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산 아래 만 중생 보듬는 '친근한 돌부처님'
엄숙하고 자애로운 부처님과
사뭇 다르게 서민적이고 친근한
중생의 모습으로 다가와
동병상련의 마음 느낄 수 있어
영월암 대웅전 뒤편 계단을 올라 삼층석탑을 돌아 오르는 곳에 자리한 마애여래입상은 서민적이고 친근한 모습이다.
유년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련하게 다가온다. 출가수행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리라. 경기도 이천 영월암(映月庵)에 자리한 마애여래입상을 찾아가기 위해 자료를 찾다가 SNS에 한 비구니 스님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만에 고향나들이. 지금 설봉산 영월암 객실(茶室)에서 일박(一宿)중인데 영월암은 내 어린시절 부모님과의 추억이 깃든 곳, 아버지께서 해마다 정월이면 쌀 한 가마와 초와 조선종이 서 너 축을 공양 올리시었다. 그때 공양짐은 지게꾼이 지고 먼저 출발하고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집에서부터 설봉산 꼭대기 영월암까지 걸어 걸어서 올랐는데 길이 멀고 험하고 가파라서 집에서 아침밥 먹고 나서면 꼭 마지시간에 영월암 마당 법당에 당도하였었다. 마애불이 신기한 영험이 있다 해서 유난히 그 앞에 정성 드리시던 어머니! 부모님의 그 정성 공덕 덕분에 지금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영월암 다실에서 넓은 유리창으로 이천시내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이 글을 올리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찾아 간 영월암은 생강나무 노랗게 피어나는 봄기운이 가득했다. 이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설봉산 중턱에 위치한 영월암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사찰이다. <영월암 중건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1300여 년 전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해동 화엄종의 개조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금석문 등 신빙자료가 없어 그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경내에는 고려중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보물 마애여래입상과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 그리고 석조, 3층 석탑 등의 유물, 유적들이 남아 있어서 이 절이 유서깊은 고찰입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 등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영월암 창건연대는 대략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초기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영월 낭규대사가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여 이전에 '북악사(北岳寺)'(<여지도서>와 <이천군읍지>)란 이름을 고쳐 '영월암'으로 불렀다.
근대인 1911년에는 보은스님이 중건하였고, 유신암(劉信庵)스님이 극락전을 옮겨 세웠으며, 1937년에는 조연우스님이 산신각과 누각인 단하각을 중건했다 한다. 지금의 대웅전 건물은 1949년 청암 김명칠스님이 이천향교 명륜당 앞에 있었던 퇴락한 풍영루 건물 목재를 가져와 짓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된 것을 1953년 11월 당시 주지 김해옹스님이 준공했다고 한다. 여러 자료를 취합해 유추해 보건데 영월암은 마애여래불을 중심으로 민초들과 생사고락을 한 도량으로 보인다.
설봉산 중턱에 자리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을 찾아가는 길은 가파르기 그지없다. 지금은 도로가 개설돼 자동차가 오가는 길이지만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고로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며칠 전 봄눈이 폭설 수준으로 내려 사찰 음지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어 설봉산(雪峰山)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은 대웅전 뒤편 계단을 올라 삼층석탑을 돌아 오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 암석을 다듬어 머리와 두 손만 얕게 부조형식으로 조성하였고, 옷 주름과 몸체는 선각으로 처리한 높이 9.6m의 입상이다.
"둥근 얼굴에 눈, 코, 입을 크고 뚜렷하게 조각하였는데 지그시 감은 눈과 넓직한 코, 두툼한 입술은 온화한 인상을 준다. 머리는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가 없는 민머리이며 목에는 번뇌, 업(業),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옷의 모양과 오른쪽 팔꿈치가 직각으로 표현된 점은 고려시대 조각상의 특징이다. 이 마애상은 지정 당시 명칭이 마애여래입상으로 되었으나, 머리가 민머리인 점과 옷의 형식으로 보아 나한상이나 조사상으로 확인되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로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성자를 뜻하고 조사는 한 종파를 세우고 중심 가르침을 준 수행자를 뜻한다. 이 불상은 유래가 드문 마애조사상으로 양식과 영월암에 전하는 석불좌대와 광배, 석탑재 등을 볼 때 조성연대는 고려초기로 추정된다."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마애여래입상 입간판을 읽어 보고 다시 마애부처님을 올려다보니 '나한님상'과 '조사상'의 모습이 겹쳐지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뇌리에 인식되는 만큼 대상도 보이기 마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월암 마애부처님은 머리가 민머리인 점과 옷의 형식으로 나한상이나 조사상으로 확인된다.
정면에서 바라본 마애부처님의 상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자리를 좌측으로 옮겨 비스듬한 경사지에서 바라보니 자연석 중앙에 조성된 얼굴윤곽이 뚜렷이 보인다. 엄숙하고 자애로운 부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서민적이고 친근하다. 때로운 세파에 찌든 중생의 모습으로 다가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천년세월을 중생들의 아픔을 보듬으며 함께 해 온 성상은 마모된 자연석에도 오롯이 드러나 있다.
마여여래입상 우측 산등성이에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던 노송이 며칠 전 봄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부러져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100년은 족히 넘었을 소나무의 생(生)이 한 순간에 사(死)로 변한 모습이다. 마애부처님의 넉넉한 그늘이 되어 주었을 소나무의 한 생이 스러져 있어 마음이 안쓰러워 아쉬운 마음을 운율에 담아본다.
"그 나무는 거기 없었네. 100년은 지켜줄 거라 믿었었네. 100년을 지켜왔기 때문이네. 봄 눈 온 지난 밤 무게 못이겨 이 생을 달리했다 하네. 지나 온 100년이 한낱 찰나네. 사라지고 나면 이리 허망한 것. 우리 것이라 집착할 것 하나 없네. 그 나무가 거기 없어지듯 우리 삶도 스쳐가는 바람이라네."
지심으로 예경을 올리고 대웅전 마당으로 내려오니 사찰 관계자들이 부처님오신날에 내다 걸 연등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종무소 관계자가 벙거지 모자를 한 분이 주지 스님이라 귀띔해 준다. 손수 용접까지 하며 부처님 도량을 가꾸고 있었다. 보기 드문 모습이다. 코로나 시대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스님의 모습에서 중생들과 함께하는 마애여래불의 모습이 보였다. 어서 빨리 지긋한 코로나 시대가 종식돼 올해 부처님오신날에는 많은 불자들이 영월암을 찾아 기도하길 기원해 본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