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삼일 후 부활한 것을 기리는 날.
부활에 대해 불자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한다는 의식적인 인사는 당연한 것인데 반해
부활에 의문을 말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꺼린다.
그런데 의심을 묻어둔 채 의식적인 인사로 지나치면 과연 종교간의 이해 폭이 좁혀질 수 있을까?.
청년 시절 유학자 노인 분이 법당에 초청되어 강의를 시작하는 데..
처음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기[나]는 아직도 한 살도 채 안된 아기와 젊은 부인을 놔두고 어떻게 출가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고 하셨다.
불교를 가까이 하기 전까지 나 역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했는데..
불교를 가까이 하면서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출가를 해야만 했으니까.. 하면서 아기나 와이프 입장은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나만 고민하며 출가한 것은 극단적 이기가 아니냐 말이다..
대승불교는 출가했던 부처님이 보살이란 모습으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불교라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부활절을 보면서 부활을 믿느냐 아니냐를 보는 게 아닌..
왜 기독교에서 예수는 부활을 했을까?.. 를 본다.
예수는 신(의 외아들)으로 영원한 자인데 33살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인가?..
만일 이게 참이라면 예수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리라.
나타나지 않을 바에 뭐하러 부활했느냐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내가 보기엔 육신 부활이 핵심이 아니다.
한편..
흥미로운 사실은 석가모니는 80세에 돌아가셨는데..
부처님 상은 대부분이 마치 33살 모습인 젊은 부처상을 만들어 놓고 있다.
만일 예수가 80살에 돌아가셨다면 예수 상은 공자나 노자처럼 지금과 다른 중년이나 노인 모습으로 전할까?..
아니!..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 석가 상을 만들듯.. 젊은 예수 상을 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서양은 동양에 비해 삶을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이를 중심으로 보지만..
기독교나 불교는 지혜를 전하고 있다.
불자나 기독교인이 예수나 부처에게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는 것은
젊음에 대한 공경이 아닌
지혜에 대한 공경..()..
그러기에 예수님의 지혜인 바이블이 있는 곳은 곧 예수가 있는 곳이 된다.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을 축하하지만 실은
예수님의 지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듯이..
2천년이 지난 지금 바이블은
세계에서 읽히며 예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있지 아니한가.
데미안은 말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알이 하나의 세계이듯..
알을 깨고 나온 것은 하나의 세계에서 죽음이듯..
알을 깨고 나온 새로운 세계는 알의 세계와 다른 세계로
육신의 세계가 아니다.
불교에서 구경열반이란
몸 없이도 살아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볼 수 있다.
아라한이 되면 지금 여기서 스스로 후세에 몸을 받지 않음을 안다[自知 不受後有]고 했다.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무엇인가?..
젊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 예수와 석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몸에 취하지 말고 지혜를 밝혀 인생을 즐기라는 것이 아닌지..()..
마음의 부활을 전하는 기독교에 고개를 숙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좋은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