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회] 미정부 지지철회, 고립무원 상태로
독재자 이승만 평전/[15장] 4월혁명으로 몰락한 독재자 2012/05/25 08:00 김삼웅워싱턴에서는 허터 미국무장관이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를 불러 4ㆍ19사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통고하면서 선거부정의 증거를 제시하는 항의각서를 전달한 데 이어, 다음 날(20일), 미 국무성은 한국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이승만은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게 되었다.
4월 21일 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는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에게 미국의 입장을 정중하게 전달하였다. 두 사람의 대화다.
매카나기 : 미국이 이번 사태(4ㆍ19)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한국에 대한 우정과 선의의 결과다.
이승만 : 이번 문제는 장면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노기남 주교와 장(張)이 한국의 헌법을 어기고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톨릭과 교회를 이용했다.
매카나기 : 미국은 장이 혼자 문제를 일으킬 만큼 파워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승만 : 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대사의 견해는 무엇인가?
매카나기 : 정부와 국민간의 진실한 관계회복을 위해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주석 5)
이상은 매카나기 개인의 뜻이 아니라 미국에서 전달된 러스크 국무장관의 지시를 외교관답게 ‘맛사지’한, 미국 정부의 의지였다. 40여 년 미국 생활을 하고, 미국 권력의 생리를 익혀 온 이승만은 더 이상 버틸 구석이 없었다. 그는 이때까지도 시위군중이 민주당 장면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변명하였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시민ㆍ학생들이 다시 가두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4월 25일 서울시내 258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에는 수많은 시민ㆍ학생들이 합세하여, “이승만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교수단의 시위는 이승만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 교수단은 15개 항목의 요구 조건과 함께 다음의 3가지 구호를 적시했다.
1.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나라.
2. 부정선거 다시하라.
3. 살인귀 처단하라.
4월 25일 교수단의 시위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승만 퇴진에는 결정타가 되었다.
교수단의 데모로 그동안 위축되어 있던 학생ㆍ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군중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을 포위공격하는 과정에서 다시 경찰의 발포로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기붕은 환자로 가장하고 집을 빠져나갔다.
주석
5> 김진국ㆍ정창현, <한국현대사,com>, 116쪽, 민연, 2000.
4월 21일 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는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에게 미국의 입장을 정중하게 전달하였다. 두 사람의 대화다.
매카나기 : 미국이 이번 사태(4ㆍ19)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한국에 대한 우정과 선의의 결과다.
이승만 : 이번 문제는 장면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노기남 주교와 장(張)이 한국의 헌법을 어기고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톨릭과 교회를 이용했다.
매카나기 : 미국은 장이 혼자 문제를 일으킬 만큼 파워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승만 : 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대사의 견해는 무엇인가?
매카나기 : 정부와 국민간의 진실한 관계회복을 위해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주석 5)
이상은 매카나기 개인의 뜻이 아니라 미국에서 전달된 러스크 국무장관의 지시를 외교관답게 ‘맛사지’한, 미국 정부의 의지였다. 40여 년 미국 생활을 하고, 미국 권력의 생리를 익혀 온 이승만은 더 이상 버틸 구석이 없었다. 그는 이때까지도 시위군중이 민주당 장면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변명하였다.
계엄군이 시위대에 발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시민ㆍ학생들이 다시 가두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4월 25일 서울시내 258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에는 수많은 시민ㆍ학생들이 합세하여, “이승만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교수단의 시위는 이승만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 교수단은 15개 항목의 요구 조건과 함께 다음의 3가지 구호를 적시했다.
1.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나라.
2. 부정선거 다시하라.
3. 살인귀 처단하라.
4월 25일 교수단의 시위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승만 퇴진에는 결정타가 되었다.
교수단의 데모로 그동안 위축되어 있던 학생ㆍ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군중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을 포위공격하는 과정에서 다시 경찰의 발포로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기붕은 환자로 가장하고 집을 빠져나갔다.
주석
5> 김진국ㆍ정창현, <한국현대사,com>, 116쪽, 민연,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