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성지순례 1일차
(2023.3.16)
3차 순례는 제주에서 인천으로 차를 싣고 배를 타고 가려하였지만
배 수리와 점검 관계로 승객은 탈 수 없다 했다.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 내려 차를 찾으로 인천여객터미널로 가는 불편함 때문에
렌트를 하려고 하였는데, 사위 차를 일주일 간 빌려준다고 하여
사위차로 순례를 하기로 하였다.
제주에서 8시 45분 비행기를 타기위해 차를 면사무소 주차장에 주차하고
제주공항가는 직행버스 첫차 (6시 34분)를 막 타려는 순간
도장을 받아야하는 성지순례 책자를 집에 놓고 온 것이 생각나서 타지않음.
시간을 보니(공항까지 1시간 걸림) 다음 직행버스는 7시 8분이었음.
아내는 우리 차를 공항근처에 주차하자고 했으나
부칠 짐도 없었기에 위태롭지만 다음 직행버스를 타자고 우겼다.
정상으로 도착하면 8시 8분 도착이기에 25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가 밀려서 10분 늦은 8시 18분에 도착했다.
서둘러 탑승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하니 우리 비행기가
15분 늦게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아슬아슬하게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한 자매를 만났는데 아내에게 필요한 병원정보를 알려주었다.
유용한 정보였다. 지나고보니 마음은 졸였지만 집에 물건을 두고와
다음 차를 탄 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처럼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그분을 찬미하는 순간이었다.
김포공항 → 행주성당 → 김포성당 →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 → 갑곶순교 성지
7.1Km 12.6Km 36.1Km 12.8Km
1. 행주성당
한강 이북 최초의 한옥 성당
110년의 뿌리 깊은 역사를 간직한 행주 본당의 복음화 여정은
행주 공소에서 시작됐다.
1899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두세 신부가 공소를 세웠다.
1909년 5월 약현 본당에서 분리돼 본당으로 승격해
김원영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행주 성당은 서울 명동. 약현 성당에 이어
서울과 경기 북부권에서 세 번째로 세워졌다.
2010년 2월 등록문화재 제 455호로 지정됐다.
성당 건물은 근대 초기의 목조 한옥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화산성당에 이어 두 번째이다.
특별 전대사 성모 순례지
성모승천을 주보로 모신 행주 성당은 2016년 1월 25일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를 맺고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해 같은 해 10월 26일 대구 대교구 성모당을 모델로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동굴과 같은 모양의 성모당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2. 김포성당
1946년 11월 서울대교구 행주 본당(현 의정부교구)에서 분리되어
매괴(로사리오)의 성모를 주보로 설립된 김포 성당은 현 인천교구에서는
답동 주교좌성당과 소사 성당에 이은 세 번째 본당이다.
새 성당을 지으면서 옛 석조 성당에 있던 종을 그대로 새 성당 종탑에 옮겨와
옛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김포 성당만이 지닌 특별한 매력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전야미사 때와 새로운 한해를 맞는 12월 31일 자정에는
신자들이 직접 종을 울린다.
문화재청은 2013년 4월 18일
옛 석조 성당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하였다.
옛 석조 성당이 김포 · 강화 지역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 의장 특징(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과
화강석을 쌓아 올리는 건축 방식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그 건축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결과였다.
사진속에서 신원식 신부가 지고 가는 상량보는 지금까지 잘 보관되어 있고,
이밖에도 성당 제대에 성 빅토리노와 성 넥다리오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3.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우리 교회에는 적게는 만 명, 많게는 삼만 명의 순교자가 계시지만
우리가 이름 정도라도 알고 있는 순교자는 약 1,000여 명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수많은 신앙 선조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에 인천교구에서는 2002년 강화도에 '한국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하여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께 봉헌하였다.
현양 동산을 ‘삶의 성지’라고 말한다.
“순교 성지는 아니다. 엄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찾아와 기도하고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성지를 만들고 싶었다.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오르다 보면 무명 순교자들의 위로와 격려를 느낄 것이다.
그들은 신앙 불모지를 복음의 밭으로 일구느라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는가.”
4. 갑곶 순교성지
강화 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이에 이은 병인박해 때이다.
어느 박해보다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던
병인년의 교난을 야기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이 강화도이다.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강화대교 서쪽 끝에 서 있는
갑곶돈대(甲串墩坮, 사적 제306호)에서 일기 시작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박해를 받게 되었다.
갑곶 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함대를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이 1866년 10월
순무영(巡撫營)에 넘겨져 양화진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에는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박순집(朴順集)의 형 박 서방,
50세 된 조참봉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강화에서 순교하였으며,
1870년에는 통진 출신 권 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또한 1871년 신미양요(申未洋擾) 때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강화에 살던 천주교 신자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하였다.
5. 진무영 순교 성지
진무영(鎭撫營)은 숙종 4년(1678년) 강화도와
주변 지역의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軍營)이었다.
이러한 방어 체제를 구축한 이유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병인양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던 신자들을
총융진(總戎陣)이 있던 양화진에서 처형하도록 했다.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오늘날에는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진무영에서도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였고, 어떠한 죄목으로 처형되었을까?
진무영의 순교자들
1868년 5월(음) 장치선(張致善) · 최영준(崔英俊) 등이
진무영에서 효수(梟首)되었다.
진무영으로 보내 처형한 이유는
강화도의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서 처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양화진과 같이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강화도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진무영 순교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순교하였다.
진무영 성지가 조성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2004년 강화 본당은 성당 구내에 성지를 조성하고
9월 15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번 3차 순례여행은 서울부근을 순례하기에
가능한 많은 친지와 지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첫날은 성지 5곳만 방문하고 형님, 형수님과 댁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4시 경에 만나 설렁탕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2시간 가량 머물렀다.
제주 집에서 뜯어간 약간의 두릅, 방풍나물, 머위, 달래, 쑥갓을 전달하자
형님이 여행중에 먹으라고 간식을 직접사서 한 보따리를 주셨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님댁에서 자라고 하셨지만, 형수님도 힘들고 불편할 것 같아
10여분 떨어진 모텔에서 묵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핸드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와 주차된 차를 살펴보니 의자옆 빈 공간에 떨어져 있었다.
출발부터 여러가지 실수로 가슴졸임의 연속이었다.
숙소는 이제까지 잔 모텔 중에서 제일 좋았다.
가격도 6만원으로 저렴하고 시설도 깨끗하고 침대도 더불, 싱글 2개가 있었다.
샤워실, 사우나실 욕탕등이 있어 고단한 하루를 푹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