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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가 가장으로써는 최악이었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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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의 단원과 인간적인 단원의 모습을 '21가지 테마로 본 우리미술'에서 전재합니다. 다른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사진은 위에서부터 '씨름', '마상청앵도', '타작'입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10?)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당시 중국에 성행하던

실학정신에 입각해 한국화한 남종화 계통의 진경산수를 발전시켰다. 또 신선도, 탱화, 도석인물, 초상, 풍속, 화조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화원 집안인 외가의 재능을 타고났으며 어릴 때부터 강세황(姜世晃)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 자신 삼절로 불리우는 강세황은 김홍도를 '근대의 명수' 또는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홍도는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20대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이후 1771년에는 나중에 정조가 되는 왕세손의 초상을, 1781년에는 어진화사로써 정조 초상을 그렸다. 정조로부터 "회사(繪事)라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만큼 총애를 받았다. 단원이라는 호는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왔다.
1790년에는 수원 용주사 대웅전의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으며 이듬해에는 왕명으로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1997년에는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정승자리와도 바꾸지 않는 풍류라는 뜻의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와 꾀꼬리 소

리에 타고 가던 말을 멈추었다는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그리고 25매의 풍속화첩(風俗畵帖-보물 527호)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김홍도의 풍류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마상청앵도>이다.
<마상청앵도>는 탈속의 풍모를 보여주는 말 탄 양반이 말 위에서 머리를 돌려 수양버들 나무 위의 꾀꼬리를 쳐다보고 있다. 하인은 말에 가려 있고 길은 내리막이어서 보는 사람의 시선은 저절로 왼쪽 노변의 풀에서 시작하여 말머리를 거쳐 양반의 시선을 따라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수양버들 위의 꾀꼬리로 향하게 구성되어 있다. 마치 이 시선의 흐름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화면에서 처리되고 있다.
또, 인물과 주제의 배경에 대한 묘사를 과감하게 생략하므로 써 배경의 공간은 공명판처럼 꾀꼬리의 울음을 증폭시켜준다. 마치 김홍도 자신의 인품과 취향, 그리고 그 속에서 노니는 풍류를 그림으로 빗대어 보여주는 듯한 풍취가 있다.
김홍도는 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외모는 수려하고 풍채가 좋을 뿐 아니라 성격이 부드럽고 소탈하여 사람들이 신선같다고 말했다. <마상청앵도>에 나오는 양반이나 <해상군선도>의 신선들은 그러므로 김홍도의 신선다운 풍모를 그대로 옮긴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해, 김홍도는 정조의 분부로 궁궐의 벽에 신선도를 그렸다. 김홍도는 웃통을 벗고 내시에게 먹물 몇 되를 만들어 받들게 하고 몇 시간만에 완성시켰다고 했다. 장자(莊子)가 말한대로 해의반박(解衣般 )이라 하여 발뻗고 편한 차림으로 편하게 그렸다는 신선도는 생동하는 신선들과 파도치는 바다의 묘사가 천품이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한국적인 풍취와 서민적인 체취가 있었던 것이다. 인물의 품격이 그대로 그림의 풍

격이 되었던 김홍도의 세계가 있었다. 김홍도는 대략 50세를 기점으로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등에 반영되었던 북종화풍과 개자원화보의 영향을 벗어나 조선의 풍습, 문화, 풍경 등을 보다 자기화하여 표현하였다고 평가된다.
44세 되던 해에 정조의 명을 받고 김응황과 함께 금강산 사군첩(四郡帖)을 그렸다. 이것이 이른바 단원법이라는 독자적인 스타일의 시작으로 보인다. 단원법이란 겸재의 북화풍 부벽준법을 강세황의 남화풍으로 재해석하여 부드럽게 순치시킨 독특한 기법이다. 그와 함께 나무에 물이 오르는 듯한 수지법(樹枝法) 등 독자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산수화가 확립되었다고 본다. 김홍도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한국적 정취는 수묵과 묵선을 강조하면서 부드러운 담채로 처리한 능숙한 기법과 공간의 해석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색채의 농담과 명암으로써 깊고 얕음과 원근감을 표현한 훈염(暈染)기법을 선보인 불화와 두께가 일정한 윤곽선으로 그려지는 기법인 철선묘(鐵線描)에 의한 삽화 등에서도 완벽한 기량을 뽐냈다.
김홍도, "해상군선도" 부분
김홍도의 천재적인 성취와 다양한 스타일은 동시대의 김득신(金得臣), 신윤복(申潤福)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후배와 제자들로는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백은배, 유숙(劉淑), 유운홍(劉運弘)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김홍도는 화업에서 한국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만약 샤라쿠가 주장대로 김홍도라면 우키요에의 스승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김홍도는 이를테면 큰 소나무였다. 소나무 그늘에서 어린 소나무들이 자라기는 어렵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되 김홍도를 능가하는 제자들이 기라성처럼 줄을 이었다거나 제자들이 김홍도의 영향권에서 유파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자들이나 그 후속세대의 성취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오히려 김홍도보다 신윤복이나 정선이 위대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김홍도를 세계적인 스승인 모로와 배대하는 이유는 그 넉넉한 여유가 가이 만인의 사표가 될만하다는 뜻이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事)에 기록된 김홍도의 행적은 한국인의 스승으로서의 성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글은 다음과 같다.
'단원은 늘 가난해서 아침 저녁끼니 걱정을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좋은 매화 한 그루를 간절히 사고 싶어하는데 때마침 삼천 금으로 그림을 팔게 되었다. 그 중 2천금으로 매화를 사고 8백금은 친구들과 시를 읊으며 마실 술을 샀다. 남은 돈 2백금으로 양식을 샀다.'
이 기록은 말년 김홍도가 연풍 현감직을 퇴임한 후의 일이다.
이러한 일화는 생각하기에 따라 매화가 피었으니 이를 즐겼다 라는 평범한 일화가 자연스럽게 김홍도의 풍모와 연결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화의 진위나 도덕적 당위, 현실성 등을 따지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홍도의 인간 됨됨이 그렇게 호탕하였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출처 김경자,"21가지 테마로 본 우리미술," 다른세상, 2002
도판: API, 100 Masterpieces of Korean Art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