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다가 드디어 기회가 생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읽게 되었습니다.
읽으면서 이 정도로 글을 쓰실 수 있는 분이 앞으로 일본에 더 나타날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전체적으로 책의 내용과 구성이 매우 풍부하고 알찼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하신 분들의 노고가 새삼 느껴지더군요(이민웅 교수님, 김유성 교수님. 근데 설마 밑의 대학원생들(근데 이분들 제자면 해사생도나 해군장교급들) 도 동원하신 건 아니시겠.......)
이걸 이리저리 핑계대다가 이제와서야 품절되서 구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도서관에서 겨우구해 읽었다는게 새삼스래 창피하기도 했고 이래저래 늦게 읽은게 많이 아쉽더군요.
이 책의 가치는 정말 읽지 않으면 모르실 것이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는 것 보다는 도서관에서 한 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리고요.
여기서는 다만 정말 사소한 오류(?) 2개정도와 관점차이(제가 감히 그럴 깜냥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감사를 설명하시면서 '순찰사'라고도 부른다라고도 한 점입니다.
경기감사(감사에는 순찰사, 관찰사, 방백과 같은 별칭이 있음, 한 도의 행정 책임자로 군사권도 겸함, 종2품) -61p-
저 '순찰사'는 엄연히 전란이 났을때 별도로 파견되는 사람의 직분을 일컫는 말 이었습니다. 다만 명종조에 을묘왜변 겪고나서 전란났을때 빠른 방어체계 수립을 위해 관찰사가 순찰사 겸임하도록 정책을 하기는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선조때가면 또 원래대로 파견하는 걸로 바뀌는등 좀 복잡해집니다. 근데 그렇다고는 해도 감사의 다른말이 관찰사처럼 순찰사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참모본부 조선역'에는 이런 표현이있네요.
"지방의 행정은 전국을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경기, 평안 8도로 나누고 순찰사를(또는 감사라고도 칭하고, 관찰사라고 한다) 두어 한 도의 정무를 장악한다...."
제가 그 시절 문서 읽는 법을 잘 몰라서 대략적인 해석입니다만 이런 의미의 문장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건 역자분의 실수인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정해왜변을 을묘왜변 석달전인 2월에 발생했다고 한 것입니다.
"즉 수년전에, 왜구가 전라도의 손죽도를 침범해 그곳의 변방장수 이대원을 살해하고 주민을 조예로 잡아간 사건을 들추어냈다...." -25p-
이 문장에서 '수년전에'에대한 각주에서 "1555년 을묘년에 을묘왜변보다 석 달 전인 2월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라고 되어있던데 이건 아마 번역하시는 분이 바쁘게 하시다 보니 실수를 하신 것 같습니다 ^^;; 다들 아시다시피 손죽도 침범은 1587년 2월에 벌어지는 사건이지요.
관점의 차이에 대해서는 번역하신 분도 약간 지적아닌 지적(?)을 하신 것 같은데, 당쟁에 대한 부분입니다.
조선 관료의 파벌 싸움 - 사화·당쟁 - 편에서, 역자분은 당쟁에 대한 주석에서
"전체적으로 식민사관의 한 가지인 당파성론을 그대로 계승한 시각이라 말 할 수 있다" -27p-
라고 평가를 하시던데, 저는 되려 이 부분에서는 키타지마 만지 교수님의 해석과 관점에 동의합니다. 당시 동서갈등이 있었던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다만 저와 관점차이가 나타난다 느끼는 부분은
"유성룡도 정탁도 이원익도 동인이었지만 한 사람 윤두수만이 서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의 높은 평판과, 서인이 지원하는 원균은 수군 장수로서 부적격자라는 의견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 같은 달 9일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는 원균을 수군절도사로 재기용 할 것을 국왕에게 부탁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조선 수군 사령관 결정을 두고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머리를 들게 되었다...." -188p-
전체적으로 (저혼자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습니다만) 당쟁이 있었다는 것을 앞에서 이야기를 하시고, 이순신 파직과 원균기용에서 당파싸움이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원균기용은 패착이었다고 내내 주장하십니다)
특히 서인이었던 윤두수를 언급하시고 그 동생인 윤근수의 상소를 언급하시면서 동서갈등을 구도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원균에 대한 평가는 키타지마 선생님께서도 언급하셨지만 동인이었던 정탁(신구차를 쓴 그 정탁이 맞다)도 원균의 해전능력은 쓸만하다고 한 적이 있고, 동인이었던 이원익도 도체찰사가 된 시점에서는
"큰 배로는 물마루를 넘어 들어올 수 없으므로 저들이 다 새로 만들었으나 우리 배만 못한데, 튼튼하지는 않더라도 바다를 건너는 데 편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기술은 매우 정교하지만 주사는 그들도 겁을 냅니다. 그들의 배는 매우 얇으므로, 우리 배와 부딪치면 부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원균(元均)은 주사로 용감히 싸웠으므로, 윤두수(尹斗壽)가 신에게 반드시 그를 쓰게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소신도 반드시 그렇게 하려 합니다."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17일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29년 11월에는 왜적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조정이 다들 공황맞은 상태여서 그런 감은 있는데, 동인이어서 지지한다 서인이어서 지지한다는 구도가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았던 상태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요시라 사건 터졌을때는 동서를 막론하고 정말 소수를 제외하고서는 이순신을 성토하였고요(유성룡 조차. 유성룡이 이순신을 지켰다는 건 징비록에 기록된 거고, 실록에서는 좀 다릅니다) 그리고 이순신 체직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서인이었던 윤두수는 이순신과 원균을 둘이서 같이싸우게 하자라는 가장 온건한 방책을 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순신 체직과 원균기용은 당쟁의 결과물이라고 하기보다는 다수의 중론이 꼭 옳은 것이아니다라는 사례로서더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권율부터 사명당 유정도 부산진격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던 시절)
사실 이런부분들은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의 충실함에서 본다면 정말 사소한 문제일거라 생각합니다만 다만 이런 의견을 가질 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한번 이야기를 드려봤습니다.
현 한일관계상황에 있어서 이런분의 부재가 더더욱 아깝다고 느껴지는 후기의 일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 주지하는 바와 같이 20세기 전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한 불행한 역사가 있다. 그리고 일본제국이 붕괴하고 한국이 독립한 후 이미 반세기가 흘렀다. 그 사이에 양국의 우호를 심화하려는 노력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무책임한 정치가들의 언동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의 상황이 좋을 때에 말로만 그러한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많은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다. 그 뿐인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이웃 나라에 침략을 거듭한 사실을 역사에서 말살 ·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나서 달성할 수 있었다고 왜곡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다. 내 생각에는 양국의 우호를 추진한다는 것은 각자가 가진 독특한 멋 / 개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역사 연구자는 양국 관계의 역사적 사실을 흔들림없는 실증을 통해 구축하고, 역사를 올바르게 전달하며, 이것을 통해서야 말로 황국사관과 그 쌍둥이 형제이기도 한 식민사관도, '조선정벌' 사관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본서는 그러한 시도의 하나인 것이다.....
첫댓글 임진왜란 연구사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좋은 저작이 번역된지 몰랐네요.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특히 후기가 감동적이네요.
사실 이 책도 나온지가 꽤 되었죠 2008년도에 나왔으니 ㅜㅜ 빨리 접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접한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후기는 참 역사학자라면 어떻게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지 알려주는 아주 훌륭한 말씀이네요.
그나저나 원균이놈, 함대를 지휘하는 제독으로서는 바보천치였지만 판옥선 하나를 지휘하는 함장으로서는 괜찮았던 걸까요? 암만 봐도 이새끼는 육군으로 갔어야 잘 싸웠을 것 같은데, 왜 배를 타게 되가지고...
무대포 돌격스타일로 힘은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지휘관으로서는 전혀 꽝이었던건 확실합니다. 특히 수군처럼 전문지식을 요하는 건;; 근데 당시 조선 군 편제상 육군도 되고 수군도 되고 다해야하는 거여서^^;;
함경도에서 여진족하고 싸우다가 갑자기 발령나서 남쪽에서 수상전 지휘하는 식이니 ㅎㅎ 뭐 잘되면 김수문 이순신 처럼 되는 거지만요 ㅋ
1. 키타지마 교수님 다른 책을 보면, 순찰사에 대한 설명이 따로 나옵니다. 아마 일시적 오기였는 듯.
2. 근데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조선정벌 사관을 두들겨 팬 것이 만선사관이라고 욕을 먹는 이케우치 히로시.
키타지마 교수님은 이케우치 히로시의 연구 결과도 많이 인용하십니다.
https://blog.naver.com/halmi/221716933868
1.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블로그에서 소개해 주실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2. 세상일도 그렇고 참 여러가지 아이러니 한 일이 많은 것 같네요 ㅎㅎ
1. 왕이 처낼 생각으로 가득했으니 뭐..;;;;
2. 외국인이 보기에는 이게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될 수 밖에 없죠.. 당장 목숨줄이 누구한테 달려있는지 생각하면.. 농담아니라 이순신이 죽기 싫어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이게 절대 감당이 안될 상황이니까요..
1. 이순신 쳐낸게 두고두고 씹혀야 할 패착인건 맞는데, 저게 세간에서 흔히 알려진 것 처럼 이순신에 대한 질투때문인지, 아니면 왜구의 재침소식에 집단공황상태가 발생하고 거기에 요시라의 떡밥이 더해진 전략적판단미스의 결과인지를 생각해보는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둘다인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후자가 더 큰 요인이지 않았을까요 ㅋ)
2. 해석이야 국적같다고 다 같은 것도 아니니까요 ㅎㅎ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이민웅교수님 보다 오히려 키타지마 선생님의 관점에 더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