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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지역 구분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두 공동왕은 위풍당당하게 그라나다에 입성하면서 레콩키스타는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스페인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수백 년 동안 끌어 온 십자군 운동의 정점이자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었다. 그런 생각은 1936년 쿠데타를 주도한 국민 진영 연합 세력에게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카톨릭 공동왕 시대의 영광을 찬미하고, 자신들의 싸움이 제2의 재정복 운동이라고 말했으며, 자유주의자들, ‘적색분자들’, 분리주의자들에게는 현대판 이교도의 역할을 부여했다.
마지막 술탄 보압딜에게서 알함브라 궁전의 열쇠를 받는 이사벨1세와 페르난도2세
봉건 군대를 거느린 국왕들과 전사 귀족들은 무어인들과 투쟁하던 시기에 토지 소유권을 되찾았다. 귀족들은 재정복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식량이 아니라 돈이 필요했는데, 당시 스페인의 주요 환금 자원은 메리노 양모(羊毛)였다. 양을 치기 위한 공유지 징발은 농민들의 식량 생산에 파괴적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토양이 침식되어 한때 ‘로마 제국의 곡창’이었던 스페인 땅은 황폐해졌다. 양을 돌보는 데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수의 평민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처음에는 군대, 후에는 제국이었다. 중세 스페인 인구는 약 1,40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18세기 말에는 7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스페인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는 항상 카스티야였다. 카스티야의 권위주의는 봉건적, 군사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교회의 정치적 지배를 강조하는 것으로 발전해 갔다. 700여 년에 걸친 재정복 운동 기간 동안 교회는 주로 군사 행동을 부추기는 포교자 역할을 했고, 성직자가 직접 전쟁에 나서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사벨라 여왕 시대에 ‘전사 대주교’는 ‘추기경 정치가’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교회와 군대는 스페인 제국이 급속하게 성장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때 십자가는 전 세계 반 이상의 지역에서 칼의 그림자였다. 군대가 정복하면 이어서 교회가 정복한 새 영토를 카스티야 국가에 편입했다.
중세의 카스티야 왕국. 카스티야는 스페인 반도의 4분의 1이 넘는 영역을 차지하는 전통적 지방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핵심부였다. 통일 이후 스페인은 카스티야 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는데, 스페인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는 항상 카스티야였다.
교회는 일반 백성들을 지옥에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종교 재판소를 두고 그 지옥을 미리 이 세상에서 맛보게 했기 때문에 교회 권력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단 한 명의 고발자나 시기하는 적이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만으로도 종교 재판소는 고발당한 사람을 능히 단죄할 수 있었다. 이단 혐의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유죄를 선고하는 이단 단죄의식에서 피고에게 공개적으로 받아내는 자백은 전체주의 국가의 충격적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보통 그 도시의 대광장(플라사 마요르)에서 열렸다. 게다가 교회는 교육의 모든 부문을 장악했고, 종교적, 정치적 이단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책을 불태움으로써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구금 상태로 몰아넣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 죽음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카스티야 인의 자질이라고 떠벌린 것도 교회였고, 배부른 상인보다는 굶주린 하급 귀족이 낫다는 생각을 부추긴 것도 교회였다.
1683년 에스파냐 마드리드에서의 이단 단죄 의식. 이단 혐의를 받은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의식으로 보통 그 도시의 대광장에서 열린다. 흔히 이단자 화형식으로 번역하는데, 화형식과는 다르다. 화형식은 보통 이 예식이 끝나고 나서 변두리로 자리를 옮겨 진행한다.
카바예로. 스페인의 하급귀족을 의미하며 16세기 카바예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스페인의 카톨릭 청교주의는 16세기 초 금욕주의적 탁발승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Ximenez de Cisneros) 추기경이 주도했다. 그는 16세기 초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종교인이자 정치가 종교개혁자, 추기경, 종교 재판소 수장으로서 콤플루텐세 대학을 창설하고 성서 편찬 후원등 여러 중요한 일을 맡아보았다. 가톨릭 청교주의는 기본적으로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발흥한 종교 개혁 운동이었다. 교황청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며 반기를 든 스페인 교회는 스페인이 나서서 유럽을 이단으로부터 구해내고 가톨릭 교회를 굳건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라 성직자들은 용서와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만 빼고 자신들이 설교한 모든 것을 실행에 옮겼다. 스페인 성직자들은 가끔 재산에 관하여 거의 예수의 원래 가르침만큼이나 체제 전복적 내용을 담은 선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카스티야의 사회 구조에 정신적 정당화를 부여했으며, 그 구조를 강화하는 데 가장 권위있는 힘이었다.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
중앙집권주의와 지역주의의 갈등 역시 15세기와 16세기에 불거져 나왔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연합 왕국에 대항하여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은 명백히 지역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1520년 이사벨라 여왕의 외손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카를 5세)로 선출되기도 한 카를로스 1세에 대항하여 도시의 자치 조직이 일으킨 코무네로스의 반란(Communeros's movement)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을 자신의 제국(합스부르크 제국) 운영을 위한 금고 정도로 여긴 데다가 왕이 데리고 온 플랑드르 출신 심복들이 오만하게 구는데 항거하여 일어났다. 다른 한편으로 반란은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에 들어오고 나서 전통적으로 각 지역들이 누리던 권리와 관습을 무시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국가 영토는 대부분이 왕실 간 혼인으로 카스티야 왕국에 흡수되었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교회가 스페인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수행해 주기를 기대했다.
카를로스 1세, 카알 5세. 1519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으며, 1530년부터 이탈리아 국왕 카를 5세였기도 하였고, 1516년에서부터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이기도 했다.
코무네로스의 반란
카스티야 국가의 봉건적이고 권위주의저기고 중앙집권적인 세 가지 결정적 속성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지역 문제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카스티야는 스페인에서 중앙집권적 권위를 확립하고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봉건적 경제 관계가 점점 더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북유럽에서 일어난 전쟁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벌인 싸움, 무적함대(아르마다)의 참패는 채 두 세대도 안되는 시간 동안 급성장한 스페인 제국의 힘이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알렸다. 카스티야는 한때 부자였다가 폭삭 망한 귀족 집안처럼 특유의 자부심만은 대쪽 같았다. 그들은 자신의 대저택 천장에 거미줄이 늘어지고 마당에 잡초가 자라나는데도 애써 눈감았으며, 젊은 시절의 위풍당당한 모습만을 계속해서 고집했다. 이렇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카스티야 지배 계층을 내향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아메리카에서 실어오는 귀금속이 아무도 먹여 살리지 못하며, 엄청나게 들여오는 귀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귀금속이 국가의 경제 하부 구조를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했다.
무적함대가 궤멸되는 모습
중세 시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일부였던 카탈루냐는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지역과는 상당히 달랐다. 후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갈등을 빚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카탈루냐인들은 중세 시대에 지중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제국은 한때 발레아레스 제도, 코르시카, 사르데냐, 시칠리아, 아테네까지도 포함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한 사람이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아니라 카스티야의 이사벨이었기 때문에 카탈루냐인들은 아메리카와 직접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카탈루냐는 과거 중세시대 아라곤,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등 지역들과 아라곤 왕국이란 하나의 나라를 이뤘었다.
1640년, 카탈루냐와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와 총신 올리바레스(Olivares) 백작 겸 공작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포르투갈은 독립을 이루었으나 카탈루냐인들은 프랑스의 루이 13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였다가 결국 1652녀에 펠리페 4세에게 항복했다. 그 후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죽고 나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에서 카탈루냐는 영국 편에 가담하여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반대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인들은 위트레흐트조약(1713년)에서 영국에게 배신당했고,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펠리페 5세(앙주 공작 필리프)는 1714년 카탈루냐를 굴복시키고 카탈루냐의 지역 특권을 폐지했다. 바르셀로나를 지배하고, 카탈루냐인들에게 그들이 마드리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몬주익 성도 축조했다. 이를 시작으로 펠리페 5세는 할아버지인 루이 14세의 중앙집권적 이념을 스페인에서 실현하는데 앞장섰다. 교회의 통합적 힘은 많이 약해졌다. 마드리드 왕정은 비(非) 카스티야 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20세기에 바스크 출신의 철학자 우나무노(Miguel de Unmuno)는 결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말했다. “목표는 오로지 통일이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티끌만한 개성과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통일이었다. …… 그것은 지배자의 무오류성의 도그마였다.” 그러나 마드리드 정부의 단호한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문젯거리를 더 높이 쌓아올려 후대인들에게 넘긴 데 불과했다.
펠리페 4세. 그가 국왕으로 즉위했을 무렵의 스페인은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황금시대라 불렸던 전성기의 끝무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올리바레스 백작. 펠리페 4세의 총애를 받던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하다가 끝내는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카를로스 2세. 정신적 장애를 안고 태어나 거의 무능력자였다는 점에서 동진의 진안제와 공통점이 있다. 다만 진안제에 비해 정신적인 문제는 적은 편이었다.
스페인_왕위계승전쟁_가계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가 원인을 제공하고 영국이 이득을 보고 스페인이 모든 배상을 책임지는 전쟁이었다.
펠리페 5세
미겔 데 우나무노.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철학자로 20세기 스페인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다. 1864년 9월 29일 스페인 빌바오에서 바스크 인 부모 아래서 태어나,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당원을 비난한 일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가택 연금을 당함, 내전의 와중인 12월 31일 살라망카에서 사망하였다.
17~18세기 동안 스페인의 상업 활동이 퇴보를 면치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가 반(反)자본주의 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하급 귀족의 가치관은 일반적으로 돈과 돈버는 행위를 경멸했다. 1788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를 보면 성인 남성 인구의 거의 절반이 어떤 형태로도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 군대, 교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방대한 규모의 귀족 계층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이 통계 수치가 아마도 “스페인의 반은 먹기만 하고 일은 안 하고, 나머지 반은 일만 하고 먹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속담을 만들어낸 현상일 것이다.
스페인은 18세기 중엽 카를로스 3세(Carlos Ⅲ, 1776~1788) 치세에, 그러니까 계몽 사상의 훈풍이 불어온 덕에 잠깐 동안 구속이 느슨해졌다. 개혁이 벌어져 군대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게 줄고 많은 장교들이 프리메이슨(계몽주의 정신을 기조로 삼아 1717년 런던에서 결성된 세계적인 민간단체)주의에 매료되었다. 반(反)교권적이고 정치적인 개혁 운동은 불가피하게 자유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자유주의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운 ‘독립 전쟁’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소심한 카를로스 4세(Carlos Ⅳ, 1748~1819)의 정부는 총신 마누엘 데 고도이(Manuel de Godoy)의 부패와 추문으로 일어난 민중 반란과 프랑스 군대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를 계승한 페르난도 7세(Fernando Ⅶ, 1784~1833)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스페인의 귀족 대다수가 점령군 편에 섰다. 이어 마드리드에서 나폴레옹의 장군 뮈라(Joachim Murat)가 주도한 처형 때문에 1808년 ‘5월 2일’ 민중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민중들은 프랑스 기병대에 맞서 맨손으로 거세게 저항했다. ‘나폴레옹의 궤양’으로 불렸던 마드리드 민중의 저항은 근대 최초의 대규모 게릴라전이었는데, 사라고사를 수호하는 전투에서만 6만 명의 스페인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 싸움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을 띤 소수 장교들, 특히 지방 방어위원회에 속한 장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완강하게 저항한 것은 주로 민중이었다.
카를로스 3세
프리메이슨의 상징. 프리메이슨은 가입조건이 매우 까다로운데 종교가 있어야 하고, 21살 이상이어야 하고, 부양 가족이 있어야 하며, 연 수입이 일정 이상 되는 고정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등 가입 조건도 까다롭기 그지없는 데다가 가입비와 연회비가 만만치 않고, 가입한 이후의 메리트도 없어 신규 회원의 부족으로 명맥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카를로스 4세
마누엘 데 고도이
역대 부르봉 왕가의 최악의 군주를 뽑을 때 자기 아버지를 젖히고 단연 1위로 뽑히는 페르난도 7세
요아킴 뮈라. 프랑스의 기병대장. 나폴레옹이 가장 아끼던 원수 가운데 하나였으며, 나폴레옹의 부관으로 스페인에 파견나갔을 때 비어있는 스페인 왕위를 넘보았다. 그러나 뮈라의 음모는 스페인의 반대와 마드리드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
1808년 5월 2일의 마드리드 폭동.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의 맘루크 기병에 맞서 싸우고 있다.
프랑스군에 반기를 들고 몬텔레온 병영에서 시민들과 합류하여 저항한 벨라르드 대위
1812년 중앙 방어위원회가 중간 계급의 자유주의 원칙에 기반을 둔 카디스 헌법을 공표하여 ‘옛 스페인’의 전통적 지배 구조가 공식적으로 붕괴되었다. 많은 도시와 주(州)들이 왕정과 교회가 강요하는 질식할 것 같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페인 연방국가 내의 자치 지역으로 선언했다. 이에 1823년 프랑스 왕 루이 18세는 스페인의 자유주의를 압살할 목적으로 ‘성(聖) 루이의 10만 명의 아들들’이라는 군대를 스페인에 파견했다. 페르난도는 자유주의 성향의 군대를 해체하고 다시 종교 재판소를 도입했다.
카디스 헌법의 선포. 하지만 나중에 복귀한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군을 끌어들여 자유주의자들을 학살하고 헌법을 폐기하였다.
스페인은 19세기에 들어서도 계속해서 자유주의와 전통주의가 갈등을 빚었다. 1833년에 죽은 페르난도 7세의 왕위 계승자는 나이 어린 이자벨 2세(Isabel Ⅱ, 1830~1904)였다. 자유주의 성향의 군대는 이사벨 2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통주의자들은 페르난도의 동생이자 또 다른 국왕 후보였던 돈 카를로스(Don Carlos de Borbon, 1788~1885)를 중심으로 뭉쳤다. 이들을 카를로스파라고 불렀다. 카를로스파의 주요 거점은 피레네 산맥, 특히 나바라의 소토지 소유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종교적 광신주의자였으며 근대적인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833~1840년의 제1차 카를로스파 전쟁에서는 정규군 장교들이 이끈 규모가 거의 1만 명에 이르는 영국군 1개 군단이 자유주의자 편에서 싸웠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 또한 외국의 자원병을 끌어들이지만, 그러나 그때는 영국 지배 집단 내에서 그런 이상주의적 모험에 대한 동정적 태도가 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자벨 2세. 정치적 불안정과 군정으로 얼룩진 통치를 기록했다. 여왕은 더욱 진보적인 체제를 바라는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의문스런 사생활과 정치적 무관심으로 왕실의 역량과 위신을 떨어뜨렸고 결국 1868년 혁명으로 퇴위했다.
돈 카를로스 데 부르봉
19세기 초 중간계급이 다수를 차지했던 스페인 장교 집단에 스며들었던 자유주의 사상은 점차 약해졌다. 자유주의자들은 교회 토지 매각으로 이익을 챙겼고, 점차 반동적인 부르조아로 변모해 갔다. 마드리드 정부는 부패했으며, 장군들은 정부를 전복하는 고약한 취미에 재미를 붙였다. 이때가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 쿠데타)의 시대인데, 이때에 장군들은 자신의 군대를 한 곳에 정렬시켜 놓고 스스로 자신을 국가의 구원자이자 독재관으로 임명하는 내용의 장광설을 토해냈다. 1814년부터 1874년 사이에 37번의 쿠데타가 있었으며, 그중 12번이 성공했다. 여왕 이사벨 2세가 자신의 호위장교들을 상대로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사이 국가는 비틀거리고 점점 빈곤해져 갔다. 여왕은 1868년에 애인 중 1명을 선택하였으나 군대가 승인하지 않자 결국 하야해야 했다. 2년 후 사보이 왕가의 아마데오(Amadeo of Savoy)가 여왕의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왕정에 대한 분노로 격앙해 있던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1873년 2월 아마데오가 사임하고 난 뒤 의회인 코르테스는 국민 투표를 실시해 공화 정부를 수립했다.
사보이 왕가 출신의 아마데오 1세
그렇게 해서 수립된 제1공화국은 군대의 개입으로 곧 무너졌다. 공화국의 연방제 프로그램에는 군대 징집 폐지가 포함되었는데, 그것은 매우 인기 있는 조치였다. 그러나 첫 번째 선거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카를로스파의 반란이 전면적인 내전으로 번지자 정부는 이 중요한 약속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파 반란군의 주력 부대는 바스크 지역의 완고한 카톨릭 신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마드리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분리주의적 야심에 자극받고 있었다. 스페인 국왕들은 전통적으로 바스크 지역의 주(州)에서는 단지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바스크 지역은 국왕의 영지였을 뿐 결코 반도의 다른 지역처럼 중앙의 지배에 예속되어 있지 않았다.
장군들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스페인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그런 생각은 미국에게 패배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마지막 거점인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상실하고 나서 더욱 강해졌다. 장군들은 카스티야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자들이었는데, 피레네 산맥 국경 지역에 자리잡은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독립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들은 연방제에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자치적 정부를 선언하자 주저하지 않고, 이 움직임을 박살내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제1공화국은 불과 몇 달만에 붕괴되었다.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보수정치가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Canovas del Castilo)는 이사벨 2세의 하야 이후 부르봉 왕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군대를 병영으로 돌려보내고 안정된 정부를 만들려고 애썼다. 이 계획은 마르티네스 캄포스(Martinez Campos) 장군이 1874년 말 알폰소 12세를 국왕에 즉위시킴으로써 마침내 실현되었다. 알폰소 12세는 이사벨 2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사관학교 생도일 뿐이었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 1874년 알폰소 12세의 왕정복고를 실현시키고 헌법을 제정하여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화혁명기의 개혁을 대부분 부정하고 보수적인 현실주의를 채택했다.
마르티네스 캄포스
알폰소 12세
반세기 동안 지속된 카노바스 체제에서 교회와 지주들은 힘이 약해졌다. 그들은 어떻게든 세력을 잃지 않으려고 버텼고, 선거는 파렴치한 방식으로 조작되었다. 농민과 소작인들은 지주들이 시키는 대로 투표해야 했고, 그러지 않으면 농사짓고 있는 땅을 내놓아야 했다. 선거 운동은 먼저 카시케(Caciques)라는 정치적 수장들이 무장 깡패 집단을 내세웠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투표용지를 파기하거나 다른 용지로 대체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치,경제적 부패는 마드리드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부패 정도는 이전 세기들에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법정은 마을 재판소에 이르기까지 매수와 조작이 비일비재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의를 보장받는 것은 고사하고 재판을 받을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카시케를 풍자한 그림
군대, 왕정, 교회의 삼위일체는 과거에는 제국을 만들어낸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제국을 무너뜨리는 주역으로 전락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 군대는 동정을 자아낼 정도로 궤멸했고, 그 결과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를 상실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병사들이 먹어야 할 식량과 장비 대부분은 장교들이 이미 팔아먹어서 남아 있지 않았다.
마닐라 해전에서 미 해군에게 전멸당하는 스페인 해군
1898년 쿠바에서 재정복 운동의 비전이 참담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스페인 지배자들은 여전히 근시안적인 자기 만족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국에 집착함으로써 나라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만일 그 사실을 인정하면 귀족 정치, 교회, 군대라는 제도가 뿌리째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항해서 부상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그것은 19세기 초의 자유주의와는 달리 지배 구조에 흡수되지 못했다. 결코 양립할 수 없었던 ‘영원한 스페인’과 새로이 떠오른 정치 운동은 충돌로 발전했고, 그것이 후에 국가를 갈가리 찢어놓는다.
알폰소 13세는 1902년 열 여섯 살에 왕이 되었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너무나 가난해서 20세기 처음 10년 동안에만 전체 인구 1850만 명 중에서 50만 명 이상이 신세계로 이민을 떠나야 했다. 기대 수명은 약 35세로, 15세기 말 페르난도, 이사벨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문맹률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지만 평균 64%에 이르렀다. 활동 인구 가운데 3분의 2가 토지가 생활 기반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지주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 간의 재산권과 갈등 문제만은 아니었다. 500만 명에 이르는 농민들 간에도 지역에 따라 생활 수준과 기술 수준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안달루시아, 에스트레마두라, 라만차에서는 농업이 여전히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었으며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갈리시아, 레온, 카스티야, 카탈루냐, 북쪽 다른 지역에서는 소규모 자영농들이 강한 독립성을 지키며 자신의 땅을 경작하며 살았으며, 레반트의 비옥한 해안 지역은 아마도 유럽에서 집약적인 경작의 가장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알폰소 13세
산업과 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8%에 불과했고, 가내 서비스업을 포함한 서비스업은 그에 약간 못 미쳤다. 스페인의 주요 수출품은 농산물, 그 중에서도 발렌시아 인근 비옥한 해안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었고, 그밖에 약간의 광물 자원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마지막 잔재가 붕괴된 후 거기에 남아 있던 돈이 본국으로 돌아오고, 게다가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투자한 덕분에 은행 붐이 일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스페인의 주요 은행들이 이 시기에 생겨났다.
스페인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지켰다. 이 기간 동안에 농산물과 원료 수출, 산업 생산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고 경제 기적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번영과 더불어 출생율이 급격히 늘었는데, 그 효과는 20년 후인 1930년대 중반에 모습을 드러낸다. 스페인의 수지 균형은 대단히 유리해 국가 보유 금이 극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경제 기적은 안개가 걷히듯 사라졌다. 당시 정부는 보호주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기대치는 높아졌고, 이어진 실업의 증가는 실망과 분노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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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흠 개인적으로 아주 관심이 많은 주제인데 기대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오옷 관심있던 주제였는데 ㅋㅋㅋ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ㅎ
서유럽에서 한덩치 하는 스페인이 왜이리 쇠락했나 궁굼했는데
역시 이유가 있네요..
잘보고가요!
잘읽엇습니다 굉장히 재미있네요.
유럽에서 제일 복잡한 나라같아요. 까딸루냐, 바스티아, 바스크 안달루시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