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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개요
우리 제천은 충청북도의 북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중간에 위치하여 동측은 단양군, 서측은 충주시, 남측은 문경시, 북측은 원주시, 영월군과 접해 있고 월악산 국립공원과 청풍호가 어우러진 문화관광의 도시다. 특히 청정한 자연 경관과 명승지, 풍부한 역사문화 유적 그리고 인심 좋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내륙호반의 도시 제천은 지리적으로는 국토의 중심부에 자리하여 옛부터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하여 왔다.
국토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앙선, 동서를 연결하는 태백선과 충북선이 교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앙고속도로 개통과 잘 정비된 국도와 지방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제천은 의병의 기개와 혼이 살아 숨쉬는 의병의 고장이다.
1895년 우리나라가 외침을 당해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을미의병전쟁의 진원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자랑스러운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자양영당,의병기념관, 박약제, 칠의사총, 남산전적지등은 호좌창의진의 유인석, 정운경, 원용팔, 이강년, 안승우, 홍사구등 제천의병의 처절하고 치열한 삶의 의기가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제천은 의병의 처음이요. 마지막인 고장으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장병이 제일 많았다," 고 단언한 것처럼 한말 제천의병은 2기 의병과 3기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사상적 모태가된 민족 주체성의 정화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에 제천에서는 자랑스러운 의병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매년 제천의병제를 지역축제로 개최하고 있다.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져 있는 청풍호반을 배경으로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동양최대의 수경분수와 물살을 가르는 관광유람선, 수상레져스포츠, 수상비행장, 금월봉, KBS 제천촬영장, SBS제천촬영장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아찔한 스릴을 만끽 할 수 있는 번지 점프장과 인공암벽장, 그레이하운드가 질주하는 경견장, 청풍문화재단지, 10대 명산의 하나인 월악산 국립공원 등 제천 청풍호반권에는 특별한 이벤트와 볼거리, 먹거리가 함께 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명소를 가지고 있다.
삼한시대 축조된 우리나라 최고의 수리시설인 의림지,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전설이 함께하는 박달재, 동양의 알프스로 불려지는 월악산, 역사교육의 산 교육장 청풍문화재단지, 금수산, 용하구곡, 송계계곡, 옥순봉, 탁사정, 배론성지 등 제천10경과 신륵사3층석탑, 사자빈신사지석탑, 마애불상, 칠층모전석탑, 덕주산성, 황강영당, 자양영당, 점말동굴등이 산재한 제천은 역사문화 유적이 살아 숨쉬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 문화의 자긍심을 일깨 울 수 있는 남한강 역사문화 유적의 보고다.
의병의 넋을 위로하고 그 의로운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10월 제천의병제, 아름다운 청풍호반을 따라 늘어선 벚꽃과 함께하는 4월의 청풍명월제, 정월대보름축제, 5월의 환경잔치, 금수산전국산악마라톤대회, 신인가수의 등용문으로 자리잡은 박달가요제등 지역축를 가지고 있다.
제천의병의 역사
청일전쟁을 통하여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일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중전 민씨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여론의 반발을 호도하기 위하여 이른바 '내장개혁'을 친일내각에 강요하였다. 그 주요한 내용은 관제를 개혁하고, 군현제도를 개편하며, 양력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였다.
오랜 전통 속에서 정비된 제도에 대한 급격한 개혁은 결국 기존의 역사와 단절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특히 을미년(1895년) 음력 11월에 강행된 단발령은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다 되었다.
그것은 문화적 자존심을 짓밟는 폭력적 조치였다. 머리터럭 하나까지 부모가 주신 것이라면서 존중하던 이들에게 단발을 강행하니 거리에는 사람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당시 제천의 장담에는 화서학파의 계보를 이은 유중교가 이주한 1889년 이래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중교의 사후에도 그의 문도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발이 강행되자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했고, 그 자리에서 당시를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극한상황'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과, 국외에 망명하여 도맥(道脈)을 계승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유인석은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으나, 일부의 소장과 문인사우(門人士友)들은 의병봉기의 길을 선택하였다. 안승우는 지평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춘영과 포수 출신의 김백선 등과 합하여 원주의 안창에서 봉기의 깃발을 올렸다. 11월28일의 일이었다. 그들은 제천으로 즉시 진격하였고, 이필희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장담의 선비들의 의진에 모여들었다. 단발을 강요하던 군수 김익진은 도망가 버렸다. 의병들은 밀려오는 적을 단양의 장회협에서 맞아 싸워 귀중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휘부는 포군(砲軍)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승전에도 불구하고 포군들은 영남지역으로 흩어져 버렸고, 이필희는 지휘권을 이춘영에게 넘겼다. 이춘영이 영남으로 내려갔던 포군들을 다시 수습하고, 제천과 강원도의 영서지역을 돌면서 포군을 모아온 안승우의 부대와 합친 것은 영월에서였다. 그들은 의병을 성공하기 위하여는 권위있는 지휘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유인석에게 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유인석은 모친상과 능력부족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결국 영월에서 호좌의진 대장의 자리에 올라 의병봉기의 명분을 팔도에 고하니 을미년 12월 20일이었다.
제천으로 진주한 의진은 일거에 인근 여러 균현을 장악하였다. 제천의병은 친일적 태도를 보이던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먼저 처단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제천의병을 충주성의 공략에 나섰다. 충주성을 바뀐 지방제도에 따라 20개군을 관할하는 관찰부의 소재지였다. 각군에서 시행되는 개화정책은 일차적으로 충주관찰부의 지시를 받드는 것이었다. 당시 관찰사 김규식은 단발령을 시행하여 원성이 높았다.
제천을 출발한 의진은 두 부대로 나누어, 주력부대는 주포가도를 통하여 박달재를 넘어 충주성에 육박하였고, 별동대는 은밀히 청풍쪽을 우회하여 마수막재를 넘어 들이 닥쳤다. 이에 충주성은 일거에 의병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병신년(1896년) 1월 5일 저녁이었다. 당초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장악한 후, 인근의 호응을 받아 서울쪽으로 진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충주지역의 호응이 기대에 못미친 대신, 충주성을 되찾으려는 일본군과 관군의 집요한 공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중군장 이춘영은 조령일대를 장악하여 영남지역의 역량까지 동원하려는 구민타개책을 내놓았고, 이를 위하여 수안보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의진내에 비중있는 인물이었던 주용규는 충주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결국 제천의병은 고립된 상태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월 25일에는 보름넘게 장악하였던 충주성을 버리고 근거지인 제천지역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주요한 전투부대는 충주쪽의 내창이나 강령지역까지 진주시켜 가흥의 적과 접전하면서 공세적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제천의병이 제천에 물러서 있는 동안, 주요한 공략의 대상은 가흥과 수안보에 있는 일본군의 병참이었다. 일본군이 두 곳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남한강 물길을 이용한 수송수단에 의존하고 있던 제천일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다. 식량과 소금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이런 국면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제천의병은 충주 쪽의 적을 방어하고 있는 후군장 신지수, 좌군장 우기정과 우군장 안성해등으로 하여금 선봉장 김백선과 함께 공략하도록 하는 한편, 이강년의 유격군을 수안보 조령일대에 보내어 영남지역에서 소모 활동을 하던 서상렬의 부대와 협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 사이의 공동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가흥공격도 실패로 돌아가고, 조령작전도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장수들간의 갈등이 증폭되어 선봉장 김백선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편, 정부는 국왕의 아관파천과 친일내각의 수립을 계기로 집요하게 의병 해산을 촉구하였다. 강화진위대장 장기렴은 병력을 이끌고 충주 쪽으로 진주하여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완강히 해산을 거부하면서 제천 인근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한 달 넘게 남한강을 주요 경계선으로 한 관군과 의병의 대치상태가 지속되었다. 소규모 전투와 함께, 서신을 통하여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고 거의의 명분을 천명하는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제천의병은 영남으로 근거지를 옮기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나 제천을 둘러싼 인근 군현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그곳으로부터 군수물자의 지원을 받으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결국 4월 13일에 장기렴의 군대가 청풍 쪽으로부터 제천으로 쳐들어왔다. 제천의병은 독송정· 남산·수도산 등의 요새지를 구축하고 감연히 맞서 싸워 관군을 물리쳤지만,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의병들의 화승총이 기능을 잃게 되자 관군은 제천을 일거에 장악하였다. 남산성에서 전투를 독려하던 중군장 안승우화 종사 홍사구는 피신하지 않고 감연히 의를 부르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제천을 상실한 유인석은 잔여병력을 이끌고 인근의 군현을 전전하면서 관군과 부딪혔지만, 한번 기울어진 형세를 만회할 길이 없었다. 유인석은 5월 23일 정선에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서행길에 올랐다. 본래 의도는 서북지역에서 용감한 용사들을 모집하여 재기하려는 것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부 간도지역으로 건너가 일단 병사를 해산하였다. 이후 유인석은 도맥을 계승하고 복수의 날을 준비하는 새로운 과업에 몰두하였다. 이것이 훗날 해외독립운동기지건설의 효시가 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을미의병 해산된 후, 일제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하였다. 특히 친일세력을 동원하여 일진회를 조직하여 앞장서도록 하였다. 의병에 가담하였던 선비들은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결속을 다지고, 때로는 위정척사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향약운동을 통하여, 또는 비밀결사체를 구성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05년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이어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나아가 각종의 이권을 빼앗기 시작하였다. 이에 을미의병때 한때 제천의병의 중군장이었던 원용석이 제천과 가까운 주천 쪽에서 을미의병 당시의 인맥을 이용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제천의병의 전군장이었던 정운경은 단양에서 봉기를 시도하였다. 이들은 문화적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을미의병에 비하여 구체화되어가는 국권침탈을 통렬히 공박하면서 깃발을 들어 올렸으나 주체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그후, 강제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은 잠재하고 있던 의별들이 일시에 들고 일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을미의병 당시 유격장이었던 이강년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해산된 원주진위대에서 무기를 받은 수많은 의병장들도 일시에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다시 제천은 의병천하가 되었다.
천남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퇴한 의병진은 주천으로 이동하여 체제를 정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강년은 호서의병자으로 추대되었다. 일본군은 제천에 불을 질러 의병의 근거지를 완전히 초토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강년은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활발한 의병활동을 별여나갔다. 특히 산악전에 능하였던 그는 끊임없는 이동과 기습으로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였다. 그의 활동 무대는 제천·청풍·단양·영춘의 사군(四郡)은 물론이요, 영원·원주 등의 강원도 영서지역, 그리고 영남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광범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때는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하여 서울 입성을 노리기도 했으나, 일본군의 토벌이 심해지면서 점차 약화되어 의병활동이 활개된 서벽·재산전투는 그가 지휘한 최후의 대규모 전투였다. 그후 이강년은 병력을 정비하기 위하여 다시 제천 쪽으로 이동하였다가 1908년 6월 4일에 청풍 금수산에서 일본군·순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이강년이 제천으로 돌아온 것은 그해 말, 과천에 임시 묻혔다가 제천의 두학으로 이장할 때였다. 비록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가 남긴 뜻을 이어'합방' 이후까지 항쟁을 지속했던 감상태도 옥사하여 이강년의 무덤 옆에 묻혔지만, 제천의병의 숭고하고 강인한 저항정신은 결코 땅에 묻히지 않았다. 이후 식민지 체제가 강화되어 가면서 제천의병은 일찌기 유인석에 의해 주도된 해외에서의 무장투쟁의 역사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구완회(세명대 교수)
충주호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사연을 안고 유장히 흐르던 남한강이 잠시 숨을 고르는 충주호. 한반도 깊은 곳에 자리해 ‘내륙의 바다’로도 불리는 충주호를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푸근하고 넉넉하다.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나들목으로 나와 호수를 향해 달리다 보면 가을에서 겨울 문턱으로 들어서는 아름다운 호반의 정취가 두 눈에 들어온다.
벚나무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붉은 나뭇잎이 빗금을 긋는 산모퉁이를 몇 굽이 돌아가면 후삼국 혼돈 시대에 통일의 꿈을 키워나가던 영웅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의 벽란도 포구를 재현한 촬영장이다. 지금도 1만2,000평의 부지엔 고려 수군의 관아와 초가집, 망루 등 20여 동의 가옥, 그리고 선박들이 그대로 남아 여행객들을 1,000년 전으로 안내한다.
왕건촬영장 지척에 있는 교리관광단지의 청풍랜드는 충주호의 역동성을 한번에 즐길 수 있는 ‘레포츠의 메카’. ‘거미인간’의 등반도 구경할 수 있는 인공암벽을 비롯해 국내 최대 높이의 번지점프 타워와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빅스윙’, 조종사의 비행기 탈출 원리를 이용한 ‘이젝션 시트’ 등 레포츠 마니아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다. 고함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뛰어내리는 번지점프도 기억에 남지만, 수상 경비행기를 타고 충주호반을 둘러보는 ‘하늘 여행’도 환상적이다.
충주호는 이런 다양한 재미를 즐기면서도 역사의 무게도 더불어 느낄 수 있는 호반이다. 조선시대까지 제천의 중심지였던 청풍은 제법 유서 깊은 고을로서 적지 않은 유물과 유적이 있었다.
마을의 관문인 팔영루 앞엔 역대 관리들의 송덕비가 즐비했고, 강가 언덕엔 날아갈 듯한 한벽루(보물 제528호)가 있어 시인묵객을 불러들이곤 했다. 그러다 1985년 충주댐이 생기면서 일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유적들을 옮겨놓고 옛 고을을 재현한 것이 바로 청풍교 너머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다.
조선시대 청풍의 영화를 기억하는 제천 사람들은 청풍 고을의 이름을 따서 충주호 중에서 이 주변을 특별히 ‘청풍호’라 부르며 아낀다. 또 뒤쪽 언덕 기슭엔 SBS 무협사극 ‘대망’ 오픈세트도 세워졌으니 충주호는 이래저래 시간 여행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단지엔 아쉽게도 마을에 사람이 기거하지 않지만 처마 밑과 부엌엔 지게ㆍ키ㆍ멍석ㆍ광주리ㆍ사기그릇ㆍ놋숟가락 등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옛 살림살이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어 어릴적 고향의 추억도 떠올릴 수 있다.
청풍문화재단지를 들른 뒤 다시 청풍교를 건너가 우회전하면 호젓하게 충주호의 비경을 살필 수 있는 능강리 지구다. 담쟁이덩굴 엉겨붙은 바위가 길을 안내하는 초입서부터 가슴은 기대감으로 설렌다.
산허리를 감도는 꼬불꼬불한 길도 맑은 호수와 제법 잘 어울린다. 능강리에 이르러 호수를 따르던 길에서 벗어나 낙엽 수북한 산길을 얼마쯤 오르면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정방사(淨芳寺). 얼마 전 목조관음상 뱃속에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복장기가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던 작은 절집이다.
샛노란 은행잎이 뒹구는 법당 뜨락에서 내려다보면 발아래 펼쳐진 잔잔한 호반 너머로 월악산(1,094m)이 높이 솟았고, 첩첩이 펼쳐진 백두대간 산줄기가 장쾌하다.
정방사를 나와 고향 같은 산골마을들을 지나면 옥순대교다. 바람은 차갑지만 충주호의 속살이면서 단양팔경에도 속하는 옥순ㆍ구담봉을 훔쳐보는 즐거움에 마음은 오히려 넉넉하다.
이곳까지 와서 천하 제일의 흥취로 꼽혀온 장회나루 뱃놀이를 지나칠 수는 없다. 장회나루를 떠난 유람선은 갖가지 기묘한 암봉 사이를 이리저리 감아 돌며 잔잔한 수면을 헤쳐나간다.
거북을 닮은 구담봉(龜潭峰), 그리고 희고 푸른 바위가 비온 후의 죽순 같다는 옥순봉(玉筍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멀어진다. 창공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형상의 제비봉도 날렵하다. 비록 기생의 가야금 소리가 흥을 돋워주는 황포돛배가 아니라 해도 어찌해서 선인들이 장회나루 뱃놀이를 천하제일의 흥취로 여겼는지 알만하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도학자인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단양의 명기 두향(杜香)과 이곳을 배경으로 나눈 사랑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퇴계가 단양에 온 지 10개월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이 나면서 퇴계와 두향의 사랑은 끝났고 말았다. 퇴계가 단양을 떠나자 두향은 구담봉 앞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고, 나중에 퇴계가 안동에서 타계하자 두향은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탄 후 자결했다고 전한다. 스물 여섯의 짧은 생이었다.
충주호는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사이의 계곡을 막아 만든 다목적호수로 우리나라 호수 가운데 가장 크고 깨끗한 호수이다. 월악산국립공원, 송계계곡, 청풍 문화재 단지, 단양 8경, 고수동굴, 구인사, 수안보온천, 노동동굴 등 수많은 관광자원들이 주변에 펼쳐져 있으며, 국제적인 관광지로 외국인을 포함,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충주댐나루터에서 쾌속관광선과 대형유람선이 충주호 뱃길 130리를 옥순봉, 구담봉, 만학천봉, 초가바위, 고래 바위, 현학봉, 오노동, 신선봉, 강선대, 버들봉, 오성암, 설마봉, 제비봉, 두무산 등을 구비돌아 신단양(장회)나루까지 운항 되고 있다.
또한 청풍나루 근처에 오면 동양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사 분수를 배를 타고 감상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충주호드라이브코스
충주하면 충주호를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찔하게 깍인 절벽 밑으로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며 드라이브하는 호반길이야 말로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나오지 않을 수 없다. 중부고속도로 일죽 인터체인지와 음성 인터체인지는 충주호 나들이길의 첫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어느 곳을 택하든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면 초행길이라도 드라이브에 어려움이 없다. 충주호 드라이브코스는 대략 2~3가닥으로 이뤄진다. 그 첫째는 충주~수안보간 중간지점인 수안보휴게소 앞에서 월악나루를 거쳐 단양까지 이어지는 충주호의 남쪽기슭의 36번 도로고, 또 한 길은 이 길의 중간쯤 수산삼거리에서 청풍문화단지와 청풍교를 건너 제천을 거쳐 다시 충주댐으로 돌아오는 길이다.그러나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주말 나들이를 겸한 충주호 드라이브는 충주시내를 관통해 충주의 주산인 계명산 일주도로를 거쳐 충주댐에 이르고, 다시 보조댐이 있는 탄금대를 거쳐 장호원으로 나오는 길이 수월하면서도 짜임새 있다. 일명 마지막재로 불려오는 계명산 일주도로는 충주의 첫손꼽는 나들이코스다. 주위에 카페와 각종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고, 고갯길에서 내려다보는 충주시가지와 충주호의 조망이 절경을 이룬다. 고개를 넘어서면 호수공원과 충주호 전망대가 쾌적한 주차공간과 함께 넉넉한 쉼터를 마련해주고, 다시 댐을 지나 충주호 유람선선착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는 충주시의 내력있는 매운탕집들이 대부분 이 곳에 모여 있다. 길의 흐름도 어렵지 않다. 충주의 관문격인 달천사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해 시내를 관통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계명산 일주도로에 닿는다.
구담봉과 옥순봉
유람선 여행의 별미 ‘옥순봉과 구담봉’ 충주호 장회나루 단양 8경 중 마지막 두 개의 절경인 옥순봉과구담봉은 유람선 여행으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묘미. 이 묘미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충주호 장회선착장으로 가서 유람선을 타고 10 여 분쯤 호수 물빛을 갈라야한다.
배가 부우웅 소리를 내며 떠나는 것 같더니 눈 깜짝할 사이 최고의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위 능선이 마치 제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나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이름붙여진 제비봉이 구담봉과 옥순봉을 감싸고 있는 형세가 세치혀로는 형언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던 것.
잠시 후 단양 8경중에서도 제일 섬세하고도 화려한 단양팔경의 백미 옥순봉이 딱 막아서며 배를 멈추게 한다. 희고 푸른 바위들이 대나무 순 모양으로 힘차게 치솟아 마치 절개 있는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절경을 연출한다. 옥순봉은 조선 명종조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이 이 곳 석벽에‘단구동문’이라는 글을 새겨 이곳이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기암괴봉이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지고 충추호 옥빛 물결 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소금강이란 별칭이 생겼나보다.
옥순봉
옥순봉을 지나자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산세가 아름다운 금수산이 지나가고 드디어 구담봉이 나타난다.구담봉은 기암절벽의 암형이 거북을 닮았으며 물 속 바위에 거북무늬가 있다하여 구담이라 하였는데 단양 암수 거북을 모두 찾으면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가까이에 제비봉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수려한 경관은 충주호 수상관광코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날 뿐만 아니라 충주호 유람선 관광의 거점지역이기도 한 구담봉.
짙은 녹음과 기암비봉의 절묘한 만남. 그 만남이 만들어내는 산세의 풍광. 그리고 산세를 헤집 듯이 흘러가는 옥빛 물길. 물길을 가르며 유람선이 곳곳에 숨어있는 비경을 찾아 굽이굽이 나아간다.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옥순봉(玉筍峯)은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 있다. 제천 10경 중 8경에 속하는 옥순봉은 지리적인 이유로 구담봉과 함께 단양 8경에 속하기도 한다.
옥순봉은 조선 초 청풍군(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해 있었다.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단양 태생의 기녀 두향이 아름다운 옥순봉의 절경을 보고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이를 허락지 않았다. 그러자 이황 선생이 단애를 이룬 석벽이 마치 대나무 순이 솟아 오른 것과 같다하여 옥순봉(玉筍峰)이라 이름 짓고, 석벽에 <단구동문>이라 새겨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문신 탁영 김일손은 <여지승람>에서, 청화자 이중환은 <산수록>에서 옥순봉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또한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과 함께 왜군 소탕에 앞장섰던 정운호는 당시 제천 8경을 노래하며 이 곳 옥순봉을 제7경으로 꼽았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화를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의 현감에 임명되었다. 이 때, 1796년 <옥순봉도(玉筍峯圖)>를 남겼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대표작인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의 한 폭으로, 현재 보물 제7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옥순봉의 산세는 청풍호와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해발 283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함마저 느낀다. 확 트인 정상부는 너른 안부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쉬어가기 좋다. 또한 노송이 운치를 더해주니 그 옛날 선계가 부럽지 않을 곳이 바로 이 곳이라 하겠다. 산행과 더불어 유람선을 타고 옥순봉과 구담봉의 멋들어진 석벽을 조망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옥순봉은 높이가 낮은데다 등산로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으니 1시간 산행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구담봉을 연결해 산행할 경우에는 약 4시간은 잡아야 한다. 구담봉으로 가려면 옥순봉 정상에서 되내려와 왼쪽으로 난 길로 가야 한다. 정상부까지는 깎아지른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옥순봉-구담봉 산행 중에는 식수를 구할 수 없으므로 산행 시작 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제비봉
제비봉은 충북 단양군 단양읍에서 서쪽인 충주호 방면의 단성면 장회리에 위치한 산이다. 단양팔경 중 수상관광지로 유명한 구담봉과 옥순봉에서 동남쪽 머리 위로 올려다 보이는 바위산이 바로 제비봉이다. 산 이름이 제비봉이라 불리우는 것은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구담봉 방면에서 이 산을 바라보면 충주호쪽으로 부챗살처럼 드리워진 바위 능선이 마치 제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나는 모습처럼 올려다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비봉 서쪽 골짜기가 바로 비경지대인 설마동 계곡이어서 산과 계곡, 호수 모두가 수려하기 그지 없으며 가을 단풍철에는 그 경관이 극치를 이루고 산행 길목에 "오성암" 이라는 산사가 자리 잡고 있어 산행인들의 좋은 쉼터가 되고 있다.
금수산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백암산」이라 불리던 것을 조선조 중엽 단양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선생께서 너무도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여 금수산으로 개명한 산이다. 특히 가을 경치가 빼어난 아름다운 암산으로 월악산 국립공원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4월 초까지 얼음이 얼다가 처서가 지나면 얼음이 녹는 얼음골에는 돌구덩이를 30cm정도 들추면 밤톨만한 얼음 덩어리가 가을까지 나오고 있어 자연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산 중턱에는 바위틈에서 한해나 장마에도 일정한 수량이 용출되는 맛 좋은 물이 있어 산을 찾는 이들의 목을 적셔주고 있다.
금수산 정상부의 원경은 길게 누운 임산부의 모습을 하고 있어 옛부터 아들을 낳으려면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청풍문화재 단지
충주호를 굽어보는 호수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주댐 건설로 인해 청풍의 옛날 화려한 이름만을 전설처럼 남긴 채 물에 잠기게 되자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이 곳에는 한벽루, 금남루, 팔영루,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 4동 등 보물 2점, 지방유형문화재 9점, 비지정문화재 42점과 생활유물 1,900 여점과 유물전시관에는 3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옛 선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한벽루(보물 제 528호)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4년 (1317)에 청풍현이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였다. 이 루는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 양식이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 (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다.
응청각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 (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인조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고종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층 누각으로 아래 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건물 좌측에 목조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금병헌(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34호)
이곳은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이었으나,신라 경덕왕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지군사가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32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국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 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금남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이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청풍 후산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였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 한 것이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후보하여 제사방으로 꾸미고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 도화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민가였다.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를 옮겨 복원한 것이다.조선말기에 지어진 ㄷ자형의 우진각 기와집이다.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을 이루고, 좌측 간살은 방, 부엌, 광으로,우측 간살은 방2칸과 2칸 크기의 부엌으로 되어 있다. 둥근 통나무 굴뚝과 부엌 살자창옆의 관솔을 피워 어둠을 밝히
는 시설은 태백산맥 일대의 산간지대 민가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본래 이전하기전의 흔적으로 보아 앞쪽에는 바깥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튼 ㅁ자형의 배치
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청풍 황석리 고가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황석리 164번지에 있었던 민가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옮겨 복원한 것이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다.안채는 정면4칸, 측면 2칸의 팔작 겹머리 기와집이며, 조산말기의 건축물로 좌측(서쪽)으로부터 부엌, 안방,웃방을 나란히 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아방과 웃방 앞에는 길게 툇마루를 두고, 사랑방 퇴는 부엌으로 구성하였다. 툇마루와 사랑부엌 사이의 퇴주(각주) 이름이 특이하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가집이다.
연리지와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라고 한다.두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쉽게 '사랑나무' 라고도 부른다. 나무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다. 연리목은 가끔 볼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 닿을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버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때문이다. 중국 전설상의 새와 나무인 비익조와 연리목에서 유래된 비익이라는 새는 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이기때문에 항상 나란히 한 몸이 되어서 난다하며, 연리라는 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이지만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나무결이 상통한다는데서 남녀간의 깊은 정분을 뜻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당 나라 6 대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그린 장한가에서 <하늘에서는 비익조(비익조)가되고 땅에서는 연리지(연리지)가 되도다>라고 읊었다.
석조여래입상 보물 546호
이 불상은 높이가 341cm이고,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10세기 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코와 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르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 (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충주댐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읍리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능강솟대문화공간
솟대는 기러기나 오리 등 새를 높은 장대 위에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삼한 시대에는 소도(蘇塗·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에 세워 인간의 소망을 하늘에 기원했다. 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하거나 마을에서 인재가 나왔을 때 기념으로 마을 어귀에 세우기도 했다.
2004년 세계박물관협회 총회에서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공식 상징물로 선정됐다. 솟대를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공원인 이곳에서는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주제 출품작인 ‘열풍 변주곡’ 등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재구성한 80여 점의 솟대 등 400여 점의 솟대가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또 윤 대표가 솟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관람객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역사적 배경과 제작 과정 등을 강의할 계획이다.
윤 대표는 1985년 솟대와 인연을 맺었다. 서울 현대미술관장으로 있던 그는 권옥연 화백의 ‘산마을’이라는 작품에서 솟대를 보고 솟대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도서관을 뒤지고 민속학자와 역사학자들을 찾아다녔다.
1988년 가을 미술관장직을 그만두고 경기 수원시 광교산 자락에 있는 친구의 오두막집을 빌려 솟대를 깎기 시작했고 5년 뒤 첫 조각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윤 대표의 솟대는 자연 그대로를 담아낸다. 조각이지만 가지를 자르고, 홈을 파고, 주변 환경과 어울리게 세우는 것이 전부. 인위적이고 정형화된 정(靜)적인 모습의 기존 솟대와 달리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동(動)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하늘에 인간의 희망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인공의 냄새가 강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1999년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로 작업 공간을 옮긴 그는 청남대, 청주 가로수길, 제천 의림지 등에 솟대를 세웠다. 능강솟대문화공간은 160m² 규모의 솟대 전시관과 주차장, 원두막, 야외 솟대와 야생화 등을 갖추고 있다. 043-653-6160
의림지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황 (540~575)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에서서 흘러 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 못의 시초라고도 하며, 그후 700년이 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의를 3층으로 석축을 해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관이 넘을 정도의 큰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층으로 쌍아 올려 수문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 박의림"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호반둘레 약 2km, 호수면 158,677m2, 저수량 6,611,891m3,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몽리면적은 289.4정보이며, 보수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수리시설보다는 유원지로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경승지로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새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 백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고 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어로 각광받고 있는 명물이며, 순채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만큼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 연암, 용바위)와 마시던 "우륵정"이 남아 있습니다.
의림지의 전설
제천시에 북쪽으로 약 10리를 가면 관광지로 유명한 의림지가 나타난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이곳에 부자집이 있었다. 하루는 이집에 스님이 찾아와 시주할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이집 주인은 탐욕스러울 뿐 아니라 심술도 또한 사나왔다. 한동안 아무 대꾸도 없으면 스님이 가버리려니 했는데 탁발스님은 가지 않고 목탁만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심술이 난 집주인은 거름 두엄에 가서 거름을 한 삽 퍼다가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그것을 바랑에 받아 넣고 선머리를 한 번 조아리더니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집안에서 보고 있던 며느리는 얼른 쌀독에 가서 쌀을 한바가지 퍼다가 스님을 뒤쫓아가 스님에게 주며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었다. 스님은 그것을 받더니 며느리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천둥과 비바람이 칠 터이니 그러면 빨리 산속으로 피하되 절대로 뒤돌아 보면 안된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며느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집안에서는 집주인이 하인을 불러 놓고 쌀독의 쌀이 독이 났으니 누구의 소행인지 대라고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자기가 스님이 하도 딱해 퍼다 주었다고 아뢰었다. 시아버지는 크게 노하며 며느리를 뒷광에 가두더니 문에 자물쇠를 채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 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울리고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광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더 요란하게 번개가 번쩍하고 천둥이 치더니 잠겼던 광문이 덜컹 열리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탁발승의 말이 생각나 얼른 광속을 빠져나와 동북쪽 산골짜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려가던 며느리는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생각이 나서 뒤돌아보지 말라던 스님의 말을 잊고 집이 있는 쪽을 뒤돌아 보았다.
그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더니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해갔으며 집이 있던 지리는 땅속으로 꺼져서 온통 물이 괴고 말았다. 물이 고인 집터가 의림지이며 며느리가 변해서 돌이 된 바위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제비바위(연자암)근처 어디엔가 서 있다는 것이었다
장락사지 7층모전석탑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模塼塔)이라고도 한다. 탑이 서있던 절터가 논밭으로 변하여 절의 규모는 알 수 없고, 7층에 이르는 거대한 이 탑이 주위를 압도하듯 버티고 서 있다.
회흑색의 점판암을 사용한 탑으로,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만은 점판암이 아닌 자연석으로 1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은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 곳으로, 1층의 네 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워 그 모습이 특이하다. 또한 남쪽과 북쪽면에 사리를 두는 감실(龕室:불상이나 사리 등을 모시는 방)을 설치하여 문을 달아 놓았는데, 현재 남쪽의 것은 없어졌다. 1층의 남쪽과 동쪽면이 몹시 부서져 있는데 이러한 피해는 2층의 지붕돌까지 이르고 있다. 각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재료가 벽돌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경사면 위아래 모두 층급을 두었으며 처마도 짧고 수평을 이룬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에는 아래위로 구멍을 뚫어 풍경을 달도록 하였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장식받침인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는데, 그 윗면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있고 구멍둘레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1967년 무너지기 직전에 탑을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7층 지붕돌 윗면에서 꽃무늬가 조각된 청동조각이 발견되어 혹 탑의 머리장식이 아닐까 한다.
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주목된다. 만드는 형식이나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는 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배론성지
성지 배론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582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다. 이곳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다. 1866년 병인 박해 전에 배론은 6개 마을로, 즉 아랫배론, 중땀배론, 웃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비득재 마을이 있었으며, 7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황사영 순교 현양탑>
진사 황사영(알렉시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쓴 역사의 땅
황사영 알렉시오는 1775년 당시 유명했던 창원 황씨 가문에서 나고, 자는 덕소(德紹)요, 어려서부터 총명과 재덕이 남달리 뛰어나 이미 16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정조대왕이 그를 불러 올려 치하한 후, 그의 손목을 붙잡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사영은 임금님이 만지신 손목을 붉은 비단으로 감아서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는 정조치하 준론 탕평의 정책 아래에서 남인들의 정계진출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고, 정조의 주목을 받은 그는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하였다. 그는 결혼한 해인 1790년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혼인을 통한 처가 쪽 사람들의 영향일 것이다. 장인인 정약현의 첫 부인은 이벽(세례자 요한)의 누이였고, 자신의 셋째 동서가 후에 순교자가 된 홍재영(프로타시오)이며,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한 이는 이승훈(베드로)이다. 알렉시오은 이때부터 세속의 공명과 영화는 뜬 구름 같이 여겨 교리 연구에만 열중하였고, 교회 안에서도 회장직을 맡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는 임금님의 총애와 특혜에는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였다. 정조대왕은 황사영이 과거시험에서 백지를 내는 것을 알게 되자, 대신들을 통해 충분히 공부하여 응시하도록 권유하였다. 또한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연민의 정을 나타냈다고 한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이곳 저곳으로 피하다가 10일 이내로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망명의 길을 떠났다. 남이 자신을 알아보기 쉬웠던 탐스러운 수염을 자르고 상복을 입고 2월 15일에 서울을 빠져 나와 김한빈의 안내로 여주, 원주를 거쳐 마침내 제천 배론 교우촌에 숨어들어 왔다. 이곳에서 서울 사는 이씨(李氏)로 사을 당한 이(喪人)라고 하였고, 옹기점 옆에 토굴을 파 그 속에서 8개월간 은거하면서 김한빈(베드로)과 황심(토마스)을 외부 연락원으로 교회 소식을 듣곤 하였는데, 8월 26일 황심으로부터 주 신부의 자수와 그의 처형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백서(帛書) 를 작성하였다. 그런데 9월 15일 황심이 먼저 잡히고 9월29일 사영이 체포되어 10월3일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그 해 11월5일 황사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백서의 발견 입수 경위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천하(古今天下)에 둘도 없는 흉악한 글이라고 하여 정부는 이를 의금부 창고에 보관하여왔다. 1894년경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관계관이 이것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하여 그의 친구인 천주교인 이건영(李健榮, 요셉)에게 넘겨주고 이씨는 교구장 뮈텔 주교께 전달하였다. 1925년 7월5일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기념품으로 봉정하였다. 교구장 뮈텔 주교는 교황청으로 보내기에 앞서 실물크기의 동판사본을 제작하고, 이를 인쇄하였다. 이 동판 사본은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전시실에 있다.
백서 내용
백서는 흰명주에 가로 62센티미터, 세로는 일정치 않으나 작게는 39.1센티미터, 크게는 40센티미터이고, 122줄을 13,384자를 가는 모필로 깨알처럼 곱고 정밀히 써진 것이다. 비록 황사영 자신이 쓴 글이나 자기 이름은 숨기고 황심(토마스) 등이라 했음은 황심이 북경 내왕이 잦고 이미 여러 차례 그곳 주교와 신부들을 만났으므로 누구보다도 신임을 더 받을 것으로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1-5행), 신유박해의 진행과정과 순교자들의 열전(6-90행),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1-112행), 그리고 관면 요청과 인사말(113-122행)로 되어있다.
황사영 토굴의 위치 확인 및 복원
1929년경 배론을 답사한 원주 본당 정규량 신부는 "황사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배론 점촌 지굴(地窟)속에서 백서를 쓰다가 체포되었다."고 하여, 그의 은신처가 땅굴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조선 총독부 시대 일본인 야마구찌(山口正之)씨가 1936년 8월 25일 배론을 찾아왔다. 그는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에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씨 집의 북쪽, 취사상 위에 있으며 남면(南湎)하고 있다. 이 집은 1866년 박해에 처형된 프랑스인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를 설립했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토굴의 구경(口經)이 약 1미터반 양쪽을 돌로 쌓아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장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 있는 까닭에 굴 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1) 구학리 646번지가 바로 신학교가 있었던 자리로 1976년 10월 18일자 제천군에서 발행한 지적도 등본으로 확인되었고,
2) 야마구찌씨가 답사할 때 1935년에 이사 온 집주인인 최재현씨가 신학교 교사(校舍)였음을 확증하였고,
3) 이 집 뒤뜰 안에 옹기 가마와 토굴이 있다고 한다.
또한 배론 공소 안창현 회장의 손자인 안태화(1926년생)는 '어린시절 10세 안팎일 때 신학교 건물인 최재현씨 댁 위에 위치한 굴에 드나들며 놀았고, 그로 인해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둗기도 하였는데, 그 굴은 토굴이었지 옹기굴은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1987년 8월 10일, 24일) 이 646번지 옛 신학교 터에 옛 집과 그 위 건축공사가 있을 때 1978년 늦은 가을 11월 11일 지붕 기와 밑에 깔 흙을 올리기 위해 옆 땅을 헤쳤는데 아주 까맣게 탄 돌들이 나왔다. 그 밑에는 좋은 진흙이 굉장히 많이 있었고, 그 위에는 옹기 가마 자리로 알아볼 수 있으리만치 엇비슷한 언덕에 중간 양쪽으로 얕은 돌담이 3층으로 쌓여 있었으며 맨 꼭대기에 땅이 꺼진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수목이 자라 있지 않고 2,3년 전에 심은 소나무가 여기 저기 있을 뿐이다. 여기가 옹기 가마와 토굴 자리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황사영이 1801년에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토굴은 1988년에 서울大 이원순 교수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그는 "아마구찌 등의 기록과 증언, 현지자세를 종합하여 볼 때 신학교 뒤, 즉 최재현씨 댁의 부엌 뒤 산비탈을 이용하여 1m 반 정도의 입구를 가진 토굴을 김귀동과 김한빈이 팠는데,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주어진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 저장고를 가장하고 있었으며, 그 넓이는 적어도 어른 두 사람이 누어 잘 수 있는 넓이라고 생각된다. 입구는 1m 반 정도 돌로 쌓아 올렸고, 굴의 천정은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보이며, 입구 부분과 달리 토굴 자체는 토벽으로 된, 문자 그대로의 '토굴'이라 추정된다. 투굴 천정 위는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추정 된다"고 하였다.
최양업신부 "바다의 별" 대성당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대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햇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3000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대성당의 명칭은 이 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신부를 기리는 바다의 별 대성당"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최양업 신부(1821~1861:40세)
천에서 14km -20분 소요)에 배론성지가 있으며 성지내에는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박해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로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황사영 신부의 순교 헌양탑, 최초의 신학당 등 이 있다.
최양업 일대기
본명 최정구(崔鼎九), 세례명 토마스, 본관 경주,1821.3.10일 충남 홍주 다락골(충남 청양군 화성면 능암리)에서 아버지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1805~1839)와 어머니 이성례 (李聖禮)마리아(1801~1840)에서 태어나고 부모는 순교 하였다
증조부 최한일 때 부터 천주교를 믿어 신앙생활의 도피로 자주 이사를 하고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에서 산간생활로 정착하였다
15세때인 1836년(현종2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반 (Mauban,R)에 의해 김대건, 최방제 와 함께 신학생에 선발되어 1837.6.7일 마카오에 걸어서 도착 신부 수업중 1838.11월 최방제 가 풍토병으로 사망 한 뒤 두 사람은 공부를 지속하였다.
1844.12월 중국의 소인가자(小人家子)본당에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산발례 와 부제품을 연달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며, 만주, 요동, 외몽고, 일대를 떠돌이 처럼 헤메면서 입국을 시도하여 1845.1월 김대건이 의주 에 입국하기를 성공하였다
그러나 최양업 은 1846. 1월 두만강을 건너려다 중국 경비병 에게 체포되어 실패하고 12월 다시 입국하기 위해 조선국경 변문 에 도착 하였으나 감시가 더욱 강화 되었고 먼저 입국한 김대건 신부와 교우들이 순교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순교자 현석문 의 순교일기 [기해일기]를 라틴어로 번역 하고 현지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1847년 고군산도와 1849년 백령도 등의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하였고. 1849.4.15일 28세 때 상해의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서품을 받고 만주의 遼東에서 활동 중 12월초 압록강을 건너 7년 만에 신의주로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울에서 하루를 쉬고 페레올 주교 와 다불리 신부 를 만나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으로 6개월 동안 전라, 충청, 경상 등 5개도 5천리를 순회하며 12,000명의 신자에게 성사를 주기위해 매년 7천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127개 공소를 방문하는 사목활동을 11년 6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1861.6.15일 영남지방에서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보고를 위하여 상경 하던 중 과로와 식중독으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사하여 베론으로 옮겨졌으며 그 해 11월초 베르뇌(Berneux)주교와 프르트에(Pourthie)신부의 주도로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 뒷산 언덕위에 안장하였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비석은 세우지 못하고 1945.9.27일 묘비를 세웠다.
땀의 증거(순직)
김대건 신부는 피의 증거자 로 순교라 하나 최양업 신부는 순직 이라 하여 103위 성인 추서에서 제외되고 성인반열에 오르지 못하여 자료를 수합 심의 중에 있으며, 평소에 천주교리와 신앙의 교훈을 전달할 목적으로 최양업 신부가 작성한 운문(韻文)형식의 천주가사(天主歌辭)는 훈계. 호소. 권면, 설명조 로 되어 신앙지식이 없는 신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 었다.
천주가사
사향가. 천당강론, 지옥강론, 심계강론.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심세대의 , 신덕가. 망덕가. 내덕가. 칠성사가(영세,견진,고해,성체, 종부,신품,혼배)칠극, 제성, 선행 등이 있다
사향가(思鄕歌)
어화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복지로나 가자하니 모세성인 못들었고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쳤구나
부귀영화 얻었은들 몇해까지 즐기오며
빈궁제화 많다한들 몇해까지 근심하랴
이렇듯한 풍진세계 안거할곳 아니로세
인간영복 다얻어도 죽어지면 허사되고
세상고난 다받아도 죽어지면 고만이라
배론성지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은 도점촌(陶店村)이라 한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자기를 굽던 곳인데, 신해박해 이후 조선 정조 15년(1791년)부터 이곳으로 교인들이 숨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든 교인들 역시 옹기를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교인들은 옹기를 팔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교인들과의 접촉이나 정보 수집 등을 할 수 있어 옹기장사가 은거 종교생활에 적당했다고 한다. 현재는 옹기를 굽던 흔적은 없고,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앞에 옹기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이다.
배론에 첫 번째 큰 파란이 일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에 이어 일어난 황사영 백서 사건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신유박해에서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 남인 세력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는데, 그때 중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도 죽음을 당했다. 당시 천주교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황사영이 화를 피해 한양을 떠나 이곳 배론마을로 숨어들었다. 배론마을에서는 굴을 파서 황사영을 숨겨 주었고, 그 토굴 속에서 황사영은 천주교의 박해 사실을 낱낱이 적은 백서를 만들어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게 된다.
그러나 백서를 가지고 가던 황심이란 사람이 붙잡혀, 결국 황사영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백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백서 사건으로 배론마을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다시 뿔뿔히 흩어지고, 백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천주교의 탄압은 더욱 강도를 더해가게 된다.
백서의 내용 중 문제가 된 부분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 5-6만과, 대포 등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지금 보아도 상당히 큰 문제가 제기될 내용이다. 그러니 당시의 상황에서 이 백서로 인해 천주교의 박해가 가속화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일이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현재 배론성지의 요셉 신품학당 뒤로 황사영이 숨어 지내던 토굴이 아직도 있고, 이 황사영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백서 사건 이후 50여 년이 흐른 1856년, 배론마을은 또 한 번 회오리가 일게 된다. 당시 메스트르 신부가 이곳 배론마을의 장주기(세례명 요셉)의 집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당시 신학교의 운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힘들었던 모양인데, 신학교 설립 10년 후인 1866년 병인박해 때 신학교의 교장이었던 푸르티에 신부와 교사였던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 고 집주인 장주기가 모두 잡혀가 서울의 새남터에서 죽음을 당하고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현재 배론성지에는 장주기(세례명 요셉)을 기리기 위한 성 요셉 성당이 개울가에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또 신품학당을 재현한 초가 건물이 있는데, 실제 신학당이 있던 자리는 그 옆에 있는 강당 건물이 있는 자리라 한다.
그리고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인물이다. 신부가 된 후 열심히 목회활동을 하다가 문경의 교우촌에서 과로로 사망하자 이곳 배론성지로 이장되었다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순교를 하지는 않았지만 김대건 신부와 비견될 만한 업적을 이룬 신부라 한다. 현재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도마신부 기념성당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다. 배론성지는 그리 넓지는 않아 앞에서 말한 유적들을 둘러보고 "십자가의 길"이라 이름 붙은 산책로를 돌아도 다 돌아보는 데는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도로 변에 있는 탁사정이란 예쁜 계곡을 들러보는 것도 좋다. 탁사정은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성지에서는 차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북쪽의 치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곳 탁사정을 만들고 더 지나 제천천과 합류하여 충주호로 흘러드는데, 이 계류가 탁사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빚어내 제천 10경 중 9경에 꼽히기도 한 곳이다. 이름 때문에 계곡 옆에 멋들어진 정자라도 하나 있을 것 같지만 정자는 없다.
도로변 이정표를 따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 경치에 실망하고 그대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실수이다. 도로변 휴게소 같아 보이는 곳 주변 경치는 탁사정의 프롤로그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차장 안쪽에 있는 탁사장 파크라는 모텔 옆으로 "등마루 산장 휴게소"라는 그저 그렇게 생긴 간판이 하나 있는데, 이 간판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비로소 탁사정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물돌이를 이루며 휘어 돌아가는 계곡에 커다란 바위들이 들어서 있어 규모는 작지만 멋진 경치를 빚어내고 있다. 계곡에 발만 담그고 있어도 한여름 더위쯤은 싹 씻겨갈 시원한 계곡이다. 계곡의 규모가 작은 것이 좀 안타깝다.
배론성지 : (043)651-4527
박달재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산을 박달재라한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 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