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오조리 689-2번지, 698-2번지, 699-2번지, 700번지, 714-1번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시설(마을성담)
※오조리의 4·3
오조리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각각 45㎞정도 떨어진 동쪽 중간지역의 해안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는 성산리와 일출봉이 있고, 서쪽에 수산리, 남쪽에 고성 리, 북쪽엔 시흥리가 자리하고 있다. 옛 포구인 엉물가 주변엔 대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식산봉(60m)이 자리해 빼어난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며 탐방객들의 시선을 끄는데 이곳엔 올레2코스가 지나고 있다. 오조리의 특징 중 하나로 해녀들의 뱃물질을 빼놓을 수 없다. 해녀들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물질하는 것을 뱃 물질이라고 하는데 오조리는 주변 다른 마을들과 달리 가까운 바다에 해산물이 많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깊은 먼 바다로 나가야 했던 것이다.
4·3 시기, 오조리에는 상·하동 300여 가호의 주민들이 살았다. 광복 당시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을 운영하던 공회당은 경찰이 주민들을 잡아다 취조, 고문하는 곳으로 변했다. 이 시기에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이 6,7명 정도 되었다. 산에 올랐던 사람은 3명 정도였다.
해방과 4·3을 거치며 마을주민들을 지켜봤던 현금란(1935년생, 여)이 조심스레 당시를 기억했다.
"해방되니까 저녁에 공회당에서 가갸거겨를 가르치는 야학을 운영했어. 내가 이름자나 쓸만 헐 때쯤 4·3이 났지. 이후 공부를 못했어. 경찰이 공회당을 사람들을 끌고와 취조허고 고문허는 장소로 사용했지. 교사였던 고근은 4·3 나기 전에 밀항해서 일본으로 가 조총련 활동을 했어. 그래서 그 사름은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와보지 못했어. 아마, 오조리에서 밀항으로 일본 간 사람이 6~7명은 될 거야. 4·3 때 산에서 활동한 사람도 세 명 정도 있었지. 옛날엔 오조리가 제주도에서 제일 작은 마을이라고 했어. 우리 마을 남자들이 4.3에 죽고, 밀항가다 죽고 허니 남자들이 엇언 집 짓는 것도 어려운 동네였어."
오조리 4·3 일지. 다음은 오조리의 주요 주민학살사건이다.
✦1948년 5월 22일: 5·10선거 이후 무장대가 주민들을 보복살해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강달권(22, 남)을 비롯한 14명(오조리 10명, 종달리 4명)이 부산으로 피신하려 배를 타고 나갔다 배가 전복돼 13명이 사망하고 1명이 살아돌아옴
✦10월 27일: 강두선(18, 남)을 비롯한 강안색(30, 남), 강정도(33, 남), 박태성(17. 남) 박태흥(16, 남), 송태생(26, 남) 6명이 성산포 터진목에서 토벌대에 학살됨
✦11월 1일: 박우창(28, 남)이 함덕 대대본부에서 석방된 후 토벌대에 재연행됐다 성산포 터진목에서 학살됨
✦1949년 1월 2일: 1948년 12월 29일, 2연대 3대대의 서청특별중대가 오조리 주민들이 경비용으로 가지고 있던 다이나마이트를 트집잡아 주민 20여 명을 연행함. 다음날 송인표(49, 남)가 고문치사하고, 다음 해 1월 2일에는 송치배(28, 남, 송인표 아들)를 비롯한 19명이 성산리 우뭇개동산에서 학살됨
✦2월 1일: 강승석(77, 남)과 오상아(68, 여) 2명이 성산포 터진목에서 서청에 학살됨
✦2월 4일: 송덕순(60, 여)이 성산포 터진목에서 학살됨
✦2월 13일: 오영화(32, 여)가 성산포 터진목에서 학살됨
4·3 시기, 오조리에서 발생한 가장 큰 주민학살사건은 다이너마이트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⑤』(59쪽)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948년 12월 29일 성산면 오조리에 갑자기 비상사이렌이 울렸다. 해변마을인 오조리에서, 사이렌 소리는 곧 토벌대의 집합 명령이었다. 주민들은 늘 하던대로 서둘러 공회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예전의 군인들이 아니었다. 9연대와 교체한 2연대 군인들이었다. 그 중에는 낯이 익은 서북청년단원도 있었다. 사설단체원인 서청이 2연대 군인으로 변신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우선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줄 아는 20명 가량의 주민을 골라냈다. 또 집집마다 뒤져 집결하지 않은 사람을 데려와 함께 군주둔지인 성산포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들을 성산리의 한 창고에 가둬 모진 고문을 하다가 나흘만인 1949년 1월 2일 일출봉 아래 속칭 '우뭇개'에서 학살했다. (중략) 오조리에 가장 큰 인명 희생을 몰고 온 이 사건이 다이너마이트에서 비롯됐다 하여 주민들은 이를 '다이너마이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혹은 당시의 표현대로 '던지기약 사건'이라고도 한다.
다이너마이트는 무엇이며, 이것이 왜 학살극의 빌미가 됐는가. 당시 주민들은 일본군이 패전해 돌아가면서 남긴 폭약 '다이너마이트'(당시 표현으로는 ‘던지기약’이라고 함)를 고기잡이에 이용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기잡이하던 중 잘못 폭발하는 바람에 1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고기잡이가 어장을 황폐화한다 하여 경찰과 어업조합이 합동단속반을 편성해 적발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4·3 전부터 다이너마이트를 고기잡이에 이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제주에 주둔했던 9연대는 인민유격대를 방어하기 위해 마을마다 민보단을 꾸렸는데 이 때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새삼스레 이것이 문제가 됐는가. 주민 오종훈 씨는, '불법이긴 했지만 당시엔 고기잡이에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했습니다. 또 4.3이 발발한 후에는 민보단이 보초를 서는 데 사용하라고 해서 초소마다 보관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 군인들이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던 한 사람을 끌고 와 주민들을 집합시킨 후 다이너마이트 관리자를 끌고 갔습니다. 타지역 출신으로 마을에서 멍석이나 짜며 지내던 불쌍한 노인은 제때 집합하지 않았다고 함께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9연대와 2연대가 교체될 때 이에 대한 인계인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가 빚어진 겁니다.' 증언했다." 2연대와 서청은 이 다이너마이트 소지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 목적이라고 판단했다.
사건 4일 전에 군인들과 서청단원들은 오조리 마을 주민들 중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하고 있는 이들을 체포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으로 집합시켰는데 폭발물을 다룰 수 있거나 집합에 늦은 이들도 마구잡이로 체포한다. 이렇게 체포된 이들은 성산국민학교 맞은 편 감자 창고에 감금됐다. 그 중 20여 명의 주민들을 우뭇개동산으로 끌고가 살해했다.(오마이뉴스 2022.11.27.)
현금란도 이 사건에 대해, “사촌 오빠(현세흥)가 폭도한테 잡혀갔다가 살아와서 토벌도 다니고 했는데 결국 서청한테 끌려가서 우뭇개에서 총살당했어요. 현장에서 유일하게 송칩 할머니는 총 맞고도 성산일출봉 절로 기어가서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했죠. 오조리 하르방이 다이나마이트 기술자였는데 그걸 만들어 토벌대를 공격하려 한다고 조작해 마을 사람들을 잡아간 것이에요"라고 증언했다.
당시 희생자는 민보단장이었던 홍성강(42, 남)을 비롯해 구장 고태종(47, 남), 강관선(33, 남), 강희숙(36, 남), 고봉만(미상, 남), 고순현(19, 남, 이명 고순봉), 고회현(26, 남), 김봉효(61, 여), 송균석(27, 남), 송도선(34, 여), 송원진(64, 남), 송춘식(31, 남), 송치배(28, 남), 송태립(65, 남), 오만두(41, 남), 오영보(28, 남), 현서홍(19, 남, 이명 현세홍), 홍평형(36, 남, 이명 홍평영), 오창희(48, 남)의 19명이다.
오조리 4·3성은 주민들이 집집마다 출력해 인근 밭담을 지게로 지어 나르며 쌓았다. 집집마다 전부 출역(出役)에 동원되었다. 축성 후엔 남녀 모두 보초를 서야 했다. 남자들이 무장대가 습격 든 적이 있는 짐수막쪽 지역을 담당해 병문개와 짐수막(논동네), 안카름, 앞동네 2개소 등 군데의 초소를 담당했다. 짐수막 쪽에서 무장대의 습격이 든 적이 있었다. 여자들은 북문과 안카름, 소금막쪽에 보초를 섰는데 이를 위해 여성들은 별도의 훈련도 받았다. 당시 여성들은 성산서국민학교(동남국민학교)에서 숙박을 하면서 훈련을 받았다. 당시 부대장은 표선 사람이었고, 시흥리 김자봉이 훈련대장을 맡았다. 취사는 오조리 출신 4~5명이 맡았다.(개정증보판 4·3유적Ⅱ 서귀포시편)
오조로112 앞이 4·3 당시 집은 없었고 정문(북문)이었으며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쪽 길 따라 이어진 담은 성담은 아니다. 오조리 700번지와 699-2번지 사이에 있는 성담이 동서 방향으로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 약 300m만 남아 있다. 오조로115-1번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일부 성담이 훼손되긴 했으나 그곳을 지나 서쪽으로는 병문동산(689-2번지)까지 남아 있다. 성담의 높이는 1∼3m, 일부 구간은 1.5∼3.5m, 폭 1∼1.5m, 길이 300m 규모로 일부 구간이 훼손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다.(개정증보판 4·3유적Ⅱ 서귀포시편)
강원희(1947년생, 남)가 자신의 집 앞이 당시 정문(북문)으로 지금도 흔적 일부가 남아 있다며, “우리 집이 오조로112인데 당시엔 집은 없었고 초소가 있었다. 바로 이 길이 북문 자리다. 성담이 잘 남아 있었는데 집을 지으면서 많이 허물어졌다. 오조리 700번지의 울타리 담이 성담이다. 마을 쪽 길 따라 이어진 울담은 성담처럼 보이지만 성담이 아니라 나중에 갖다가 쌓은 것이다.
마을쪽 길 따라 이어진 담은 성담은 아니다. 오조리 700번지와 699-2번지 사이에 있는 성담이 동서 방향으로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 약 300m만 남아 있다. 오조로115-1번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일부 성담이 훼손되긴 했으나 그곳을 지나 서쪽으로는 병문동산(689-2번지)까지 남아 있다. 성담의 높이는 1∼3m, 일부 구간은 1.5∼3.5m, 폭 1∼1.5m, 길이 300m 규모로 일부 구간이 훼손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다.(개정증보판 제주4·3유적Ⅱ 서귀포시편)
마을 북쪽 길가에서 보이는 곳에 100m 정도의 성담이 남아 있다. 높이는 2∼3m 정도인데 가정집과 경작지의 경계선으로 이용되고 있는 부분이다. 마을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1948년 12월경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 성은 마을을 빙 둘러싸는 모양이었고 서쪽, 남쪽, 북쪽으로 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은 곳은 북쪽 성벽뿐이다.(2002년 4월 13일 답사)
2020년 현재 정부가 인정한 오조리 출신 희생자는 49(남 42, 여7)명이다.(제주4·3유적Ⅱ 서귀포시편)
《작성 2008.04.09. 보완 202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