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산성 답사시에 보았던 대전전투와 딘 소장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여러 인터넷 자료에서 취합 선택했음을 밝혀둡니다.)
- 보문산에 있는 대전지구 미군 참전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 공적기념비 -
- 동판문 사진 -
< 대전 지구 전투 공적비 >
(*한글편만 읽어보기)
자유는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 생활의 고귀한 상징이요 평화는 자유를 살릴 수 있는
인류 공동의 신성한 이상이다 이 자유와 평화를 획득 수호하기 위하여 여기 국제연합의 거룩한
역사 한 페지가 이루어졌다 단기 4283년 6월 25일 새벽 불법침략을 개시한 공산군은 일
거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침 하였다 세계 자유국가들은 총궐기하여 이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 24사단은 국련군의 최선봉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적과 처음으로 대전하였으나 과불적중
으로 인하여 7월 17일 적은 대전을 포위 공격하게 되었다 미 24사단은 20일 동안 결
사적인 방어전을 진행하든중 진두지휘에 나선 [딘]소장 불행히 실종되엇엇다 이 처절무비한 악전
고투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미 제24사단의 영웅적인 혈투사를 영원힌 빛내고 기리고저 이
작은 비를 세우노라
단 기 4292년 9월 31일
육군 제 202 건 설 공병단 세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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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제24보병사단장
윌리엄 프리시 딘( William Frishe Dean)
<1. 개요 >
- 1899년 8월 1일 미국 일리노이주 칼라일 생
- 1981년 8월 24일 (향년 82세) 사망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복무 미합중국 육군
- 복무 기간 1921 ~ 1955
- 최종 계급 소장 (Major General)
-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 신체 180cm, 96kg
- 서명 William F. De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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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1945년 9월 9일 ~ 1947년 6월 2일 )
- 사령관 : 존 리드 하지 (1945년 9월 9일 ~ 1947년 2월 5일)
-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의장: 김규식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5월 30일)
-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 (1947년 2월 5일 ~ 1948년 9월 15일)
- 군정장관
: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1945년 9월 11일 ~ 1945년 12월 17일)
: 아처 L. 러치 (1945년 12월 18일 ~ 1947년 9월 11일)
:* 윌리엄 프리시 딘 (1947년 10월 30일 ~ 1948년 8월 15일)
(* 딘 소장은 미군정청 군정장관으로 근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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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산성 장대루와 식장산 (597m) : 세천 전투를 생각해봅니다. -
- 보문산성 가는 길에(218m 높이 지점에서) 돌아본 대전역과 시가지 일대 -
<3. 대전 전투 경과와 딘 소장의 실종 >
1). 개요
대전 전투는 1950년 7월 16일 야간에 미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가 (대전시내) 갑천 일대에 배치되면서부터 7월 20일까지(본격적인 전투는 19일에 시작되어 대전 시가전은 20일) 대전 일대에서 미 제24보병사단이 조선인민군 제3, 4사단 및 105 전차사단에 대응해 펼친 지연전이다.
2). 시가전과 철수 작전
7월 20일 새벽 3시, 공격준비사격 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한 미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가 허겁지겁 보문산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시가전으로 야기될 피해를 우려해서인지 주력을 대전 시내로 들이지 않고 오전 6시경 포격 지원 속에 전차 몇 대만 시내로 보냈다.
한편 갑천의 부대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한 미 34연대장과 윌리엄 F. 딘 미 제24보병사단장은 북한군의 일부 병력과 전차만이 대전 시내에 들어온 것으로 판단하고 반격을 진두지휘해 수색중대와 공병중대의 3.5인치 로켓포로 전차 8대, 야포로 전차 2대를 파괴시킨다.
- 사진 설명: 북한 괴뢰 전차 파괴 사진-
*딘 소장이 직접 전차 특공조를 지휘하며 파괴한
북한군 T-34-85 전차( 로씨아 땅크)
: (1950년 7월) 대전전투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 탱크에 쓰여진 영문 자세히 보기>
( Knocked Out 2o July 5o : 7월 20일에 파괴된 (탱크)
Under The Supervision Of. : 지휘하에
MajGen W.F.Dean. ) : W.F.Dean 딘 소장의
이후 이 전차들은 대전시청의 34연대 지휘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 무렵 북한군은 금산과 옥천으로의 퇴로를 차단하고서야 주력을 시내로 진입시켰고, 그제서야 북한군의 진의를 파악한 딘 사단장은 이 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사단 지휘소는 충북 영동 소재)
결국 7월 20일 딘 소장은 부관 클라크 중위를 대동하고 호위차량 1대를 앞세워 17시 55분에 연대 지휘소(* 대전시청)를 출발하였으며, 뒤이어 34연대 등 잔류 병력 본대가 18시에 출발하면서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천 터널에서 차단선을 치고 매복중인 북한군의 기습으로 차와 장비를 버리고 산기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딘 소장과 부관 클라크 중위 포함 17명의 일행이 산길로 통해 철수하던 중 딘 소장은 부상병에게 줄 물을 뜨러 가다 어둠속에 길을 잘못 들어 7월 20일 늦은 밤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종되고 만다.
- 딘 소장 탈출로 -
그 후 7월 22일 역시 낙오했던 미 제24보병사단 2대대 소속 스탠리 E. 테이버(Stanley Eugene Tabor) 중위를 만나 같이 본대를 찾아가던 중 민가에 숨어있었는데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이 급습하였고 테이버 중위가 주위를 분산시켜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테이버 중위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 후 홀로 대구 본대를 찾아 산야를 헤매다가 8월 20일 전라북도(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에서 농부 박종구의 집에서 대략 3일간 머물며 닭죽 등 후한 대접을 받고 본대가 있는 대구로 향하였다.
그러나 운명적이게도 여기서 행방불명 된지 36일 후인 8월 25일에 전북 진안군 주민인 한두규, 최천봉이란 두 사람을 만난다. 딘 소장은 두 사람에게 미군 군표와 선물을 주기로 약속하고 대구까지 안내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은 5달러에 해당하는 3천원에 딘 소장을 북한군에 넘겼다. 이리하여 그는 그 후 줄곧 휴전 때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딘 소장은 도피와 포로 생활로 어찌나 고생했는지96kg였던 몸무게가 59kg까지 줄었고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자살 충동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특히 고문을 통해서 인천 상륙 작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밀을 노출할 것을 우려해서 실제로도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 북한군 측에서는 처음에는 딘 소장이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얼마안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한편 미군에서는 실종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가 1950년 10월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딘 소장 심문시 통역을 맡았던 북한군 징집병 이규현(훗날 문공부장관 역임)이 귀순하여 진술함으로써 미군에서도 이때 딘 소장이 생존하여 북한군에 포로가 된 것을 인지하였다고 한다.
'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66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그렇지만 미군에서는 이규현의 진술 보다는 정황상 전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1월 9일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여식을 거행하였으며, 1955년 10월 31일 전역식에서 전투보병휘장(Combat Infantry Badge) 2등급을 수여했다.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하던 중 1951년 12월 21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공산계 언론사 소속 월프레드 G. 버체트(Wilfred Graham Burchett) 종군기자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시켰고, 1951년 12월 24일 딘 소장의 사진과 함께 전 세계로 기사가 배포되면서 포로 상태인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 딘 소장이 북한군 포로가 된 사실이 입증된 인터뷰 기사 : 1951년 12월 24일자 신문 -
포로가 된 이후 딘 소장은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가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일반 포로들을 교환한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에 의해 1953년 9월 4일 석방되어 귀환하였다.
딘 소장은 그 후 일본을 거쳐 1953년 9월 24일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 후 미 제6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잠깐 역임한 후 1955년 10월 31일 전역식과 함께 퇴역했다.
한편 딘 소장을 북한군에 팔아넘긴 한두규와 최종봉은 체포되어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딘 소장은 귀환 후 1953년 9월 25과 10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에게 두 한국인에게 관대한 처벌을 부탁하는 탄원서를 보내는 관대함을 보여 주었다.
한두규와 최종봉은 1954년 9월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한두규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7년 5월 좌익수전향자로 감형 출소하였다.
딘 소장이 길을 잃고 헤메일 때 닭죽을 쑤어 주는 등 호의를 베풀은 전북 무주군 적상면 박종구 씨에게는 그의 자식들이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딘 소장은 그 후 여생을 조용히 살다가 1981년 8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 4. 딘 장군 회고록에서 >
1)"There were heroes in Korea, but I was not one of them." 서문 (p. 3)
(한국전쟁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저는 그런 영웅들이 아닙니다.)
2)"I wouldn't have awarded myself a wooden star for what I did as a commander."
(제가 지휘관으로서 했던 행위는 나무 훈장조차 탈 자격이 없습니다.)
3)1953년 미국 귀환 후 기자회견에서 첫마디:
"Get it out of your heads that I'm a hero. I'm not.
I'm just a dog-faced soldier."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서 제가 영웅이라는 생각을 버려주세요.
저는 영웅이 아니고 일개 육군 보병 군인입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딘 소장의 생애입니다.
구한국 멸망시에도 그렇고, 일제시에도 그렇고, 해방 후, 한국동란시까지 순간의 행동과 판단이 일생을 좌우할 수 있음에서야. 본인만이 아니라 후손과 국가에까지도 말입니다. 아울러 운명이란 것도 생각해봅니다.
(2025년 1월 15일(수) 카페지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