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에 편승하고 개인의 출세와 부귀 영달만을 쫓는 물질만능 현대사회..
불의, 위선, 갑질이 판치는 세태속에서 삶의 의미와 교훈을 배웁니다.
(현지답사: 서울 영도교(청계천 7가), 숭인동 숭의공원, 남양주 사릉, 강원도 영월 단종 장릉, 유배지 청령포, 충북 박달재,
충남 홍성 성삼문 유허지 .. / 역사자료: 조선왕조 실록, 야사 등, / 글 작성 및 정리 : 엄유호)
단종(端宗, 1452~1454) 조선 6대 임금, 聖君 세종대왕의 직손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숙부 탐욕의 세조에 의해 17세에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자,
궁궐에서 추방당한 정순왕후 송씨부인 (단종보다 1살 위)은 동대문 밖 숭인동 산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 (단종비가 머물던 곳, 여승인 비구니 사찰)
정업원 구기 (청룡사)
영조친필 현판 前峰後巖 於千萬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여라.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
세종대왕의 친 손자 단종이 숙부에 의해 죽은 후 정순왕후는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아침 집근처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는데 그녀의 울음소리가 산 아래 마을까지 들렸고 마을 여인네들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죽음보다 더 깊은 슬픔에 젖은 정순왕후(송씨부인)
18세에 과부가 된 송씨는 머리를 깎고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 동안 아침저녁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 하여 ‘동망봉
(東望峯)’이라는 이름이 유래 되었다.
단종을 그리워하며 동망봉에서 동쪽 영월을 바라보던 절개와 충절의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매년4월 추모제)
수양대군 세조
단종이 그의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정순왕후 송씨부인과 영원히 이별한 "영도교"(永渡橋)
다리위의 잡상인들..
2016, 1,
여인들만 드나들던 여인시장터 (현재 동묘 벼룩시장) / 단종호송 포도대장 왕방연 시비(영월 청령포)
당시 여인 시장터 / 현재 동묘 벼룩시장
사릉 (思陵)
18세에 이별 82세에 영원히 이별 죽어서도 합치지 못하고 .. 영월 "단종" ⇔ 남양주 "정순왕후" 사릉 (思陵)
/ 금곡역 하차, 23, 55, 77 버스 평생 단종만 생각하여 사릉 !
18세 꽃다운 정순왕후의 64년간의 어린 단종(17세)을 그리며 한맺힌 인고의 세월을 보낸후 82세에 눈을 감음 !
강원도 영월 장릉 2019 / 10,
영월 청령포 단종유배지
일명: "엄흥도 소나무" 어송 (御 松)
충신 엄흥도 (忠臣 嚴興道) 흔적 (제천 - 충주 - 문경)
충신 엄흥도 문과공파 26대 손 엄유호(본인)
만고의 충신(萬古의 忠臣) 성삼문(成三問)
하늘에서 세번 불러서 낳았다는 성삼문 (이룰-성, 석-삼, 부를-문)
아호 - 매죽헌(梅竹軒), 충절의 표상 "사육신" 의 대표적 인물 !
매화나무의 지조와 대나무처럼 올곧은 절개를 지켜, 聖君 세종대왕의 고명을 받들어
탐욕의 세조 일당의 회유를 뿌리치고 세종의 직손 단종을 끝까지 따르다 순절한 조선 충절(忠節)의 대명사 !
<성삼문의 忠節의 詩>
"북소리 치며 이목숨 재촉할때 고개드니
해는 서산에 지누나 황천길에 한주막도 없다하니
오늘밤은 어디서 쉬리,"
(끝까지 어린 단종에게 충절을 지키다 새남터에 끌려가며 죽기직전 지은 최후의 시 ! )
- 끝 -
惡行者 天之以罰 “단종관련 악행 삼총사” 의 말로 - 역사적 교훈
(세조: 두아들요절, 한명회: 두딸요절, 한확: 객사)
1. 세조 (世祖) / 두아들 요절 / 세조 말년 문둥병 병사
자신의 업보 때문인지...두 아들이 요절하고, 말년에 악몽에 시달리고 악성 피부병(문둥병)으로 고생하다 사망 (천벌)
2. 한명회(韓明澮) 호는 압구정 / 두딸 요절 / 부관참시 수양대군의 모사(謀士)꾼으로 그중 셋째 딸은 세조의 아들 예종에게
시집갔는데, 17세에 요절(夭折), 넷째 딸은 세조의 손자 성종비로19세에 요절 하였다. 한명회 사후 연산군 때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때에 부관참시(剖棺斬屍 - 무덤에서 꺼내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거는 형)를 당했다. (천벌)
3. 한확(韓確) /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내놓게 한 비열한 간신배로, 그 누이는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여동생은 명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그가 외교통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라 우겨서 명나라의 세조 왕위 승인을 받아오던 중도에서 "노상객사" (천벌) (조선왕조실록 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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