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갔다가 장릉에 들렸다. 인조 부모의 무덤이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선조의 아들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다.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의 아버지다. 애초에는 왕릉이 아니었는데 아들 덕에 왕으로 추존되고 흥경원에서 장릉으로 격상되었다. 처음 가 보는 곳이 아니기에 왕릉 주위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거닐었다. 조선의 왕릉은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다르지만, 겉보기에 모두 같아 보인다. 울창한 숲속에 편안하게 자리 잡은 왕릉은 모습 자체가 엄숙함이다. 일주문 뒤로 정자각이 보이고 옆으로 비각이 세워져 있다. 잘 가꿔진 잔디 언덕 위로 쌍 봉분이 보인다. 나이 지긋한 문화해설사가 무료하게 앉아 있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비각 옆에 잘 다듬어진 무늬 돌의 용도를 물어보니 반갑게 대답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장릉은 흥경원이었다. 정원군은 선조의 아들이지만 왕이 아니고 왕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능'이라 하지 않고 '원'이라 했다. 인조가 반정으로 임금에 오르고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고 흥경원을 장릉이라 했다. 이때 흥경원에 세웠던 비석을 땅에 묻고 새로 왕릉의 격에 맞는 비석을 새로 세웠다. 일설에는 인조가 왕릉이 아니었던 홍경원의 비석이 보기 싫어 일부러 땅에 묻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래 들어 왕릉을 단장하다 묻힌 비석이 발견되었고 이 또한 유물로 인정되어 비각 옆에 전시한 것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통성은 중요하다. 조선 시대는 왕자 중에서 적장자가 대를 잇는 것이 정통성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차남이 왕통을 잇기도 하고 서자가 이어받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왕은 정통성이 약하기 때문에 왕권이 약하다. 이는 인조도 마찬가지다. 인조는 할아버지가 선조다. 그렇지만 아버지 정원군은 왕이 아니라 왕자로서 인조는 왕손에 불과하여 왕으로서 정통성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아버지를 왕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추진하여 십 년 만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였다. 정원군에서 아들이 왕이 되어 정원 대원군이 되었고 이어 원종 왕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로써 인조는 원종 왕의 아들로 인조 왕이 된 것이다. 덕분에 인조의 형제들도 능원군, 능창군에서 능원대군, 능창대군이 되었다. 인조는 정원군의 맏이로 능양군이었다.
인조의 가족은 광해군의 의심병으로 핍박을 받았다. 인조의 동생 능창군은 거짓 역모 고변 때문에 유배지에서 죽었고 아버지 정원군의 집은 왕기가 서려 있다는 소문에 집을 빼앗겼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죽었다. 광해군은 왕기가 서려 있다는 정원군의 집터에 경희궁을 지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소문대로 이 집에서 인조 왕이 나온 것이다. 광해군은 왕기를 없애려 경희궁을 지었지만, 조카 인조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세자가 되고 선조를 이어 왕이 된 이후에도 정통성에 늘 시달려 왔다. 기록에는 사람을 의심하는 증세가 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선조의 아들 중에 임해군, 영창대군은 광해군에 의해 죽고 나머지는 병으로 죽어 남은 왕자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유일하였다. 광해군으로서는 위협적인 존재가 정원군이었으므로 항상 의심하였다. 인조 처지에서는 가족이 화를 당함에 따라 복수를 위해 인조반정에 앞장선 것으로 본다. 아무튼 반정에 성공하여 조선이 끝나는 순종까지 인조의 직계 후손들이 대를 이었다.
인조의 능은 아버지의 김포 장릉과 똑같이 파주 장릉이지만 한자가 다르다. 김포 장릉은 章陵, 파주 장릉은 長陵이고 단종의 왕릉인 영월 장릉은 莊陵이라 쓴다.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