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승우의 미래의학] 이상한 나라의 히포크라테스
중앙일보
입력 2023.04.20 00:46
박승우 성균관 의대 교수·삼성서울병원 원장
‘의사는 강자’ 논리에 갇힌 사회
과한 규제는 또 다른 피해 낳아
공공이익 위한 최선책 찾아야
의료계의 자정 시스템도 필요
따스한 봄날, 잔디밭에 쉬고 있던 히포크라테스는 토끼가 바쁘다고 중얼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따라가다가 큰 동굴에 빠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로부터 2500여년 뒤인 2023년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와 있다는 토끼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고열로 쓰러진 아이를 안은 부모가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지만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없어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경악을 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그는 추락한 복합 골절 환자를 받을 수 있냐는 응급구조사 전화에 “환자가 넘쳐 곤란하다”고 전화를 끊는 것을 보고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한 의사를 붙잡고 물었다. “의사라면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의사는 지친 듯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숭고한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런 과실이 없음에도 죽으면 도의적 책임을 지라고 하고, 심지어 살인죄로 고발당합니다. 저도 살아야 다른 환자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미래의학
히포크라테스는 비명을 지르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는 참으로 해괴한 악몽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환자를 보러 갔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가 믿지 못할 일이 요즘 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의사는 강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 수많은 의료진이 위급한 환자를 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했어도 사망 후 유가족과 분쟁으로 가면 국가 조정기관에선 의사 과실이 없다고 판정하면서도 돈 잘 버는 병원이 도의적 책임은 지라며 위로금 지급을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유가족은 의사 잘못임을 확신해 다시 형사나 민사 소송을 제기한다. 이런 일을 수차례 겪은 의사는 이후 소신껏 치료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사연이 보도되면 병원들이 왜 중증응급환자 제때 치료할 수 없었는지 분석하고 유사한 불행을 막기 위해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어떻게 투입해야 할지 원인을 찾아야 한다. 반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디가 더 잘못한 건지 과실 여부 수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게다가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금고 이상 판결 시 의료면허를 취소하겠다는 법안도 추진되고 있다. 의사 전체를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기에 추진되는 과도한 처벌이다.
어느 직업군이건 비상식적인 이들이 조금씩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 직종 전체를 비이성적이고 악의적인 집단이라고 재단하면 안 된다. 의사들도 성범죄나 강력범죄를 저지른 이가 진료하는 것에는 대다수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 과실과 무관한 범죄로 금고 이상의 형벌만 선고되어도 의사 면허를 취소하게 되면 해당 의사뿐만 아니라 진료받던 환자들에게도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독립된 면허기관이 범죄자 의료인의 도덕성을 검증하고 관리하는 자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우리도 제도를 보완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지 의사만 탓하다가는 진료를 포기한 의사로 인해 더 많은 이가 소중한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최근 여러 법안 상정으로 직종 간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의료 분야는 고도로 세분화된 각 직종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야 최상의 진료가 가능하다. 서로 자기 입장만 내세우고 갈등이 커질 경우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에 더더욱 세밀히 조율해 나가야 한다.
그동안 한국 의료의 미래를 위한 의료계의 노력을 설명해 왔다. 이제는 사회의 의식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생각이 바뀌어야 해법이 나올 수 있다.
60년 전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은 과학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느 한순간 거대한 의식, 즉 패러다임 변화를 통해 급격한 발전이 일어나고 이후 정착되는 과정이 반복되어 왔음을 역설한 바 있다. 이제는 의료에 대한 새 패러다임을 공유해야 한다.
경증 환자는 동네병원에서, 중증환자의 집중 치료는 대형 종합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의료체계가 확립되어 응급환자가 제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정당한 수가가 책정되어 외과, 소아청소년과, 응급실, 중환자실 등 필수 의료분야 의사들이 정상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국민 모두를 위한 올바른 정책이라는 공감대가 쌓여야 한다.
첨단과학과 AI만으로 미래의학이 실현되지 않는다. 의료 전문가에 대한 화풀이식 처벌을 논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질지 머리를 맞대고 개선한다면 세계를 선도하는 미래의학이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박승우 성균관 의대 교수·삼성서울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