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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생애(1)
초기
출생
유비는
161년 음력 6월 7일 동한 유주(幽州) 탁군(涿郡)
탁현(涿縣)에서 유홍(劉弘)의 아들로 태어났다.
탁현은
삼국지연의에서 누상촌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누에치기에 사용하는 뽕나무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현재의
허베이성 바오딩 시의 현급 시 줘저우(涿州, 탁주)로
현 베이징 남서쪽에 인접해 있다.
21세기엔
이곳이 중국의 수도권이지만, 이 시대에 요서(遼西)
일대는 그저 변방 외곽이었다.
유주는
삼국시대에 공손찬이 유우에게 빼앗았고 원소가 공손찬을 무너뜨린 뒤 차지하고
원희를 유주목으로 임명한 하북(河北) 4주 중 하나였다.
원소 사후
원씨가 조조에게 멸망한 뒤에는
위의 영역이 된다.
유년기
유비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형제 자매에 대한 기록이 일체 없는
것으로 보아 외동이거나 형제들을 모두 일찍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는
홀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짜고 신발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자치통감에서는
대놓고 '少孤貧'이라고 해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1]
현대 중국에서
유비는 중국 신발 산업의 비조로
여겨지고 있다.
2002년 12월 15일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중국 피혁협회가 유비를 중국
신발산업의 비조(鼻祖, 원조)로 모시기로 하고
쓰촨성 청두의
신발공업지구인 우허우(武侯)구에 그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고 14일 신화통신이 전했다.
당시 중국 피혁협회장이었던
쉬융(徐永)씨에 따르면 유비는 청두에 촉의 도읍을
정한 뒤 신발산업을 적극 육성해
당시 쓰촨의
신발이 위와 오에 널리 수출됐을 만큼
국가적 특산품이었다고 한다.
또 제갈량을
모신 청두 무후사의 유비 상 위쪽에
걸린 편액에는
‘1845년 신발산업
제자들이 세움’이라는 글귀가 씌어 있을 정도로 유비는
중국 신발 업계의 상징적 존재라는 설명이다.
유비의
묘소를 지키고 있는 유비의 후손은 신발
수공업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유비의 집앞에 있는
뽕나무[2]는 매우 커서 황실의 수레
덮개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찮게 여겼다.
탁군(涿郡) 사람
이정(李定)은 유비의 집앞을 지나가며 이 집에서
필시 귀인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유비는 어린 시절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 거야."라고 말했는데, 어머니와 숙부 유자경이 "너는 허튼 소리를 하지 말거라.
우리 가문을 말아먹겠구나!"라고 혼을 냈다. 왜냐하면 유비의 말은 황제가 되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에 평범한 시대 같았으면 집안이 멸문될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3]
탁군(涿郡) 사람이었던 간옹은 어려서부터 유비와 친했다는 것으로 보아 같은 탁현(涿縣) 출신으로 추정된다.
청년기
유비는 열다섯 살이 되어 친척 유원기의 후원으로 노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때 공손찬과 유덕연과 동문이었다고 한다. 유원기의 아내가 유비 후원을 반대했지만 유원기는 유비가 보통아이가 아니라며 후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유비는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으며 호걸들과 결의를 맺기 좋아해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의 공부는 했지만.
다만 유비는 말년에 들어서는 독서에 신경을 써서, 죽기 전 유선에게 늘 독서하고 수련하라고 말했다. 유조로 유선에게 한서(漢書), 예기(禮記)에 대해서 읽고, 여유가 있으면 제자(諸子, 제자백가)와 육도(六韜), 상군서(商君書, 상앙의 저서)를 두루 읽어, 다른 이의 지모에서 도움을 얻도록 하고 제갈량이 직접 필사한 신불해, 한비자, 관자, 육도를 통달할 것을 권했다.[4]
이는 유비나 제갈량이 주로 읽었던 책들이 어떤 부분들인지 드러나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역사책이나 유가의 책도 있었지만 법가나 병가의 책이 많이 있다. 한서는 본조(本朝)를 위한 관례고, 예기는 수양하기 위한 중요한 서적이다.
촉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유비와 제갈량은 법가를 많이 따랐고[5] 거기에 유가와 병가 등이 섞인 형태였다. 역사서와 유교의 경전과 병법서와 법가의 통치술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폭이 넓다. 제갈량 문서에도 나오지만 제갈량이 순자를 중시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국시대 진나라처럼 압제적인 것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운용했지만.
이에 대해 유학자들이 비판하기도 했지만 청나라 초기의 학자 강신영(姜宸英)이 말하길 '무후(제갈량)는 군사 장군이 돼, 문사(文事)와 무비(武備)로, 바빠 틈이 없었는데도, 손수 신, 한, 관자, 육도를 베껴 후주에게 전했는데, 지금 서생은 도리어 이를 할 수 없으니, 가히 부끄러움이 누구보다도 심하구나.(중략)
선주와 제갈량 모두(후주가) 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고대의 사람이 독서함은, 모두 실용적이었음을 볼 수 있는데, 유생은 시문을 읊으며, 말솜씨에 의지하니, 비록 많아도 또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찬하였다.
아무튼 유비는 공부를 하고 몇년 안 되어 탁군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되고, 돌아온 후 무리들을 모아서 그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 이 시기 말 상인인 장세평과 소쌍은 유비가 범상치 않다면서 후원했다고 삼국지 촉서 선주전은 전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비는 모범적인 면과는 거리가 멀고, 마치 그의 조상 한고제 유방이 그러했듯이 협객으로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비의 현은 알 수 없으나 탁군 출신이라는 것을 볼 때 이 시기부터 장비와 어울려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탁군으로 도망친 관우와도 함께 어울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원결의
나관중의 군담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 장비가 유비와 도원결의로 의형제를 맺었다고 전하는데 정사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명시되지는 않는다. 다만 여러 정황상 이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었거나, 혹은 그에 준할 만큼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정사 관우전에서는 장료와의 대화에서 관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조공께서 후히 대우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劉將軍-좌장군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함께 죽기로 맹세하는 것은 주로 의형제를 맺을 때 하는 것이고 또한 비시전에서 보면 관우에게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며, 또한 관우가 죽은 이후 여러 인사들이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유비와 관우는 실제로 의형제였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정사 장비전에 따르면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고,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는 잠을 잘 때에도 관우, 장비와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고 한다. 위와 오에서도 이 셋의 두터운 신뢰 관계에 대해 인정했을 정도니, 이 셋이 설령 진짜로 의형제는 아니었을지라도 굳건한 결속력을 지닌 사이었다는 건 알 수 있다.
또한 의형제를 맺는 경우가 이미 여러 차례 있어왔으며 현재 중국에서도 적지 않게 있는 일이다. 꽌시 문서 참조. 단순한 지인관계가 친구관계, 단순한 친구관계가 오래되면 깊은 친구관계로, 깊은 친구관계가 더 깊어지면 의형제로 발전하는 건 현재 중국에서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물론 그 관계까지 도달하기는 매우 힘들고 중국에서도 의형제 관계가 너도 나도 있는 보편적인 건 분명 아닌 특수한 관계이지만.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만나게 된 시기를 황건적의 난이 발생한 184년 전후로 잡는다면, 219년과 221년에 두 형제를 잃을 때까지 서로 함께 한 시간이 무려 35~37년이다.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함께 한 시간은 웬만한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보다도 길었으며, 오늘날에도 3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친우 관계로 매양 함께 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더구나 그냥 어울려다닌 정도가 아니라 유비 생애의 숱한 패배와 불운을 모두 함께하며 무수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서로 배신하지 않고 끝끝내는 밑바닥 평민에서부터 각자 일국의 황제와 대장군이 될 때까지 그 인생 역정을 모두 함께 한 사이니, 이 정도면 사실 도원 결의가 실제로 있었네 없었네 따져볼 필요도 없이 사실상 가족, 형제와도 같았으리라고 쉽게 추측할 만하다.
심지어 이런 사실은 다른 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어서 관우와 형제라고 칭할 정도로 친한 친구였던 장료는 관우 본인에게 '좌장군(유비)과 나는 한날 한시에 같이 죽기로 약조한 사이이므로 결코 저버릴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고, 유엽은 '관우가 죽었는데 유비가 복수를 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라고 했고, 유비는 정말로 관우의 복수전에 나선다.
그 이전 시대와 당대, 그리고 후대에 걸쳐서 이 셋처럼 끝까지 신의를 지킨 이들은 많지 않다. 설령 지키더라도 이들만큼 신의가 깨질 대위기를 겪은 이들 역시 많지 않다. 당장 실제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마등과 한수는 서로 뒤통수를 치며 싸우면서 신의를 깼고, 손책과 주유는 끝까지 서로를 신뢰했지만 둘은 유관장만큼 신의가 깨질 위기가 아예 없었다. 손책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너무 일찍 죽어서...
황건적의 난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황건적이 들끓자 전국에서 이를 진압할 의병들이 일어났다. 유주 탁군에 머물던 유비 또한 관우와 장비,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의병이 된다.[6] 유비는 처음 거병할 때는 으레 그렇듯 유주에서 거병한 것이다. 유비는 황건적의 난에서 교위인 추정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여러차례 공을 세운다.
이후 187년 6월에는 장거와 장순이 반란을 일으켜 유주를 공격하자, 청주에서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게 되었다. 종사(從事, 주목이나 군수의 속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장순을 토벌하게 했는데, 평원을 지나다 유비가 무용(武勇)이 있음을 알았던 평원 사람 유자평의 추천으로 반란진압에 참여한다. 유비는 들판에서 적을 만났는데, 유비가 상처를 입어 죽은 척 하자 적들이 뒤쪽으로 떠났고 이 때문에 그를 수레에 태워 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의 군공으로 유비는 기주 중산국(中山國) 안희현(安熹縣)의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현위(縣尉)인 안희위(安喜尉)에 임명된다. 중산국은 유비의 조상인 중산정왕 유승의 임지이기도 하다. 지방 말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평민 출신이고 20대라는 젊은 나이를 고려한다면 그럭저럭 출세했다고 볼 수 있다.
독우 매질 사건
그러나 얼마 뒤 군공을 세운 사람 가운데 가짜 군공자를 선별하라는 조서가 내려오고 얼마 뒤 독우 직위의 관료가[7] 안위현으로 찾아온다. 이때 파견된 독우는 유비와 아는 사이로 그가 부임하자마자 자신이 파직되리라고 생각했다.[8]
독우는 유비를 공적 없이 임명된 자로 간주하고 유비를 내쫓으려고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비가 독우가 머무르는 전사(傳舍)에 찾아갔지만, 독우는 병을 칭하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유비는 사실상 파면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해 한스럽게 여겨 치소로 되돌아간다.
유비는 장거, 장순의 난에서 죽을 고생까지 하며 군공을 세웠는데 억울하게 파면되는 것에 분노했는지 부하들을 이끌고 독우가 머무르는 전사의 문 안으로 뛰어들며 “나는 부군(府君-태수)의 밀교를 받아 독우를 체포하러 왔다.”라고 말하며 독우를 구속해 현의 경계까지 끌고 갔다. 이후 독우를 나무에 묶어놓고 백여 대를 매질하고,[9] 이에 독우가 애걸하자 매질을 멈추고 이후 현위의 도장을 풀어 독우의 목에 건 뒤 안위현을 떠나 도망간다.[10]
사면
이후 하진이 조정 관리를 파견해서 자신의 모병에 응한 자는 지위고하와 죄질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주겠다고 선포했는데, 유비는 독우 구타 사건을 사면받고 관직을 얻기 위해서 모병에 참가하고 군공을 세워서 사면받는 데 성공한다. 도위 관구의와 모병하려고 단양에 가던 도중 하비에서 도적을 만나 격파한다. 이때 받은 관직인 하밀승은 스스로 내버렸지만 이후 임명된 고당현위직은 받아들인다. 얼마 후 직책이 현위에서 고당현령으로 승진하게 된다.
초전기
조조와 만나다
고당현령이 되었다는 본전 기록 바로 다음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붙인 영웅기 기록에 따르면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 낙양)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모으고 불러들여 무리를 합쳤다. 때마침 영제가 죽어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유비 또한 군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라고 되어 있다.
영웅기는 1차 사료인 데다가 저자 왕찬은 기억력이 매우 좋기로 유명했으며 유표가 형주를 다스리던 시절 유표의 관리로 일했기에 유표와 가까이 지내는 객장으로서 201년부터 208년까지 7년씩이나 형주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를 접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세간에 떠돌아다니는 풍문보단 실제 유비를 보면서 그의 이런저런 사정을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많았을 것이므로 기록의 신빙성은 높은 편이다.
영웅기에선 유비가 수도 낙양에 있을 때 조조를 따라 패국에 갔다고 쓰고 있는데, 이때 유비가 청주 평원군 고당현령 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후의 동탁 집권시기와 뒤 이은 군웅할거 시대도 아니고 아직 후한의 중앙 정부, 조정의 권위가 멀쩡히 유지되는 상황에서 일개 지방현령인 유비가 무슨 특별한 사유도 나온 게 없는데 임지인 고당현을 놔두고 굳이 수도에 있을 이유가 없고,
거기에 한 술 더 떠 그냥 조조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임지에서 한참 떨어진 조조의 고향인 패국까지 따라가 거기서 장기간 머무르기까지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유비는 고당현령 직을 버리고 수도 낙양에 있다가 조조를 만나 패국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즉 영제 말기 어느 시기에 유비는 고당현령 직을 버리고 관우, 장비, 간옹 등의 최측근만 데리고 낙양에 갔다 조조와 만났고 조조의 고향인 예주 패국(沛國) 초현(譙縣)까지 따라가서 함께 군사를 모았다는 소리가 된다.
이들이 만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비가 장거, 장순의 난 토벌에 참여한 187년 6월 이후 ~ 영제가 붕어한 189년 5월 사이로 추정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제 말년에 유비의 연대가 정확하게 확인되는게 187년 6월 장거, 장순의 난 토벌 참여뿐이기 때문이다.
이후 유비가 안희위를 언제 버렸는지, 관구의와 단양에 언제 갔는지까지는 추측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 실제로 만남의 시기에 있어 추정 범위는 더 좁을 것이다.
삼국지집해 무제기에 인용된 조별전(操別傳)에 따르면 조조가 전군도위(典軍都尉, 전군교위(典軍校尉)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로 임명되고 고향인 초현으로 보내졌다고 하니 이때 유비가 하밀승, 혹은 고당현령 직을 버린 상태에서[11] 조조를 따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조가 효기교위로 임명되고 벼슬을 버리고 달아날 때의 경우는 이미 영제는 죽고 소제가 즉위했을 때이므로 영웅기의 기록에 들어맞지 않으며, 또 이 당시 조조는 고향 패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진류에 머무르며 거병했으므로 역시 기록에 들어맞지 않는다.[12] 이와 같이 정확한 시점을 따져보면 조조가 전군도위가 된 188년은 영제 말년이기에 상충하지 않고 부합하는 면이 가장 큰 편이다.
여담으로 유비는 동탁 토벌전 이후 공손찬에 소속되어 청주에서 머물다 도겸의 추천으로 예주에 부임하였으므로 예주 패국 패현에서 인망으로 군림하였고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긴 뒤에도 소패, 즉 예주 패국 패현에 주둔하였음이 기록되어있다.
이후 허도 조정과 조조 휘하에서 공식적으로 예주목에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도 예주의 인재들이 유비에게 출사하였다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어쩌면 비교적 이른 시기인 이 시점부터 유비는 예주 패국 패현에 영향력을 보유하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동탁 토벌전
아무튼 유비는 조조와 함께 동탁 토벌전에 참가하지만[13] 동탁 토벌전에서 유비가 무엇을 했는지 알려진 행적은 없다. 참전했으니 싸우기는 싸웠을 것이고, 조조와 같이 무리를 모으고 있다가 거병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비는 조조의 고향 패국에서 그 동안 조조와 함께 모은 병력을 일으킨 후, 동탁 집권 당시 혼란을 겪던 수도 낙양에서 도망쳐 진류에 머물며 봉기한 조조의 군대에 합류해 그와 함께 동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탁 토벌전 도중 산조(酸棗)에 주둔하던 조조는 다른 이들이 미적거리는걸 보다 못해 190년 3월경 무작정 혼자 동탁 공격에 나서지만(자치통감) 동탁의 휘하 장수 서영에게 격파당해 조조 휘하 대부분의 장졸이 죽거나 다치고 조조도 튀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잘 싸운 서영은 남은 조조의 병력이 얼마 없다고 신나게 하루종일 전력을 다해 싸웠음에도 조조군 궤멸에 실패하고, 이래서야 산조를 공략할 수 없다고 물러났다. 당시 서영은 조조의 잔존병력이 힘써 싸우는 것을 보고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여겨 또한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때문에 서영은 당시 조조 잔존 세력에 조조 휘하에 있던 (만인지적이라고 불리는) 관우, 장비를 보유한 유비 세력 때문에 조조군 궤멸에 실패하고 병력이 약해져서 물러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붙인 유비가 동탁 토벌전에 종군했다는 영웅기 기록 다음에 이어지는 본전 기록에서는 바로 이후 유비가 적(賊)에 의해 격파당하니 (노식 문하에서 안면이 있었던) 중랑장[14] 공손찬에게 달아났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쓰인 적(賊) 글자는 '도적'이라는 뜻도 있지만 말 그대로 적군의 세력, 반역자, 역적(逆賊)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유비는 고당현령 직을 버리고 수도에 있다가 조조를 따라갔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현령으로 그대로 있다가 도적에 격파되었기보단 조조 휘하에서 반동탁 연합군의 '적'이자 그들이 '역적'으로 규정한 동탁과 싸워서 패하고 공손찬에게 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실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될 때 하내에서 맹주로 격문을 읽었던 원소나 산조에서 맹주로 격문을 읽었던 장홍이나 모두 동일하게 동탁을 적신(賊臣, 역적)이라고 칭하고 있다.
즉, 당시 유비의 입장이나 후세에 사료를 참고해서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 역시 후세의 사료를 참고해서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 입장에서 보면 동탁군은 '적신'을 따르는 '토벌해야 하는 적(賊)'이었던 것이다.
배송지가 굳이 유비가 동탁군과 싸웠다는 영웅기 주석 바로 다음에 유비가 적(賊)에게 깨뜨려져 공손찬에게로 도망갔다는 본전의 기술이 곧바로 이어지게 했던 것으로 보아 그는 본전에서 간단하게 (유비가) 적(賊)에게 패해 달아났다고만 진수가 쓴 부분이 사실은 유비가 적(賊)인 동탁군과 싸우다 격파당하여 달아났던 일이라고 1차 사료인 영웅기를 인용해 자세히 서술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대학자 학경은 배송지의 의도가 맞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저서 속후한서에 영웅기를 주석으로 인용하면서 원래 삼국지에 달려있던 '동탁을 토벌하는 데 종군했다'까지의 영웅기 주석을 적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에 의해 격파되어 분위장군(奮威將軍) 공손찬에 갔다'라는 기록까지 영웅기 주석이라고 더해서 적었다.
이를 봤을 때 학경이 속후한서를 쓴 송말원초(1260년~1275년) 당시에 남아있던 영웅기에는 '(유비가) 적(賊)에 의해 격파되자 분위장군(奮威將軍) 공손찬에게 달려갔다'라는 기록까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배송지는 영웅기를 인용해 사정을 자세히 쓰고자 했지만 '적에게 격파당해 공손찬에게 갔다'는 것 자체는 본전 기록과 겹치므로 굳이 영웅기의 이 부분은 적지 않았던 것일 수 있는데, 학경이 굳이 정사 삼국지 주석 영웅기에 적혀있는 이상의 내용까지 선주전 본전이 아니라 영웅기 주석의 내용이라며 적었던 것을 보면 설득력이 있다.
거기에 공손찬을 '분위장군'이라고 쓰는 기록은 학경 속후한서 영웅기 주석 이 기록뿐이다. 분무장군과 분위장군은 서로 다른 잡호장군 관직이긴 한데 서로 같은 급의 관직인 데다가 무(武)자와 위(威)자는 붓으로 써놓으면 얼핏 비슷하기 때문에 저수, 여포의 예에서도 나오듯이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관직이기도 하다,
결국 학경이 유비가 중랑장 공손찬에게 도주했다는 선주전 본전 내용뿐만 아니라 공손찬이 반동탁 연합군 당시 분무장군이었다는 정사 삼국지 공손찬전에서 내용을 따온 것도 아님을 알 수 있고 이들과는 다른 제3의 독자적인 원전인 영웅기에서 내용을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초평 원년(190년) 봄 정월, 주와 군은 모두 군대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했다. 동탁은 홍농왕(소제)를 죽이고 황제(헌제)를 위협해 서쪽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자 소열제(유비)는 다시 관직을 버렸다. 후에 고당위에서 고당현령으로 옮겨 갔다.
원래의 주해(原注)인 영웅기에 따르면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에 있었는데 후에 조공(조조)와 함께 패국으로 돌아가 무리를 불러 모으고 합쳤다.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고 유비 역시 군대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 적(賊)에 의해 격파당하니 분위장군(奮威將軍) 공손찬에게 달려갔다.
학경 속후한서
어쨌거나 이때 유비와 함께 있었을 조조가 동탁과 싸워서 패한건 위에서 말한 서영군과의 전투 뿐이므로 유비는 서영군과의 전투로 인해 조조를 떠나 공손찬에게 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조조는 서영에게 격파당해 군대가 거의 와해되어 군사가 적었으므로 조조 밑에서 유비는 뭘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기고 조조와 반동탁 연합군을 떠나 공손찬에게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후 조조는 여기저기서 반란까지 겪어가며 생고생 끝에 다시 병력을 규합했으나 그 숫자는 겨우 1천 명밖에 되지 않았고, 병력을 어떻게든 모아서 원소가 있는 하내로 이동한 후에는 더이상 동탁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원소에게 거의 종속된 부하 취급을 받게 된다.
사실 유비 입장에선 조조가 영 미덥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가짜 격문을 돌리고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기까지 하는 연의에서의 위상과 달리 실제 이 당시 조조는 반동탁 연합군에서 별로 영향력이 없었을 공산이 매우 크다.
우선 가짜 격문을 돌린 거 자체도 조조가 한 게 아니라 교모가 한 거고 이 당시 반동탁 연합군의 주축으로 원술, 한복, 공주, 유대, 왕광, 원소, 장막, 교모, 원유, 포신 등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조조를 화려하게 수식하기에 바쁜 무제기에서조차 조조는 그냥 '대행' 분무장군이라고만 나오고 후한서 원소열전엔 아예 조조가 참전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조조는 '기타 쩌리' 라인에 포함되어 있었던 듯. 하긴 자사나 태수도 아니고 잡호장군인 분무장군 대행에 다른 사람들은 각각 수만씩 이끌고 오는데 몇 천 명의 의병만 데려왔으니 당연할지도. 물론 조인, 유비가 모집해 데려왔을 병력도 있었겠지만 다른 지방관들이 이끌고 온 병력들은 명색이 후한의 정식 관군들이다.
또, 산조 지역의 맹주를 뽑을 때 다른 자사나 태수들이 다들 총대매긴 싫어서 모두 일개 공조인 장홍을 맹주로 지지하는 마당에 명색이 중앙에선 서원팔교위의 일원이었고 효기교위까지 했었던 조조를 지지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절친인 장막과 포신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무제기에서는 조조가 움직이지 않는 걸 질책하는 걸 무슨 맹주 원소까지 질책하는 것 마냥 대단한 것처럼 묘사하는데 실제로는 산조에 있던 아무도 조조의 말을 안 들어주니 조조 혼자 피꺼솟해서 무작정 나가다가 역적 동탁의 부하장수인 서영에게 된통 깨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기껏 자기가 모은 병력, 조인이 모은 병력, 유비랑 같이 모았던 병력, 장막이 보내준 병력 거의 다 날려먹고 친구 장막이 보내준 장수 위자, 포신의 동생인 포도[15]까지 전사하게 만든 다음, 간신히 살아남아 산조에 돌아와서 거창한 계획을 제시하지만, 절친 장막조차 쓰지 못했을 정도로 거창하기만 한 계획이라서 또 다시 아오안, 이러다보니 조조와 행동을 같이 했을 유비가 조조의 이 꼴을 보고 그냥 그 길로 동문인 공손찬에게 도주한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
공손찬 휘하
공손찬 밑에서 그는 주로 원소와 대결할 때 전선을 맡았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다가 적에 의해 격파되고 그곳에서 도망친 유비를 받아들인 공손찬은, 표를 올려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고(선주전), 청주자사 전해(田楷)를 위해 191년 7월에 기주목이 된 원소를 막도록 했다.(선주전, 조운전) 전해가 청주자사가 된 것은 191년 11월이므로 유비가 별부사마로서 전해와 붙어 다니게 된 것은 이 때 이후로 보인다.[16] 한편 이때 유우가 천자로 추대되자 유우가 거부했는데 한복이 원술에게 서술을 보내 유우가 황제 위에 오를 것이라는 도참을 쓴 적이 있다. 후세 학자 가운데서는 이를 후에 유비와 조비가 각각 황제가 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유우 문서 참고.
어쨌거나 유비는 거듭된 전공을 세워 시험삼아 청주 평원군의 수평원령(守平原令)이 됐다가, 후에 영평원상(領平原相)[17]이 된다(선주전). 이 시점부터 자치통감에 유비의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자치통감의 191년 10월 기록에 '당초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식의 표현을 붙이면서 유비의 출신이나 배경, 생김새와 성격,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과의 관계가 서술된다.
자치통감에선 유비가 노식과의 인연으로 공손찬에 의지했다고만 나오고, 원소를 막기 위해서 전해와 붙어 있었던게 아니라,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초 전해와 함께 청주를 순시하게 했는데 공로가 있으므로 평원상(平原相)으로 삼았다고만 나온다. 어쨌거나 평원상이 된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평원군은 기주 바로 옆에 있는 군으로 213년부터 기주의 영역이 되지만 당시에는 청주에 속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었을 땐 원소가 기주목이 된 후인데(공손찬전) 따라서 그는 원소를 최전방에서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공손찬 밑에 있던 조운과 처음 만나 조운이 유비를 수종했는데 당시엔 그냥 면식 관계였다가 점차 서로 간 정이 더해져 조운이 형의 상을 당해 물러났을 때는 서로 손을 맞잡고 후일을 기약하기도 했다.(조운전 조운별전)
한편 원굉의 후한기에 따르면 이보다 이른 시점인 191년 7월에 공손찬이 유비를 평원상에 임명했다고 하는데, 어느 쪽 기록이 맞든 간에 공손찬은 190~191년경에 자신의 군에 들어온 유비가 관우, 장비 등과 함께 단 시간 내에 많은 전공을 올리고, 또 동문이라고 매우 중용하였던 것 같다. 바로 1~2년 사이에 평원상이 되고 자신의 주 전력인 오환호기까지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유비의 전공에는 원래 임무인 원소 견제도 포함한 전공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 선주전과 조운전을 교차 검증하면 전해가 청주자사가 된 191년 11월 이후부터 유비가 전해, 조운 등과 함께 기주목 원소를 막기 위해서 활동했다는 것이 교차검증 되기 때문이다. 아마 간헐적인 교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1년 11월 공손찬이 황건적 30만을 상대하여 엄청난 전공을 올렸을 때 청주-서주에서 북상하던 황건적을 상대로 평원군 근처 발해군 경계에서 싸운 것인 만큼 유관장이 여기에서 공을 세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평원상 시절
위서(魏書)에는 이 시기의 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 인민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다.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사(士) 중의 아랫사람이라도 필히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유비는 청주 평원군에서 관리로 지냈을 때부터 상당한 행정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며, 치안을 바로잡고 덕을 베풀고 재물을 풀어 아랫사람과도 평등하게 자리를 같이 해 많은 사람들의 인망을 얻었고 그에게 귀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당시 화북 사정이 막장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비가 평원상을 지냈을 때 평소 유비를 깔보고 불쾌해 하던 군민 유평(劉平)이 유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하지만 그 자객은 유비를 만났을 때 유비가 심히 후대하자 유비를 찌를 수 없어 실토하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청주 북해국(北海國)의 북해상(北海相) 공융은 황건적의 침입을 받자 유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유비는 당대의 명사였던 공융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만한 인물이 자신을 알아줬다고 기뻐하고 삼천 병력을 태사자에게 보내서 도와줬다.
원소와 싸우다
그 뒤 원술과 원소가 전쟁을 하였고(192년) 이에 조조와 유표가 원소에게 가담하고 도겸과 공손찬이 원술하고 연합하여 대규모 국지전을 벌였다. 유비는 연주 자사로 공손찬에게 임명된 선경과 서주목 도겸과 함께 싸우게 된다. 유비는 자신의 임지인 청주 평원군 고당현(高唐縣)에 주둔하면서 원소와 원소 휘하 군벌인 조조와 싸웠고 패배한다.(192년 겨울 무제기)
이는 공손찬이 192년 12월 용주에서 원소와 격돌하여 또다시 크게 패한 전투(후한서 원소열전, 자치통감)와 연속적으로 벌어진 전투로 보인다. 용주는 청주 평원군과 기주(冀州) 발해군(勃海郡) 경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 공손찬전에 따르면 공손찬은 계교 전투 이후(192년) 자신을 추격한 최거업의 병력을 무찌르고 남진, 각 군현을 공략하면서 평원까지 이르렀다. 이후 청주 자사 전해를 파견하여 제(濟) 땅을 점거시켰다.[18]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니 유비와 전해는 동으로 가 제(齊, 청주 제국)에 주둔했다(삼국지 선주전) 원소는 다시금 수만 명을 보내 전해를 공격했다.(후한서 공손찬전)
자치통감은 '원소는 공손찬이 설치한 청주 자사 전해와 2년을 잇달아서 싸웠는데 병사들이 지치고 아울러 양식도 다하여 서로 백성들에게 약탈하니 들에는 푸른풀이 없었다. 원소가 그의 아들 원담을 청주 자사로 삼으므로, 전해가 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태복) 조기가 왔으므로 공손찬이 이에 원소와 화친하고 각각 군사를 인솔하고 물러났다.'라고만 적어 전해군과 원소군의 전투 지역인 제국과 유비의 참전 여부를 서술하지 않았고 그래서 얼핏보면 이 기록은 유비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19] 또 원소군과 전해군의 2년간 전투가 끝난 시점을 193년 1월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때 이미 유비가 여러 사서에 이름을 남기고 있으므로 대략적으로 후한서, 정사 삼국지의 내용과 함께 종합하자면, 계교 전투가 끝난 이후인 192년의 어느 시점에 전해와 유비가 제국으로 가서 원소군과 싸우다가 유비만 192년 겨울에 고당현으로 이동하여 원소-조조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고,
그동안 제국에선 전해-원소 양측 병사가 싸움의 끝에 피폐해지고 식량도 다해 백성들을 약탈하는 가운데 원소가 새로 청주 자사로 삼은 원담과 전해의 전투가 있었으며, 193년 1월의 휴전협정으로 모든 전투가 종료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치통감은 원담이 청주로 간 시기를 193년조에 적고 있지만 사실 이게 명확하지 않다. 원담을 청주로 내보내는 조치에 반대했던 저수의 일화는 삼국지, 후한서, 원굉의 후한기, 자치통감에 모두 기술되어 있으나 그 삽입 시점이 모두 제각각이다.
① 『삼국지』 원소전: 공손찬이 역경에서 망한 후(199년), ② 『후한서』 원소전: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탈출할 즈음(195년), ③ 『후한기』: 원소가 병사했을 때(202년) 初라는 표현을 붙여서. 『자치통감』 역시 동일.
이는 진수나 범엽이나 원굉이나 사마광이나 '원소가 원상을 총애하여 원담을 청주로 내보내는 조치에 대한 저수의 전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그 시기는 정확히 몰라 나름 적당한 부분에 서술해두었다는 뜻이다.
즉, 원담의 파견에 대해선 다들 정확한 시점을 몰랐다는 뜻으로, 원소가 병사했을 때(202년) 원담의 파견에 대하여 '初(당초)'라는 표현을 붙인 자치통감 역시 시기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일단 전해가 제국으로 가고 원소군과 2년간 싸운 것이 계교 전투 후인 192년 이후란 것은 확실하다.[20]
다시 자치통감 기록의 원전인 후한서 공손찬전을 살펴보면 '이후 청주자사 전개(전해)를 파견하여 제 땅을 점거시켰다. 원소는 다시금 (전해가 주둔한 제국으로) 군세 수만을 보내어 전해와 2년에 걸쳐(192년[21]~195년 사이, 193년 1월부터 적어도 동년 3월까지는 공손찬과 원소가 휴전중인 시기.) 전투를 벌였으나,(싸움 끝에) 군량이 다하여 사졸은 지쳤으며, 서로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들이 황폐해져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라고 한다.
후한서 공손찬전에는 '원소는 이후 자식 원담을 청주 자사로 삼아 파견하였으나, 전해는 그와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라고 하여 전해가 193년(공손찬이 유우를 사로잡은 해와 같다.) 원담과 싸워 패하여 귀환했다고 썼지만 자치통감은 단지 이기지 못했다고 썼다.
어쨌거나 유비와 전해가 193년 이후에도 청주에 머물면서 도겸을 구원하러 갔으므로 후한서 공손찬전의 전해 귀환 시기 서술은 오류가 맞다. 다만 이 부분은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敗退還)에 '後'를 문장 앞에 붙여서 '이후에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後敗退還)라고 하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어쨌거나 실제 전해가 귀환한 시점을 따져보면, 흥평 말엽~ 196년(후한서 공융전)에 유비의 추천으로 공융이 청주 자사로 천거되었고 조기가 흥평 말엽(후한서 조기전)[22]에 손숭을 추천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공융과 손숭이 천거된 시기가 같은 것으로 보아, 전해는 후한서 기록대로 흥평 말(195년 무렵)에 청주로 파견된 원담에 의해 축출되어 귀환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23] 이렇게 볼 경우 194년 여름에 있었던 조조의 2차 서주침공 때 전해가 도겸과 유비를 구원하지 못한 것이 설명되는데 194년 여름부터 195년까지 2년간 원소군과의 전투를 벌이다 원담의 참전으로 축출되어 서주 구원전에 참여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보면 딱 맞아떨어진다.[24]
어쨌거나 후한서 조기열전에 따르면 '(이 당시) 원소·조조는 공손찬과 기주를 다투고 있었다. 원소 및 조조는 조기가 온다고 듣자, 함께 스스로 군사를 인솔해 수백리 앞에서 봉영(奉迎)했다. 조기는 깊게 천자의 은덕과 전을 세워 백성을 안심시킬 합당한 이유를 말하고 또 공손찬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를 말했다. 원소 등은 각각 군사를 이끌고 떠나며...(중략)' 라고 쓰여있어 192년 겨울 전투 이후 곧바로 쌍방이 화친(193년 1월)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당현에 있던 유비도 공손찬 휘하였으므로 싸움을 멈추고 청주 제국으로 군사를 물렸을 것이다. 공손찬이 화친을 깬 게 193년 3월 즈음이므로 이때부터 유비도 그해 가을까진 전해와 함께 다시 원소군과 싸웠을 것이다. 다만 본격적으로 원소의 반격이 시작된 건 동년 6월쯤이므로 원소군과 싸우는 시간은 더 짧았을 것이고 청주 공손찬 세력의 우두머리 전해가 직접 서주 구원을 위해 내려올 정도면, 아예 서주를 구원할 때까지 원소 세력의 공격은 미약하거나 없었을 가능성도 많다.
원담 등장 이전까지 원소 세력은 청주에선 평원군 일부에만 세력이 미치기도 했고, 191년경 청주 자사 초화의 사망 후 그 후임으로 공손찬은 전해를, 원소는 장홍을 각각 추천하고 각축을 벌인다. 그런데 192-3년경 원소가 장홍을 동군 태수로 뺀 것은 아주 잠시 청주에서 발을 뺐다고도 볼 수 있다.
유비는
북방의 유주 출신이었고 공손찬의 휘하였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자연스럽게 하북 일대에서 활동했다.
[1] 유비 할아버지가 동군 범현의 현령을 지낼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유비집도 어느 정도 잘 살지 않았느냐, 유비집에 큰 뽕나무가 있었으니 잘 사는 집안의 표식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는데, 아버지가 일찍 죽고 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아버지 죽었다고 그렇게 가세 떨어질 정도면 애초에 부자는 아녔고 현대로 따지면 그전까지는 그냥 공무원하면서 그럭저럭 먹고살았던 집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로 돗자리도 짚신도 소모품이고 당시 중국에서는 좌식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돗자리는 늘 수요가 많았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해졌다는 거지 끼니를 굶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아래 후술될 청년기의 기록을 보면 개나 말(사냥),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하며 호걸들과 놀러다니기를 즐겼으며 노식의 산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게 가난한 집안이라면 힘들었을 거라 추측하기 쉽다.
[2] 후일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주 산업이 뽕나무 잎을 먹인 누에를 쳐서 만드는 비단 산업이라는 점에서 묘한 일화라고 할 수 있다.
[3] 사실 유비 본인도 황족이지만, 전한시대의 왕족이 조상인 유비는 현재 황제인 영제 유굉, 그리고 훗날 그를 숙부(황숙)으로 칭하는 헌제 유협과는 사돈의 팔촌이 형제로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게 먼 방계황족인지라 위험한 발언이 맞다.
[4] 이러면서 '승상(제갈량)이 경(유선)의 지량(智量)을 칭찬하여 심히 크게 수양해 바라던 바를 넘어섰다 하니 실로 그러하다면 내가 또 무엇을 근심하리!'라는 말도 남겼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유선의 나이가 이미 열일곱이다. 15세면 관례를 치르고 성인 취급하던 시절이니 열일곱이면 현대 기준으론 이미 대학생 정도인 건데도 책 제목까지 하나하나 적어주면서 공부하라고 독촉하는 걸 보면, 심지어 '승상이 너 공부하라고 책을 여러 권 직접 필사하기까지 했다. 너 꼭 찾아봐라'라고 하기까지 했으니...
[5] 예컨데 유비는 진기, 정현과 교류하면서 매번 (그들이) 가르침을 주어 치란의 도를 모두 언급했지만 사면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제갈량의 인용으로 잘 알려졌다.
[6] 이 무리들 중에는 유비의 패거리 일원들도 포함됐을 것이다. 이들이 유비를 평생 따른 최초의 유비군이라면 유비가 몇 차례나 와해되면서도 유비의 생존소식을 듣자 다시 달려오는 생존력과 충성심이 납득가는 일이다.
[7] 삼국지평화에서의 이름이 최렴으로 나온다.
[8] 공을 세워 관리가 된 자들은 중앙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아 독우를 보내 처리했는데, 이를 눈치챈 유비가 선수를 쳤다는 의견도 있다.
[9] 보다시피 정사에서 독우를 매질한 사람은 유비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캐릭터 이미지 때문에 매질한 사람을 장비로 바꾸었다.
[10] 정사에선 나름 제 딴에는 합당한 이유로 유비를 찾아왔고 이를 너무 앞서 나간 유비가 두들겨 팬 것으로 나오나 연의에선 애초부터 유비에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거나 유비가 청렴결백하단 걸 알자 유비의 측근을 잡아다 매질하며 없는 죄를 만들려 한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왔다.
[11] 다만 하밀승을 버리고 조조와 만났다가 반동탁연합군이 흐지부지 되고 고당현령이 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했으며 거기다가 회유할 만한 명망도 아직 부족하고 말단인 현령급의 인사를 장안의 동탁 조정에서 일일이 신경쓰면서 벼슬을 내려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당현령이 되고 나서 벼슬을 버린 후 낙양에 있다가 조조를 만났고 조조와 함께 산조에서 반동탁연합군에 종사하다가 서영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즉 적(賊)에게 격파된 이후 달아나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공손찬에 의탁했기에 이후 공손찬이 표를 올려 별부사마를 받게 하고 기주목이 된 원소를 상대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 또 조조가 혼자 가다가 발생한 여백사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유비가 같이 있었다는 얘기는 없다.
[13]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공손찬 휘하로 동탁 토벌전에 참여했다고 나오지만 사실 정사에서 공손찬은 동탁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유비는 조조와 같이 참여했다.
[14] 선주전 기록은 이렇고 화양국지는 그냥 유비가 고당현령이 된 이후 바로 공손찬이 중랑장이 되자 표를 올려 별부사마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같은 삼국지의 공손찬전은 이때가 공손찬이 분무장군 직을 받은 이후라고 기록하고 있고 후한서와 자치통감은 이 시기 공손찬이 항로교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공손찬이 분무장군을 받은 시기는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 중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정사 삼국지는 189년 동탁이 낙양에 들어섰을때, 후한서는 191년 30만 황건적을 격파했을때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도 이 문제를 판단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적지 않았다. 원나라의 대학자 학경의 저서 속후한서는 영웅기를 인용해 동탁 토벌전에서 적에게 격파된 당시 유비가 분위장군 공손찬에게 갔다고 하여 초평 원년(190년) 당시 공손찬이 분위장군이라고 쓰고 있다.
[15] 연합군 중에서는 원소의 군사가 가장 강성해 대부분의 호걸들이 그에게로 모였지만 포신은 조조를 높게 평가했는데, 이를 미루어보아 장막과 함께 포신이 조조를 지원해서 포도가 따라갔다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16] 학경 속후한서는 영웅기를 인용해 '(초평 원년) 군을 일으켜 동탁 토벌에 종군하다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 갔다'라는 기술을 한 이후 "초평 2년 여름 6월, 원소가 기주목 한복을 쫓아내고, 스스로 주를 거느리며, 공손찬이 배치한 청주자사 전해를 공격했다.
겨울 10월, 공손찬이 표를 올려 소열제(유비)를 별부사마로 삼아, 전해를 위해 원소를 막게 했다"는 기록을 적고 있는데 공손찬이 자사를 배치한 것은 후한서 효헌제기와 후한서 공손찬전에 따르면 191년 11월에 30만 황건적을 격파한 이후이므로 초평 2년의 기록은 '유비가 별부사마가 되어 전해를 위해 원소를 막게했다'라는 기본틀만 빼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이 기록 전반은 그냥 넘어가기 쉬운 선주전의 '군을 일으켜 동탁 토벌에 종군했다.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공손찬은 표를 올려 (선주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田楷)를 위해 기주목 원소를 막도록 했다.' 라는 서로 이어지는 기록을 확실히 둘로 나누어 각각 초평 원년(190년), 초평 2년(191년)의 사건임을 확실히 기술함으로써 실제로는 두 사건 사이에 시간차가 꽤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17] 환, 영제 연간 평원군은 다시 국(國)이 됐기에, 유비가 평원을 실제적으로 다스리는 직책인 상이 된 것이다. 당시의 평원왕은 유석(劉石)인데 이오후(蠡吾侯) 유익(劉翼)의 자식으로, 평원왕 유석은, 건화 2년(148년)에 봉해졌다가, 건안 11년(206년)에 봉국이 없어졌다.
[18] 그러나 후한서 원소열전과 삼국지 원소전 영웅기 주석에 따르면 바로 이후 공손찬이 192년 12월(자치통감) 용주에서 패배해 193년 1월(후한서 원소열전, 자치통감)에 조정의 화해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19] 실제로 자치통감은 처음 유비가 등장하여 조운과 만난 이후 서주대학살에서 서주를 구원할 때까지 유비의 기록이 없다. 아마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뺀 듯.
[20] 다만 후술하듯이 여러 기록을 교차 검증하면 원담의 파견은 후한서 원소전의 기록이 가장 원래 파견 시기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21]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다시 부연하자면 192년 초에 계교 전투가 있었으니 그 뒤 공손찬이 최거업의 병력을 격파하고 남하했다가 전해를 제국으로 보낸 것이 192년 어느 시점으로 보인다. 한편 192년 겨울 유비는 고당현에서 원소와 조조 동맹과 싸우고 있었으니 전해와 함께 제국으로 갔다가 바로 고당현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22] 조기가 형주에 머물면서 장안에서 도망쳐나와 낙양에 있던 헌제에게 상주했다.
[23] 손숭은 진짜 부임했는지 알 수 없고, 공융은 실제로 청주 북해국에 소재하고 있었다만 얼마 안 가 건안 원년(196년)에 원담에 의해 쫓겨난다. 그리고 그 후임이 조조가 추천한 이정(삼국지 이전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정도 얼마 안 가 죽고 비로소 조조가 표를 올려 청주의 실지배자인 원담을 정식 자사로 승인했던 게 아닌가 한다.(196년~199년 사이) 그 이전까지 원소는 황제의 재가 없이 원담을 청주 자사로 내세웠던 것이고.
[24] 자치통감은 전해의 구원을 흥평 원년인 194년 2월에 붙여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지 무제기, 삼국지 도겸전 주석 오서를 보면 194년 봄으로 해석될 수 있다.(조조가 팽성(彭城)으로 진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자 도겸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저항하였고, 청주 자사 전해(田楷)가 와서 도겸을 구하려고 하니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도겸전 주석 오서) 흥평(興平) 원년(194년) 봄,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왔다.(무제기)) 어쨌거나 이후 전해의 서주 구원 기록은 사라지므로 194년 2월에 돌아가서 원소군과 싸웠다면 말이 된다.
[출처] 유비의 생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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