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폴란드 3 -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20200926 토요일 오후 5시
최성은 선생님의 안내로 떠나는 폴란드 문학 두 번째 여행을 따라갑니다.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를 만나 여행의 감동이 아직도 충만한데, 또 다시 올가 토카르축으로 우리를 감동에 흠뻑 빠져들게 했습니다. 폴란드 문학을 전하고 싶은 선생님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집중할 수 있었고 우리들의 모습에도 열정이 느껴져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쉼보르스카와 올가 토카르축의 덕후(?)로 만드는 힘을 가지셨네요.
쉰이 넘은 나이에 서점에서 이렇게 훌륭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준비하신 알모님도 최성은 선생님도 그리고 함께한 우리도 모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폴란드는 5명의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나라입니다.
첫 번째 수상자는 '<쿠오바디스>의 작가 헨리크시엔키에비치(1905).
두 번째 수상자는 <농민>의 작가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1924).
세 번째 수상자는 반체제 저항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1980), 미국에 망명한 작가입니다.
네 번째 수상자는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96)로 수상 시집 <끝과 시작>,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2018)는 <방랑자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토카르추크는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 넘나들기를 묘사하는 데 백과사전적 열정과 서술의 상상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림원은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1962년생인 올가 토카르추크는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칼 융의 사상과 불교 철학에 조예가 깊으며, 나를 인정하고 타자에 대한 그 사람 고유의 특성을 인정하고,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본령이라고 했습니다.
“문학이란 가장 심오하고 정교한 교감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행동의 동기를 이해하게 되고,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고,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노선과 피부색, 성적 지향, 그밖에 표면상 우리를 갈라놓는 수많은 요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보편적 정서를 하나로 묶어내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소설이야말로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므로.”
-올가 토카르추크 “노벨상 수사기념 소감” 중에서(2019)-
“내가 기억하는, 태어나서 가장 처음 본 사진은 어머니가 처녀 시절에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1960년대 초반에 촬영한 그 사진 속에서 한 젊은 여인이 구형 라디오 옆에선 채 프레임 밖으로 망연히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어린 계집아이의 눈에 비친 젊은 여인의 모습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슬픔의 이유에 대해 어린 딸이 엄마에게 묻는다.
- 네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워하느라 슬픈 거야. -
어머니가 대답했다.
내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날 그리워할 수 있냐고, 내가 물었다.
네 댓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리움이란 건, 누군가를 잃었을 때 솟아나는 감정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 때로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어. 우리가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된단다. -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이 짤막한 대화 덕분에 나의 존재는 세상의 평범한 물질적 속성이나 인과관계, 확률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내 존재를 시간의 저편, 영원의 달콤한 영역 가까이에 배치했다. 그때 나는 막연하게나마 지금까지 내가 상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결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한 젊은 여인 - 내 어머니는 한때 사람들이 ‘영혼’이라 부르던 뭔가를 그렇게 내 안에 심어주었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서술자를 내게 선물해주었다. (...)
다정함이란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이다. 그것은 사물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느낌과 감정을 서로 나누고, 상대로부터 끊임없이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이며, 우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면밀하고 주의 깊게 바라볼 때 구현된다. (...)
문학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발휘한다. 문학만이 우리를 타인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서 그 가치와 정당성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타자의 운명을 더불어 체감할 수 있게 해준다.”
-2019.12. 7 노벨 문학상 수상기념 한림원 기조강연<다정한 서술자> 중에서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우리는 왜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 훔쳐 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감독 아그니에슈카 홀란드가 ‘흔적’(pokot)’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2017년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 했습니다. 토카르추크는 홀란드 감독과 시나리오를 함께 썼습니다.>
<방랑자들> “적절한 시간과 장소”중에서
많은 이들은 세상의 좌표 어딘가에 시간과 공간이 서로 딱 들어맞는 완벽한 지점이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다들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소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움직이면서도 어떻게든 가능성이 싹터서 결국엔 목표지점에 다다르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로 말이다. 적절한 순간, 적절한 장소에 도착한다면, 그래서 주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면 자물쇠의 암호는 해제되고, 비밀번호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더 이상 기회를 놓칠 일도 없고,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건, 운명의 손길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그저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그 유일한 배열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출석을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거기서 당신은 어쩌면 위대한 사랑이나 놀라운 행운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오랜 세월 모두가 헛되이 갈구하던 놀라운 신비를 풀 수 있게 되거나. 혹은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종종 그런 순간이 가까이 다가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어쩐지 바로 오늘 그런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최성은 선생님이 제공하신 자료에서 참고함)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고 강의가 끝났다. 엉덩이는 조금 아팠지만 선생님과 공감하며 올가 토카르축의 생각을 따라가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각자의 삶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한 사람의 말을 따라가며 한 작가의 생각을 함께 느끼는 시간. 마치 환타지세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에 혹은 같은 시간에 올가 토카르축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