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제목 : 길 잃은 시간
1.
샤워기에서 뿜어져나오는 물은 갈증났다. 내 육체에 뭍은 찌꺼기들을 모조리 다 씻겨내기에는 부족한 물이었다. 하지만 난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샤워기에 대해서 어떤 불만도 품지 않았다. 다만 내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내 살결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샤워를 한 후 나는 머리에 뚝뚝 떨어져내리는 물방울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 지금 이 순간만은 내 얼굴과 어깨에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로 내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축축해진 내피부를 아직은 느끼고 싶었다.
욕실에서 나오자 거실 탁자 위에 수북히 쌓인 카드대금용지가 보였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책상 서랍 구석에 박혀 있는 일곱권의 일기장을 가지고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카드대금 지로용지 옆에 두고 한 동안 유심히 쳐다보았다. 일곱권의 일기장의 색깔은 가지각색이었다. 일기장의 겉표지 관찰을 그만두고 나는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담배 한 개피를 주어다가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잘 피우지도 못했던 담배였고 무슨 맛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담배였는데 오늘따라 담배의 단맛이 느껴졌다. 담배의 흡입력이 내 코끝을 자극했다. 그러자 내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약간의 피로가 몰려들었다.
일기장은 평균적으로 이년에 한권씩 사용했던 것 같다. 이제 약 십 사년동안 써왔던 일기장들이 한순간에 사라져야 할 시간이 왔다. 어렸을 적에 써왔던 일기장을 찢어버렸던 적이 한 번 있었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얼핏 그 당시 두, 세권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났다. 그때 왜 일기장을 찢어버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린 마음에 어떤 상처를 받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뒤로 한 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상처가 아물어질 때까지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졌을 무렵 다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상처부위에 새 살결이 돛아나서인지 나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로 십 사년이 지났고 난 다시 내 삶의 궤적이었던 이 일곱권의 일기장 속에 물들여져있던 내 삶의 시간들을 지금 모조리 없애버려야만 했다. 어쩌면 십 사년동안 내가 남겨 놓은 것은 일곱권의 일기장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외면했던 남편, 그로인해서 과민했던 나의 조울증. 남편은 나의 신경과민을 달래기 위해서 나에게 신용카드를 선물했다. 남편은 나의 허전함을 백화점에서 카드를 남용하므로써 달래길 바랬다. 그는 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가 정작 사랑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찾기에 급급했던 그에게 나의 조울증은 거머리같은 존재였다. 그는 사치에 점점 빠져버려 중독이 돼버린 나를 뒤로 남겨둔채 떠나갔다. 그가 떠나는 날 난 백화점에 가서 미친 듯이 카드를 긁었다. 넘쳐나는 카드대금용지를 빌미로 삼아 그가 날 미쳤다고 소리쳤다. 그가 소리치며 떠나는 날 난 미치듯이 그에게 매달렸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경멸스런 그의 눈초리는 나의 흥분을 소름돛게 만들었다. 온몸에 일어난 나의 소름은 잠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고 내손은 그의 목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젠 모든게 넘쳐서 감당할 수 없었다. 정말 나에게 남은건 아무것도 없다. 빚더미 속에 존재하는 내게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내게 남은 단 하나의 흔적조차 지우기 위해서 난 일곱권의 일기장을 태워버릴 것이다.
내 입술에서 뿜어나오는 담배연기의 색깔이 점점 진해졌다. 물기에 젖었던 내 몸과 머리카락도 이제는 다 마른 듯 싶었다. 내 입안에서 스며 나오는 담배연기는 물기 마른 내 육체를 태운 잔재 같았다. 나는 담배가 입술에서 다 타도록 그냥 물고 있었다.
일기장을 베란다에 가지고 가서 다 태워버렸다. 한권 한권 태어지는 일기장을 바라보면 눈물나도록 슬플줄 알았었는데 난 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슬픔을 느끼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든게 다 준비된 사람처럼, 아니 이미 이곳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모든 감정이 마모돼버린 듯 싶었다. 점점 사라져가는 일기장처럼 나의 육체와 영혼도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이랬다.
더 이상 내일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탁자 위에 그대로 쌓여있는 카드대금용지만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삶 속에 언제부터 저런 종이 쪼가리가 날 괴롭게 했던 것일까. 정작 내 조울증의 시작은 탁자 위에 있는 종이 쪼가리부터가 아니었을까. 상처가 아물고 다시 일기장을 펼칠 무렵 나는 알았을까. 상처가 아물어진 뒤로 난 더 큰 상처를 위해서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상처가 희망이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난 그때 조금이라도 느꼈을까. 정말 모든 것들은 다 이랬다. 처음에는 모든 것들이 다 존재하더니 그 다음 순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렸을 적에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은 나에게 자유를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했었다.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허덕거리면서 살았던 것 같다. 어쩔때는 내가 살기 위해서 숨을 쉬는 것인지 아니면 숨을 쉬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러울 때가 많았다. 항상 조급해질때면 남편은 나에게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또,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내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나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남편의 그런말들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나에게 단것만을 건내준 사람. 남편은 그런사람이었다. 소리없이 사라져버렸고 나에게 남은 건 탁자 위에 수북히 쌓여있는 카드대금용지뿐이었다.
나는 부엌에 가서 싱크대 서랍 속에 숨겨둔 수면제를 꺼냈다. 그리고나서 냉장고 문을 열어 마시다 만 소주병을 꺼냈다. 소주병 안에는 반병의 소주가 남아있었다. 수면제 봉지를 열어 소주병 안에 털어넣었다. 병을 들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18층에서 내려다본 아파트 야경은 아름다웠다. 모든 것들이 정적으로 흘러갔고 밤바람만이 새벽의 고요함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눈이 부실정도로 초롱초롱했다. 이별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18층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새벽의 하늘이 이다지도 맑았던 것을 왜 나는 지금 처음 느끼는 걸까.
밤하늘을 떠도는 바람이 내 뺨 속에 타고 들어왔다. 순간 나는 어떤 충동에 사로잡혔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래,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죽음이 왜 모든 것의 끝이라는 걸까. 죽음이 시작이 될 수 는 없는 걸까. 왜 우리들은 죽음을 모든 것들의 끝이라고 단정짓는 걸까. 이생을 넘어 죽음으로 건너가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주병을 단번에 비었다. 약간의 취기가 서서히 밀려들어왔지만 내 정신은 점점 뚜렷해지고 맑아지는 듯 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무겁기만 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시 시작하면 무엇을 할까. 그때는 내 꿈을 이룰 것이다. 어렸을 적에 꿈꾸었던 순박한 것들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내 꿈이 뭐였지....정말 뭐였더라.
알콜의 활동으로 내 두뇌가 점점 마비돼서 인지 어렸을 적 꿈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뇌가 마비되었다기에는 내 의식은 너무 또렷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은 점점 맑아지는데 도대체 어릴 적 내 꿈이 무엇인지 정작 생각이 나질 않는다. 순간 미치도록 난 울고 말았다. 모든 것들을 잊고,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날 울게 만들었다. 한 순간에 밀쳐올라오는 눈물을 억지시키지 못했다. 어쩌면 난 내 이름조차 기억하고 있지도 못하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나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 모든 것들을 다 털어버리고서 말이다. 내 숨속에 존재하는 더러운 공기조차 버리고 싶다. 내 어깨를 짖누르고 있는 모든 무게들을 다 버리고 싶다. 그리고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다시 새하얀 A4용지 위에 내모습을 깨끗이 그려나가고 싶었다.
나는 아파트 복도 난간에 올라갔다. 내 꿈은 아마도 새가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건너면 난 새가 될 것이다. 난 깨끗한 A4용지 위에 훨훨 날아 다니는 새를 그려넣을 것이다. 그 새 위에 밤하늘에 초롱초롱 박혀있는 별들도 그려넣을 것이다. 알콜의 취기가 점점 내 몸 구석구석에 파고들었다. 내 육체를 지탱하던 척추의 힘조차 꺽이고 말았다. 난 힘 잃은 새처럼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2.
제이가 문을 연 순간 어둠이 방안에서 문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제이는 어떤 이끌림에 의해 그 방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이윽고 문이 닫혔고 그 문 틈 사이로 비춰들 던 단 한 방울의 빛조차도 이내 사라져버렸다. 방안에는 어둠의 존재만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어둠은 자신의 텅 빈 공간 안에서 생성시킨 붉은열을 제이에게 뿜어내고 있었다.
제이는 모든 것이 비어있는 듯 하면서 어둠만이 존재하는 그 공간 안에 적응하느라 꽤 오랜시간 동안 눈을 깜박거렸다. 제이의 눈에서 몇방울의 액체가 떨어지자 그 공간에 적응이 된 듯 눈꺼풀의 깜박임이 줄어들었다. 어느 정도 방안의 어둠이 제이의 육체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자, 어둠이 만들어낸 붉은열은 음성으로 변조되어 제이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곳에 들어온 당신을 환영합니다. 이방은 당신의 자아가 만들어낸 공간입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기억소자들을 조회해본 결과 당신은 삼백오십가지의 크고 작은 기억들을 잃어버리면서 살아왔습니다. 여기서 자의에 의해서 소멸된 기억은 오십여가지정도가 있고 나머지는 삼십 오년을 살아가면서 타의나 환경에 의해서 저버린 기억들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당신의 자아 스스로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입혀지는 고통을 무마시키기게 하거나 혹은 도피하기 위해서 저버린 것들이고, 후자의 경우는 너무 사소한 것들이어서 삼십 오년간을 허덕거리면서 살아온 당신이 돌볼 수 없었던 기억들입니다.
당신은 잃어버린 기억을 재생시킴으로써 어떤 후유증이 따를지 모릅니다. 그래도 당신은 기억을 다시 재생시키고 싶습니까?"
"네......찾고 싶은 기억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 삼백오십가지를 다 재생시켜드리고 싶지만 당신에게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 시간 역시 당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은 지금 18층에서 추락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당신이 지구의 대지에 닿기 전에 우리들은 당신의 기억을 재생시켜야만 합니다. 당신의 육체가 지구 표면에 닿을 시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한가지 기억정도만을 재생시킬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재생시키고 싶습니까?"
"꿈....내 어릴적 꿈이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분명히 난 알고 있었는데, 그 꿈을 간직하면서 살았었는데..어느 순간부터 그 꿈을 잃어버렸어요. 그래도 내가 품었던 꿈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는데...건망증인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아니,,생각이 나지 않았었는지는 오래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제 꿈은 새가 되는 것이었나요?"
"꿈....좋습니다. 당신의 기억소자를 조회해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붉은열의 음성이 사라지자 제이 주변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제이는 어떤 눌림에 의해서 쓰러졌다. 사방이 어둠뿐이라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제이는 자신의 육체를 어둠속에 맡겨버렸다. 방안의 어둠이 점점 바닥으로 내려 앉았다. 제이의 육체도 역시 어둠과 같이 바닥으로 한없이 내려갔다. 어느 지점에서 모든 움직임이 멈쳤다. 제이의 육체도 몸안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듯이 정지돼버렸다. 제이는 어둠이 눌러버린 자신의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석고처럼 굳어버린 육체를 어찌하지 못했다. 제이의 모든 세포의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다만 제이의 눈꺼풀과 누렇게 변색돼버린 눈동자만이 움직일 뿐이다.
제이의 눈동자가 허공을 직시했다. 허공은 어둠이 바닥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에 비어있었다. 어떤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허공에서 투명한 이물질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 이물질들은 서로 엇갈리면서 뭉쳐서 하나의 거울을 만들어냈다. 그 거울 속에서는 정지된 제이의 육체와 눈썹아래로 깜박거리는 제이의 눈동자만이 자신의 생존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사라졌던 붉은열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붉은열의 음성은 사람의 음성도 기계의 음성도 아니다. 공기속에서 존재하는 커다란 소음입자들이 분해되어서 퍼져버린 소리였다. 붉은열은 정지되어있는 제이의 육체의 겉을 맴돌다가 제이의 귀를 찾아낸 후 석고처럼 굳어버린 제이의 귓속에 비집고 들어갔다.
"당신의 기억을 조회해본 결과, 당신의 꿈은 폐기된 기억 속에 끼어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퇴색되어버렸고 너무 낡아서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꿈에 대한 기억은 고통을 마모시키기 위한 자의에 의해서 소멸된 것이 아니라 기억을 저장해두기 위해 저장소로 가는 과정에서 어긋나버렸고 길을 잃은 당신의 꿈은 자아속에서 떠돌며 방황을 하다가 결국에는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폐기물 속에 들어가 버렸던 것입니다. 당신은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당신의 기억을 당신 삶의 길에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위에 존재하는 거울이 당신의 잃어버린 꿈을 찾아줄 것입니다. 당신의 기억이 이 거울 속에 영사되어 당신의 꿈을 보여줄 것입니다."
붉은열의 음성이 제이의 귓속에서 빠져나갔다. 제이는 붉은열의 음성이 사라지자 굳어있던 몸이 조금씩 풀려진다는 듯 온몸에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거울 안에는 수많은 인간의 세포들이 꿈틀거렸다. 허공속에서 영사되는 빛에 의해 그 세포들이 하나씩 죽어갔다. 그 죽은 세포들은 제이의 얼굴과 몸위로 떨어졌다. 그 죽은세포들이 떨어져나가자 거울은 목욕을 한 듯 깨끗하고 맑아졌다. 그 거울은 제이의 어릴 적 순수를 되돌리기 위한 몸부림처럼 수많은 세포들을 죽였고 그 죽은 세포들은 제이의 찌들고 묵은 삶의 양처럼 거침없이 떨어져나갔다.
깨끗해진 거울속에는 한권의 동화책이 영사되었다. 그 동화책이 한 장 한장 넘겨질 때마다 탁했던 제이의 눈동자의 얇은 누런막이 한꺼풀씩 벗겨져나가 맑아지는 듯 했다.
그 동화책은 한 장 한 장 넘겨질 적마다 여러 가지 악기 소리가 났다. 특히 기타소리가 진하게 들렸고 조금 지나자 기타소리만 반복적으로 들렸다. 제이는 처음에는 동화책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동화책 속에는 오빠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던 제이의 오빠는 제이에게 기타소리를 자주 들려주었다. 오빠는 기타를 어깨에 매고 자주 거리를 떠돌았다. 오빠는 제이에게 자신의 꿈을 자주 들려주었는데 오빠의 꿈은 거리의 악사가 되는 것이었다. 오빠의 꿈은 너무나 소박했지만 그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한 현실은 너무 화려했다. 제이가 처음으로 일기장을 찢어버렸던 때는 오빠가 고시원에서 삶을 끝냈을 적이었다. 그 일기장 안에는 오빠의 기타소리가 남겨져 있었다. 거울에 영사된 동화책을 바라보는 제이의 눈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맺혔고 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제이는 항상 오빠와 같은 꿈을 꾸었다. 오빠의 꿈이 거리의 악사였다면 제이의 꿈도 악사가 되는 것이었다. 항상 오빠와 함께 하고 싶었다. 오빠는 제이의 꿈이었던 것이다. 오빠가 사라지자 제이의 꿈도 사라졌다.
거울 속의 동화책이 다 넘겨지자 제이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거울 속에 영사는 중단되고 붉은 열이 다시 나타나서 제이의 귓속에 다시금 들어갔다.
"이제는 당신의 꿈을 기억하십니까? 너무 낡아서 끄집어내는데 고생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육체가 바닥에 닿을려고 합니다. 꿈을 간직한채 이 삶을 마감하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꿈조차도 알지 못한채 사라져가는 영혼들이 이땅위에는 많습니다. 부디 당신이 기다리는 죽음 건너서의 삶에서는 당신의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럼..."
붉은열은 제이의 귓속에서 빠져나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제이의 굳어졌던 육체가 풀리고 처음에 들어섰던 문이 보였다. 제이는 어둠을 등지고 그 문을 열었다.
3.
나의 몸은 비에 젖은 새처럼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단단할 줄 알았던 땅은 생각보다 덜 했다. 오빠의 기타소리가 점점 내 영혼을 불렀다. 이 밤이 끝나면 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