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일 제1차 안동선비 옛길걷기를 광복절을 맞이하여 걷기행사를 가졌다.
이번 걷기여행은 풍산한지마을을출발하여 소산마을 가일마을 갈전리 등을 걷는 일정으로 약 4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무덥고 시멘트길이라서 다소 힘든 일정이지만 함께해준 분청님과 송진기님 감사드립니다.
차량을 한지공장에 세워두고 새역마 뚝길을 걸었는데 달맞이꽃이 아름다게 피어서 나그네를 맞이하여 주었다
소산마을 초입에 청음 김상헌선생이 남긴 시비가 우리를 반기었다
가노라 삼각산아로 시작되는 시는 청음의 우국충절이 배여있는 시로서 조국을 떠나서 청나라로 가면서
앞으로 펼쳐질 조국에 운명을 생각하여 비통한 마음을 시로서 토해내었다.
소산마을 진입하니 생태공원을 삼구을 중심으로 연못과 함께 잘 꾸며져 있다
연꽃중에서도 화려하지 않고 곱게 피어난 백련이 우리를 반긴다
"부들"을 오래만에 보았다 어릴때 저수지나 습지 등에서 많이 보았는데 여기서 만났다.
아이스케이크를 닮았다하여 꺽어서 들고 다니면서 놀던 기억이 새롭다.
삼구정-이 건물은 조선 연산군(燕山君) 2년(1496)에 김영수(金永銖, 1446~1502)가 80여세 되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형님인 김영전(김영전,1439~1522)과 상의하여 건립한 것으로 여러 차례 보수와 중건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삼구정이란 명칭은 거북이 모양의 돌이 3개가 있어서 붙인 것으로, 거북은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어머님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안동시 풍산들은 눈이 멀리 하회마을 가는 길목에 넓게 펼쳐져 있다.
낙동강이 안동에 가장 크고 넓은 들을 만들었다. 약 10여리의 벌판 이름 그대로 풍요로운 곳
그 풍요로움을 바라보는 아늑한 마을 소산리(素山里) , 『 시미-흰산』라는 우리말 이름은 정겹다.
바로 이 소산리(素山里) 가 안동김씨의 텃밭이다.
입향조는 세종때 비안(지금의성)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으로 전한다.
그의 자부 권씨가 다섯아들을 데리고 시미에 낙향했는데 장남은 승려가 되어 세조때 국사(國師)가 된 고승 학조대사이다. 그 5형제중 막내 영주(永銖)가 세아들을 두었다. (영-삼당 , 번 , 순) 그 중 번의 손자가 극효이며 극효의 아들이 상용, 상헌. 김번의 후예인 장동파가 서울에 옮겨 세도를 구가하는 동안 큰집인 삼당의 후예들이 작은 집의 권세에 편승하지 않고 뼈대있는 가문의 전통을 이으며 소산을지켰다.
마을 한 복판에는 김번이 지어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는 청원루(淸遠樓)등 장동집의 유적인 남아 안동김의 본바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동김씨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집안이다 특히나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우리나라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김좌진장군을 비롯하여 그에 김두한(김좌진장군에 아들이라는 정확한 근거없슴)
구한말 대표적 개혁파 김옥균과
선김(구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선생이 안동김씨이다
또한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 김시현선생님이 이곳에서 이웃한 풍산 현애리 출신으로 안동김씨 후손이다
김시현선생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총 24년간 감옥살이를 한 초인적인 항일투사가 있다. 그 가운데 여섯 차례, 기간으로 16년에 걸친 감옥살이는 일제하에서였고, 나머지 한 차례(수감 기간은 약 8년)는 해방 후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였다.
김 의사는 62세 나이에 52년 6.25일유시태((柳時泰, 당시 62세)를 통해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승만 저격 계획이 실패하여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이승만 저격 사건으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시현과 유시태가 공동으로 속해 있었던 의열단에는 ‘7가살(七可殺)’이라는 맹세가 있다. 1919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창단할 때 처치해야 할 일곱 부류의 인간들을 규정했다. 총독부고관, 군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밀정, 반민족적 토호가 그 대상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을 그 대상으로 지목하여 암살을 시도했다. 의열단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안동김씨 종택을 둘러보았다..
연휴라서 가족단위 고택체험 방문객이 많이 보였다.
종택에 이쁜 백일홍과 잘 꾸며진 정원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한다.
가일마을 가는 중간지점에 6.10만세 주역인 권오설선생의 묘지를 둘러보았다.
작년에 이장하면서 철판으로된 관이 나와서 일제의 악명을 다시 확인하였는데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혀있어 가슴이 아프다.
권오설(權五卨 1897~1938)은 1920년대 사회주의 이념을 민족문제에 대입시켜 자주 독립을 일구려 했던 애국자. 전남도청에 근무하고 광주에서 3.1운동을 맞은 권오설은 배후로 지목되어 6월형을 받고 그해 가을 가일 마을로 들어와 원흥의숙이라 부르는 신식교육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운다. 신식교육뿐 아니라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함께 펼쳤다.
이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오미동의 김재봉, 우롱골의 이준태와 같은 고향 선배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1923년 풍산소작인회를 결성한 권오설이 그 대표자격을 갖고 서울로 갔다. 이듬해 조선노동총동맹의 10인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 위원을 거쳐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 되는데 김재봉이 책임비서, 권오설은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5월1일 메이데이 시위를 기획 하였는데 갑작스런 융희황제 순종의 승하로 인산일에 대중적 시위로 방향 전환을 하는데 6.10 만세운동의 기획인 것이다.
권오설은 서울에서 유학하던 권오상, 권오운, 권태성, 유연희등 가일과 이웃마을 청년들을 6.10만세운동 한복판에 세웠다. 6월 7일 권오설은 일경에 시위 준비가 사전에 노출되어 체포되고 불발로 끝날 위기에 종로4가 네거리에서 예안출신으로 중앙고보에 다니던 이선호가 계획 했던데로 뛰쳐 나가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신호탄이 되었다.
권오설은 20개월동안 미결수로 있었는데 김남수는 통일조선공산당이라는 3차당 활동으로 구속되기 직전까지 권오설을 지원 하였다. 7년형 구형에 5년형을 선고받고 1930년 7월에 출옥이 예정 되었으나 100일을 앞둔 4월 17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갑자기 순국 하였다.
가일마을 흙담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수곡종택 정조16년(1792)에 권 조가 조부 권 보(호:수곡)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넓은 안마당을 격하여 사랑채와 안채 등이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었고 새 사랑채인 일지재는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사랑채 지붕을 팔작으로 화려하게 하지않고 맞배지붕으로 처리한 것은 평생을 도학에 전심하며 검소를 생활신조를 삼은 조부의 뜻을 담은 것이라한다.
시습제(時習齊)는 화산 권주(花山 權柱 1457~1505)의 고택이다. 화산은 도승지등 많은 벼슬을 거쳤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대명외교에 일익을 담당 하였다고 한다. 주변에 담장과 정원이 주인에 정성을 옅볼수있다
마지막으로 안동한지공장을 견학하였다.
옟날 방식 그대로 한지를 생산하는데 체험장으로서 많은 관람객이 찿아오고 있다
앞으로도 안동선비옛길 걷기여행은 부 정기적으로 토요일에가질 예정입니다.
다음 걷기여행은
하회마을 삼거리에서 시작하여 병산서원. 하회마을 걷기여행입니다..
낙동강변을따라 늦여름에 정취를 우리 지역에 대표적 유적지인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둘러보는 걷기여행에 많은 참여바랍니다.
일자는 추후에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첫댓글 늘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자주 갈 수 없는 곳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