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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명절
에스더 7:1-6, 9-10, 9:20-2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지난 추석 명절을 잘 쇠셨는가? 예전에는 명절에 대해 별로 실감하지 않고 살았는데, 한동안 이민목회를 하다 보니 추석이니, 설날이니 참 대단한 명절이란 것을 느꼈다. 고향을 떠나봐야 고향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부모님을 여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빈자리를 느끼는 법이다.
어제는 후반기 ‘사랑의 집수리’를 했다. 아침부터 같이 일하고, 먹고, 놀았다. 얼마나 소란스럽고 웃음이 넘치는지, 부단장이란 분이 좀 경건하게 하자고 농담을 한다. 잠시 배달 차 들른 핀란드 가구점 사장은 오늘 색동교회인줄 알았다면 딸을 보낼 것을 아쉬워한다. 이렇게 온 교회가 함께 ‘즐함우함’을 나누는 날은 마치 명절 분위기가 난다.
게다가 집 안을 새로 꾸민 베트남 가정은 정말 명절과 같았을 것이다. 도배를 하고, 새 가구를 들여서가 아니다. 늘 주눅이 들어서 산 한국 땅에서, 이렇게 친절한 한국인들을 한꺼번에 만났으니, 고향 하늘 아래보다 더 푸근했을 것이다. 어제 만큼은 우리 모두 천사가 되었다.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친절에 의지해서 산다. 이방인들이 자기 나라에서뿐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객지에서도 고향 같은 명절을 쇠게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1)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지켜온 부림절이란 명절을 소개하고 있다. 부림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 날을 감사하며 축하하는 유다인의 축제일이다.
구약 역사서의 마지막 책인 에스더는 죽음의 낭떠러지에 빠졌던 유다 백성의 절망과 극적으로 다시 생명을 얻은 기쁨을 맛보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5대 명절에 성경의 작은 두루마리 다섯 가지를 하나씩 낭독하는데, 부림절에는 에스더를 읽는다. 부림절을 가리켜 에스더의 금식일로도 부른다.
유다인들이 페르시아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겪은 일이다. 그들은 불신앙 때문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왔는데, 이젠 그들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되었다. 조국을 떠난 디아스포라가 겪는 고난은 참 가지가지다.
유다인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은 늘 살얼음판처럼 불안하였다. 뿌리를 지키면서 사는 일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방인들의 다신교적 풍토에서 유일신 전통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는 일이었다.
에스더는 그 역사적 배경을 소개한다. 바벨론을 멸망시킨 해방자 고레스 왕은 포로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이제 포로로 잡혀 온 모든 백성에게 자기 땅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그들의 신을 섬길 수 있도록 해방령을 내린 것이다.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들이 귀환 백성을 이끌고 돌아왔다. 제2성전을 건축하였고, 예루살렘 성벽을 복원하였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사람은 페르시아 땅에 머물렀다. 아마 그곳에서 집도 짓고, 혼인도 하고, 기반도 마련했기 때문에 선뜻 돌아 올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우리나라 동포들이 모두 돌아오지 못한 이유와 비슷하다.
에스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아하스에로 왕이 통치하였다. 왕은 아각 사람 하만을 제국의 2인자로 세웠는데, 하만이 속한 아말렉 족은 유다 민족과 적대적인 역사를 갖고 있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하만의 조상 아각은 모르드개가 속한 사울 가문과는 원수였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이다. 그렇다고 두 인물의 무용담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인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모르드개는 오직 하나님께만 절하였고, 왕에게만 경의를 표할 뿐이었기 때문에 자기 상관인 하만의 강요에 따라 무릎을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그런 행위는 여호와 신앙에 반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각의 후손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에게는 자기 신앙을 지키려는 위엄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감히 누구도 얕볼 수 없는 거룩한 배짱이 있어야 한다.
하만은 이런 모르드개에게 분노하였고, 유다인 전체의 씨를 말리려고 들었다. 유다인들이 가진 재산에 욕심을 부려 그것을 독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유다인을 가리켜 왕의 법을 지키지 않는 민족이라고 음해한 것이다. 하만의 음모로 임금은 제국 전체에 유다인 진멸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기가 닥쳤다. 모르드개와 모든 유다인은 크게 절망하였다. 유다인은 애통해 하였고, 이를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에 4:3)가 많았다.
2)
모르드개는 조카인 왕후 에스더에게 유다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으니, 네 정체성을 밝히고 즉각 나서라고 촉구하였다. 마침내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 유명한 고백을 우리는 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에스더는 왕후였지만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작심하였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진정 하나님의 손이 그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분명히 도우신다. 에스더는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믿었고, 용기를 내었다.
어디든 하만과 같은 인물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누를 수는 있어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에스더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려는 사람을 결코 막지 못한다.
본문은 에스더가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 한 후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장면이다. 왕비를 사랑한 아하스에로 왕은 제2인자 하만과 함께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간다. 이 자리에서 왕은 왕비에게 소청을 물었고,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자신이 죽을 운명에 처한 유다인임을 당당히 밝혔다.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7:3).
에스더는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였다. 바로 하만의 면전에서 왕의 눈을 어둡게 한 그들의 죄를 드러냈다. 결국 하만은 페르시아 제국의 제2인자였으나, 그의 불의 때문에 고꾸라졌다. 사람의 목숨을 제 멋대로 죽이려한 자의 당연한 결과였다.
하만의 음모는 결국 자기가 당할 ‘죽을 꾀’였다. 그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나무에 그 반대로 하만이 매달리게 되었다. 또 성경은 불의를 저지른 자는 결국 그 불의 때문에 망할 것임을 경고한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시 57:6).
하만의 죽음은 불의한 사람의 최후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만한 인간,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시키려던 억압자의 종말이었다. 하만은 졸지에 죽었지만, 그가 죽이려던 유다인에게는 생명과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유다 민족은 죽음 직전에서 살아나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유다인들은, 하만의 음모에 희생양이 될 뻔한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출애굽하면서 경험한 해방의 기쁨을 다시 누리게 되었다. 그들에게 부림절은 제2의 유월절이었다. 다시 출애굽을 경험하는 듯, 새로운 명절이었다. 마치 출애굽 전야의 밤처럼 해방을 맞은 것이다.
3)
에스더에는 단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유다인의 역사를 넘어서 하나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삶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는 찬양을 담고 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슬픔이 기쁨으로 달라졌다. 애곡해야 할 날이 즐거운 명절로 변화하였다. 제사상이 잔치가 되고, 장례일은 명절이 되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9:22).
그 날이 부림절이다. 부림은 제비뽑기라는 뜻인데,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할 길일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유다인을 모두 죽이기로 ‘부르’를 던져 결정한 운명의 날은 아달월 14일이었다.
유다인들은 지금도 민족명절로 부림절로 지키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없도록 배려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하나님을 성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처지를 기억하신다.
엊그제 뉴스에 위안부 할머니 두 분이 일본을 방문해 재일조선학교를 찾아 간 것이 화제였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지진과 수해로 피해를 입은 재일조선학교를 돕고 격려하기 위해 오사카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오사카 조선학교를 이미 5년 전부터 도우면서 차별받는 동포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해마다 전달했다고 한다. 일찍이 남의 나라에서 비참한 처지에 살던 분들이기에 제 나라 백성의 고통을 기억하고 돕는 것이다. 우리 민족 중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800만 명이다.
이번 추석상에서 본 유엔총회는 남다른 풍경이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북한을 편들고 그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난생처음 이런 경험을 한다. 1991년 유엔 동시가입 후 늘 대결, 상호비방, 악선전뿐이었다.
그동안 남과 북은 서로 남남이었다. 남보다 못한 웬수처럼 서로 증오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동포’라고 선언한 것이다. 북의 유엔 대표단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화해의 소식 그 자체는 명절이다. 우리는 더욱 화해와 평화를 응원하고, 나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수고와 희생을 해야 한다.
내년이면 3.1절 100주년을 맞는다. 남과 북은 백주년 맞이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새로운 역사적 화해와 평화의 과정을 약속할 것이다. 이 땅 한반도에서 평화의 원년을 쓸 것을 나는 믿는다. 이 민족에게 가장 큰 명절이 곧 다가온다. 남과 북은 물론 해외 동포를 포함한다. 세계의 여러 나랑와 선물을 나누고, 가난한 나라를 도울 것이다.
사실 아버지께 예배하는 모든 날들은 명절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은 자녀이고, 큰 가족이다. 독일의 성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이런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심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고향을 찾게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에 명절을 주신 분이다. 나를 구원하신 날은 내 생애에 가장 큰 명절같은 사건이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참 믿음의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여호와 신앙을 지키려고 한 용기와 희생은 유다인에게 부림절이란 명절을 선물하였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특별한 기념일이 있지만, 더 나아가 쟁취할만한 내 삶의 명절이 있다.
사람마다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갖는다. 먼저 좌절부터 하는 사람이 있다. ‘내 코가 석자’여서 남의 권면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한번 죽지 두 번 죽나’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거룩한 배짱을 부릴 일이다.
에스더과 모르드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고백은 얼마나 위대한가? 신앙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킨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편에 선다면, 적어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458장 찬송은 내가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짊어질 때 반드시 아침 해 같은 명절이 찾아 올 것을 찬양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내 인생을 명절로 만들어 가려는 믿음의 길이다. 우리가 ‘즐함우함’ 할 때 누군가에게는 명절을 경험하게 한다.
내 생일은 얼마나 복된 명절인가? 특별한 기억과 기념일, 고난을 극복한 일, 내 믿음의 터를 세운 날들은 다 내 명절이다. 내 인생의 명절을 만들어 가는 것은 특별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심으로 이룰 수 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진정 하나님의 손이 그를 도우신다. 내 인생의 절망을 명절로 바꿔주시는 분은 바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내 삶을 항상 도우시고, ‘즐함우함’하셔서 이 땅에서 내 인생의 명절을 누리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