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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10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본문은 야곱이 자기 형 에서를 만나서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건네주는 장면입니다.
1. 본문 1-2절은
“①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 지라 그 자식 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②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입니다.
야곱은 자기 형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에서가 직접 접근하자 야곱의 공포는 새삼스레 살아나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활기찬 용사처럼 이 투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위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불안이나 공포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 에서는 잔혹하며 전처럼 그를 증오할 이유가 여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서가 그의 아비 이삭의 집을 떠나 제 마음대로 생활한 다음부터 한결 온화해졌을 것 같은 가능성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결과가 미심쩍고 위험도가 큰 일이기 때문에 앞에서 묘사한 순서대로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적대행위를 시도하는 경우 온 종족의 멸망을 피하고 일부만이라도 도주할 시간적 여유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곱이 무질서하게 처리한 것처럼 보이는 또 한가지 일은 그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라헬과 그 아들 요셉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축복의 알맹이는 실제로 유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 관한 야곱의 이런 불찰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계시되지 않았고 사실 그의 임종 직전까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갑자기 말씀의 증인과 전령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야곱이 라헬에게 지나치게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야곱이 가족 일부나마 보존하려는 열망에서 우리보다 앞에 나가며 ‘사태가 여차직하면 자신을 희생물로 내놓는 것도 불사한다’ 는 이런 정신은 참으로 혁혁한 용기를 가진 증거입니다. 물론 이런 의도에 권위를 부여하고 길잡이가 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이 만약 천상 생활에 대한 확신과 기대의 뒷받침이 없었더라면 이처럼 용감하게 죽음을 맞으러 나아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식을 위해 생명을 위험에 드러내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 야곱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달랐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깊이 응고되어 있어서 그는 땅을 무시하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반면 육신의 애착으로 정도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습니다. 거룩한 조상들의 신앙이 모든 면에서 완전히 순수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쪽 저쪽으로 벗어나기 쉬웠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언제나 훨씬 우세하여 육신의 연약함이 그들의 의도를 이탈하지 않게 하셨고 그들로 하여금 제 길을 고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도 자신을 완전히 순수한 자로 생각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의심해야 할 필요성이 아주 큽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올바로 행동하려고 목적하기 때문입니다.
또 육신에는 언제나 우리의 거룩한 목적이 뒤섞여 있으며 많은 과오와 부패한 것이 우리에게 슬그머니 기어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자하게 다루셔서 이런 종류의 잘못은 우리 잘못으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2. 본문 3절은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입니다.
야곱의 이런 행동은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동방 사람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식에 탐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이 단지 자기 형을 경배하기 위해 이렇게 행한 것처럼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일면으로는 감사를 드리기 위해 또 다른 일면으로는 자기 형의 원한을 호의로 바꾸어 주시도록 탄원하기 위해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형에게 가까이 나아가기 전에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 형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존경이나 경배의 표시를 나타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했듯이 이 경배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야곱이 자신을 낮춤으로 형의 난폭함을 진정시키기 위한 한 사람의 간원자로 나아갔다는 사실과 상치하지 않습니다. 만일 야곱의 이런 태도로 인하여 장자권의 품위가 떨어졌다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성자 야곱은 신앙의 눈으로 보다 높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적당한 시기가 되면 축복의 효과가 나타날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땅 밑에서 썩고 있는 한 알의 씨앗과 같이 행동합니다. 비록 야곱이 가문을 다스릴 권세는 빼앗기고 자기 형의 발 앞에 초라하게 엎드려 있지만 자기 장자권 만큼은 확보된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잠재적인 권리에 만족합니다. 그는 명예와 재물을 초개처럼 여기고 형 앞에서 하위자로 간주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3. 본문 4절은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입니다.
에서가 예상 밖에 친절과 자비로 야곱을 맞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계셔서 자신이 원하실 때면 언제든지 그들의 완악함도 연화시키시며 그들의 잔학함도 경감시키신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맹수를 길들일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순화시키신다는 것을 증명하십니다. 아울러 자기 종인 야곱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것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대적들의 위협이 우리를 경악시킬 때면 이 신성한 닻에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 하셔서 잔인한 마음들을 언제나 인간적인 정에 기울도록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분노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자기 권능으로 그들을 억제하셔서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정당하다면 그분께서는 쉽사리 그 잔인한 마음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유순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에서가 야곱에게 그처럼 유순하게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잔인성이 안에 갇혀 있을 동안 인간적인 감정이 일시적으로 피어 올랐으리라는 생각도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애굽인들이 일시적으로 인정을 베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읽습니다. 그들은 전보다 선해지지도 않았으면서 인정을 베풀었고 그런 뒤 곧 그들의 광란은 다시 폭발하였습니다.
우리는 에서의 악한 의도도 하나님의 속박 하에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감동을 받아 형제의 우애를 품게 되었습니다. 타락자 같이 순탄하게 통하진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규제하는 만큼은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타락한 인간들이 단 한가지의 보통 살육에서 시작하여 만물을 다 그 살육에 뒤섞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 보존을 위해서 극히 필요합니다. 형제처럼 서로의 자비심을 진지하게 개발할 만큼 양자의 영에 지배받는 자들은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서로를 아끼며 서로의 멸망을 향해 저돌저그로 돌진하지 않는 것은 인류 보존을 위해 감시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신실한 백성의 생명이 더 귀중한 까닭에 그분께서는 그들을 각별히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종 야곱을 위해 에서의 표독한 마음을 온화하게 가라 앉히셨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4. 본문 5절은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입니다.
모세는 형제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눈물과 포응으로써 자기 우애를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축하하려는 심정에서 동생의 자녀에 대해 묻습니다. 야곱의 대답에는 경건이 풍길 뿐만 아니라 겸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많은 자손을 자기에게 주셨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태의 열매가 하나님의 상급이요, 선물(시127:3) 이라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식이 저절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짐승들이 많이 낳는 새끼도 하나님의 선물인 터에 그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들은 그 자녀들을 인해 하나님의 독특하신 친절을 깊이 깨닫고 송축하여야 합니다. 야곱은 자신을 형의 종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겸손의 언사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세상 이득이나 장자권 명예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정해진 계시의 시기까지 하나님의 감추인 은혜 만해도 그에게 아주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야곱의 선례를 따라 이 땅에 체류하는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실질적인 삶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가 인생살이를 사망의 그늘에 둘러싸인 지루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형편은 어느 모로 보나 비참하고 저주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복되다고 선언하십니다.
5. 본문 6-7절은
“⑥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⑦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입니다.
야곱의 아내들은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귀양살이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죽음의 두려움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에서 앞에 부복합니다. 그들에게도 이 시련이 매우 가혹하였습니다. 또한 성자 야곱의 마음을 아주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이와 같은 복종심이 이렇게 시험받는 것은 정당하였습니다. 이는 그로 하여금 우리 모두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욱이 성령께서는 여기서 우리 앞에 하나의 거울을 두십니다.
우리는 이로써 세상에 나타나는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는 신적 은총의 표징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속된 사람 앞에서 부당한 멸시를 받고 엎드려 있는 그에게서 우리는 위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형에게 은총을 입어 자기가 상속주가 된 땅의 입주를 허락 받기만 한다면 대우를 잘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는 교회의 영광이 더러운 휘장에 뒤덮어 악인에게 조소의 대상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끈기 있기 그것을 참아 나아가야 합니다.
6. 본문 8-9절은
“⑧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⑨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입니다.
에서는 전혀 모르는 자처럼 묻고 있지는 않습니다. 에서는 수소와 약대와 나귀와 다른 가축이 예물로 자기에게 헌납되었다는 것을 종들에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묻는 것은 그 선물을 거절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으레 전혀 모르는 것을 묻듯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절박합니다. 그는 자기 형 에서가 그 선물을 받을 마음이 생길 때까지 쉬지 않고 권합니다. 예물의 열납은 화해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형을 설득할 목적으로 선물을 거절하지 않으면 그것은 큰 친절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아낌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할 수 있는 선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달갑게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자를 즐겨 공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 형을 보고 마치 하나님이나 천사를 뵌 듯 기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말로써 자기가 진심으로 형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존경하기도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타락자와 비교함으로써 하나님께 잘못을 행하는 듯이 보입니다. 더욱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선택권이 자기에게 주어졌더라면 그는 자기 형과의 만남을 피하는 것보다 더 열렬히 바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매듭은 쉽사리 풀립니다. 무엇이든 썩 훌륭한 것은 신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히브리인 사이에 익숙한 언어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서도 이처럼 확실히 변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모호한 표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의 친절하고 우애있는 영접에 마치 하나님이나 천사로 본 듯 기쁨을 감출 수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어떤 임재의 표징을 보여 주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꾸며서 말하거나 마음에 있는 것을 가장하여 달리 표현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모든 증오가 완전히 사라져서 에서가 형으로서 대해 주기만 한다면 형에게 대한 모든 도리를 다 하려는 것이 그의 주된 소원이었습니다.
7. 본문 10절은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입니다.
우리는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라고 할 때 이 명사는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수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나는 이 예물로써 형님께 대한 나의 호의를 증명하려고 하나이다’ 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만일 수동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지목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야곱은 마치 ‘나는 여호와께서 자기 은혜로 내게 주신 것들을 아낌없이 형님께 나누어 드립니다. 이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에 형님도 동참하게 하려는 내 뜻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한 마디 말을 고집하지 않기 위해 즉시 자기가 소유하는 것은 모두 자기 수고나 근면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부언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런 설득에 의해서 자기 형으로 하여금 선물을 받도록 유도합니다.
그는 마치 ‘여호와께서 내게 풍부한 것으로 부어주셨으므로 그 중 얼마를 드린다 해도 내게는 아무 손실이 없지만 형님께는 그것으로도 넘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비록 현재 상황에 이끌려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치하하는 고백도 숨김없이 내놓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는 거의 같은 말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소유하는 것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자는 극소수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더 큰 몫은 자기 자신이 근면했던 결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은총에서 흘러나온다고 확신하는 자는 백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날 때부터 이런 의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배은망덕으로 말미암아 그 점을 지워버립니다. 야곱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삶이었는지는 이미 설명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지극히 큰 고난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의 자비만 치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