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올 데는 없지만 누군가가 소식을 보내 주기를 바라며
저녁 먹기 전에 문자 온 게 없는지 전화기를 쳐다 본다.
은근히 바라던 메시지가 와 있다.
" 아빠 ㅇ월 ㅇ일이 생신이시네요.
ㅇ일에, 우리 집에서 밥 한 끼 먹고 하루 주무시면 어떠세요?"
"생일이 대수가! 날짜가 많이 남았네
천천히 생각해 보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제 말대로. 하죠 퇴근하면서 모시러 가께요~"
답을 안 하니까
" 아빠. 이거 보시면 전화 주세요"
" 봄 도다리가 있나"
"있을 거구만. 횟집에. 한번 물어 보께요"
나도 이제 배짱이다. 혼자 살은 세월이 얼마인데 그깟 지 생일 하루 혼자서 보낼 수 있는 내공은 충분히 쌓여있다.
그런데 딸들이 마음 아파할지도 모르겠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딸 집에 가서 저녁 잘 먹고 나니 최서방이 고구마 빼대기를 가져온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 가져왔다.
마누라가 있을 때 내 생일상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인
두부조림이 항상 놓여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마누라가 운전하는 새 차로 드라이브를 즐기며 출퇴근하는 내 평생의 최고의 행복한 시절이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무슨 그루터기가 있어야지싶었던 나날에 비하면…여간 마음 뿌듯해 오는 게 아니었다.
마음이 설렜고 황홀감에 젖어 있는 이 행복이 내게 過濫 하다는 생각에서 때때로 왠지 불안하기도 했다.
행복을 많이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인지, 호사다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좋은 일에 익숙해지지 못한 혼란 같은 것인지, 인생을 겸허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주고서 빼앗아가는 기억'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활짝 핀 샛노란 개나리가 피어있는 출근길 '기장-반송 지방로' 오르막에서 내려다 본 차 씨 집성촌
은 항상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이 집성촌 최고 어른을 만난 적이 있다. 51회 선배 황ㅇㅇ 지사장과 함께였다,지사장이 고리 본부 행정실장 일 때
이 어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울산 지점장으로 영전해 와서 부임 인사 차 함께 가자고 해서 갔다.
그때 나누었던 연금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내가 죽어 면 네 국민연금은 포기하고 내 연금을 받는 게 이익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이 틔어 나왔다
마누라는 "지금 무슨 소리 하느냐"라고 하는 목소리에 불만이 스며들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손을 핸들에서 떼고 " 아니 전에는
내가 죽어 면 곱게 묻어주고 당신도 죽겠다"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사랑
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거 안전운전에 지장이 있겠다 싶어 끽소리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내 옷을 한 벌 사 주겠다 하여 백화점에 갔을 때 옷
고르는 시간이 너무 걸려 담배 한대 피우고 오니 치수를 맞추기 위해 나를 찾었던 모양이다.
" 당신은 꼭 내가 찾으면 없더라 "라고 한다
그 소리가 해주 출산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한 기억을 나게 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래서 이 기억이 떠오르지 않도록 내가 마누라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누라를 항상 내 곁에 있게 했다.
동래중학교 宋白館 앞 공터에 주차장을 만들어 주민에게 개방
했고 교육원에 출입하는 차량도 그곳에 주차했다.
송백관 앞에 있는 높이 솟은 느티나무가 내가 이학교 다닐 때
집에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속절없이 하루를 학교에서
보낸다는 아쉬움에 발로 밑둥치를 툭툭찼댔던 정문 옆에 있었던 그나무 같기는 한데 어찌 여기에 있을까 생각하니 아닌 것 같기도 해 아리송하다
촌놈 바지게 지고 장에 가듯이 하며 학교 가던 시절을 뒤돌아
보니 정문 진입로 앞 전찻길 옆 텃밭에서 낯선 사람에게 시도 때도 없이 왕왕거리던 강아지도 내가 지나가니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개 亡身을 당한 것만 떠오른다.
.
院長이 이층으로 달려와 "김 선생! 차에 불났다"라고 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커면서 의지해 온 누님이고, 때로는 强함에
놀라기보다는 尊敬心마저 가지게 하는 '鐵의 여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곽 선생은 다친데 없나"라고 하니 다친 사람은 없단다
"그럼 보험 처리하면 되지"하며 계단을 내려 갈려니
곽 선생이 울먹이며 올라오고 있다."다친데는 없나"라고 하니 없단다.
건설 사무소에 근무할 때 수많은 위험을 경험한 나는 어떠한 사고라도 사람만 다치지 않으면 괜찮다는 것이 나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만한 일에 울고 그러냐"라고 하며 속으로 그동안 못해준 마음의 빚을 좀 갚아야 되겠다 싶었다.
현장에 가보니 본 닛 앞쪽이 타 버렸는데 그나마 당직 선생님
이 소화기로 진화해 준 덕분으로 그정도였다.
차 꼬락서니를 보니 이 차와 몇 년을 함께 한 마누라의 心性에
울 만도 하겠다. 전 날에 정비소에서 엔진오일을 갈고 점검을 했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오히려 점검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었다,
나는 들어라는 듯이 " 잘 됐네 차 바꿀 때도 됐는데 "라고 하며 자동차 영업소에 더 좋은 차를 의기양양 주문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렉카 차량 기사가 원인을 밝히려고 하면 "경찰서에 왔다 갔다 " 해야 한다며 그냥 폐차 처리하라고 해서 "겅찰서 왔다 갔다 해야 된다"는 말에
서투른 도둑이 첫날밤에 들킨다고 이런 이상한 일은 처음이라
"차 끌고 가버리세요"라고 해버렸다.
그 후 렉카 기사가 전화를 했기에 나는 폐차 비용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돈을 주겠다고 한다.
이게 이해가 안 되었지만 돈을 준다니까 웬 떡이냐 싶었다.
첫댓글 나는 두 달 전에 23년된 쏘나타를 폐차처리했는데 90만원 받았다... 지금은 말 그대로 지공선사 신세^^
나는 삼십만 원 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자동차 기념관과 협의 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