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단번 속죄, 완전한 속죄, 영원한 속죄(히 10:1-18)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것인가?
기독교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인 죄의 문제라고 한다면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된 것은 사단의 거짓된 술수와 사람들의 오해로 말미암아 빚어진 결과이다.
세례(침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의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회개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공의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을 거부하고 가출한 아들이 아버지와 그 사랑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즉 그릇된 길로 가다가 그 길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회개"라는 말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말하기를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참된 회개가 아니요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나열하며 고백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종교인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 바른 양심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들이다.
진정한 참된 회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 죄가 대속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였는데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그가 진실로 뉘우치며 잘못을 깨닫고 있고, 한편 그의 범죄가 실수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는 것을 경찰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풀려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범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판사가 그를 재판할 때, 그가 실수한 것과 그 일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며 반성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풀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판사는 법에 따라 재판을 하며 그 대가를 갚도록 판결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경찰이나 판사가 그를 미워하거나 편견을 갖고 대하기 때문에 그가 정죄받아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범죄가 그를 감옥으로 끌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다.
부모가 그 자식이 불행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듯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시기를 원하지 않지만 인간들의 죄가 그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는가?
먼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펴보자.
구약 시대(히브리서 10:1-4)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다(히브리서 10:1).
그러므로 해마다 늘 드려지던 같은 제사들로는 정결케 되기를 원하던 사람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었다.
만약에 구약 시대에 율법을 따라서 드려졌던 제사들이 제물을 드리는 자들을 "단번에 정결케" 할 수 있었다면 드리는 일이 그쳐졌을 것이다(히브리서 10:2).
그러나 구약의 희생 제사는 이미 지은 과거의 죄에 국한하였기 때문에 범한 죄를 위해서 속죄제사를 드려도 또다시 범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그 제사는 끝이 없는 반복된 제사였다.
죄에 대한 속죄제사를 드린 후에 죄에 대한 요구가 다 갚아졌다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완전히 사라졌으므로 더 이상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제사가 이미 지은 과거의 죄에 국한된 온전하지 못한 제사였기 때문에 오히려 죄가 생각되었으며 죄를 깨닫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이유를 가리켜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브리서 10:4)고 하였다.
그 제사들이 해마다 반복하여 드려졌던 이유가 여기 있으니 곧 짐승의 피가 죄를 없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것이 반복해서 드려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마다 짐승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
(2) 그 제사는 반복되는 같은 제사
(3)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케 할 수 없다.
(4) 짐승의 피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 그 제사는 단번에 영원히 정결케 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가 구약 시대처럼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곧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나아와 자기의 생명을 대신해서 짐승의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사함을 얻고자 하였던 방법을 적용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와 자복을 하여 더욱 성실하게 교회 생활을 하면 그 죄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그림자였으며 모형이었으며 예표였다.
실체를 깨닫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시적으로 허락하셨던 그림자였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만 갚을 수 있는데 마치 빚쟁이가 그 빚을 갚아야만 자유스럽게 되는 것과 같다.
만약 1퍼센트라도 남았다면 그는 아직도 빚쟁이를 면치 못한 것이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100퍼센트 다 갚기까지는 역시 빚쟁이이다.
그는 그 남은 빚에 대해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
그가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 남은 빚을 완전히 갚지 않으면 안된다.
빚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져야 하듯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하신 말씀대로 죄를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대가가 치러지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라고 하셨다.
생명은 피요 피는 죽음이다. 피는 곧 생명과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생명의 원리이며 죄사함의 원리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라고 하였다.
피만이 유일하게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수단이며 생명을 속할 수 있다.
그러나,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드려졌던 구약의 제사는 일시적인 것이며 제한적이며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체인 온전케 되신 제물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미 상고한 대로 피만이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열심과 정성과 충성과 헌신과 봉사로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코자 하며, 특히 "회개"라는 것을 잘못 이해함으로 지금까지 지은 죄를 반복하여 고백함으로 죄를 용서함 받으려고 하는 시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방법을 불신하는 것이며, 자기 의를 세우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을 때 그들은 그들의 수치를 발견하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그들의 치마를 만들어 그들의 수치를 가리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치마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햇볕이 뜨거워지자 그들의 치마는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뭇잎은 곧 말라서 부서졌으며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또 다시 치마를 만들어 입어야만 하였으며 그런 일은 반복되었다.
그들의 치마는 그들의 수치를 온전하게 가려 주지 못했으며,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부분적이었고, 헛된 수고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결과요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지 아니하는 증거이다.
"회개"라는 것을 동일한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복해서 용서를 비는 행위는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반복하여 만들어 입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인간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아무리 그럴듯하게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수치를 가릴 수는 없다.
해가 떠오르고 햇볕이 뜨거워지면 그 치마는 말라서 부서지고 쓸모 없게 되어버린다.
그들의 수치를 일시적으로 가려주는 것은 옳은 방법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룩하시고 예비하신 대속사역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이 무화과나무 잎의 치마는 헛된 수고요 쓸모 없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 3:21)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짐승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
가죽옷은 햇볕에 뜨거워지거나 바람이 불어도 부서지거나 허물어질 수 없는 안전한 옷이다.
이 옷은 외부의 어떤 환경과도 관계없이 그들의 수치를 완전하게 덮어 주므로 다시 만들 필요가 없는 옷이었다.
이 옷은 단번에 그들의 수치를 영원히 보이지 않게 가려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죄의 문제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로서 단번에 정결케 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된 행위에 대하여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고 하였다.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의 공로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판단과 방식대로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속의 방법으로부터 멀어졌으며, 특히 그것이 더 많은 죄를 짓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하신 영원한 속죄를 알고는 있지만 믿지 못한데서 온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따라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셨으며 율법의 요구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에 율법은 그 어떤 것도 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요구할 것이 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가령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어떤 청년이 그 빚 때문에 독촉을 받으므로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있었던 그의 아버지께서 그 빚을 모두 갚아 주시므로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께서 다 갚으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므로 계속해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며,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지쳐 쓰러졌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빚을 모두 갚아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며 한편 아버지의 소원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세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아버지가 그의 빚을 다 갚아 주셨는데 그는 계속해서 빚을 갚아 달라고 아버지께 요청을 한다면 이미 갚았다고 하는 아버지의 말씀과 사랑을 불신하는 것이며, 조금 심한 표현이지만 아마도 당신은 이 사람을 정신병자와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점은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를 오늘날 그대로 적용시키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공로를 원죄만 대속하였다거나 이미 지은 과거의 죄에만 해당된다고 함으로 앞으로 지을 죄는 회개하여야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에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런 방법으로 죄가 용서된다면 회개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하는데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반복해서 못박혀 죽음을 당해야 하며 그 일은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렸던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 9:25,26)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대제사장이 해마다 속죄를 위해서 드렸던 제사와 같지 아니하였다.
그 제사는 해마다 드려야만 했지만 (참고 - 성막의 지성소에는 일반 제사장들은 들어갈 수 없으며 대제사장만 해마다 1년 1차씩 돌아오는 속죄일에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를 마치고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1회씩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의 법궤 위 즉,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 또는 시은소에 피를 뿌려야만 1년간 범했던 백성들의 죄가 사해져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셨다.
이미 단번에 드려진 제사를 반복해서 드려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용서를 구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평가절하시켜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이 모든 죄의 완전한 죄사함을 위해서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미 용서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 대가가 지불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였을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반복하여 회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치 매달 할부금을 납부하는 것과 같이 외상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속죄는 단번에 (참고 - 완전히) 영원히 이루어졌다.
신약 시대(히브리서 10:5-18)
구약 시대에 드려졌던 짐승의 제사는 죄를 영원히 없게 하는 완전한 제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브리서 10:5-7)라고 하였다.
죄를 영원히 없게 하는 완전한 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요(히브리서 10:8) 온전치 못한 제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루마리 책, 곧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어린양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셨던 것이다.
구약 시대의 수많은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루마리 책(구약 성경)에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위해서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던가?
구약 시대의 모든 제사와 희생은 그리스도의 완전 대속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요 그림자요 예표였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라고 함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서 예언했었다.
만약 율법으로 드리는 희생 제사가 온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성취되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고난의 주로서 오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따라 드려졌던 희생 제사가 온전치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셔야만 하셨다.
그러므로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것은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히브리서 10:9)이었다.
그 첫 것, 곧 폐하여진 것은
(1) 염소와 송아지의 제사요
(2)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며
(3) 불완전한 제사요
(4) 죄를 없이 하지 못한 제사이다.
그러나 둘째 것 곧 세움을 입은 것은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요
(2) 단번에 드려진 제사며
(3) 온전한 제사요
(4) 죄를 없게 하는 제사이다.
그러면, 그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였는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첫 것인 짐승으로 드려졌던 희생 제사를 폐하시고, 둘째 것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려졌던 희생 제사를 세우셨다. 첫 것과 둘째 것은 대조되고 있다.
하나는 폐하고 다른 하나는 세우신 것이다. 폐하신 것은 온전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세우신 것은 온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고 하셨다.
"거룩함을 얻었노라"라는 말은 이미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이며, 지금도 거룩한 상태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서 된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희생이 구약의 제사와 같다면 일시적으로 거룩함을 얻었다고 해도 그 거룩함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대속되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상죄란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앞으로 세상이 끝날 때까지의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가리킨다. 골로새서 2장 13절에서는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하였다. 모든 죄란 과거의 죄만을 말하거나, 아담과 하와의 죄 곧 원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요한일서 2장 2절에서는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거룩함을 얻는 것이다.
다음은 구약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를 대조시켜 봄으로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자.
히브리서 10장 11절의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라는 말씀을 보면 구약의 제사장의 직무의 특성을 "매일 서서 섬기며"라고 규정한다.
성막이나 성전에는 의자가 없다. 그곳은 휴식의 장소가 아니라 섬기는 장소다.
성막의 바닥은 어디에 있던지 흙이 있는 그대로다. 그곳에는 쉴 곳이 없었다.
아니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계속해서 제사가 필요했었는데 이는 그들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피곤한 일이었으며, 힘든 일이었고, 끝이 없는 일이었다.
그 제사는 종식될 수 없는 제사였던 것이다.
또한 "자주 같은 제사를 드렸다." 그 제사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백성들이 시시로 죄를 범하였으며 죄악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반복해서 자주 같은 제사를 드렸지만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라고 하였다.
그렇게 수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죄를 없게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 제사로 완전한 대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이 구약 제사의 특징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이 이루어진 은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로 제사를 드리던 구약 시대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회개와 선행과 열심과 헌신으로 죄를 용서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죄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모든 죄의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매일 기도 때마다 동일한 죄를 열거하면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바라보며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것이다.
이것이 죄사함을 믿고 깨달은 자의 자세다.
구약 제사와 대조시키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사는 이 사실을 더욱 자세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브리서 10:12)라는 말씀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하나) 제사"를 드리셨다. 이 일은 약 1900여년 전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베드로 사도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베드로전서 2:24)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도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고린도후서 5:15)이라고 하였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단번에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
만약 그 십자가의 죽음이 일부분의 죄를 대속하였다면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위해서 반복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완수하시고 하늘 성소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대속의 일을 위해서 더이상 하셔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대속되어야 할 죄가 더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는 여전히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다.
구약의 제사는;
(1) 서서
(2)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림(반복된 제사)
(3) 언제든지 죄를 없이 하지 못함.
그리스도의 제사는;
(1) 앉아 계심
(2) 한 영원한 제사
(3) 죄를 없이 하심(히브리서 9:26)
그러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는 어떤 것인가?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라고 하셨다.
한 제물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 것이다.
이 제사는 일시적인 것이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며 온전한 것이다.
만약 독자가 자신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갚아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죄의 대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죄를 완전히 대속하였다는 사실을 그대로 자신에게 적용시킨다면,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온전케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거룩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다.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누가 이 선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 이신데 누가 정죄하겠는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누가 그분의 영원 속죄의 죽으심을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히브리서 10장 15-18절에는 성령의 증거하심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성취하신 것은 성령께서도 증거하시는 바이다.
성령께서는 구약의 제사와 같이 행위로서 죄를 대속하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대속하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대속된 것을 마음에 믿는 것과 관련시키고 있다.
성령의 증거는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17)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단코 용서하시지 아니하시며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죄의 형벌 가운데서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마태복음 5:26) 저희 죄와 불법을 기억지 아니하시겠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 죄와 불법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빚을 진 사람을 그 빚을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빚을 받을 사람은 결코 잊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반드시 찾으시는데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은 이미 그 죄에 대한 빚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에 대한 대가를 기억지 아니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용서되었고 그 빚이 갚아졌는데도 그 빚을 갚아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말이다.
물건을 사고 그 값을 100퍼센트 지불하였는데 또 다시 물건값을 요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정에서 흔히 있는 일로서 공과금을 납부한지 수 개월 뒤에 또 다시 공과금 체납 고지서를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에 순순히 이미 납부한 공과금을 또 납부할 사람이 있겠는가?
집안을 다 뒤져서라도 영수증을 찾아 그 증거를 제시하고 큰소리 칠 것이다.
죄사함의 권세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그런데도 "구원받으셨습니까?" 혹은 "거듭나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이단이라든가 겸손한 체 하면서 "아직 부족해서요…", "이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불신함으로 오는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7)라고 하셨다.
초대 교회 곧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들도 은혜로 죄사함을 받으며 우리도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그들은 죄사함 받은 것을 이미 과거의 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셨는데도 자신은 "부족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로마서 4:25).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사소한 죄가 있어도 불가능하다.
모든 죄를 다 탕감받지 않았다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운전 면허 시험을 보는 사람이 80점을 맞아야 합격하는데 불합격된 이유를 "딱 하나 틀렸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데, 하나 틀려서 불합격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10개 틀린 것이나 모두 틀린 것이나 불합격은 다 같은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613개의 율법을 100퍼센트 다 지켜야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
만약 하나라도 어기면 다 지키지 못한 것이 된다(갈라디아서 3:10, 5:3; 야고보서 2:10).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들은 율법을 직접 받았던 자들이다.
또한 약속의 민족으로서 그들의 습관과 일상생활은 율법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율법을 다 지키므로 온전하게 될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마치 게가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해도 앞으로나 뒤로 가지 못하고 옆으로 갈 수밖에 없듯이 모든 사람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게가 옆으로 가도록 태어났듯이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인간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죄의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서는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
혹 인간의 힘으로 어느 정도의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다.
인간의 의라는 것은 마치 더러운 옷, 누더기 옷, 나뭇잎으로 만든 옷과 같다(이사야 64:6).
그러므로 완전 속죄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세상 죄(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죄를 없게 하셨다(요한복음 1:29; 히브리서 9:26).
이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들의 죄가 대속된 증거는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대속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선언하신 말씀과 반대되는 입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죄를 사함받았느냐의 여부와 우리의 구원은 관계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죄가 완전히 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이미 성취하신 것을 반복하여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을 경홀히 여기며 그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또 다시 증거하시기를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0:18)라고 하셨다.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이미 드리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며 대조되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르치며 믿고 적용시키는 바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마치 월부금을 붓듯이, 적금을 넣듯이, 그리고 매달마다 일정한 금액을 물건을 산 대가로 지불하듯이 죄를 용서함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치시고 제시하신 사죄의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서 이미 우리 자신들의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위해서 제사드릴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못박고 있다.
현명한 독자는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완전 속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죄사함에 대한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에는 "단번 속죄"에 대해서 여러 번 강조하였다.
7장 27절 - "저(예수 그리스도)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9장 12절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예수 그리스도)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장 26절 - "그리하면 그(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예수 그리스도)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9장 28절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10장 2절 -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장 10절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죄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단번에" 대속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의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십자가의 대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라고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 그 무엇도 더할 수 없이 완전하게 이루셨음을 선포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미래의 죄, 앞으로 지을 죄는 아직 대속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런 말과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소리일 것이다.
우리가 믿는 이 도(道)를 하나님께서 유다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 3절)라고 하였다. 믿음의 도는 "단번에" 주신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29)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대속 곧 죄사함이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죄를 사함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죄사함은 취소되거나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로 완벽하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죄에 대한 완전한 참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7).
"죄사함을 받았으니."
당신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사해졌다.
"죄사함을 받았으니!"
할렐루야! 이제 당신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셨을 것이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