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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가톨릭문화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축일: 10월 13일 성 에드워드 국왕 Saint Edward the Confessor
성인은 영국의 에드워드(에드와르도) 왕이었다. 이 왕은 ’착하신 왕’ 로 별명이 붙을 정도로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대수도원을 재건하였다. 현재까지도 국왕 성 에드와르도 무덤은 그 사원안에 있다. 성인은 웨스트민스터의 주보성인이며 고아들과 방랑자들의 주보성인이다.
그는 에텔레드 왕과 왕후 엠마의 아들로 잉글랜드의 이슬립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에 덴마크 군이 불법 침입해 왕의 일족을 추방했고, 교회와 수도원을 불사르며 약탈을 가행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를 학살하며 국민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에드와르도는 어머니와 더불어 어머니 고향인 프랑스의 노르만디에 피신했는데, 신심이 두터운 어머니는 왕자의 마음속에 신덕을 심어 주는 것에 전념했으므로, 그는 어려서부터 경건하게 자라나서 측근자의 입에서 궁중의 천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어떤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던 가는 다음 일화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신하들이 "전하는 언젠가는 칼을 빼서 저 몹쓸 덴마크인들을 소탕하고 신성한 조국을 회복하시지 않으면 안됩니다."하니, 왕자의 대답은 "아니다. 나는 피를 흘려서까지 왕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그는 그런 국난(國難)도 하느님의 섭리인 줄 알고 일체를 하느님의 뜻에 맡기며, 그분 뜻이 계시면 나라의 회복이 있을 줄 알고 기도했던 것이다.
부친인 국왕은 불행한 가운데 세상을 떠났는데, 얼마 안 되어 영국 국민은 덴마트의 학정에 총궐기해 그들을 소탕하고 태자 에드와르도를 국왕으로 모셨다. 그 장엄 화려한 즉위식이 거행된 때는 바로 1042년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다.
젊은 명군(明君)은 신앙은 만선의 원천이라는 신념으로 신하로부터 모든 국민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공경하는 정신을 함양하도록 지도, 노력했다. 이리하여 전에 폭도들에게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은 복구되고 성스러운 예식은 엄숙히 거행되었으며, 주교를 고문으로 두어 법전 편찬과 빈민 고아들의 구호사업을 추진하고, 무엇보다도 가혹한 세금에 시달린 국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감세(減稅)의 대 영단을 내렸다.
에드와르도는 그때까지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고, 또 결혼할 의사도 갖지 않았으나, 중신들의 권유로 독실한 신자 에디타를 왕비로 맞았다. 그들은 서로 합의해 표면상으로는 부부지간이나 사실인즉 남매지간 같이 동정생활을 계속했다.
노르만디에 피신하고 있을때, 에드와르도는 하느님께서 다시 조국을 회복시키고 자신을 왕위에 올려 주시면 꼭 로마를 순례할 것을 서원했는데, 지금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므로 그는 서약대로 로마로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국정이 안정되지 못했으니 외유를 할 수 없다는 중신들의 권고에 그는 난처하게 되어, 그 처지를 교황 레오 9세께 전구했던 바, 로마 순례 예산으로 수도원을 세우고 빈민을 구제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회답을 받고, 즉시 웅대한 성당 부속 대수도원을 건립해 왕실의 안식처로 삼았다. 즉 저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치세는 하느님께서 축복하셨음인지 지극히 평화로웠다. 사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와르도가 무기(武器)를 든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왕 말콤이 역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에드와르도는 위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국민을 사랑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짓는 등 그의 신심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대한 큰 사랑으로 나타났다. 국민들은 영명한 군주로 그를 흠모했으며, 1066년 1월 5일 서거했다.
영국이 가톨릭국이었을 동안은 그에 대한 공경심이 대단하여, 역대 왕들은 즉위식 때 이 성인의 왕관과 망토를 사용함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에드와르도의 유해는 1220년 10월 13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그래서 이 날을 그의 축일로 지낸다. 그는 1161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문장은 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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