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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7일 목요일
[(백)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과 원로들을 향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형제들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씌워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형제 여러분,
다른 민족들도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나를 뽑으신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9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11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12 그러자 온 회중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표징과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13 그들이 말을 마치자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4 하느님께서 처음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모으시려고 어떻게 배려하셨는지,
시몬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15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17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18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9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20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1 사실 예로부터 각 고을에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봉독하며 선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어느 청년이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필’이 안 와서” 맞선을 거절하였다고요. 사랑은 ‘필’, 곧 느낌일까요? 느낌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시작되지만, 사랑을 지속하려면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였다가도 헤어지거나, 부부로 살면서도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10).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은 인내와 끈질긴 배움을 요구하지만 그 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려면 끊임없이 연습을 되풀이해야 하지만, 한 번 멋지게 연주하고 나면 그 기쁨으로 연습의 고단함을 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배우고 익히며 성장해야 하는 예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긴 세월 함께 지내며 예술처럼 사랑을 가꾼 노년의 부부들은 아마도 이 기쁨을 알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는 사랑의 예술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례하며 이러한 사랑의 예술을 배웁니다. 오늘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사랑의 살과 피가 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기쁨은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아이들을 향한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발도코 오라토리오에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던 아이들 앞에 설 때 마다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존재 자체로 제 기쁨입니다. 제게 있어 유일한 소망 한 가지는 여러분이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항상 기쁘게 지내는 것입니다.”
돈보스코의 아이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며 흠결 투성이인 우리가 하느님께는 존재 자체로 기쁨이라니 이 얼마나 과분하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성경 전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한 인간이 구원과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구원과 사랑이 선포되고 체험되는 곳에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 주년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축제를 지냅니다. 예수님 관련 축일들, 성모님 축일들, 여러 성인의 축일...이런 축일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기쁨이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총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충만케 해줍니다.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인간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구성원들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돕기 때문에, 그 길은 아름답다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 주저 없이 내게 당신을 계시하시네. 그분은 친구처럼 자신을 낮추시네. 내가 그분께 기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와 같은 존재 되시네. 그분은 나의 자비이시므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네.”(솔로몬의 찬미가)
기쁨의 충만에 이르는 법: 이웃 사랑은 십자가의 해설서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9-11)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목요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과 계명을 나를 얽매는 답답한 사슬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실천하기 너무나 버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으십니다.
계명을 지켜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이유가, 우리를 노예로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순종과 희생이 어떻게 기쁨의 샴페인을 터뜨리는지, 이 역설적인 복음의 신비를 풀기 위해 아주 가슴 시린 단편 영화 한 편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3년에 제작된 체코의 단편 영화 '다리' (원제: Most)의 이야기입니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도개교(배가 지나갈 때 들리는 다리)를 관리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일터에 데리고 갑니다.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멀리서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열차가 빠른 속도로 다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다리는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위로 들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알아챈 어린 아들이 기차를 멈춰 세우려다가 발을 헛디뎌 거대한 다리의 기계 톱니바퀴 속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멀리서 이 참상을 목격한 아버지는 경악합니다.
아버지는 극한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레버를 당겨 다리를 내리면 톱니바퀴에 낀 아들은 압사하지만 기차의 수백 명은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레버를 당기지 않으면 기차는 강물로 추락해 모두가 몰살당합니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며, 결국 기차를 살리기 위해 레버를 당깁니다. 굉음과 함께 다리가 내려앉으며 아들의 생명은 부서졌고, 기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사히 다리를 통과합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꿈에도 모른 채 창밖을 보며 웃고 떠듭니다.
마약을 투약하려던 한 젊은 여성도 창밖을 무심코 바라봅니다. 바로 그때, 기차 창밖으로 아들의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짐승처럼 오열하며 절규하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와 그 여성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마주칩니다.
그 순간, 여성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꽂힙니다. '아! 지금 내가 이 기차 안에서 평온하고 안전하게 앉아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구나. 저 남자의 가장 소중한 아들의 목숨을 갈아 넣은 희생 덕분이었구나.'
이 영화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기차 안의 모든 승객이 목숨을 건졌지만,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그 기쁨의 깊이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직 한 사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희생한 아버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목격한' 여성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시어 지금 기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에 탄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기쁨을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으로 온전히 누리려면 한 가지 절대적인 조건이 필요합니다. 영화 속 여성처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아드님을 십자가의 톱니바퀴에 밀어 넣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찢어지는 고통을 내 가슴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논리가 하나 파생됩니다.
만약 그 기차 안의 여성이 아이들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1그램도 없는 소시오패스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오열을 보고도 '운수 나쁜 영감이네' 하고 고개를 돌렸을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무엇인지 공감할 능력이 없기에, 아버지가 치른 희생의 무게가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식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거울 신경 세포'의 법칙입니다.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면, 타인이 나를 향해 쏟는 사랑의 크기를 결코 해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밥상에 올라온 생선의 가장 맛있는 살을 발라 내 밥그릇에 올려주실 때, 그것이 눈물 나는 희생인 줄 모릅니다. 철없는 생각에 '우리 엄마는 생선 대가리만 좋아하시는구나' 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어른이 되어 자식을 낳고,
내 입에 들어갈 밥 한 숟갈을 굶어가며 자식의 입에 고기를 넣어줄 때, 비로소 과거 어머니의 마음을 거울처럼 반사하여 깨닫게 됩니다. '아, 우리 엄마도 고기를 좋아하셨구나. 나를 너무 사랑해서 당신의 본능을 꺾으신 거였구나.' 이처럼 사랑의 실천이라는 데이터가 내 안에 쌓여야만, 나를 향한 타인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20절은 이 진리를 명확히 짚어줍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출처: 1요한 4,20).
눈앞의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보듬으며, 밉상인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내 자존심을 꺾는 뼈아픈 희생을 해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위해 치르신 희생의 값이 얼마인지 영원히 계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왜 원수를 사랑하고,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이웃을 품어주어야 합니까? 저 사람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나 자신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라는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은 마치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쓰인 100억짜리 당첨 수표'와 같습니다. 내 손에 100억짜리 수표가 쥐어져 있어도, 내가 그 언어를 읽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종이 조각일 뿐 내게 어떤 기쁨도 주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희생'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 자존심을 꺾고 이웃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언어인 '희생과 사랑'이라는 외국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순간, 비로소 내 손에 들린 십자가가 100억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러브레터임을 읽어내게 됩니다. '아! 창조주 하느님이 나를 살리려고 당신 아들의 목숨을 내놓으셨구나! 내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존귀한 존재구나!'
이 압도적인 자존감을 깨닫는 순간, 우리 영혼에는 세상 어떤 권력도, 돈도, 질병도 빼앗을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 실천은 하느님께 바치는 무거운 세금이 아니라, 내 영혼의 기쁨을 인출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는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명을 실천할 때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된 기쁨에 도달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제 자신의 아주 내밀하고 소중한 실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크게 다치셔서 수원 빈센트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와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 병원에서 새우잠을 주무셔야 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병원 식당 설거지를 도와주시고 남은 밥을 조금 얻어 드시며 버티셨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저는 고모 댁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고모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마음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당신의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고 평생 고아로 살아본 뼈저린 상처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니 '내 자식마저 나처럼 고아를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공포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셨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셨습니다.
그러다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쌩쌩 달리는 큰길가를 지나치려는데, 웬 아이 하나가 그 위험한 트럭들 사이 먼지구덩이에 주저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더랍니다. 바로 저였습니다. 어머니는 달려와 저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셨습니다. 어머니는 잃어버린 목숨을 찾은 기쁨과 안도감에 우셨고, 저는 사실 상황 파악도 못한 채 그저 배가 고파서 같이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사제가 되고, 1년 동안 냉담자들을 찾아다니며 방문 사목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거리를 헤매며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사랑의 실천을 하면서, 저는 비로소 저를 찾아 먼지구덩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셨던 어머니의 그 절박한 심정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 저는 제 영혼을 관통하는 거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마주했습니다. '아, 하느님도 나를 찾으러 이 먼지투성이 세상으로, 십자가라는 위험한 트럭이 달리는 길가로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오셨구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0). 이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펄떡이는 생명으로 제 영혼에 부딪혀 왔습니다. 내가 그토록 절박하게 사랑받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 영혼에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미칠 듯한 기쁨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웃을 찾아 나서는 사랑의 수고가 어머니를 이해하게 했고, 어머니를 이해하니 하느님의 사랑이 해독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똑같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수고를 거부하면,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이 흘리신 피와 땀을 보고도 "아이고, 하느님은 원래 십자가 지는 걸 좋아하시는 특이한 분이구나" 하고 넘겨버리는 영적 바보가 되고 맙니다.
교부 성 대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흘리는 땀방울만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유일한 저울표입니다." (출처: 성 대 그레고리우스, 『복음 강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요즘 뉴스를 통해 전쟁의 소식을 자주 접합니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부딪히고, 서로의 질서를 내세우며 상대를 압박합니다. 각 나라는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보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질서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어린 생명이 희생되고,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인간이 만든 질서는 때로 이렇게 생명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세상의 질서는 힘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쪽이 자신의 기준을 관철하려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평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왕도,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윗도 결국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야 했습니다. 인간의 힘과 논리는 결국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무엇이 참된 질서인가?” 신앙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같은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유다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전통과 율법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공동체는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유다인의 기준만을 강요했다면 교회는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기도하고 식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합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질서를 선택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랑과 포용, 생명의 질서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걸어온 길이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사목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곳에 가면 먼저 듣고, 먼저 이해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 기준을 앞세우기보다, 공동체의 삶과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급한 변화는 상처를 남기지만,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는 공동체를 살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단순한 권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질서입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 지배가 아니라 섬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 하느님의 질서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서는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질서는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만, 하느님의 질서는 상대를 살리려 합니다.
교부이신 성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은 태어나고 자라며 완성되어 갑니다. 우리는 세례로 태어나고, 말씀과 성사로 자라며,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향하는 곳은 경쟁과 승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서를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준입니까, 하느님의 기준입니까? 전쟁은 죽음을 낳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을 낳습니다. 힘은 두려움을 남기지만, 사랑은 기쁨을 완성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를 선택합시다. 그 선택이 우리를 참된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로사 베네리니(Rose Venerini)
활동년도 : 1656-1728년
신분 : 동정녀, 설립자
지역
같은 이름 : 로싸, 로즈
이탈리아 비테르보(Viterbo) 태생인 성녀 로사 베네리니(Rosa Venerini)는 그곳의 의사이던 고데프리두스 베네리니(Godefridus Venerini)의 딸이다.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한 젊은이가 죽은 후에 그녀는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부친을 잃음으로써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성녀 로사 베네리니는 주변의 처녀와 부인들을 모아 저녁마다 로사리오 기도를 가르치는 등 종교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예수회원인 이냐시오 마르티넬리(Ignatius Martinelli) 신부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그 사제는 그녀가 '세속 안에서의' 교사가 되는 것을 주님의 뜻으로 알아듣고 그렇게 인도한 것이다.
1685년 그녀는 두 사람의 지원자와 함께 비테르보에 여학교를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명성은 퍼져나갔고, 급기야는 바르바리고(Barbarigo) 추기경의 초청과 큰 도움으로 몬테피아스코네(Montefiascone)에 교사 훈련원을 세우게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Lucia Filippini, 3월 25일)를 만나 '자비로운 교사회'를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이들은 '베네리니 수녀'들로 알려져 있다. 1728년 5월 7일 로마에서 선종한 성녀 로사 베네리니는 1952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6년 10월 15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 로스첼리 (Augustine Roscelli)
활동년도 : 1818-1902년
신분 : 신부, 설립자
지역
같은 이름 : 아오스딩,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오스틴
성 아우구스티누스 로스첼리(Augustinus Roscelli, 또는 아우구스티노 로스첼리)는 1818년 7월 27일 이탈리아 카사르자 리구레(Casarza Ligure)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나 명예에 있어서 축복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덕이 높은 부모와 총명함 그리고 진실한 친구를 허락하셨다. 그는 고요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향에서 가족의 양을 치며 성장했고, 그의 영혼은 기도에 열려 있었으며 그의 마음 또한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려졌다. 16살 때인 1835년 5월 그는 자신이 사제직에로 불림을 받았다는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농부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소는 그의 기도생활과 너그러운 사람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제노바(Genova)에서 공부를 하고 1846년 9월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의 첫 임지는 산 마르틴 달바로(Saint Martin d'Albaro) 성당이었다. 8년 후 그는 위로의 성당으로 이동하여 고해성사를 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제노바에서 그는 지원을 받지 못하여 굶주림이나 매춘 생활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 가족조차 없는 젊은 여성들을 교육하는 기숙학교를 만들었다. 1876년에는 무염(無染) 수녀회를 창설하여 이 기관과 그가 창설한 다른 기관들을 운영하게 하였다. 이러한 자선행위와 더불어 1874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지방 고아원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22년간 이 소임을 수행하며 교정 사목을 병행하여 사형수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02년 5월 7일 선종한 그는 1995년 5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1년 6월 1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요한 (John)
활동년도 : +721년
신분 : 대주교
지역 : 요크(York)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영국 잉글랜드의 요크셔(Yorkshire) 출신인 성 요한(Joannes)은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월 9일)의 문하생으로 캔터베리(Canterbury)에서 공부한 후 노스요크셔(North Yorkshire)의 휘트비(Whitby) 수도원에 들어갔다. 687년경에 그는 헥스햄(Hexham) 교구의 주교로 축성되었고, 705년에는 성 보사(Bosa, 3월 9일)를 계승하여 요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로서 활동하면서도 교사직을 고수하는 한편 고적한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그는 721년 5월 7일 은퇴하여 지내던 베벌리(Beverley) 수도원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묘지는 수 세기 동안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순례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는 1037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9세(Benedict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