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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전투란? 백촌강전투(또는 백강전투)는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망하자 백제 군부와 민중들이 봉기 하여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의 정점인 663년 8월27일~28일 이틀간 일어난 대규모 전투입니다.
잃어버린 백제의 여러 성을 되찾는 등 어느정도 성과를 올린 백제부흥운동 당시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일본의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 재위 655~61, 여성천황)은 일본에 와 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백제부흥군의 수장으로 귀국시키고, 당시 일본의 전 국력을 총 동원하여 배 1천 척에 2만7천명의 병사를 동원하며 백촌강전투를 2년간에 걸쳐 준비합니다. 이를 위해 사이메이천황은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배를 건조하던 북규슈까지 가서 구원군을 지휘하려하였고, 오사카까지 가서 직접 무기 준비를 챙기고,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원행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사이메이천황은 모병을 하기 위해 갔던 지역에서 출정을 1년 앞두고 급사를 하고 맙니다.
어머니인 사이메이천황이 급사하자 황태자인 나까노오에황자(후에 덴지천황)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황위계승식도 미룬채 출병준비를 계속합니다. 이렇게 무리하다 싶을 정도의 국력을 쏟아 준비하여 일본은 출병을 하여 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백제부흥군과 합류하여 나당연합군과 일대 결전을 벌입니다. 그게 663년 8월27일~28일간 이틀간의 백촌강전투입니다.
당시 일본서기 기록에서는 신라군과 백제군은 각각 육상에서 해전을 벌이던 당군과 일본군을 응원했다고 합니다.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백제 일본 연합군은 무참하게 패배합니다. 중국의 당나라시기의 역사책인 구당서에도 이틀간의 전투에서 일본의 전함 1천척 중 4백척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때 그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바닷물이 피빛이었다고 합니다.
기록만 보면 불타고 남은 6백척에 패배한 일본군이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태우고 일본으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 일본 내의 백제문화가 빠르게 유입된 정황도 있습니다.
아무튼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일본까지도 정벌하러 올 것으로 일본은 예상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수도를 바닷가인 오사카에서 상대적으로 침공이 어려운 내륙의 아스카로 천도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백촌강전투를 지원하던 일본의 행보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무리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이를 두고 황실의 계보와 인척, 정권의 핵심들까지 모두 백제계였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는 '조국부흥전쟁설'도 있고, 일본 학자들은 거꾸로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기에 그랬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현재 가장 논리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백제, 고구려 침공 후 일본까지 넘볼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일본의 결정이었다.' 입니다만 진실이 참 궁금한 대목입니다. ] |
당시 이 청동 비로자나불을 조성하느라 일본 전체의 청동과 금은의 재고가 바닥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도금을 하기 위해 황금 28kg에 수은이 130kg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도금 방법은 황금과 수은을 함께 녹여서 바른 후에 수은이 기화되면서 도금이 되는
방식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로 인해 많은 백제계 도래인 도금 기술자들이 수은중독으로 사망
했다고 전해집니다. 심지어는 쇼무천황도 수은중독으로 인한 병사설이 있을 정도지요.
752년 5월 26일의 대불 개안 공양회에는 신라, 중국, 인도, 캄보디아의 고승과 외교사절들을
초청하는 동아시아의 국제행사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대불 점안은 인도의 승려인 보리선나가
맡아서 진행하였답니다. 보리선나가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 행기 스님이 마중나갔는데,
행기 스님은 도래인 출신으로 동대사를 건립하는데 막재한 재정을 민중들로부터 후원 받는데
큰 공을 세운 '동대사 4성'중의 한분입니다.
동대사 4성은 쇼무천황, 개산주지인 료벤승정, 개안을 맡았던 보리선나, 그리고 권진(기부)을
맡은 행기 대승정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동대사 대불전이나 비로자나 청동대불은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닙니다.
대불전 안의 것 중에 창건 당시의 것은 부처님아 앉아계신 좌대 정도라고 합니다.
752년 점안식을 마친 대불전은 100년 후인 855년 큰 지진으로 대불이 쓰러지면서 머리에 큰
손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헤이안시대 말기인 1181년 무인정권이 자기들에게 항거하던
나라의 불교세력들을 토벌하기 위해 처들어왔을 때 동대사는 이웃한 흥복사와 거의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각 사찰들이 보유한 승병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보니 무인정권이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벌인 일이지요. 그때 군사들을 피해 대불전 안으로 들어와서 2층까지 꽉 채운 2천명의 승려와
민간이들이 모두 대불전과 함께 불에 타 죽고 대불도 녹아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복원에 들어가 1185년 다시 개인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380년 후인 1567년 일본 전국시대 때 다이묘들간의 전쟁으로 다시 한번 불타고 맙니다.
다시 복구에 뜻을 둔 고케이 스님이 에도막부의 허가를 얻고 권진(기부)행각을 별여 1692년 다시
대불개안식을 열면서 대불을 다시 복원하여 봉안합니다. 대불전은 그로부터 17년 후인 1709년에
완공되어 높이 50m 폭 57m로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물로 지금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창건 당시보다는 재정부족으로 대불전은 70% 크기이고, 대불도 높이가 1m
작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대불전의 건축방식에 대해서는 무척 논란이 큽니다.
엄청난 지붕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 수많은 목재들이 결구를 매우 복잡하게 겹겹이 연결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답니다.
특히 1709년에 완공된 지금의 대불전은 동양에서는 보기 힘든 방법까지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톤의 기와 무게 때문에 처마가 조금씩 처지면서 처마라인이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졌다고 합니다. 이를 막기위해 1882년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를 했지만 그래도 버티지
못했다고 하네요. 결국 20세기 초반에 다시 완전 해체수리를 하게 됩니다.
이때 유럽의 건축기술을 교육 받은 사람들이 대거 동원되어 철골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고, 거대한 나무 한그루로 사용했던 기둥들을 여러개 나무를 합쳐서 철물로 묶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또한 기와의 수를 줄여서 지붕무게를 12% 감소시켰다고 하네요.
하지만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743년 동대사 대불 칙령 발표
752년 점안식 - 신라, 중국, 인도, 캄보디아 승려 모두 모인 동아시아 국제행사
855년 대지진 - 대불 무너지고, 강당, 남대문 등 무너짐
1181년 무인정권들의 난입으로 대불전+대불 전소
1185년 2차 개안식. 조겐상인이 권진.
1567년 전국시대 다이묘간의 전쟁으로 전소
1697년 코케이스님이 권진행각을 벌여 재건립
1709년 3차 개인식(기존보다 대불전은 70% 수준, 대불은 1m낮게 완성)
1882년 지붕무게 견디기 위해 버팀목 삽입공사
1906년 전면 해체 수리 시작
1915년 대불전 낙성식
1980년 대대적인 지붕수리
대불전 내 동쪽 기둥 중에 하나 밑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공부를 잘 한다고 하여
아이들이 줄을 서서 통과하려는 진풍경이 벌이집니다. ^^
대불전 앞에 모셔진 어느 스님의 목상입니다.
만지면 복이 온다는 것을 반질반질한 부분을 보고 알 수 있지요.
복 받으셨는지는 나중에 알려주세요. ^^
대불전 관람을 마치고 우리가 서둘러 가는 곳은 동대사의 명물로 꼽히는 이월당입니다.
해질무렵이라 시기적으로도 딱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는 길목에도 사슴들이 우리를 자주 멈추게 합니다. ^^
나무들의 뿌리가 왠지 사람들의 삶처럼 고단하게 느껴지는 길을 따라 갑니다.
화장실 타임에 잠시 단체촬영을 합니다.
아, 지금 보니 제가 못보고 셔터를 누른 부분이 있었군요.
앞으로는 자제 부탁드립니다. ^^;;
오른쪽의 2층 건물이 동대사의 명물로 꼽히는 이월당입니다. 한번 올라가 보죠.
아, 올라오는 순간 다들 탄성을 냅니다.
대불전의 지붕과 아스라히 멀어지는 능선의 파도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정말 시간을 잘 택해서 온 것 같습니다.
고층 건물이 없는 일본 도심의 원경은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수직보다는 수평에 더 안온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동대사 이월당의 낙조를 즐기고 계시더라고요.
동대사 대불전의 황금색 치미와 참 잘 어울리는 명풍광입니다.
파노라마도 촬영해보니 동대사의 수많은 전각들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참 장관입니다.
일몰의 대불전 지붕. 많이 줄인 기와 무게만도 1,500톤이 넘는다죠?
일본에서는 길조로 받아들이는 까마귀 떼와 한폭의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이번 일본 여행에서는 얼마나 많은 감탄사를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다시 버스를 향해 갑니다.
남김없이 그물처럼 중생을 구제한다는 불공견삭관음을 모신 삼월당입니다만,
디테일이 대단하다는 불상이었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늦어 문을 닫았네요. T.T
마음 푸근한 길을 걸어 다시 버스로 향합니다.
날은 이미 어둑해지고....
동대사 주차장에 대기하던 우리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다 잠시 패밀리마트에 들려
이날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합니다.
먼 길을 달려 다시 우리집에 왔습니다. 역시 요시노산의 치쿠린인 료칸입니다.
오늘은 구워먹는 고기와 다양한 찬들이 카이세키로 서빙됩니다.
바쁘게 다녔던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아요.
저는 삼각대를 갖고 밖으로 나왔어요. 반달이 휘영청 밝은 밤.
야마토 3대 정원을 보유한 치쿠린인의 밤을 담고 심었거든요. 하늘의 별도 총총합니다.
왼쪽의 저 문으로 들어가면 야마토 3대 정원인 군뽀오 정원의 입구가 나옵니다.
야간의 모습은 어떨지..
오른쪽 료칸에서 비쳐 들어오는 빛으로 나름 환합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과 참 아름답네요.
유카타는 일본 숙소에서 참으로 요긴하죠.
촬영을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비에서 뵈어서 찰칵! ^^
아침에 대중탕으로 가는 길입니다.
탕으로 가는 길에도 이런 정원을 마주하게 됩니다.
탕의 노천탕을 파노라마도 촬영한겁니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남탕과 여탕이 아침 저녁으로 바뀝니다.
입구에 보통 걸린 파란, 붉은 천도 없어서 자칫 혼동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다른 탕에는 노천탕이 없더라고요.
격자무늬로 보는 군뽀오정원입니다.
아침 식사하러 가는 길에 보이던 병풍화의 그림을 보니 에도시대 때의 참근교대제 모습을 그린 것 같습니다.
참근교대제란 도쿠가와 막부 시절인 에도 시대 때 각 지역 다이묘(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1년씩 영지와 에도을 오가면서 정무를 보게 한 것입니다. 본인의 영지로 가서 일을 할 때는 자기의 부인과 자식을
에도에 인질로 맡기고 가야 했죠. 그 덕에 에도는 상대적으로 긴 기간동안 정권을 유지합니다.
이때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오갈 때 수많은 무사와 가신들을 대동하면서 오갔는데, 이 덕분에 전국의
교통로들이 정비되고, 교통로 주변의 상권이 활성화되어 지역경제활성화를 도모하게 되었다네요.
상대적으로 다이묘(영주)들은 에도를 오가면서 쓰는 비용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풍 그림에서는 현민님 말씀처럼 여성 무사들의 그림이 있어서 신기해 보였습니다.
일본의 료칸에 묵어보면 꽃꽃이 하나 무심한 것이 없지요.
이틀째 아침 야마토 3대 정원이라는 치쿠린인의 군뽀오 정원을 제대로 보기 위해 정원 탐방을 나섭니다.
정원 탐방로를 따라 올라가면 이렇게 치쿠린인을 내려다보는 곳이 있습니다.
자, 이 길을 따라가면 숨어 있던 명소가 또 나옵니다.
그건 다음 11편 후기에서... ^^;;
첫댓글
동대사 입구에서 부터 몇 번을 놀랐어요~
사람이 많아서 놀라고
상상이상으로 컷던 대불전에 놀라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압도하던 불상의 크기에 놀라고
이월당의 일몰에서
이 압도하는 모든것들을 내려 놓게 만드는
일몰의 고요한 있음에 놀라고..
예상하지 않았던 한 순간의 " 아! " ..
그 때가
사람이 생각을 멈추는 시간이고, 성성하게 깨어 있는 때이기도 한데..
동대사는 순수하게 깨어있음을 체험하게 하는 순간들였어요~~..
오늘은 후기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또 놀라네요~..
동대사의 연대를 보며
놀라는 이 순간..
복을 받으거 맞네요~~..ㅎㅎ
발견이님~~
감사드립니다~~
크다고 아~~주 크다고 딱 작심하고 봤는데도, 크긴 크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크기만 하고 말았어요. ㅎㅎ
진짜 느낌은 이월당에서... ^^
그런데 지금의 기술로도 동대사 대불전의 지붕을 받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1300년 전 사람들의 기술에 놀라고 맙니다.
심지어 지금의 대불전은 초창기 것의 70% 수준이라는데 말이지요. 목조건축물이 필요없게 된 현대의 기술 퇴보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런데 지금 캐나다 등에서는 목조 건축 빌딩들이 조금씩 유행을 하려고 한다네요. 세상은 참 수레바퀴 같아요.
소중한 여행기 잘 보았읍니다
내용이 너무 감동 하고 좋아 자료좀 퍼 가겠읍니다
감사 합니다
좋은 날 되시고요. ^^
이월당에서 바라보는 겹겹의 산의 모습이
부석사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산들의 모습과 흡사해 보이더군요.
이월당이 있어서 동대사가 더 빛나는건 아닐지~~~
부석사 생각이 많이 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월당의 석양은 이번 여행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
이월당에서 마주한 일몰은
이번여행의 큰 축복이었지요
아스라히 스러지는 태양빛에
겹겹 능선의 스카이라인???도
일품이었구요
동대사
그 많은 사람들속에서
떠밀리듯 흘러가다ㅎㅎㅎㅎㅎ
일본 청소년들에게도
입시는 어김없는....중압감인가보더군요 기둥아래
hole을 보니
저처럼 떡대는 ㅠㅠ
일본에서
안태어나서 참 다행이었어요ㅋㅋㅋ
+.+
아름다운 이월당의 석양이었어요.
사람들이 많지 않으면 그 구멍에 저도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아예 엄두가 안나더군요.
사람구경 제대로 했어요. ^^
여행은 언제나 설레임의 연속이지만, 입이 딱 벌어지는 어떠한 풍경앞에서는 눈물이 나기도 할 만큼 감동이라게 밀려 올때도 있는데..
찰나의 감동을...이월당에서 맛볼 수 있었습니다~
후기를 보면서 다시 떠올려 보니..그 감동이 조금은 밀려오는 듯 합니다~
이번 여행은 무언가 조금 부족한 여백이 있고, 그 다음에 그걸 한꺼번에 채워주는 또 무언가가 휘릭하고 나타나는 것 같았어요.
동대사 대불전의 아쉬움을 이월당이 메워주고, 금각사의 모자란 것을 등지원이 채워주고, 등지원이 미치지 못한 정신적인 부분을 다시 용안사 석정이 담아내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번에 좌악 파노라마로 펼쳐낸 인화사(닌나지)의 어전 정원은 그야말로 감동의 쓰나미였습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