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예술이란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변형하고 추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상이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된 ‘형식’이나 ‘구조’를 추출하는 것으로서의 추상과 주어진
형식을 변형하거나 형식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추상을 구분하며, 들뢰즈의 ‘추상적 선’, 즉 모든 방향을 향해 풀려 나가
거나 감겨 드는 변형으로서의 ‘유목적인 선’에 대해 얘기한다. 현대미술의 역사는 바로 소실점의 제거와 탈주선의
범람으로 요약되는 투시법의 해체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특히 들뢰즈의 ‘추상’이 모든 종류의 형식화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으며, 새로운 구성물로서의 ‘일관성’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미메시스 혹은 모방·재현이란 개념 없이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서양 예술사가나 미학자들은 단연코 ‘노(No)’
라고 대답할 것이다.
미메시스라는 개념은, 그것이 인간의 의도에 자연을 동화시키는 것이든 아니면 자연의 요구에 인간의 의도를 동화시키는
것이든, 예술이라는 영역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1. 모방과 추상
리얼리즘과 ‘반영’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예술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이러한 관점에서 원시예술로부터 현대
예술에까지 유일한 전통을 수립한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는 요소들은 ‘부르주아 퇴폐주의’라고 비난한다.
한편 20세기의 가장 아방가르드한 음악과 함께 사유했던 아도르노조차 미메시스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을 이해하려는
점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이를 오디세우스와 사드를 통해 확장된 계몽 개념으로 연결함으로써 좋든 싫든 계몽된 문명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어떨까? 뱀의 배 한가운데를 둥그렇게 팽창시켜 거기에 곰의 얼굴을 그린다면 그것은 뱀을 모방하는 것일까,
아니면 곰을 모방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것을 변형시키는 것일까? 사슴의 뿔을 둘둘 말아 나선형 방석처럼 그린 몽골의 암각화는 사슴을
모방한 “위대한 리얼리즘 정신의 승리”일까?1) 아니면 그것을 바꾸고 변형시킨 것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 위대한 리얼리즘 정신이 어떻게 대답하는지 잘 알고 있다.
저건 뱀의 몸과 곰의 머리를 모방한 거야. 저건 사슴 몸과 달팽이집을 모방한 거야….
아마도 그들이 UFO를 본다면 거기서도 접시나 솥을 모방한 위대한 리얼리즘 정신을 발견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렘브란트가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해 숱한 스케치를 했으며 해부학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직접 시체를 해부하기도 했음을 잘 안다.
그러나 아무도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해부도를 예술작품이라고 하지는 않으며,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그 묘사의 정확성
으로 인해 비로소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재현으로 말하자면, 〈수태고지>에 등장하는 천사는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인가?
숱하게 그려진 성모나 예수, 큐피드와 비너스는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인가?
이에 대해 들뢰즈는 이전의 대부분의 미학자나 예술사가와 반대로 대답한다.
그것은 모방이나 미메시스가 아니라 변형이요 ‘추상’이라고.
예술은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시키고 추상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성립한다고.2)
그런 점에서 심지어 재현이란 관념을 갖고 있는 르네상스 내지 바로크 시대의 화가조차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
하는 것만은 아니며, 어떤 그림이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는 것을 통해서였다고.
아마도 이런 생각은 금세기 초의 예술사가였던 보링거(W. Worringer)의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보링거 역시 예술이란 대상을 모방하려는 모방충동이 아니라 대상을 변형하려는 추상충동에 의해 성립되었음을 주장한다.3)
그래서 그는 사실적 재현의 정도를 통해 예술작품의 미적 범주를 설정하려는 태도를 서양의 고전시대에 출현한 미 개념을 제국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며 유럽의 고전적 예술을 특권화하는 결과를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전적 예술사가 서구의 수많은 예술작품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편협한 것임을 주장한다.4)
이런 점에서 보링거의 입론은 예술사가 미학사의 오래된 전통 속에서 하나의 중요한 파열구를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하다.
이는 어느새 또다시 잊혀진 그의 입론을 새삼 강조하고 재검토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렇지만 무엇이 대체 대상을 변형하고 추상하게 하는가에 대해서 그가 말하는 것은 불안과 공포를 마치 원죄와도 같은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하는 오래된 서구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고 있는 듯하다.
즉 그는 이러한 변형과 추상충동을 대상 세계를 합리적으로 포착하지 못하는 무지와 불안·공포의 산물로 설명한다.5)
그러나 유머와 가벼움, 유쾌함과 기쁨을 미덕으로 여기는 니체주의자가 예술을 이런 종류의 충동으로 이해하길 기대한
다면 바보짓일 게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여기서 그는 클레(P. Klee)의 입을 빌려 말한다.
“예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가령 카트린 미예(Catherine Millet)가 “중요한 것은 농부가 들고 가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정확한
무게를 그리는 것이다”라고 할 때, 그리고 세잔(P. C럝anne)이 나름의 선과 형태, 색채를 통해서 사과의 무게를 그리
려고 했을 때,6) 그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변형하고 추상하는 것, 그게 바로 예술
이란 것이다.
2. ‘표현주의’와 표현주의
예술가가 작품으로 보여 주려고 하는 그 비가시적인 것, 그것을 들뢰즈는 ‘힘’이라고 부른다.
이는 현대예술에서 특히 중심적인 것이 된다. 현대예술은 어떤 것도 대개는 이전에 지배적이던 질료와 형상이라는
고전적 범주를 깨고 돌파하여 새로운 창조의 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 창조의 장은 소재(재료)와 힘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한다.7)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란 그것이 포획한 재료를 통해서 우주적인 힘을, 그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려 ‘표현’이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은 종종 ‘표현주의(Expressionism)’
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또 다른 오해의 여지를 담고 있다.
알다시피 그것은 이미 20세기 초에 미술이나 음악, 혹은 문학이나 영화에서 나타났던 어떤 광범위한 ‘사조’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들뢰즈는 주관적인 감정을 대상에 이입하여 그렇게 변형된 대상을 통해 표현하려는 음악이나 미술에서의 ‘표현
주의’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리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표현 내지 표현주의 개념은 보링거가 지적한 것처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것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것은 무엇인가?
유기체란 각각의 부분들을 ‘생명’이라는 하나의 특권적인 중심을 위한 ‘기관’으로 기능하게 하는 통합체다.
유기체라는 관념 아래서 신체의 모든 부분은 그 특정한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고정된다.8) 입은 먹는 기관, 위장은 소화
기관, 항문은 배설기관 등등.
그러나 입이 이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없는가? 그것은 무언가를 먹을 뿐 아니라 배설하기도 하고, 말을 하며,
키스한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경우, 그것은 우리에게 그 사회에서 할당한 기능을 열심히 수행하는 기관이 될 것을 요구
한다.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역할을, 학교에서는 선생이나 학생으로서의 역할을.
반면 우리의 삶은 그 고정된 자리를 끊임없이 이탈하고 벗어나며 다른 것이 된다.
권력의 선분들을 가로지르는 사선 같은 횡단선들, 그것은 이런 고정된 모든 것에서 탈주하는 유목의 선이다.
들뢰즈가 프란시스 베이컨(F. Bacon)의,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어리 같은 그림을 언급하며 ‘기관 없는 신체’를 말할 때,9) 그는 기관화하여 유기적 통합체로 만드는 유기적 선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하게, 그는 카프카(F. Kafka)가 개나 원숭이, 딱정벌레나 쥐에 관한 소설을 쓸 때, 사실은 글을 쓰면서 개가 되고 원숭이가 되며, 딱정벌레가 되고 쥐가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이 동물이 되는 한 방법이며, 주어진 ‘인간’의 자리에서, 주어진 ‘가족’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인 것이다.10) 이를 그는 ‘출구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탈주선’.‘표현주의’에서 감정이입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감정(sentiment)을 대상에 부여하여 대상을 인간화한다.
뭉크의 유명한 그림에서 모든 선은 절규하는 여인의 얼굴로, 그 얼굴의 검은 구멍으로 끌려가고, 모든 색은 그 검은 구멍
에서 나오는 공포와 두려움의 기호가 된다. 풍경 전체가 절규하는 인간의 얼굴이 된다.
‘표현주의’는 모든 풍경을 이처럼 ‘얼굴’로 만들어 버린다. 공포에 질린 얼굴, 두려움에 떠는 얼굴, 혹은 슬픔과 분노, 절망
에 사로잡힌 얼굴…. 유기적인 선과 관련하여 “인간의 얼굴이 특별한 우선성을 갖는다”는 말은, 적어도 이 경우 아주 강한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입이 모든 것을 인간화하는 유기적인 선으로 표현된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기하학적 선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직선적인 것, 기하학적인 것은 유기적인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
체적과 공간성에 종속되는 그리스의 유기적인 선은 그것들을 평면으로 환원하는 이집트의 기하학적인 선의 뒤를 잇고
있다.
대칭과 윤곽, 내부와 외부를 갖는 유기적인 것은 하나의 홈 파인 공간의 직선적인 좌표계에 귀속된다.
유기적신체는 직선으로 연장되어 멀리 있는 것에 연장된다.”11) 이는 추상적인 선을 기하학적 선으로 귀속시켰던 보링거(《추상과 감정이입》)와 분명하게 달라지는 지점이다.
반면 추상적인 것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대칭이나 비례 같은 통념적 형식을 깨는 방식으로 구불구불 구부러지는 곡선
이고, 어떤 하나의 중심으로 귀착되지 않은 채 나름의 ‘출구’를 향해 뻗어 나가는 유목적인 선이며, 좌표계를 짜는 수평선과 수직선을 가로지르는 사선이며, 그럼으로써 비유기적인 생명의 힘을 표현하는 선이다.
여기서 인간의 얼굴은 어떤 우선적인 위치도 갖지 못한다.
그 대신 “머리는 리본처럼 풀리거나 감기고, 입은 나선형으로 말린다. (중략)
이렇게 흐르고, 소용돌이치고,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꿈틀거리는 변화의 열광적인 선은 인간이 조정하고 유기체가 제한
하는 생명의 힘을 (중략) (그 조정과 제한을 넘어) 해방시킨다.”12)
칸딘스키
1926
파블로 피카소
<도라 마르(Dora Maar) 부인의 초상>
캔버스에 오일 92×65cm 1937
3. 추상적 선과 기하학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멈칫거리게 된다. 추상과 모방, 추상적 선과 유기적 선의 대립은 좋다.
직선이나 기하학적 선이 추상이 아니라 함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여기서 우리는 ‘추상’에 관한 두 가지 상이한 개념을 다시 구별해야 한다.
하나는 상이한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된 ‘형식’이나 ‘구조’를 추출하는 것으로서의 추상이다.
알다시피 기하학의 선이나 도형도 이러하다.
이 얼굴 저 얼굴에 공통된 형태, 얼굴과 태양에 공통된 형식, 그게 바로 원이다.
원은 그 찌그러진 모습을 컴퍼스를 돌려 정확하게 편 것이고, 둥글게 생긴 모든 것의 공통된 형식이다.
이런 점에서 기하학적 선이나 도형은 형상적 내지 형식적인 것이며, 형식의 추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그것은 형상이나 형태를 지우고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형상이나 형태를 찾아내기 위해 만들어진다.
직선이 곧은 것은 구불구불한 길들을 곧게 펴서 ‘이상적(ideal)’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이고, 원의 정확한 곡선은 울퉁불퉁한 ‘둥근 모양’을 곧게 펴서 이상적 형태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기하학적 선은 자유롭게 흐르고 구부러지는 유목적인 선이 아니라 두 점을 잇는 곧은 선, 점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고정된 선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선은 ‘잘못’ 그려진 선이고, 거기서 벗어나는 선은 진리의 이름으로 배제되고 소멸되어야 할 ‘오류’다.
이와 달리 주어진 형식을 변형하거나 형식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추상이 있다.
몽골의 암각화에서 빙글빙글 돌며 말린 사슴뿔은 사슴뿔이 갖고 있는 어떤 형상이나 형식적 공통성과도 무관하다.
달팽이집처럼 밀려 올라간 말의 입술, 네발 동물의 한쪽엔 새의 머리를 달고 그 꼬리는 뱀의 몸처럼 늘어나더니 그 끄트
머리는 식물의 이파리처럼 만들어 버리는 유목민의 장식적 선은 주어진 형태의 변형으로서, 탈형식화를 이끄는 선으로서
추상적 선을 보여 준다.
혹은 보링거 말대로 자연에 반하여 끊임없이 구부러지는 선이 야기하는 기이하고 부자연스럽게 강제되는 고딕적 선의
운동은 우리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우리의 의미나 생명보다 강력한 무언가를 표현한다.13)
이 또한 공통성의 합리적 추출이 아니라 ‘선에 의한 공상’14) 을 통해 자연적인 세계의 형상을 변형시키는 추상적 선이다.
들뢰즈가 홈 파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대비하면서 매끄러운 공간의 특징으로 ‘추상적 선’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바로
이런 유목적인 선, 모든 방향을 향해 풀려 나가거나 감겨 드는 이런 변형으로서 추상적 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선이 탈주적인 유동성에 의해 기하학을 넘어서는 것과, 생명이 자기 자리를 넘어서 위치를 바꾸는 소용돌이에 의해
유기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동시적이다.”15)
점에 종속되는 선이 아니라 점들을 포함하거나 통과하면서 자유로이 흐르는 선에 대해 말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소실선(ligne de fuite,‘탈주선’)들을 오직 하나의 점으로 귀속시키는 투시법은 모든 선을 오직 하나의 점으로, 소실점
(point de fuite)으로 종속시키는 홈 파인 공간을 구성한다.
그것이 자연주의적인 선이나 재현적인 형상이 지배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
이다.
클레의 그림 <투시법으로 그려진 방>은 그 경직된 투시법적 소실선들 안에 갇힌 사람들의 형상을 통해, 소실점으로 귀속
되는 선들의 권력을 보여 주는 듯하다.
4. 추상화(抽象化)와 추상화(抽象畵)
이런 점에서 ‘모던’이란 말을 ‘근대’와 대비하여 ‘현대’라고 번역하게 만드는 현대미술의 역사는 바로 그 소실점의 제거와
소실선/탈주선들의 범람으로 요약되는 투시법의 해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들뢰즈의 시각에서 본다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미술을 사로잡고 있던 홈 파인 공간의 해체를 의미하며, 변형으로서 추상적 선이 해방되는 결정적
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들뢰즈가 기하학과 대립되는 추상적 선의 개념을 현대예술이 제공한다고 본다.
“추상적인 선은 기하학이나 직선적인 것으로는 정의될 수 없다. (중략) 현대 예술에서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식도 제한하지 않는 (중략) 가변적인 방향의 선이다.”16)
그렇지만 다른 어디서도 그랬듯이, 이렇게 해방되어 자유롭게 풀려난 추상적 선을 다시 홈 파인 공간 안에 사로잡고 가두
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여기서 이제 기하학은 이전에 투시법의 소실점에 집중되어 있던 이 역할을 대신하는 특권적인 위치를 다시 차지한다.
몬드리안(P. Mondrian)이 ‘추상’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렸던 나무 그림들은 이러한 양상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먼저 그는 자연적 형태에서 뻗어 나가며 변형되는 추상의 과정을 보여 준다.
거기서 나무는 춤추거나 강밀한 힘을 방사하는 추상적 선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시 공간을 분할하는 기하학적 도형의 형상에 따라 재분할되고 기하학적 추상에 다시 포획된다.
자연적 형태에서 해방된 추상적 선의 변형능력이 기하학의 홈 파인 공간 안에 다시 갇히는 것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몬드리안은 변형으로서 ‘추상’을 기하학적 형상 안에, 직선과 사각형, 비례의 규칙 아래 다시 가둔다.
칸딘스키(W. Kandinsky)는 이를 약간 다른 양상으로 보여 준다.
<즉흥(Improvisation)>이란 제목으로 그려진 일련의 그림들은 자연적 형태에서 벗어난 선과 공간의 자유로운 흐름을, 그
흐름이 만드는 힘을 종종 폭발할 듯한 강밀도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그림을 넥타이 그림과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그 자유로운 선과 공간에 새로운 ‘법칙’을 부과
하게 된다.
《점.선.면》에서 운명교향곡의 주제를 기하학적 도형으로 가시화하는 방식이나 무용수 팔루카(Paluca)의 춤추는 동작
들을 기하학적 선으로 ‘추상’했던 그의 ‘스케치’는 법칙화의 강박을 따라 기하학적 선이 형태적 추상의 길로 자유로운
선의 흐름을 유도하고 결국 기하학적인 점·선·면에 가두게 되는 양상을 유치할 정도로 극명하게 보여 준다.
반면 클레는 정확한 기하학적 선과 정확하지 않은 비기하학적 선의 이러한 차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많은 경우 의도적으로 고정하고 가두는 경직된 선을 만들기 위해 기하학적 선으로 사람이나 형상을 그리며, 이를
자나 컴퍼스를 쓰지 않은 구불구불한 선과 대비시킨다.
<고속도로와 샛길(Highway and Byway)>에서 이는 직선적인 선으로 홈이 파인 고속도로와 구불구불 흘러가며 끊임없이
옆으로 새는 샛길의 대비로 그려진다.
그런데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보이는 것은 자로 그린 직선으로 곧게 파인 그 길이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지는 숱한 샛길
들에 의해 잠식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니, 반대로 그 곧은 길은 그 많은 샛길의 자유로운 펼쳐짐을 관통하고 포획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
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우리는 그림과 문자(글자)의 관계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글자 내지 문자는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을 대신하고 그것을 추상하여 만들어진다.
들뢰즈는 그러한 문자의 출현이 제국적 국가의 탄생과 결부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반면 선사시대의 예술은 글자가 없었기에 더욱더 추상적이었다고 한다.
반면 “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글이 추상적인 역할을 할 때, 이미 강등된 가치를 갖게 된 선은 필연적으로 구체화되거나
심지어 구상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17)
글자에게 추상을 일임하고 그림은 구체적인 것이 되는 것. 이처럼 추상적 선은 또 다른 추상으로서 글자와 대립한다.
그러나 이응로는 글자 내지 문자를 다시 변형함으로써 ‘글자=추상 ; 그림=구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러한 근본적 이원성을 깨버린다.
그림을 추상한 한자는 이러한 또 한 번의 추상을 통해 다시 ‘그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의 기원적 형상이나 자연적 형태로 복귀하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 추상적 문자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추상적 선을 그린다.
‘문자추상’에서 추상은 글자를 변형시키는 추상적 선을 그리는 방법일 뿐이다.
추상이라는 ‘개념’으로 글자와 그림의 경계를 횡단함으로써 그는 추상이란 형상이나 형태와 더욱더 거리가 먼 변형임을
새로운 층위에서 보여 준다.
들뢰즈의 사상에서 모방이 아닌 변형으로서, 그리고 공통형식의 추출이 아닌 형식의 변형으로서 ‘추상’이란 개념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형식의 변형이 모든 종류의 형식화에서 벗어나는 탈형식화의 선을 그릴 때, 그것은 ‘일관성의 구도’에 도달한다.
‘일관성(consistance)’이란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아상블라주를 만드는 예술가처럼 여기저기서 끌어온 것을 새로운 구성물로 만들어 내는 것, 그래서 각 부분의 이질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구성물로서의 ‘일관성’을 만들어 내는 것.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모방’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혼성 모방’을 경멸한다. 그 이유는 무언가를 다른 곳에서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져온 것을 원래의 것으로부터 충분히 탈영토화하지 못한 채 잡다하게 섞어 두기 때문이다.
일관성의 구도란 어떤 것을 모든 방향으로 접속할 수 있는, 그래서 어떤 다른 것으로도 변형시킬 수 있는 입자적이고 원소
적인 지점이며, 그런 만큼 어떠한 것도 구성할 수 있는 잠재적 상태란 의미에서 ‘구성의 구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가오는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는 변형과 변이의 순수 잠재성 그 자체다.
추상을 통해, 탈형식화를 통해, 혹은 탈영토화를 통해 일관성의 구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이진경 | 사회학 연구공간 ‘너머’
이진경은 서울대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유 연구실 + 연구공간 ‘너머’ 연구원이다. 저서로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 《맑스주의의 근대성》, 《철학의 외부》, 《철학과 굴뚝청소부》 등이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1925년 1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소르본느대를 졸업하고, 리용대 강사를 거쳤다.
1969년 주 논문인 《차이와 반복》, 부 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9년 푸코의 후임으로 68혁명으로 만들어진 뱅센실험대학(이후 파리 8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철학·문학·과학을 강의하고, 1987년 퇴임 후에는 줄곧 좌파를 옹호하며 집필과 방송활동을 했다.
구조주의 등 1960년대의 서구 근대이성의 재검토라는 사조 속에서 철학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배경으로 서구의 2대 지적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고, 1968년 《차이와 반복》에서 이 문제를 극복하는
문제를 전개했다.
1972년에는 동료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기존 정신분석에 반기를 들고, 니체주의적 틀 안에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통합하여 20세기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저서로 《경험주의와 주관주의자》(1953) 《니체와 철학》(1962) 《칸트의 비평철학》(1963) 《천 개의 고원》(1980) 등이
있다.
한국에도 《앙티 오이디푸스》(민음사, 1994)와 《니체와 철학》(인간사랑, 1995)이 번역 소개되었다.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들뢰즈 (1935-1994)
벵센느 파리 8대학에서 가르친 프랑스 철학자.들뢰즈의 작업은 철학의 세 영역을 망라한다: (1) 철학사에서의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해석; (2) 포스트구조주의적 철학의 진전(들뢰즈는 많은 동시대 포스트구조주의자들, 특히 미셸 푸꼬와 쟝-프랑수아 료따르와 더불어 결실있는 논쟁들에 뛰어 들었다); (3) 펠릭스 가따리와 함께 한, 포스트-프로이트적 유물론의 창안. 세 가지 모두 들뢰즈의 미학에서 역할을 맡으며 그의 미학에 영향을 미친다.
들뢰즈의 미학의 중심 개념은 표현(expression)이다. 그는 지각[작용]들(perceptions)과 관념들(ideas)에 연관된 근저에 있는(underlying) 운동들(movements)의 표현에 대한 미적 가치를 강조한다; 예를 들면, 예술 작품은 무언가가 지각되어졌을 때 발생하는 변화들(changes)을 표현해야 한다. 예술은 이러한 운동들을 포착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지각을 ― 그것이 관람자나 청중에게서 다시 활성화되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 영속적(permanent)으로 만든다. 관람자와 청중은 예술 작품을 지각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그들은 정서나 분위기와 같은 작품 속에서 포착된 변화들에 의해 감동을 받는다(moved). 정서나 분위기는 작품 속에서 고정된 존재들이라기보다는 변화들로 이해된다. 유사하게, 철학적 미학은 외관상으로는 고정된 상태들(states)의 근저에 놓인 운동들과 변화들에 관련될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그것들[운동들과 변화들]에 대한 이해의 정적인(static) 방식과 동적인(mobile) 방식 사이의 구분을 끌어내기 위해 직관, 지각 그리고 경험에 대한 비판을 제안한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직관, 지각 그리고 경험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고정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상태들에 대립된 것으로서 상태에 있어서의 절대적 변화들이다. 그러므로 표현은 숨겨지고 잊혀져 왔을 상황들(situations)에 있어서 그 변화들의 활성화(activation)이다. 그리고 들뢰즈적인 표현주의는 표현을 정체성[동일성](identity)과 같음(sameness)의 개념들에 대항하여 방어하고 표현을 고무하려고 시도하는 철학적 미학이다. 미학과 예술에 대한 들뢰즈의 가장 근본적인 주장은 미학과 예술이 또 다른 ― 외관상 더욱 견고한 ― 실재(reality)에 대한 은폐된 조건인 진리(truth)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예술에서의 내적인 상태들이나 의미들의 표현에 흥미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표현은 주체의 정체성과 상태들의 재현[표상](representation)을 거스른다. 그것은 고정된 정체성이 그것 외부의 어떤 것과의 마주침(encounter)의 결과로 사라지는 변화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들뢰즈의 작업의 선도적인 원리는, 따라서 표현은 거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립되는 운동과 생성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의 역설적인 효과는 들뢰즈의 비판적이며 구성적인 사유를 특히 어렵고 혁명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체성이라는 점에서(in terms of) 핵심 개념들의 정의를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표현되어졌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한 응답에 있어서, 들뢰즈는 고정되고 잘 규정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철학을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반영(reflection)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모순을 피하기 위해 들뢰즈는 강도들(intensities)이라는 말로 개념을 발전시킨다. 강도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전이(passage)라는 말로 처음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어떤 것이 주어진 속성을 보다 덜 혹은 더 띠게 될 때(예를 들면, 보다 덜 혹은 더 붉은) 발생한다. 표현은 강도 내에서의 변화들을 포착하며, 결과적으로 표현은 두 고정된 상태들의 비교와는 대조되는 강도의 측면에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풍경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으면, 예술과 철학의 과제는 풍경의 두 상태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색채의 강도에 있어서 변화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붉음이라는 점에서 규정된 강도들에 머무르거나 밝음(붉음의 두 강도들 사이의 차이는 따라서 밝음이라는 점에서 생각되어질 것이다)이라는 점에서 퇴행(regress)의 진전된 단계 등등에 머무를 수 없다. 이것은 색채나 빛의 분석과 분류를 통해 표현을 대신할 정체성의 미학에 대한 토대를 재도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히려, 비록 들뢰즈가 특수한 강도들을 묘사하긴 하지만, 그는 강도 그 자체를 강도들의 무한한 계열들 ― 거기에서 각 특수한 강도는 무한하게 많은 발산하는 계열들의 단지 하나의 집중(concentration)이다 ― 이라는 점에서 규정한다(따라서 붉어짐은 밝음의 집중이며, 다른 색채들, 다른 정서들, 예를 들면 격정 등등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infinitesimal calculus)의 사용에 고취되어, 들뢰즈는 미분학(differential calculus)에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이 관점을 개념화한다. 그럼에도 그 자신의 이론에 일관성있게, 그는 또한 영겁회귀와 최초의 반복의 철학이라는 니체의 이론을 사용한다.
들뢰즈는 표현을 차이 그 자체 혹은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정의된 차이에 관련시킨다; 차이는 두 사물들 사이에 있다기 보다는 강도에 대한 긍정적 지각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를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한다: 차이는 반복된 심급들(instances)의 계열(series) 내에서 변화의 지각이다. 거기에서 계열 내의 변이(variation)는 계열의 개별적 항들로 소급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질 수 없다. 그보다, 차이는 계열 내의 변이, 강도 내의 변이에 대한 지각이다. 강도와 차이 그 자체라는 점에서 정의된 표현의 개념은 비표상[비재현]적이고 비개념적인 행사들(exercises)로서 들뢰즈의 예술과 창조성에 대한 정의들의 기반이다. 예술 작품에 있어, 그가 강도의 표현에 관심을 두는 한에서, 종종 계열[연작](series)의 반복을 통해, 그것은 또한 예술과 문학에 대한 그의 연구들의 기반이다. 이번에는, 계열의 측면에서 예술 작품에 대한 이런 고려는 예술에서 원본과 모사물의 관념에 대한 반대가 된다. 오히려, 예술 작품은 시뮬라크르(simulacrum), 거기에서 어떠한 절대적인 원본도 찾아질 수 없는 반복들의 차이나는 계열들의 부딪힘*(coming together)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예술가는 주어진 사물의 개념적 정체성, 주체로서 예술가의 정체성과는 무관한 순수한 지각들과 감각들(sensations)을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지각들과 감각들은 세계를, 혹은 더욱 정확하게는 지평[평면](plane)을 표현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현실적 실존(actual existence)과 그것 바깥의 어떤 것을 연관시키는 잠재적(potential) 운동들과 변화들로부터 우리를 끌어낸다({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보라).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니체주의자이다: 예술가는 생성(becoming)으로서의 세계 ―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전적인 효과들인 한에서 ― 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예술가는 또한 인간들을 극복할 수 있는 그 전형적으로 동물적인 지각들과 감각들을 포착함으로써 인간 속에 있는 동물을 표현할 것이다. 들뢰즈는 동물적인 동요[불안](disquiet) - 동물들이 구체적 위협을 지각하기 이전에 위험을 감지하는(sense) 방식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 와 동물적 경보(alertness) - 동물이 거의 완벽한 이완 상태에서 활발한 상태로 돌입될 수 있는 방식 ({천개의 고원}에서의 진드기(tick)) - 에 특히 매혹된다. 그러나, 그러한 지각들과 감각들이 동물들, 그리고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들뢰즈는 그러한 지각들과 감각들이 어떠한 존재에서도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는 독립적인 잠재적 생성들이라고 제안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두려워함(fearing), 배고파함(hungering), 녹색이 됨(greening), 미소지음(smiling)과 같은 동사들에 의해 서술되어지는 잠재적 운동들로 특성화되는 세계가 있다. 예술가는 이 동사들을 실제 질료들 내에서, 실제 예술 작품 내에서 포착함으로써 표현할 수 있다. 두려워함이나 녹색이 됨과 같은 지각 혹은 감각을 표현함으로써, 예술가는 또한 affect*, 즉 그것들과 더불어 일어나는 변화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affects 혹은 생성들 그리고 그것들을 격발시키는 지각들과 연관된 창조의 형식이다.
이러한 연관은 예술에서의 비판적 기능 뿐 만 아니라 들뢰즈의 미학 내에서 핵심적 규준(criterion)이 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재현의 측면에서 정의될 수 없다. 재현은 유사성(resemblance) 혹은 유비*(analogy) 내의 동일화(identification)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유사성 혹은 유비는 개념적 동일성(identity)에 의해 보증된다; 즉 거기에는 두 유비적인 혹은 유사한 사물들의 개념들 사이에서 도출된 동일성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두려워하게 됨(becoming fearful)과 같이 본질적으로[내재적으로](intrinsically) 운동 중에 있는 변화와 과정들(processes)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하기 때문에, 예술에서의 창조는 재현을 기준으로 하여 규정되어질 수 없다. 예술 작품은 운동을 지각들과 감각들의 형식으로 전이시킴으로써, 그것이 우리를 운동으로 이끌, affects를 창조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위대한 예술은 대상, 풍경, 행위, 의미 혹은 게다가 감정(feeling)의 재현 내에 있지 않다. 위대한 예술은 그러한 것들을 일으키고 또한 파멸로 이끄는 운동들을 포착하는데 있다. 이것은 예술의 비판적이며 창조적인 기능들을 해명해준다. 예술작품은 재현과 동일성의 오류를 드러내준다. 예술 작품은 어떠한 특정한 동일성에 견고함 뿐 만 아니라 연약함도 주는 근저에 있는 변화들을 표현함으로써 재현과 동일성의 환영적(illusory) 본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들뢰즈는 또한 순수한 잠재적 운동들은 어떤 주어진 상태 혹은 주어진 상태들 사이의 차이와 동일화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강도들로 규정한다; 오히려 보다 밝게 됨과 같은 강도들은 잘 규정된 상태들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존재를 지탱함에 대립하는 생성을 창조함에 있어서, 예술 작품은 따라서 삶의 강도에 기여하며 동일화(identification) 내의 억제[금지](inhibition)에 방해되도록 작용한다.
들뢰즈의 초기 저작들은 위대한 철학자들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연구들이었다: 흄,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 칸트. 그 자신의 미학은 그들에게 많이 빚지고 있다: 특히 칸트에게는 초월적인 것[초월성](the transcendental)의 관념에 대해, 니체에게는 영겁회귀의 관념에 대해, 스피노자에게는 내재성(immanence)과 표현의 관념에 대해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영향들은 이제 그의 주저인 {차이와 반복}에서 고유하게 들뢰즈적인 철학으로 조합된다. 이 책에서는, 위대한 예술을 구성하는 것에 관한 들뢰즈의 입장이 그렇듯이, 예술의 원초적 기능이 명료해진다. 그 책의 두 가지 주요 개념은 미학에 관련되어 있다. 차이는 예술 작품 속에서 반복으로 통해서 그리고 재현의 실패와 더불어 표현되어지기 때문이다: ". . . 현대(modern) 예술 작품이 치환하는(permutating) 계열들과 순환적인 구조들을 발전시킬 때, 그것은 철학에게 재현의 포기로 이끄는 길을 가리켜준다" ({차이와 반복}, 69쪽[영역본]). 들뢰즈는 글자 그대로 주제들, 화제들, 줄거리들의 계열의 반복들을 포함하고 있는 현대 작품들 ― 예를 들면 그의 친구 미셸 뷔또르(Michel Butor)가 쓴 소설들, 혹은 조 부스께(Joe Bousquet)가 쓴 텍스트들 ― 에 강하게 영향받았다. 우선, 이 문자상의(literal) 반복은 우리의 정체[동일]감(sense of identity)*을 침식하는 복잡한 변이들을 허용한다는 것이 그가 주목한 점이다. 계열 내의 각 대상들에 대한 감각(sense)은 어떤 변이가 원본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점에까지 다른 대상들에 연계되어진다. 둘째로, 변이들은 계열 내의 미세한 차이들, 즉 미분화(differentiation)를 낳는 과정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sensibility)을 예민하게 한다: ". . . 반복은 스스로를 내재화하면서 스스로를 전복시킨다: 페기(Péguy)가 말하듯이, 바스티유 감옥의 탈취를 기념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독립기념일 축제가 아니라, 모든 독립기념일에 앞서 경축하고 반복하는 것은 바로 바스티유 감옥의 탈취이다; 혹은 모네(Claude Monet)의 모든 다른 수련(water lily)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첫 수련이다" ({차이와 반복}, 1쪽).
이제 예술 작품은 원본도 복사물도 재현도 아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이다: 원래의 시작으로 되돌려되거나 지도적 이상이나 모델로 되돌려질 수 없는 계열의 부분을 형성하는 작품. 시뮬라크르의 우연적이고 모사된(simulated) 본성에 대해 입증하는 것은 바로 작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시뮬라크르는 잠재적인 생성들의 근저에 놓인 "실제"(real) 세계를 표현한다: "만일 재현이 그것의 요소로서 동일성을 가지고, 측정 단위로서 유사성을 가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시뮬라크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순수한 현존(presence)은 그것의 측정 단위로서 '불일치'(disparate) ―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직접적인 요소로서 차이의 차이 ― 를 가진다" ({차이와 반복}, 69쪽). 들뢰즈의 저작에서, 반복들과 변이들의 계열 내에서의 시뮬라크르로 예술 작품을 정의하는 것은 예술을 넘어 인식론적인 것과 윤리학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분기들(ramifications)을 가진다. 따라서, 그는 선형적(linear) 시간과 질서정연한(well-ordered) 데카르트적 공간으로는 그의 차이와 반복에 대한 정의들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에 관심을 가진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예술 작품들은 다른 관점들 ― 거기에서는 시간이 "기호들에의 도제수업"({프루스트와 기호들}을 보라)을 해명하는 과정들에 종속된다 ― 을 요구한다. 들뢰즈에게 있어, 기호는 변화와 생성에 대한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주고 빼앗게 되는 과정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하여 배우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기호들은 의미의 소통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우리가 지배될 수 있는 affects, 지각들 그리고 감각들(sensations)의 배움에 관한 것이다.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involuntary memory)의 경우에, 들뢰즈는 그것[비자발적 기억]의 가능성(possibility) ― 즉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미래에 활동시키는 그런 방식으로 되돌아온다는 것 ― 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에 관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의 최종적인 종합에서 현재와 과거는 이제 단지 미래의 일면(dimensions)이라는 것을 본다: 조건으로서의 과거, 동인(agent)으로서의 현재."
들뢰즈에게 있어, 문학은 의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근저에 있는 과정들 ― 거기에서는 배움이 감각(sense)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는 것을 느끼게 됨(coming to feel)에 관한 것이다 ― 의 표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문학의 기능이 언어외적인(extralinguistic) affects, 지각들 그리고 감각들의 창조를 위하여 언어에서의 의미의 구성을 침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문학은 지속적으로 언어를 교란하며, 우리를 해석의 정립된 기술들(techniques) 너머로 가도록 강제하는 새로운 언어적 형식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현대적이 되어야 한다. 그는 항상 영미 문학 ― 로렌스(T. E. Lawrence), 멜빌(Herman Melville), 핏제럴드(F. Scott Fitzgerald), 버로우즈(William Burroughs) ― 에 심취해왔다. 영미 문학은 미지의 것에 대한 여행과 탐험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들의 효과, 즉 우리를 미지의 것으로 이끌어 가는 것 뿐 만 아니라, 언어의 정립된 구조를 비틂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그 효과를 성취하는 가에 있어서도 이것은 사실이다. 들뢰즈의 오래된 친구이자 협력자인 심리학자 가따리와 공저한 카프카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문학관이 가장 광범위하게 다루어진다: {카프카: 소수 문학을 향하여}. 들뢰즈의 마지막 논문 모음집 또한 ― 비록 거기에서 치유(curing), 병(sickness) 그리고 건강(health)의 의미들(senses)은 직관에 반한(counterintuitive) 것이긴 하지만 ― 이 주제에 문학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추가적인 강조를 덧씌운다({비판과 임상}). 들뢰즈의 설명에 의하면, 치유하는 것은 흔히 안락한 정체성과 상태로부터 해방하는(release) 것이며 치유된 자를 폭력적이고 손상시키는 경로들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핵심은 안정된 실존(settled existence)은 단순히 커다란 고통과 억압을 숨기는 건강의 환영을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핏제럴드와 같은 자기-파괴적 작가들에 대한 들뢰즈의 열중을 해명해준다. 자기-파괴적임으로 해석된 것은 해방이고, 사실 치유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안정된 상태와 의미는 우리가 변화와 생성을 위해 가지는 잠재력을 단순히 억제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핵심은 다수(majority)의 상태들과 의미들의 환영을 침식시키는 "소수의"(minor) 생성들의 발명하는 것이다: "문학으로서의, 글쓰기로서의 건강은 잃어버린 사람들(missing people)을 발명하는 데 있다"({비판과 임상}, 14쪽). 작가들은 그들이 의미를 가진 언어가 붕괴하도록 하려 하는 한 황홀경(delirium)에 감싸여 있다. 그러나 그 도취는 짓밟혀 온 것에 대한 치유이며 해방이다: "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건강의 창조물을 황홀경 내에서부터 해방시키는 것 혹은 사람들, 즉 삶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것이다"({비판과 임상}, 15쪽).
이러한 예술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은 들뢰즈와 가따리의 두 권의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즉 {앙띠-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후자에서, 표현으로서의 예술의 정의는 어떤 정체성이나 영토(territory)의 정식화도 표현에 의존한다는 주장에 의해 동물들에까지 확장된다. 영토 혹은 유기체(organism)로의 경계가 분명해질 때, 한계(limit)의 측면이 아니라 어떤 것(something) 내로의 전이와 어떤 것 밖으로의 전이의 측면에서 영토를 정의하는 두 과정들의 표현이 있어왔다. 이 두 과정들은 영토화(territorialization)와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 ― 어떻게 생명체가 어떤 것을 자신의 정체성과 연관시키고, 어떻게 그 정체성이 변화들과 생성들에 의해 점유되고 왜곡되는가 ― 라 불린다. 동물이 자신의 영토나 집을 만들때면 언제나 들뢰즈와 가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창조의 형태로 이 과정들을 표현한다. 그래서 새가 나뭇잎의 패턴을 사용해서 둥지를 지을 때면, 그 패턴은 새가 그 자신과 자신의 환경 사이의 구분을 끌어내는 방식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 패턴은 또한 그 적대적 환경에 대한 새의 의존을 표현한다. {천개의 고원}의 리토르넬로(ritornello)에 관한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음악적인 후렴이나 음조(tune)의 맥락에서 이러한 과정들을 연구한다; 음조의 반복은 특정한 존재의 특이성(singularity)에 대한 인식이 되고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획하며 다른 것들에 대해 인지가능하게[구별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이 생성, 이 출현(emergence)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가? 영토는 예술의 효과일 것이다. 예술가, 즉 경계를 끌어내거나 표시[흔적](mark)를 만드는 최초의 인간. . . 개인의 것이든 단체의 것이든, 비록 전쟁이나 억압을 위한 것일지라도, 고유성(property)은 이것으로부터 온다"({천개의 고원}, 189쪽[영역본]). 음조는 항상 다른 음조들로부터 취해진 구성요소들, 그러나 노래의 더 넓은 패턴들로부터 취해진 구성요소들에 의존한다. 그래서, 비록 어떤 정체성이라도 패턴의 반복 ― 예를 들어, 영토를 통과하여 걷기 ― 을 사용하면서 구성되어질 수 있다해도, 그 패턴은 정체성과 다른 가능한 삶의-형태들(life-forms)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다른 파괴적 접속들(connections)의 기호이다. 미적 표현으로서 정체성의 정의를 통한 이 접속되어있음(connectedness)은 들뢰즈와 가따리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된다: 미적 표현은 그것의 모든 가능한 접속들, 모든 가능한 생성들에 열려져야만 한다. 예술은 우주적 질서(cosmic order)임이 틀림없다.
그들의 마지막 저작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예술, 과학 그리고 철학을 그것들의 연관됨 뿐 만 아니라 그것들의 독립성을 결정하려는 그런 방식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지각들과 감각들의 표현으로서 예술은 개념들의 창조로서의 철학을 보충해준다. 이것은 예술이 완전히 개념화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개념은 예술 작품과 동일한 감각적[육감적](sensual) affects를 절대 표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철학과 예술은 관련되지만 독립적인 지평[평면]들(planes)을 끌어올리기 위해 함께 작업해야 한다; 개념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 없이는 불완전하고, 감각적인 것은 개념적인 것 없이는 불완전하다. 예술과 철학의 이러한 상보성은 들뢰즈의 철학 스타일과 예술에 대한 그의 비판적 작업과는 구별되는 양상이다. 들뢰즈는 그의 미학을 예술 작품들에 적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들의 세계가 지각들을 통해 표현되어져야 할 때, 들뢰즈는 예를 들면 표현, 시간, 공간이라는 철학적 개념들을 보충하기 위해 예술에 의지한다[예술을 참조한다](turns to art). 철학과 예술의 이러한 "패치워크"(patchwork)는 영화, 문학, 회화, 건축에 대한 그의 작업과는 구별되는 양상이다. 따라서,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들뢰즈의 선구적인 저작({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에서, 화가는 인간 안에 있는 동물의 감각적(sensual) 양상과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운동과 생성의 표현의 물리적(physical) 양상을 표현한다. 들뢰즈는 인간 이미지를 파괴하기 위해 그리고 베이컨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탈육화된 비명(scream)과 고기(meat)로서 절개된 살(flesh)과 같은 "비인간적 생성들"의 지각들을 유발시키기 위해 베이컨이 살과 뼈를 사용하는 것에 특히 관심을 가진다. 유사하게, 베이컨의 작품의 (들뢰즈가 "다이어그램"(diagram)이라고 부르는) 배경(ground)과 형상(figure) 사이의 긴장은 모든 정체성에 대한 조건인 근저에 놓인 혼돈 상태(chaotic state)의 감각(sense)을 우리에게 준다. 베이컨과 배경에 대한 그의 사전준비의 물리적 양상이 그것을 지성적 affect에 대립되는 감각적(sensual) affect로 표현하는 반면, 들뢰즈는 그 상태를 개념화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표현으로서의 예술과 철학의 역할에 대한 진전된 정의가 된다. 그들은 카오스로부터 일관된[안정된] 지평을 끌어올리기 위해 개념들 혹은 지각들의 창조에로 어떤 생성들을 집중해야 한다: "다이어그램이 그림 전체를 삼켜버려서는 안되고, 공간과 시간 내에서 한계 지워져야 한다. 그것은 조작할 수 있고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 폭력적인 수단은 해방되어야 하고, 격변(catastrophe)은 모든 것을 침수시키지 말아야 한다"({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71쪽[영역본]).
예술과 철학의 상보성은 들뢰즈의 영화에 관한 두 권의 책, {영화 1: 운동-이미지}와 {영화 2: 시간-이미지}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들뢰즈는 퍼스(Charles Peirce)의 기호론(semiotics)에 의해 고취된 시간과 운동에 관한 영화적(cinematic) 기술들의 신중하고 포괄적인 분류와 베르그송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논문들의 급진적 독해를 결합시킨다. 그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 즉, 행위*(acts)에 의해 야기된 공간적 관계들에 있어서의 변화를 포함하는 영화적 이미지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의 보다 심층적인 특질들(characteristics)을 소통시키는 영화적 이미지 ― 라는 최초의 부류들을 가져오기 위해 베르그송의 직관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의 초기 희극은 서로 다른 운동-이미지들 사이의 기대치 않은 연결들(links)에 의존한다; 우리는 특정한 운동-이미지 ― 예를 들어, 주먹질 ― 로부터 특정한 액션(action)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운동-이미지에 연결되는 그 작용은 그러한 기대들을 혼란시킨다 ― 그 주먹질은 키스와 눈꺼풀의 파닥거림으로 응수된다. 또는 오손 웰즈의 거울의 사용에 있어서는, 시간-이미지와 이미지들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본성이 부각된다; 거울에서 장면의 반영은, 단일한 실제 이미지의 단순한 개념이 거울의 사용에 의해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하게 되는 이중적 현실(reality)을 창조한다. 비록 들뢰즈는 이미지의 두 부류들에서 지각에 우선권을 주지만, 우리는 감동 받으며(be affected) 액션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지각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이미지는 액션에 우선권을 주며 따라서 운동에 우선권을 준다. 반면 시간-이미지는 우리가 시간의 본성과 현실에 대한 그것의 효과에 대해 배울게 되는 관조적 수동성(passivity)으로 우리를 이끈다.
영화에 관한 들뢰즈 저작의 첫째 권은 운동에 집중하며, 둘째 권은 시간에 초점을 둔다. 그럼에도 두 책은 영화사에 관한 논제(thesis)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시간-이미지에 우선권을 주려는 논의(argument)라는 점에서 또는 영화가 현실에서의 시간의 원초적 역할을 드러내주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연결되어 있다. 첫째 권의 끝부분으로 가면서, 들뢰즈는 로버트 알트먼(Robert Altman), 존 카사비트(John Cassavetes)*, 시드니 루밋(Sydney Lumet)*의 영화들에서 운동-이미지의 역설적인 극한-경우들(limit-cases)을 숙고한다. 그는 액션-상황-액션(여기서는 액션이 상황에 응답을 하고 새로운 상황을 촉발시킨다) 또는 액션-상황-액션이라는 구조들에 따라서는 상황들(situations)이 액션들에 의해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경우들에 관심을 가진다. 오히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다른 이미지로의 이동(shift)은 적어도 의식적 행위의 관점에서는 무작위의 특성(property)을 취한다; 액션은 어떤 상황으로 되지도 않을 것이며, 혹은 상황은 그에 상응하는 액션이 부족할 것이다. 방랑하는(wandering) 로드무비 또는 더 정확하게는 끝없는 여행의 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이 분해(disintegration)의 경우이다(예를 들면,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영화에서). 여기서, 액션의 종합하는 역할은 자기-좌절(self-defeating)이다. 비록 각 운동-이미지가 풍경을 통한 방랑에 의해 이웃하는 운동-이미지에 연결될지라도, 방랑의 행위는 그 자체 목적이 없다. 액션은 공간의 더 심층적인 지각 ― 그것을 통해 영화가 운동한다 ― 의 측면에서 이미지들의 펼침(unfolding)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으며, 영화는 운동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풍경을 지각하는 다른 방식과 관련하여 시간에 관한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 지각이 액션의 그리고 운동-이미지의 부정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풍경은 그것을 통해 방랑하는 이들에게 입력되며 목적적으로 행위하려는 그들의 의지를 부정한다. 들뢰즈는 운동-이미지의 영화의 이 위기 ― 여기서 영화는 "플롯을 상실한다" ― 를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화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출현과 연관시키기 시작한다. 사실, 영화에 대한 그의 작업은 새로운 물결[누벨바그]에 대한 이 논제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영화의 새로운 물결은 운동-이미지를 넘어 시간-이미지에 주어진 우선권의 측면에서 정의된다: 운동의 특성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행위들은 시간의 특성들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되는 관념들에 자리를 내준다.
영화에 대한 연구는 들뢰즈로 하여금 표현의 개념을 시간과 공간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베르그송의 직관들을 개척하는 급진적 기획인 한편, 또한 산업적 스케일에서 운동에 관한 전통적 환영들의 창조로서의 영화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이다.* 들뢰즈는 영화감독들이 어떻게 더욱 다양하고 효과적인 시선들(views)을 표현하는지를 ― 예를 들면,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들뢰즈가 좋아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 코믹한 주인공의 반직관적인(counterintuitive) 액션의 연장(extension)으로 세계를 환원시킴으로써 코믹한 상황들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 주목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객관적인(objective), 상식적인(commonsense) 시선들을 확장하며 또 깎아 내린다. 키튼의 영화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습들을 무시한다: 주인공은 거대한 거리들(distances)을 즉시 뒤덮으며 복잡한 기계장치(machinery)를 단순한 사적 메커니즘으로 바꾼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세계를 작은 마음(mind)의 반영으로 만든다. 만일 영화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면 그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시간과 공간의 경험, 즉 상식적인 시선들을 더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들뢰즈는 위대한 감독들을 그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다른 시선들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분류한다. 그 표현이라는 점에서의 각각의 발견은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채택된다;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논의는 아직 고려되어 본적이 없는 형식들의 발견과 병행하여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업을 플래시백(flashback)에 대한 다른 사용들을 통해 시험한다. 그는 어떻게 요제프 만키비츠(Joseph Mankiewicz)가 플래시백을 ― 과거의 사건들의 기록들로서 미래에 회상되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억(memory) 그 자체의 창조에 대한 기록들로서 ―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때로 플래시백은 무언가 일어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회상(remembrance)의 행위로서, 그것은 미래의 기억의 창조를 그 특성들 중 하나로 보여준다: 플래시백에서, 그들은 무언가를 회상하기로, 미래를 위해 그것을 기록하기로 결정하며, 이것이 그들의 행위들을 설명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되돌아보는(look back) 행위로서 뿐 만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look forward) 창조적 행위로서, 기억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이것은 과거와 미래의 측면에서 현재에 대한 정의가 된다; 현재는 회상의 행위인 동시에 미래로의 투사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그의 철학을 단순히 영화제작에 대한 답변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영화에 대한 그의 논제들은 표현, 시간 그리고 공간에 대한 그의 이론들을 영화에 적용시킨 것을 뒤따른다. {영화 1}의 첫 번째 장에서, 운동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단순한 이동(displacement)과는 대립되는 강도의 표현으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운동은 의자에서 침대로의 등장인물의 이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이 이동을 촉발시키는 강도를 표현하는 그 방식 ― 예를 들면, 욕망(lust)의 고조 ― 에 있다. 따라서, 운동은 순간들(instants) ― 즉, 시간 속에서 움직임 없는 컷들(의자 위치, 침대 위치) ― 에 관련해서 정의되지 않는다; 운동은 질적인 변화들 혹은 강도들(욕망함)의 측면에서 정의된다. 이제 이 정의는 정적인 컷들로 주어진 이미지들의 연속(succession)으로 그 정의를 돌리기 위해 영화에 적용된다; 오히려, 영화는 질적인 변화들과 결합한 이미지들이라는 의미에서,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구조이다. 운동-이미지에서, 지각들과 affections의 집합은 행위를 요구한다; 시간-이미지에서는, 관념들이 요구된다 ― 또 다시 지각들과 affections의 집합에 의해.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과제는, 이 이미지들이 우리를 공간과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들 수 있는 그런 다른 방식들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예술의 혁명적 과제에 대한 들뢰즈의 믿음이 부각된다 ― 위대한 감독들은 공간과 시간의 확립된 감각을 저해한다. 서사(narrative)와 소통의 부차적 역할에 비해 감각들과 관념들의 일차적 역할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러하듯이: "영화는 지성적인 소재를 밖으로 드러낸다. 마치 그것을 통해 언어가 그 자신의 '대상들'(의미 단위들과 의미 작용들)을 구성하는 전제되어진 무엇, 혹은 조건, 필연적인 상호연관처럼"({영화 2}, 342쪽). 그럼에도, 들뢰즈가 이 위대한 영화를 희귀하며 멸종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는 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영화는 그가 방어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다("영화적 생산에서 막대한 무능력한 비율은 장애(objection)*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철학과 특정한 예술가들 및 예술 형태들에 대한 작업과의 연계를 넘어, 들뢰즈는 또한 그의 작업과 바로크의 양식 사이의 평행선({굴곡: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바로크에 대한 중요한 연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크 미적인 것과 17세기 합리주의 철학, 특히 라이프니츠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에 대한 독해를 전개하는데, 거기에서 굴곡[겹, 주름](fold)이라는 개념은 합리주의와 라이프니츠의 체계 내의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해명을 제공함으로써 단자론(monadology)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각 모나드[단자]의 개별성(individuality)이자 보편성(universality)은 수학적인 곡선 위에서 특이한 굴절들(singular inflections)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진다; 즉, 곡선 위에는 특이한 인접r[근접](neighborhood)을 정의하지만 또한 전체적으로 곡선의 특성(property)을 정의하는 굴곡이 있다: 곡선은 세계가 각 모나드 속으로 접혀지는(folded into)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인접 속으로 접혀진다. 이러한 미분 수학, 철학 그리고 미학의 결합은 들뢰즈의 작업에 전형적이며 {차이와 반복}에 기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하게,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정신의 육체에로의 펼침(unfolding)과 육체의 정신에로의 접음(folding)으로 설명되어진다. 바로크의 예술은 라이프니츠의 굴곡에 대한 작업과 평행하는 미학을 함축한다. 상이한 실체들과 상이한 영역들 사이의 모순들은 굴곡들을 통해 해결된다; 따라서 천상과 세속은 바로크 교회의 평면도와 정면도에 있는 굴곡들을 통해 연관된다. 그래서 질료는 바로크 교회화(painting of fabric)에서처럼 예술에서 굴곡들의 무한한 다중화(multiplication)로 포착된다.
들뢰즈의 미학에 대한 가장 근접한 저작들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굴곡: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는 아직까지는 너무 최근의 것이라[새로워서]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바뀌기 시작하는 중이지만(Boundas, 1994). 들뢰즈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에서 가따리와 함께 한 작업은 어떤 스캔들의 성공(succès de scandale)을 거두었으며, ― 이탈리아에서는 극단주의 정치학과 테러리즘에 대한 추정된 영향으로 인해 그 책이 금지될 정도로까지 ― 1968년 이후 프랑스 철학의 극단주의의 한 예로 받아들여졌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저작에 대한 훌륭한 주석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단지 최근의 일이다. 그럼에도, 엄밀하며 역사적 감각이 있는 철학적 개념들과 결합한 들뢰즈의 미학의 풍부함과 독창성은 유력한 미래를 약속한다. 이것은 "언젠가 이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는 푸꼬의 악명높은 반어적 진술로 요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