략했음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게 된다(1905년 1월 15일). 그리고 2월 초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 서른의 나이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1907년 6월 5일 졸업).
2월 20일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휴 딘스모어’의 주선으로 ‘존 헤이’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여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문에 따라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 4월 23일 워싱턴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에서 루이스 햄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고 8월 5일 뉴욕 시 동쪽 오이스터베이의 사가모어힐 <여름 백악관>에서 윤병구 목사와 함께 어렵게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 탄원서를 전달했지만 공식적인 루트를 통한 문서가 아니라며 공사 명의의 탄원서를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승만을 만나기 4일 전에 이미 일본의 한국종주권을 인정하는 밀약을 승인한 뒤였기 때문이다.
1905년 ‘미국의 루즈벨트’, ‘러시아의 위트’, ‘일본의 고무라’ 사이에 체결된 ‘포츠머드 조약’에 “한반도에서 일본은 우월성을 가진다.”는 짤막한 문구가 기록되었고 이때부터 일본의 한국침략은 합법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노력이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인 이주영 교수에 의하면 “이 면담을 계기로 그의 이름은 미국 언론에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1965년 하와이에서 죽기까지 <뉴욕 타임즈>에 게재된 관련 기사만도 1,256건에 이를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가 대학에 다닐 때에 아들 봉수가 미국에 오게 되지만 그의 아들은 어린 나이(8세)에 디프테리아로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사망하였다(1906년 2월 25일). 이승만은 아들의 죽음도 지켜보지 못했기에 늘 이 부분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고 한다.
1910년 35세에 귀국한 이승만은 YMCA의 간부로서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소개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1911년 당시 천주교 주교 뮈텔의 밀고로 ‘105인 사건’이 터지게 되고 체포의 위협으로 1912년 3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아내 박승선(朴承善)을 일본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지만 병을 얻어서 3개월 만에 귀국하고 1912년 시아버지인 이경선의 사망 이후에 기독교 선교활동에 전념하다가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에게 잡혀 처형을 당하였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 이승만 혹자는 이승만을 친미(親美)주의자라고 비난을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미국 유학과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저질렀던 ‘배신행위’와 ‘기만’ 그리고 ‘무관심’으로 겪어야만 했던 쓰라린 경험들은 맹목적 ‘친미’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의 정치와 외교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경험하였다.
나아가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처럼 자행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초강대국인 미국이 지닌 힘과 영향력의 위력을 너무나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생존의 확보를 위해 미국을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굳게 믿었던 철저한 “용미(用美)주의자”이다. 또한 미국정부도 이승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자들 중에는 무력으로 일제에 항거하자는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주창하였다. 그 이유는 자칫 한국인들의 무장 봉기가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가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를 마쳤으나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사건, 전명운의 ‘스티븐슨’ 암살사건 등으로 친일성향의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을 테러분자라는 오해를 받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래서 무장투쟁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이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모든 백성들이 그런 의지가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함을 알게 된 이승만은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거대한 군중시위의 필요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통해 국내 지도자들에게 거국적 시위의 당위성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이런 그의 뜻이 전달되어 3·1운동 33인의 민족대표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나 구성되도록 기여하였다.
결국 ‘독립선언서’의 작성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으며 3·1 만세 운동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것을 반증하는 확실한 증거는 3·1운동 이후에 설립된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의 이름이 부각되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서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야기 하지만 그 임시정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있는지를 아는 국민들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당시에는 모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3월 2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노령(露嶺) 임시정부를 선포하면서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 및 외무총장에 이승만을 임명하게 된다.
뒤 이어 4월 11일에 선포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없는 국무총리로 지명되며,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漢城) 임시정부는 최고의 자리인 집정관 총재에 뽑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조선민국임시정부’(평안도, 내각총무), ‘신한민국임시정부’(평안도, 국방총리), ‘대한민간정부’(기호, 국무총리), ‘임시대한공화정부’(간도, 국무급 외무총장), ‘고려임시정부’(간도, 국무총리) 등이 있다. 이처럼 이승만이 실질적인 수반이나 그에 준하는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학 분야에서 첫 이승만 연구 박사학위를 취득한 포항공대 고정휴(高珽烋) 교수는 학위 논문에서 “첫째는 구한말 개혁의 선구자이자 6년 동안의 옥고를 지른 정치범, 그리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청년 외교가이자 미국의 철학박사라는 ‘명망’ 때문이고, 둘째는 독립과 관련해 국민들이 막연히 미국에 대해 갖고 있었던 기대감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러 임시정부의 직책 가운데서 이승만은 한성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이유는 전국 13도의 대표들이 비밀리에 모인 국민대회(4월 16일∼23일)에서 조직됨으로써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한국 임시정부를 영어로 ‘Republic of Korea’라고 호칭하였고 6월부터는 ‘집정관 총재’를 영문의 대통령(President)으로 번역하여 대외적 명칭으로 삼았다. 한편 상해에서는 세 개의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조직을 토대로 상해와 노령의 임시정부를 합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1919년 9월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지게 되며 임시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세계의 열강들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알리는 서신을 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 천황 앞으로 국서를 발송하여 ‘한반도에서 외교관을 제외한 모든 일본 군대와 관리들을 당장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약소국이 주권을 유지하는 데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1904년에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외교를 친밀히 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 나라를 부지(扶持)하는 법으로 알아야 할지니, 만일 외교가 아니면 형세가 외로워서 남의 침탈을 면할 수 없다”고 했다.
1905년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면담으로 시작된 그의 긴 외교 행로는 ‘독립, 건국, 호국’의 과정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활동 전체를 ‘이승만 외교’라는 말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21년경 상해에서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에 심각한 비판이 일어나게 된다. 공산주의자이며 무장투쟁론자인 국무총리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물러나라는 말부터 시작하게 된다. 당시 중국에서는 무장투쟁론이 우세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여운형은 안창호와 함께 집회를 열고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독립정신에 어긋난 것’이라고 성토했다.
결국 이승만은 상해를 떠나야 했다.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외교독립론을 주장하고자 했으나 회의 참석 차 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고 결국 1925년 3월 안창호 세력이 우세한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의 탄핵안을 통과시킨다.
이제 상해 임시정부와의 공식적인 관계는 단절된 것이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에 김구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고 1933년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기 위하여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을 때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표로 제네바로 가게 되었다.
이승만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한인 독립 문제’를 의제로 다뤄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채택되지 못하게 된다. 1933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소련에게 호소하고자 했으나 기차에 내리는 즉시 되돌아서게 되었고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오스트리아 중소기업가의 막내딸인 프란체스카 도나(Francesca Donna)를 만나게 된다.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였다. 이승만과의 대화에서 그녀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망명객인 이승만은 초청을 할 수 없었고 프란체스카가 1년 뒤에 이민자격으로 미국에 와서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이들은 결혼은 독립을 위한 동지적 결합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외교적인 노력으로 미국을 이용하고자 하지만 미국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때에 이승만의 저서 한 권이 미국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반드시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그의 예견은 1941년의 진주만 기습으로 사실로 나타났다. 미일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이승만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확인받기 위해 임시정부 승인을 미국에게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과 영국 수뇌에 알림으로써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에 대한 약속을 원칙적으로나마 확인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 1945년 8월 일본의 멸망
해방 당시 북한에는 국내에서 줄기차게 항일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해온 기독교 지도자인 조만식(曺晩植)이 있었지만 소련군 사령관과 함께 일본군 사령관의 항복식에 참여한 바 있었으나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인데다가 얼마 후 ‘반탁’을 주도한 것 때문에 숙청당하게 된다.
그리고 남한에는 송진우(宋鎭禹), 여운형(呂運亨), 박헌영(朴憲永) 등이다. 아울러 해외에서 귀국해 온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등이 해방 초기 남한에서의 상황 전개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송진우(宋鎭禹)는 일제 때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3년간 투옥된 바 있었으며 끝내 일제의 힘에 의해 사장직에서 해임된 항일지사이며 무게가 있고 합리적인 사고력으로 추진해 나가는 온건한 민족주의자이다.
여운형(呂運亨)은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로 일제 때 신한청년당을 거쳐 임정초기에 참여한바 있으나 곧 임정을 떠난 이탈파로서 고려 공산당에 가담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공산당 선언’(共産黨宣言)을 번역했으며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평가되어진다.
박헌영(朴憲永)은 1920년대의 청년 때부터 국내의 공산청년동맹 및 조선공산당 창당 핵심 인물로 활약하면서 오랜 투옥생활을 하였고 출감 후 변장 은신하며 해방을 맞은 극좌적인 지도자이다. 백범 김구(金九)는 ‘임정’초기부터 관여하면서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지휘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의 거사를 지도했고 1930년대 이후부터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의 국가 주석으로 항일투쟁을 주도함으로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은 지도자이다.
일제는 항복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국내의 지도자들을 회유, 강압, 협박 등을 자행하였다. 패망이 다가오며 항복교섭이 진행 될 때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는 한국 내에 거주하는 71만 명이 넘는 일본인의 안전과 그 재산을 보호 할 대책을 강구하면서 송진우를 설득하다가 실패하자 여운형을 이용하게 된다.
여운형은 일제의 간계에 빠져 항복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총독부의 요청을 수락하고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준다는 조건으로 치안권의 일부와 공작금을 받았다. 이것은 너무나도 치사하고 야비한 부일배(附日輩)의 행각이다.
그는 총독부에서 나오자 마자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조직의 핵심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여운형은 정국을 급진좌경으로 몰고 갔다. 이는 일제의 속임수에 속은 결과이다. 그는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을 기대하고 공산주의 정부수립을 위한 구상을 해 나아갔던 것이다.
그가 세운 건국준비위원회는 발족 20일 만인 9월 7일 해방 정국에 아무런 공헌도 없이 ‘조선 인민공화국’으로 급조되므로 공산정권 수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런 행동은 오고 오는 세대에게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의 행동이 일제에게 하나의 정당성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여운형, 박헌영, 허헌 등 국내 공산세력이 광분하고 있었을 때 국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곧 상륙할 미군의 정책 및 동향을 예의 주시하였다. 또한 해외 민족독립운동에 공헌한 지도자들의 귀국을 기다리면서 서서히 결집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오히려 이승만을 미국의 정책 구상에 부담이 큰 인물로 보고 비협조적이었다.
미국은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결코 자국의 정치적 목적이 아닌 한반도 내의 일본 총독부와 군부의 항복을 받는데 있었고 또한 일본 총독부 및 일본인 철수 후의 공백 기간,사회 안녕 질서의 유지에 있었기 때문에 건국을 향한 한국 민족의 정치적인 좌우 진영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중립적인 태도로 임하였다.
이승만은 우여곡절 끝에 71세의 나이로 귀국을 하게 된다(1945년 10월 16일). 그리고 좌익이나 우익의 어느 한 정치세력의 지도자로서의 수락을 끝내 거부하고 민족의 무조건적 대동단결을 호소하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강조하였다.
당시 친일파를 제거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좌우 지도자의 공통적인 결심이었으나 그 시기에 대한 견해는 차이가 있었다. 박헌영은 ‘선 처리, 후 건국’의 입장임에 반하여 이승만은 ‘선 건국, 후 처리’의 입장이었다. 사실상 혼란기에 친일파를 식별하기도 어렵고 처리할 법이 없었다.
나라가 서야 법이 제정이 되기에 그 처리 과정을 조급히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결국 이 문제가 건국에 있어서 하나의 화약고였다. 친일행각을 넘어서서 부일배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조차 처리하지 못한 것이 우리나라 현대사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된 것이다.
건국 이후에라도 이들에 대한 문제를 처리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은 소련과의 협조를 통해 국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좌우합작’ 노선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소련에 반대하는 사상은 미국으로 하여금 이승만을 멀리하게 하고 정치적 후원자가 아니라 충돌과 반항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은 전략적으로 한반도의 전쟁에 단 6일 동안 개입하고 너무나 많은 이득을 악랄하게 챙겼다. 그들은 북한에 34세의 김성주(김일성)를 앞 세워 ‘조선인민 공화국’이라는 급조된 조직을 등장시켰고 1945년 8월과 9월 초에 남한과 연결된 철도와 전화를 차단시키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금지시킨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한민족의 동질성을 파괴시키고 이산가족 발생이라는 아픔은 한국전쟁이 아니라 소련의 조치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남북분단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더 슬프게 한다.
이승만은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한 정부수립이 실패할 것을 확신하고 1946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국 정부 수립 문제를 UN으로 이관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 결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결의 112호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독립문제가 통과되었다.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을 겪지만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1948년 3월 1일).
그래서 제헌국회의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하게 되었다(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의 첫 번째 국민주권이 행사되는 총선거를 남북한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일어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가 있을 때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여하튼 총선거의 결과로 동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소집(198명)되어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찬성 188표)되었다.
이 때 북한에서 선출될 대의원을 위하여 100석을 공석으로 두기도 하였다.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7월 12일) 공포(7월 17일)하고 이 헌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7월 20일).
그리고 24일에 중앙청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고, 8월 5일에는 정부조직을 완료하여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게 정부수립을 정식으로 통고했으며 이런 절차를 마친 다음인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을 만 천하에 널리 선포하였다.
아쉬운 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이 헌법 전문에서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만연한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야기 하려면 그 법통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제헌국회와 제헌국회를 통하여 수립되고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을 말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이 부분이 빠지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부끄러움이다. 임시정부는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은 결코 아니다. 설상가상 그러하더라도 임시정부의 대통령 또한 이승만이었다.
그래서 헌법 전문의 일부분이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제헌국회를 통하여 세워진 대한민국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것으로 수정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것은 국민적인 자존심의 문제이다. 국가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 한국전쟁을 통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 운명
해방 이후 군정(1945년∼1948년)이 실시된 3년 동안 ‘한반도 신탁 통치’와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이승만은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존 하지(John Reed Hodge) 남한주둔 미 점령군 사령관뿐만 아니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와 심각한 마찰과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해방 후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좌우익의 이념투쟁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소련의 팽창주의와 결탁된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고 말하면서, ‘콜레라와의 타협은 불가능’함을 주장했다”고 했다.
1946년 6월 3일 소위 ‘정읍(井邑) 발언’에서 야기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고도의 정치적 승부수였다는 점도 물론 고려해야 되겠지만,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우려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의 현실주의적인 국제정치적 감각과 인식이 초래한 차선책이었을 것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승만은 소련의 지배하에 북한의 법에 의하여 공산화가 기정사실화 되어 가는 엄연한 현실 즉, 이미 북한에는 소련의 주도로 ‘조선 인민 공화국’이라는 조직이 갖추어져 있던 현실을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통일 민족국가 건설은 민족적 당위론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주장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장에서 연설을 통해 건국의 기초 조건으로서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를 전적으로 믿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공산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건국 이후에 대한민국의 경제는 분단된 현실로 말미암는 경제난의 극복이 필요하지만 이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국가를 지키는 일이었다.
적대적인 이념대결로 치열했던 냉전의 시대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국가안보를 책임져야만 하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의 ‘생존확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가치’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국의 생존과 안보는 ‘좋으나 싫으나’ 미국의 의지와 정책에 달려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외교가’로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준비된 수완과 능력’은 신생국 한국외교가 집중할 수밖에 없는 대미외교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북한은 ‘국토완정’(남한까지 인민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뜻)을 외치며, 그것을 무력으로 실천하기 위해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했다. 소련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야욕을 가지고 북한에 대규모 군사력을 양성해놓고 신형무기로 그들을 무장시켰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그들로부터 남침준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받았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국방의 어려움과 경제난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어서 신생 대한민국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해결하려면 외부의 원조가 시급했고, 한국에 그런 원조를 해줄 수 있는 국가는 오로지 미국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원조제공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경제원조 제공에도 인색했지만, 군사원조 제공에는 더욱 인색한 태도를 취했다.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얻어내기 위해 한국에서 철수하는 미군 병력이 보유했던 군사장비들을 양도받으려 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군의 군사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군정의 권한과 기능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하기 위한 협정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면서까지 미군의 무기를 많이 양도받으려고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이 사용하던 무기를 양도하는데 극히 인색했다.
미국은 혹시라도 한국군이 강력해지면 통일을 위해 북침을 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군에 철저히 방어용 무기만을 양도했다. 심지어 미국은 병사들의 기본무기인 소총마저도 북한군의 소총과 대등한 성능의 것으로 교체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한미군이 사용할 목적으로 한국에 반입되었던 많은 잉여물자들을 일본 등으로 빼돌렸다.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적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는 요구하지 않겠으나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필요한 무기만은 효과적인 무기를 달라”면서 탱크와 전투기 등 효율적인 무기들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탱크는 한국지형에 맞지 않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미국 비행기들이 지체 없이 날아올 것이므로 한국에는 전투기가 필요 없다”는 등의 구실을 내걸면서 그런 무기들을 제공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 군정청 경무부장을 역임한 조병옥을 특사로 파견하여 군사원조 협상을 전개한 결과 미국은 한미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고 중․경무기를 포함 1억3천만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를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무기를 지원하는데 소극적인 자세를 지속했다. 오히려 1950년 1월에 ‘애치슨라인’을 발표했다. 애치슨라인 안에 들어있는 국가에 대한 침략은 미국이 단독으로라도 방어에 나선다는 것이며, 애치슨라인 밖에 위치한 국가에 대한 침략은 유엔의 틀 속에서 미국이 방어에 나선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애치슨라인이 풍기는 미국의 한국포기 인상은 한국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한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온 자들을 고무했다. 이런 배경에는 미국의 자국민 이익을 추구하는 절대적인 이기주의에서 출발한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가 소련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나 미국에는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미국의 국가이익에 중요한 지역이 아닌 한국에서 미국이 전쟁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조만간 공산화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또한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미국이 남한지역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도록 도운 것은 임시방편적인 조치이며, 미국은 장차 대한민국을 소련에 포기할 것’이라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북한공산군의 남침 가능성에 대비하여 대한민국의 방어력을 강화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외교적 노력을 치열하게 전개했으나 대한민국의 방어력강화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이 남침해 오면 반격을 가하여 쉽게 북진통일을 이룩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는데 이것은 북한의 남침의지를 꺾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6·25 한국전쟁은 일제가 전쟁에 항복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운형과 같은 부일배(附日輩)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 일본의 치밀함과 비겁함, 해방 후 정국을 급진좌경으로 몰고 간 여운형의 빗나간 야욕,
6일간 전쟁에 참전하고 북한을 점령하고 북한을 공산화 시키려는 소련의 야욕, 그리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소련에 비해 무기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애치슨라인과 같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미국의 정보력의 실수 등이 연합하여 발생한 비극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끈질긴 외교적 노력도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6·25 한국전쟁의 실체임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한국 정치권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노력에 대하여 비판적 평가를 하면서 전쟁을 막지 못한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
6·25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과 일본의 삼각관계에 따른 피해가 우리 민족의 아픔으로 주어졌음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대한민국 건국 후 2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6·25 한국전쟁은 신생 대한민국의 최대의 위기였으며 지금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국과 소련의 의지에 의해서 분단국가가 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의 서신에 의하면 “미국에 대한 우리(한국)의 확고부동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과 1945년 한반도의 양분(bisection)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두 번씩이나 (미국에 의하여) 배신당했다.
지금의 사태진전은 또 다른 배신(sellout)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전쟁의 정치적 해결에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UN연합군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휴전을 협정하기 위하여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을 달래야 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초대 정부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새로이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의견이 유엔휴전위원회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의견은 1954년 제네바 정치회의에서도 다시 제기되어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측이 이승만의 정치 고문인 올리버 박사를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1948년에 태어난 신생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벼랑 끝 전술’로 완강히 버텼고,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 참전국 대표들은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나라는 약했지만 그 지도자는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이승만은 내부의 적과 동시에 외부의 적과도 싸워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휴전을 담보로 떼를 쓰는 동시에 국회를 장악한 정적들과 싸우면서 정적들을 탄압하기 위해 위헌적인 조치들을 취하자 그것을 이용하여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다.
1952년 5월에서 6월 사이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은 이종찬 등의 한국군 지휘부가 주도하는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놀랍게도 이런 쿠데타 음모에는 이승만이 가장 신뢰하던 이기붕도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이승만은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려 했다가 그런 조치를 취하지 말라는 미국의 경고를 받고 국회해산을 하지 않았으며, 국회도 이 대통령의 협박 속에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한국의 정치적 위기가 진정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도 ‘이승만 제거 쿠데타 계획’을 중단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제거 계획이 진행되다가 중단되고 포기 되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직위가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조국이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내던지고 조국의 안전을 위한 외교를 구사한 위대한 건국 대통령이기에 존경 받아 마땅하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악평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건국 이후 12년간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은 영도력이 탁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아직은 그런 리더십을 이어갈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왕조시대에서 억압적인 삶을 살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숨을 죽이며 살았고, 한국전쟁으로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다. 작은 권력으로 약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의 악행이 부일배(附日輩) 출신의 말단 공무원들에게도 있었다.
여기에 ‘한탕주의’와 ‘극도의 이기심’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한 불신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이 자신들의 안위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귀국(還國) 이후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에게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또한 이것은 그의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신의 종신집권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숱한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점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자유당의 몰락과 대통령의 하야를 가져오게 한 4·19혁명의 근본원인은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청산되지 않았던 ‘부일배 일당’의 잔인한 악행과 더불어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4·19 학생혁명의 불꽃으로 사라진 영원한 국부(國父)의 욕망
역사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처럼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고 미래까지 이어질 것이다. 1960년 4·19 정신은 56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시대마다 그 의미가 변천을 겪어왔다.
이제 우리는 젊은 세대가 잃어가고 있는 4·19의 정신과 의미를 새롭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4·19 민주 혁명은 우리 사회의 아픔인 동시에 미래 지향적인 발전의 초석이었다. 이 위대한 사건은 다음과 같은 배경으로 발생되게 된 것이다.
- 첫째, 정치적인 배경
이승만은 집권 12년 동안 행정 수반으로서만이 아닌 입법·사법부의 권한까지 침해하는 등 매우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군림하였었다. 또 정책 제안에 있어서 대부분 자기 스스로 하였으며 실무 장관보다 국무총리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런 대통령의 열정은 각료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는 수동적 행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치적인 배경은 크게 세 가지의 틀을 가지고 있다.
“① ‘친일파-부일배’의 청산을 하지 못한 것, ② 무리한 헌법 개정을 한 것, ③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체제를 강화한 것” 등이다.
물론 친일파가 건국 당시에 필요악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처리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헌법의 개정이 필요하였다 하더라도 방법과 그 과정은 잘못되었다.
‘정치파동’이나 ‘사사오입’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한 것이나 ‘신 국가보안법’의 제정, ‘대공 사찰 강화’와 ‘언론통제’ 등과 같은 일을 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아무리 남북대결 속의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라 하더라도 미국에서 배웠던 민주주의 정신으로 바르게 했어야 하는 것이다.
- 둘째, 경제적인 배경
4·19 학생 혁명의 배경가운데 하나가 정치 기강의 파괴로 인한 경제 질서의 혼탁이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해방 직후의 열악한 경제 환경과 여기에 6·25 전쟁으로 인한 기간산업의 파괴 등으로 악성 인플레에 허덕이고 있었다. 또한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 계획의 정책 추진마저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원조로 신속히 회복은 되어가고 있었으나 그의 효율적 운영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휴전 후 정경 유착으로 인한 부정과 부패가 격심하고 빈익빈부익부 현실의 격증으로 국민 경제 질서가 파괴되고 있었다.
도시에는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고 시골에는 대부분의 농가 등 일반 백성들은 생계비에 미달되는 수입으로 살아가며
처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극소수의 특권층은 이러한 국민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이런 잘못된 경제의 순환과 경제의 파탄이 4·19혁명의 경제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 셋째, 사회적인 배경
4·19 이전의 국민 경제는 소수의 집권 고위층과 그들과 결탁한 일부 자본가들에 의하여 농간 당하였고 민중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였다. 우리나라의 당시 산업 구조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한 농민의 영세성은 자연히 이농 현상을 초래시켰고, 해방 후 특히 6·25 남침으로 인한 인구 대이동으로 도시의 인구가 급증함으로서 각종 사회적 불안 요소를 조성시켰다.
6·25 전쟁은 수많은 전쟁미망인을 낳았는데 대부분이 구호 대상자였지만 당시 사회는 이들을 도울 여력이 없었고 국민들의 생활은 비참할 정도로 힘들었다. 또한 혼혈아와 영아 유기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심각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고아원의 운영이 불합리하게 운영되고 그들을 수용할 공간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거리의 부랑아로 방황하는 경우가 더 많이 생겨나게 된다. 당시 대학 졸업생들의 진로도 순탄하지 못하여 누적되는 지식인의 실업문제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회적 요인들은 각 계층마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보다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 넷째, 교육적인 배경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의식 있는 국민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교육의 역할은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서 학생들의 양적 증가 및 문맹의 퇴치는 국민의식의 향상을 가져와 정치나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수준이 높아졌다.
또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자유, 평등. 박애, 정의 등의 개념을 충실히 익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한국의 사회적 모순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확대 현상을 빚게 됨으로 학교에서 경험한 원론적인 이론과 실제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실과의 괴리 현상,
그리고 사회 지도충의 부정과 부패, 정치적인 비민주성은 사회의식을 자극시키고 계도함으로 학원은 점점 비판 의식의 확대와 민주 의식의 광장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이승만 대통령도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958년 인천에 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미국의 MIT와 같은 대학을 세우기 위하여 하와이 교포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인(인천)하(하와이)공과대학’을 세우기도 하였다.
★ 1956년 5월 5일, 경무대 앞 의거
4·19 학생혁명은 1960년에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가 하나의 원인은 되었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과 더불어서 교육적인 요인들이 겹쳤으며 1956년에 흘렸던 선배들의 유혈항쟁이 꽃을 피운 것이 4·19 학생혁명이다.
1956년 5월 5일, 건국 후 8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민주화 투쟁인 ‘경무대 앞 의거’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적 열기가 최절정에 달한 의거였다. 학생과 시민의 대대적인 가두시위 투쟁의 첫 장을 연 사건인 동시에 학생 민주화 운동의 효시이며 첫 신호탄이었다. 정권의 심장부인 경무대(현, 청와대)앞에서 사상 첫 유혈 사태가 일어났으며
당일에 체포된 인원만 무려 708명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4년 후 등장한 4·19학생 혁명에 가려진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맥락에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성난 시위 군중들은 ‘이승만 정권 타도’, ‘자유당 독재 타도’, ‘일당 독재 물러가라’, ‘치안 책임자 처단하라’ 등의 구호와 함성으로 경무대 앞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5일 밤 발생한 경무대 앞 충돌 사건은 건국 후 처음 있는 민주화의 유혈 의거였기 때문에 국내외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5월 6일 정부는 긴급 각의를 열었으며 이어 공보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성명을 통하여 시위 군시위 군중을 폭도로 몰았다. 민주화를 향한 시위를 반정부 폭동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 1960년 2월 5일, 공명선거추진 전국학생 위원회
당시 사회는 부정선거로 점철되어 있었다. 다가올 정·부통령 선거 때는 기필코 공명선거의 굳은 토양을 닦아 자유 민주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공명선거만 보장된다면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공통된 목적과 의지로 조직한 4·19 이전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학생궐기를 호소하며 계도한 것이 ‘공명선거추진 전국학생 위원회’이다.
1960년 2월 5일에 발족된 이 위원회는 각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경찰 당국의 끊임없는 방해를 받으면서도 3월 초부터 서울에서 학생시위의 포문을 열었고 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은 후 각각 본교에 들어가 시위 투쟁을 일으키게 한 4·19의 촉진제 역할이 되었다.
또한 ‘공명선거촉진위원회’에 이어 보다 범국민적인 조직체의 구성에 착수한 민주당과 재야세력은 동년 2월 28일 오후 을지로에 있는 대성 빌딩에서’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날 모임에는 민주당, 민권수호연맹, 재야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문화계, 종교계, 흥사단 및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민주운동
2월 28일은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張勉) 부통령의 유세가 있는 날이었다. 장면은 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1956년 9월 28일 오후 2시 30분경 서울 명동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상붕의 총에 왼손을 맞고 암살의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그는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59년 민주당 대표 최고 위원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3월 15일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유세를 2월 28일(일)에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자유당은 이날 유세를 방해하기 위하여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인들을 출근하게 하고 학생들도 말도 안 되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대면서 등교를 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야당 도시였던 대구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되고 결국 오후1시를 기해 학원의 정치 간섭에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고자 합의 하게 되었다. 이 역시 4·19 학생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 1960년 마산지역 ‘시민 · 학생’ 의거
마산지역의 의거는 1차 3월 15일, 2차 4월 11일에 있었다. 3월 15일은 정·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당일 오전 10시 30분경 민주당 마산시 당은 선거 포기를 결의한 후 땅을 치고 울부짖으면서 마산시 선거관리 위원회에 참관 포기 문서를 제출하고 참관인이 모두 철수를 하였고
가두방송으로 마산시민에게 선거포기의 부득이한 사유를 알린 후 오후 3시 40분부터 30명 당원이 비장한 각오로 가두시위에 나섰다. ‘협잡 선거 물리치자’는 구호를 부르면서 남성동에서 부림동을 거쳐 해안동을 돌았을 때는 군중의 수가 수 천 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시위에 참석한 인원이 점점 늘어가고 있던 오후 7시경 마산시내의 전기가 차단되면서 암흑천지가 되었다. 이 때 많은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면서 시위는 계속되고 경찰은 실탄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1956년 5월 5일에 있었던 경무대 앞 의거의 유혈 사태 이후 4년 만에 재등장한 민주화의 격전장이 되었다.
3.15 마산의거가 있은 지 27일이 지난 4월 11일 낮, 그간 행방을 찾지 못했던 17세의 어린 학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체가 마산 중앙동 해안에 떠오르면서 정국이 파국으로 치달았다. 전남 남원이 고향인 김주열은 마산상고 1학년이었는데 1차 마산의거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희생이 된 것이다.
그런데 떠오른 시체가 너무 처참했다. 오른쪽 눈으로부터 뒷목덜미에 이르기까지 폭발이 되지 않은 최루탄이 통째로 박혀 있고 머리도 얻어맞은 듯 파열 상을 입은 흔적이 있는 채 발견된 것이다. 이 시체를 유기한 ‘박종표 경비주임’은 일제당시 헌병으로 근무하였다.
이 무참한 시체를 본 일부 시민들에 의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경찰에 대한 증오심이 북받치면서 시민들이 격분하기 시작하였다. 3일간 이어지는 제2 마산의거는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화약고의 점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이날은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이 그동안 빼앗겼던 국민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총 궐기하여 노도와 같은 힘으로 권력의 심장부로 달려간 날이다. 3·15 협잡선거에 따른 마산 시민의 1, 2차 시위와 어린 학생 김주열의 처참한 죽음을 지켜본 대학생들은 분노에 찼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자유당 정권의 극악한 부정선거의 실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서울의 각 학교에서는 옹기종기 모여서 시위 계획을 짜는 일이 많아졌다. 부정선거가 자행되리라는 것을 확연히 알고 이에 대하여 침묵한다면 앞으로 닥쳐올 국가적 불행은 더 커지게 될 것이라는 자각은 4월 18일, 대광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하여 4·19 학생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4·18 고대생의 궐기에 이어 이날은 서울대학, 연세대학, 동국대학, 성균관대학, 건국대학, 중앙대학, 홍익대학, 고려대학, 숭실대학, 국민대학 등 서울 지역의 10여만 학생이 총궐기 하였을 뿐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 청주 등 주요 도시의 학생들까지 민주화의 대행진에 돌입하였다.
물론 당시 중고등학생들도 이 시위에 함께 했으며 초등학생까지 가담하게 되는 진정한 학생혁명의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4월 19일, 정부는 마침내 이날 오후 1시를 기해 국무원 공고 제82호로서 서울, 대구, 광주, 대전 등 4개 도시에 경비 계엄령을 내린 후 5시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4월 20일 대통령 이승만은 담화를 발효하게 된다. 대 유혈 시위의 보고를 받고 난 후의 담화로 보이나 근본적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는 제대로 받지 못한 듯 국민의 불평불만을 지엽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로서 당시 대통령의 주변에 있는 집권 세력은 악랄하고도 끈질긴 반민족 세력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4월 23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상 학생들을 문병하면서 몇 번이고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선거를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라면서 다친 학생들을 위로했던 것이다. 이런 현장의 모습이 대통령의 마음에 많은 생각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4월 25일 오후 5시 30분경 대학교수단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게 된다.
대학 교수단의 시위는 통행행금지 5분전에 끝났으나 교수단 뒤를 따라온 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이 흐트러지지 않고 중앙청 쪽에서 쏜살같이 다가오는 2대의 탱크와 무장군인 앞으로 가서 ‘쏠 테면 쏘라’는 태도를 보였다.
4월 26일, 4·19혁명이 발생한지 일주일이 되던 날 오전에 대통령 측근인 김정렬(전 국무총리)의 현재 상황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이승만은 보고를 들으며 침통한 표정을 짓더니,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그래,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
그리고 혼잣말처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하다가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라고 말하더니 연이어 하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학생들을 통하여 민의(民意)가 무엇인지 간파하고 스스로 오전 10시30분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다음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지도자로서의 업적이라 평가해야 한다. 이로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의 11년 8개월의 시간을 마치는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리고 5월 29일,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났고 영원히 조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망명객으로 인생을 마쳐야 했다.
이승만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그는 대단한 애국자이며, 선각자이며, 민주주의의 뿌리를 이 땅에 심은 건국대통령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를 국부(國父)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그는 과오(過誤)보다는 공(功)이 훨씬 많다. 정말 아쉬운 것이 있다면 영원한 국부(國父)로 남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요인으로 역사적인 죄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4·19 학생혁명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백성들의 진정한 뜻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깨끗하게 물러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신봉자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대단히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4·19 학생혁명이 주장한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실천자이다.
★ ‘사월혁명’, 지금도 살아있는 ‘민주주의 종합 혁명’의 역사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는 것이다. 선배들의 피와 땀과 희생과 노력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민주주의가 꽃을 피워가고 있다. 아직 100년의 역사가 안 되었기에 선진 민주사회의 완성된 민주주의가 아직은 우리에게 거리감이 있기도 하다.
말은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실제 그 내막은 이기주의인 경우도 있다. 포장은 민주주의이지만 내용은 전체주의나 독재주의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글의 끝에 와서 ‘4·19 혁명’이 아니라 ‘사월혁명’을 강조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실수나 오자가 아니다.
4·19 민주혁명은 단순히 그 날 하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1956년 5월부터 시작된 선배들이 민주주의 제단에 흘린 피와 대구의 2·28과 마산의 3·15를 비롯한 많은 희생의 발아(發芽)로 탄생되어진 ‘민주주의 종합혁명’으로 명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월혁명’은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서 참되고 바른 민주주의 정착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 사건임과 동시에 불가피한 성장적인 진통의 과정이었다. 또한 ‘사월혁명’은 공권력이 휘두르는 부정과 부패와 횡포에 대항한 국민들의 염원이 승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국민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을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헌법은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로 이루어진 개헌헌법으로 제9차 개헌이다. 그 헌법의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것은 대단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월혁명’은 결코 미완의 역사라고 할 수 없으며 그 의미를 축소해서도 안 되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역사와 사회정의의 열망의 역사로 길이 보존되고 유지 계승 발전되어야 한다. 이 나라 국민들이 지금도 열망하는 것은 ‘참다운 민주주의의 이념이 실현되어지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축되는 일’이다.
이러한 가치 개념은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지행해 나아가야 할 최고가치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사월혁명’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있어서 영원불멸의 가치를 지니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가졌던 ‘영원한 국부의 꿈’은 버림으로 성취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국가의 원로로 물러났다면 그는 오욕(汚辱)의 역사가 아니라 찬란한 영예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이끌 수 없다’는 자만심을 버렸어야 했다.
또한 친일파와 부일배들을 솎아 내어서 버렸어야 했다. 이들은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는 조국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자들이었다. 또한 자기 사람들을 버렸어야 했다. 당시 정부에 속한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을 편협하게 다룬 것이 부정과 부패와 불법의 온상이 되게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함으로 ‘4월 혁명’을 일으키게 되고 건국한지 12년 만에 대통령에서 물러나 평범한 시민으로 그리고 노년에 또 다시 시작된 망명생활로 생을 마감한 비참한 영웅이 되고 말았다.
영원한 국부(國父)로 남을 수 있었지만 결국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스스로의 함정에 빠트려서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건국대통령’이라는 호칭은 결코 뗄 수 없는 운명적인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