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서너 살 때. 그러니까 대기업체의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출장으로 LA에 다녀와서 Newark 공항에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운전기사가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백인 아저씨였는데 타자마자 무엇이 그리 궁금한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피곤한데 말을 시키니 귀찮기는 했지만 영어회화 연습하는 셈치고 묻는 대로 대꾸하다 보니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가족 관계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는 물을 만큼 묻더니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데 그동안 말이 고팠던지 말이 많아졌다.
큰딸이 자라면서 남자관계가 매우 복잡해 툭하면 외박해서 속을 썩였는데 아내와 밤을 꼬박 새우며 딸의 귀가를 기다릴 때마다 세상에 자기와 함께 외로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은 아내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작은딸은 내성적이라서 남자를 사귈 줄 몰라서 걱정했는데 나이 들도록 순결을 지키며 살다가 결혼했는데 그리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가정사를 들으니 별 흥미도 없고 좀 지겨운 생각이 들어서 피곤하니 그만 얘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얼마간 대화가 중단되었는데 그가 침묵을 깨고 불쑥 물었다.
“아내에게 얼마나 자주 꽃을 선물하시오?”
“글쎄요? 꽃 같은 건 선물한 적이 없는데요.”
그는 나를 흘끗 쳐다보며 딱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잔소리인지 훈계인지 모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당신도 나이 들어보소. 딸들이 다 결혼하고 나면 정말 외롭다오. 그때가 되면 의지할 사람은 아내밖에 없다오. 지금부터라도 아내에게 자주 꽃을 선물하소. 그거 돈 얼마 들지 않소. 단돈 $1이면 충분하오. 당신 아내는 꽃 한 송이를 받으면 $1짜리로 보지 않는다오. 그걸 당신 마음의 표시로 보는 거요. 꽃이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거요. 내 말 단디 들으소. 당장 지금부터라도 꽃을 선물하소. 그럴 생각이 있다면 당장 꽃가게에 들렀다 갑시다.”
바로 꽃가게에 들르지는 않았지만 듣고보니 옳은 말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나이 든 사람의 잔소리가 아니라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 도착하여 내릴 때에 수업료를 바치는 셈 치고 팁을 넉넉히 주었지만 그리 아까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무뚝뚝한 강원도 산골 출신 촌 사람이 달라졌다. 가족에게 꾸준히 꽃을 선물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아내 생일, 딸들 생일, 결혼기념일, 어머니날, 발렌타인 데이(이 날은 특별히 아내와 딸들 모두에게 꽃을 선물함.) 등은 물론이고 기분 내킬 때마다 가족에게 꽃을 선물했더니 온 가족이 받을 때마다 기뻐하고 집안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소문을 듣고 볶아대는 부인들 등쌀에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 중에도 따라 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그 괴짜 운전기사 덕분에 동네 꽃가게 매상도 꽤 올랐을 것이다. 꽃 선물이 다른 것에 비해 돈은 별로 들지는 않고 효과는 몇 곱절이 나는 법이니 나의 동료도 그리 손해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운전기사 아저씨는 나이 들어 갈수록 꽃을 더 자주 선물하라고 했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꽃 선물을 중단해서 지금은 장미 한 송이에 얼마인지도 모른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고 보니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꽃을 사러 가는 것도 혼자 힘으로 할 수가 없고, 늘 아내와 함께 지내다 보니 깜짝 꽃 선물을 할 기회를 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아저씨를 또 만나게 되면 야단이나 맞지 않을까 모르겠다.
논어(論語)》의〈술이 편(述而篇)>에 삼인행필유아사 [三人行必有我師]."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라고 했는데 나는 그날 우연히 현자(賢者)를 만나서 작으나마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다.
객담 두어 마디
하나 : 문상두의 글 끝에 陽川書窓이라고 쓴 것이 폼나 보여서 나도 그리 하려고 마음 먹고 구상을 해 보았다.
New Jersey=뉴저지=뉴자지=새 자지=新腎 그리하여 新腎書窓이라고 할까 했는데 발음을 그럴싸 한데
의미가 영 거시기하여 망서리고 있는 중임.
둘 : 이 글을 읽고 감동하여 동문 여러분과 가족, 친척이 꽃 선물하기 캠페인을 벌여서 삼각산 산신령=꽃을 든 남자인
조진우의 가게로 몰려들어 떼돈을 벌에 해주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