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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지금이야 거의 사그라졌다고는 해도, 한때 어컬트(Occult) 분들이 가장 선호하고, 또 가장 떠받들었던 무술은 팔극권이고, 또 떠받드는 명인(名人)은 이서문(李書文 : 1864~1934)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서문>
<출처 : 中国武術簡易人名辞典>
(진위 여부 불확실, CG 상상화이지, 사진이 아님.)
사실 초기의 어컬트 무인(武人)들의 대부분은 만화 권아(拳兒)나 팔극권과 연관된 분들이 적지 않았고, 팔극권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 열풍 덕택인지, 서림문화사의 <내공팔극권교범>이 갑자기 잘 팔려서, 출판사가 추가 인쇄를 해야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내공팔극권 교범(장세충 저, 서림문화사>
어쨌든 통신이나 비주류 계열을 통해, 자칭 팔극권사(八極拳士)라고 하시는 분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그분들에겐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이서문의 전설(傳說)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했던 적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악담(惡談)을 하는 속셈이 뭐냐며 화를 내신 분도 있고, 가만두지 않겠다며 경고(?)를 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직접 저를 찾아오겠다거나 만나자는 분들도 있었는데, 저로서는 무척 반가운 말이었지만, 그런 말들을 실천에 옮기신 분들은 단 한 분도 없었고, 오히려 제가 발품을 팔아서 직접 찾아다녀야만 했었죠. 어쨌든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점을 조사하는 일에는 나름대로의 의의(意義)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저는 팔극권과 이서문 노사에 대해 짚어보고자 합니다.
90년대에 팔극권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각종 전자 게임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가진 등장인물은, 팔극권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에서도 바로 짐작 가능합니다. 특히 아키라라는 등장인물(캐릭터)의 동작을 오씨개문팔극권의 오련지(吳連枝) 노사가 감수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 게임의 동작을 보고, 팔극권을 익히고 있다는 사람들까지 등장했지요.
<초기 버추얼 파이터의 아키라>
팔극권이 강하다거나, 혹은 팔극권을 한 무술인들이 강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이 고(故) 신창(神槍) 이서문 노사(老師)의 일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한데, 이서문 노사의 제자이셨다고 하는, 고(故) 유운초 노사의 대만 무단(武壇)에서 나왔다고 하는 정보와, 유명한 무술 연구가 마츠다 류우치(松田隆智)1) 씨의 정보를 근거로 내세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매체와 게임 등의 위력 덕분인지, 조금 지나자, 팔극권은 무적의 권법이요, 이서문은 천하무적이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지요. 심지어 일부 팔극권 팬들 사이에서는, 이서문 노사를 신격화(神格化)한다는 느낌마저 있었습니다.
<故 劉雲樵 老師>
(출처 : 中華民國八極拳協會)
그러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만화 '권아(拳兒)'일 것입니다. 고(故) 유운초 노사는 <권아>에서 유월협 노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마츠다 류우치(松田隆智)>
(출처 : BAB JAPAN CO.,LTD)
그런데 본인은 팔극권이라고는 책이나 자료를 통해서 본 것이 전부입니다. 팔극권을 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과 대련을 해 본 경험은 있지만, 팔극권 자체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는 사실 거의 전무(全無)하다 하겠습니다.
특히 책이나 자료 등을 보고 독학하고도, 종사(宗師)나 고수(高手)를 자처하시는 천재 분들과는 달리, 저는 책이나 자료를 보고 권법의 고수가 될 정도의 사람이 못 됩니다. 또한 '은거(隱居)해 계시는 신비의 팔극권사'에게 비밀리에 배울 수 있는 기연(奇緣?)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팔극권을 전혀 할 줄 모르므로, 팔극권이라는 무술에 대한 고찰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대신 이서문의 일화(逸話)를 자세히 고찰해보고, 중국 본토에서의 이서문 및 팔극권에 대한 인식과 평가 등에 대해서도 조금 덧붙이고자 합니다.
(2) 이서문의 일화는 과연 어떠할까?
많이들 아시겠지만, 이서문의 일화 중에서 유명한 것들 몇 개를 뽑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느끼는 상식적인 의문을 한 번 제기해 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일화
이서문이 방 한가운데서 허공에다 장(掌)을 치면 벽까지 흔들흔들 울렸다고 합니다. 벽 흙이 푸시시 떨어졌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의 집, 그것도 부자도 아닌 서민의 집은, 속에 짚이나 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세운 것 위에, 흙을 덕지덕지 발라서 지어놓은 초라한 움막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조금만 격한 동작을 하면 집이 쿵쿵 울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무척 가난했다고 알려진 이서문의 집이면 어떨까요? 그리고 현대에 지어진 주택이라도, 건강한 성인 남자가 며칠, 혹은 몇 주간 계속 벽을 치면, 집이 쿵쿵 울리거나 벽에 금이 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하물며 판자나 얼기설기 엮은 지푸라기 틀 위에, 흙을 발라 만든 당시의 낡은 집이면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2) 두 번째 일화
이서문이 진각(震脚)을 하면서, 땅을 밟으며 연습을 하면 도로가 푹푹 파여서 못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도로가 오늘날처럼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튼튼하게 잘 덮인 도로였을까요? 만화 '겐지(권아)'에서는 콘크리트로 된 도로라고 되어 있지만, 1900년대 초기만 해도 콘크리트는 귀한 것이었고 그 품질도 조악했습니다. 그런 콘크리트라면, 오늘날의 일반인들도 군화 정도 신고 온 몸의 체중을 실어서 같은 곳을 몇 번만 쿵쿵 찧어대면, 충분히 금을 가게 하거나 꺼지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3) 세 번째 일화
이서문이 유명하게 되자, 북경에서 두 사람의 도전자가 찾아 왔다고 합니다. 애써 도전을 사양한 이서문이었지만, 결국 거절할 수 없어 대결을 하게 되는데, 이서문이 일격을 가하자, 한사람은 두 눈알이 튀어나오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서문의 장(掌 : 손바닥)을 어깨에 맞자 견갑골이 부러지며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얘기일까요? 뒤에서 논하겠습니다.
4) 네 번째 일화
창주의 군벌(軍閥)이었던 하군장이 연회를 열었을 때, 이서문이 오니까 무술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무술가가 이서문을 보고는, 자그마한 체구라 대단하지 않은 듯 여겨 이서문을 얕보고, 비웃다가 이에 노한 이서문은 그에게 일격을 날렸고, 그는 벽까지 날아가서 처박혀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사실이라고 믿기는 힘듭니다만, 이런 일화들을 진짜라고 가정하면, 여기서 의문이 더 생깁니다. 다음을 보아주십시오.
(3) 관청에서는 뭘 하고 있었을까?
위에서 인용한 일화 외에도 이서문은 생애에 걸쳐 많은 사람을 시합에서 죽였다고 하는데, 대충 종합해보면, 적어도 8명 정도를 죽인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의 관청에서는 이런 '살인마'를 그냥 방치했다는 것일까요?
이서문이 활약한 시대는 생존 연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청나라 시대 말기에서 민국 초기, 즉 1900년대 전후입니다. 그리고 무술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무술인들에 대한 탄압도 심했던 청나라에서, 무술가끼리의 시합이라고 해서,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는 선례(先例)나 판례(判例)가 통용되었을까요? 그리고 이서문이 한 것은 분명한 사적(私的)인 싸움이었지, 결코 시합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던진 이런 질문에, 관청에서도 이서문의 강함을 겁내었기에, 감히 건드리지 못한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무협소설과 현실을 구분 못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그 당시의 공권력(公權力), 혹은 관청이 그렇게 허술했을까요?
일례로, 형의권(形意拳)의 유명인물인 곽운심은, 도적들과 싸우다가, 6연발 권총을 지니고 있던 도적 두목을 죽였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살인죄로 체포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도적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마을 사람들의 탄원과, 곽운심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관리의 처사로, 감형되어 3년간 복역하고 출옥했었습니다.
도적을 소탕(?)한 곽운심도 이러할진대, 사적인 '싸움'에서 상대를 치사(致死)케 한, 이서문이 면죄부(免罪符)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서문의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서문은 순전히 개인적인 싸움에서 상대를 죽인 것이니, 이는 분명한 살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라면 이서문은 폭행치사에 해당합니다. 그것도 우발적인 것도, 자력구제(自力救濟)도 아닌, 분명히 상대를 다치게 할 의도가 뚜렷한 이런 경우는 죄가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이서문이 잡혀서 감옥살이를 했다거나, 처벌을 받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조금만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분이라면, 이상하다는 걸 느끼실 것입니다.
(4) 당시 관청의 실태는 어떠했을까?
관청, 이해를 돕기 위해 경찰이라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사적(私的)인 싸움, 혹은 결투(?)에서 사람을 죽이면 대개는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한 가지는 경찰과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인 문제, 즉 죽은 사람의 유족(遺族)들과의 문제입니다. 운좋게 합의가 된다면 돈이나 기타 수단으로 배상할 수 있지만, 원한을 남기면 복수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중국인들은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불구대천(不俱戴天 : 같이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의 원수라는 말이 있는 것이죠. 이서문은 자신이 죽인 상대의 가족의 보복으로 독살 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는 병으로 죽었다는 반론도 나온 것으로 압니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이서문이 살아있던 시대는 민국 초기입니다. 당시 이서문이 활동했던 지방에는 '창현공안부'. 혹은 '창현공안국(沧县公安局)'이라는 게 있었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창현경찰서'쯤 될 것입니다. 민국 초기를 기록한 자료집이나 사진(당시에도 카메라가 있었습니다)을 보면, 유치장은 물론 사건의 자료 사진을 현상하고 보관하기 위한 곳인 듯, '암실(暗室)'도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창현공안국의 국술조, 즉 무술 경찰대라고 할 수 있는 조(組)의 3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사진입니다.
<滄縣公安局國術組>
(출처 : 文化精品庫)
생존 연대를 다시 한 번 보아주십시오. 고(故) 이서문 노사(1864~1934)는 분명 20세기 초반까지 생존해 계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암실을 갖고 있던 그 집체(集體)는 '정집대(貞緝隊)'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서 실제로 현장으로 출동해서, 증거 자료를 수집하는 부대인 것입니다. 이처럼 현대의 경찰서 못지않은 치안 단속 기관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형태와 체계는 조금씩 변했어도, 중국의 전국 곳곳에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부터 어떤 이유건 간에, 살인범이 무사하기란 힘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중국의 땅덩이가 워낙 넓으니, 구석구석으로 도망 다녔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서문이 도피 행각을 벌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이서문의 일화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습니다.
(5) 문헌의 재고(再考)
이서문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 문헌 중 하나는 <창현지(滄縣志)>입니다. 이 책은 중화민국 22년(1933년), 다시 말해서 이서문 노사가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만들어진 책입니다.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죠? 이 책에는 관청 업무 기록도 소개되어 있습니다만, 무술가의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서문의 일화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을 다시 한 번 살펴보죠.
집에 찾아온 두 사람의 무술가와 이서문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읽을 필요가 있더군요. 아래는 원문과 번역입니다. (간자체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沧县志李书文,南良村人(隶属盐山县),在八极门谱六世,为黄四海弟子。短小瘠瘦而精悍逼人,专精锻练,以致阳缩如蚕。奉系军将许兰洲延之为师,一时三省师旅之长,从学者若鲫。李景林督直时,邀其来津教授将弁。燕京技术家闻其名选艺最精者二人,赴津与较,书文逊谢,设酒款之,酒阑,来者终请一试,书文不得已,撤席,主定,呼曰:“请!”乃进步一掌,击其前立者头入于项内,而睛出眶尺许。次者复欲较,书文又呼曰:“请!”仍以掌扑其头,其人头微偏,掌落其肩,肩骨折、节脱。书文掌法于室中排击空气,去窗五尺,纸震动有声,故其拍击燕客,若摧枯然。其最精之艺为大枪,盖得吴钟之嫡传。蝇集于壁,以枪刺之,应手落地而壁不留痕。其与人较枪也,恒以枪杆与之相搅,急掣枪柄,敌即前仆于地。又有单手托枪法,以一手插腰间,以一手托枪杆,枪柄亦插于腰际,而运枪如神,人莫能当;又以拱把铁椎,长三尺许捶之入壁,有力者拔之不能出、撼之不能动。书文以殳搅之,随搅而出若拔芥然。故军旅之间又群呼为 “神枪李”,云。(民国二十二年 沧县志)
참고자료 : http://www.wsbjq.com/printpage.asp?ArticleID=20
(번역)이서문, 남량촌 사람(염산현에 종속), 팔극문 계보 6대, 황사해의 제자. 작은 몸집에 여위었으나, 날쌔고 용맹하여 사람들을 두렵게 했는데, 단련에 전념하는 것으로 날이 새고 지는 것이 누에와도 같았다. 북양군벌의 한 파인 봉천파의 허란주 장군에게 지도자로 초빙되었고, 때로는 세 개 성(省)을 멀리 다니며 가르쳤는데,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경림 총독 시대에, 그를 지도교관으로 맞이하였다. 연경(북경의 옛 이름)의 무술가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 뛰어난 두 명을 선발하여 보내 시합을 하게 했는데, 이서문은 이를 사양, 술을 권하며 환대했지만, 방문자들은 계속 시합을 요구했다. 이서문은 할 수 없이 탁자를 한쪽으로 밀고, 말했다 : "청(請 : 잘 부탁합니다)" 예를 갖춘 후, 나아가면서 장(掌)을 쳤는데, 앞에 선 자의 머리가 목에 박히고, 눈이 1척(尺)이나 튀어나왔다. 다음 사람도 역시 겨루고자 하여, 이서문은 또 말했다 : "청(請)" 장으로 머리를 쳤는데, 상대는 간신히 머리를 기울여 피했다. 장(掌)은 그의 어깨에 떨어져, 어깨뼈가 부러지며 관절이 빠졌다. 이서문의 장법(掌法)은 실내에서 허공을 치면, 5척 떨어진 창문의 종이가 울려 소리가 났는데, 때문에 북경 손님을 격파하는 것은,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것과 같았다. 가장 정묘한 기술은 대창(大槍)으로, 오종(吳鐘)의 적전(嫡傳)을 모두 얻었다. 파리 떼가 벽에 붙어있으면, 창으로 그것을 찌르는데, 손짓에 파리가 떨어져도 벽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가 창으로 겨루면, 항상 창대가 서로 부딪히면, 급격히 창대를 당겨서, 상대를 땅에 앞으로 넘어뜨렸다. 또한 한 손으로 창을 다루어, 한 손은 허리에 꽂고, 한 손으로 창을 다루며, 창 자루 역시 허리춤에 끼워져 있는데, 창을 다룸이 귀신과 같아,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 또 쇠몽둥이를 쥐고, 벽에 3척 깊이로 꽂았는데, 힘 센 자도 뽑을 수 없고, 제대로 뒤흔들 수도 없었다. 이서문이 창을 흔들며 나아가면, 뒤따라 먼지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군인들과 사람들이 부르길, "신창 리"라고 했다. (번역 오류 지적 바랍니다. 중국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얄팍한 한자어 실력만으로 번역했거든요.)
아래는 만화 <권아>에서 위 내용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권아(拳兒)에서 이서문의 일화를 묘사한 장면>
그런데 중국인들의 과장이나, 표현의 특징 등, 기타 요소를 고려한다면, 이 기록을 사실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부를 했다는 것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어디에도 '죽었다'라는 말은 없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1척이나 튀어 나왔다'라는 표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위력이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닐까요? 중국어 특유의 표현법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6) 역사적, 지리적 고찰 ①
청(淸 : 1616~1912)은 금무(禁武)정책으로 무술을 탄압했던 나라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1733년, 무술가 사냥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대학살이 행해진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일전쟁(1894~1895)이 끝나고, 의화단의 난(1900)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의화단 전사들의 모습>
(출처 : 二十世紀的五十場戰爭)
서구 열강이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나라를 사전 탐색하고, 그 나라 사람들에게 정신적 세뇌를 가하여, 제국주의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제공하는 역할도 맡았던, 교회 및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자는 반(反)교회 투쟁부터 시작하여, 서구열강에 저항하여 일으킨 시민운동이지만, 권비(拳匪:권법가 도적)의 난이라고도 불리듯이, 무술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화권(義和拳), 신권(神拳) 등의 권법과 경기공(硬氣功), 특히 철포삼(鐵布杉)2)이라는 것을 내세워, 총알도 뚫지 못한다고 큰소리 쳤지만, 총 앞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을 뿐입니다.
<1900년, 8개국 군대 북경 침입 후, 일본군이 의화단들을 잡아서 목을 벤 모습>
(출처 : 血铸中华)
<권아(拳兒) 표지>
<출처 : http://websunday.net/museum/index.html>
<蘇昱彰 老師의 八極拳 寸勁 시범 순간 갈무리>
(添言 : 동영상으로 보면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음)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자료를 보고 이론 체계를 갖추고, 독학을 조금 해보고는,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스승이나 화교 노인에게 전수받았다며, 전수 계보도까지 만들어서 자신의 이름을 넣더니, 팔극권사를 자처하며, 스스로 고수라고 하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죠.
아직까지도 몇몇 그런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요즘은 그래도 중국의 노사분들에게 제대로 배워 오신 분들이 계시는 덕에, 10여 년 전만 해도, 자칭 팔극권사들의 수장(首長)을 자처하면서, 멋대로 갖다붙인 이상스런 계보를 앞세우며, 비전(秘傳)을 물려받은 제자 운운하던 분을 위시하여, 나머지 자칭 팔극권사 분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었더군요.
당시에도 아는 분들은 다 알던 일이었지만, 무술서적, 특히 일본의 팔극권 서적이나 비디오 테잎을 보고 독학했으면서도, 자칭 비전을 전수받은 팔극권사라며 제자까지 받던 분들 중에서는, 얼마 전에 배사첩을 중국에서 돈 주고 구매해 오신 분도 있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좀 재미있게 느끼는 점인데, 팔극권 열풍이 한창일 때는, 몇몇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분들의 항의와 비난 속에서도, 꿋꿋이 스스로 비전 계승자라고 주장하다가, 얼마 전부터는 중국무술 무용론(無用論)의 선두주자로 변신한 분들도 생기고 있다는 점이죠.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탓인지, 팔극권의 인기가 주춤한 탓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그렇다 쳐도, 새로운 숭배자들이 계속 나와서, 인터넷이라는 검증 장치가 거의 없는 장(場)에서, 그릇된 정보와 왜곡된 정보들을 자체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결국 악화(惡貨 : 엉터리 정보)가 양화(良貨 : 올바른 정보)를 구축(驅逐 : 몰아 쫓아냄)하게 되니, 영화배우를 무신(武神)이나 절세고수, 혹은 역사상 최강자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계속 생기고, 무슨 무술은 고구려나 고조선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어떤 무술은 신비의 산중 지킴이의 비전 무술이라는 주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런 일이 반복될까요? 아마도 환상(게임, 소설, 만화, 영화 포함)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런 일은 계속 생길 듯합니다. 중심이랄까, 그런 것을 잡아주는 단체나 조직, 혹은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 하는데, 새로 출발하는 무예동 시즌 2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PC 통신 시절의 무예동에서 중국무술 게시판을 맡고 있을 때도 특이한 분들은 많았지만, 그때는 익명성의 그늘 뒤에 숨기는 힘들었기에, 비교적 해결이 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익명성이라는 강력한 방패 뒤에 숨어서, 제 개인적으로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에도 온갖 비아냥거림과 욕설, 협박들을 퍼붓는 분들이 있는 판이니, 다시 출발하는 무예동의 앞길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듯합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도움과 조언이 절대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들이 신(神)으로까지 추앙하는 일부 무술영화배우에 대해서, 조금만 자신들 비위에 안 맞는 글이 보인다 싶으면 흥분하여, 항의를 하는 것은 물론, 경고와 욕설, 심지어는 암습 협박까지 하시는 분들은, 아이돌 그룹에게 열광하는 일부 삐뚤어진 소녀팬들이 연상될 때가 있어서, 그나마 제게 미소(?)를 짓게 해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은하영웅전설>의 한 글귀가 생각나서, 고소(苦笑)를 짓게 할 때도 있지만요.
'광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자기 취미와 기호에 맞는 환상이면 족한 것이다.' <은하영웅전설, 다나카 요시키 지음> 중에서
※ 미주(尾註)
1) 松田隆智, 일본의 중국무술연구가, 우리나라에도 이 분의 책이 많이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당랑 붕보권, 형의권 교본 등이 그 예이죠.
2) 철포삼 : 쇠로 된 조끼를 입은 듯이 창칼도 뚫지 못하는 방어력을 가지게 한다고 주장하는 소림 72예중 하나.
3) 수이비엔 : 변화에 따른다. 변하는 대로 따라간다. ⇒ 무질서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법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것이 중국인들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4) 형불상대부 : 형벌은 위로 대부(당시의 귀족 계급)에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禮記)
참고자료 : 왜 팔극권은 이겼을까? (원저 : 七堂利幸, 번역자 : 이윤석님)
[출처] [중국무술]이서문 전설 고찰 (무예동(1995-2008 무술전문동호회)) |작성자 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