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남 李福男(1555~1597)】「충장공 이복남 장군과 만인의총(萬人義塚」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의 장군. 본관은 우계(羽溪).
이광식의 증손이며 지중추부사 이전의 손자로 흥덕현감, 갑산부사를 지낸 이준헌(李遵憲)의 차남이며 아버지 이준헌은 일찍 요절하였다.
누이 중 한명은 윤근수의 아들 윤환에게 시집갔다. 친하게 지낸 인물로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있다.
1588년(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고 선전관, 별장 등을 지냈다. 무인을 불차채용할 때 추천을 받았다. 1592년 나주판관이 되고 그해 도복병장을 겸직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김제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전주 웅치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승리했고, 안덕원에서도 왜군을 격파했다. 그 공로로 당상관에 승진해 팔량신성의 수비를 맡았다. 1593년 전라방어사, 전라조방장이 되었다가 조선과 일본이 종전협상을 하는 동안 권율의 휘하에 배속되어 경상도 창녕으로 가 대기하였다. 그 뒤 충청조방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병으로 이시언(李時言)과 교체되었다가 1593년 12월 다시 충청조방장이 되었다. 1594년 9월 남원 부사 겸 전라조방장, 1595년 1월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5년 문초를 가하다가 죄인이 죽어 어사로부터 남형(濫刑)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곧 복직, 1596년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전쟁 중 군마를 꾸준히 훈련시킨 공로로 선조에게 붉은 비단을 하사받았다. 1597년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재임명되었다. 1597년 4월 해안가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으려고 5000명 군사를 이끌고, 순천 해안가로 내려갔다가 남원성 함락 소식과 명나라군 부총병 양원의 지원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광양, 진상 등을 거쳐서 남원으로 갔다.
임진왜란(1592년)때 호남을 범하지 못하여 패전했다고 생각한 왜적은 정유재란(1597년)을 일으켜 14만 대군으로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6천 명은 남원성을 공격한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로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1천여 군사와 원군인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3천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했다.
음력 8월 7일 왜군의 선봉대가 남원에 모습을 나타냈고, 12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 집결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동문을 명 나라 중군장 이신방(李新芳)이 맡고, 남문은 장표(蔣表)가, 서문은 모승선(毛承先)이 맡았으며 북문은 전라병사 이복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양원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진우충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증원을 거부하였고, 양원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13일에서 16일까지 나흘 동안 혈전이 벌어지고,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민 · 관 · 군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명나라 장수 양원은 50여 명의 심복 부하만을 거느리고 군졸로 변장하여 명나라로 달아났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었으나, 이들도 배후 공격을 받아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전라병사 이복남 이하 3,000여 명의 장병들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때 물러나면서 관사들에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내렸던것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1597년 8월 이미 남원성은 함락되었고 일본군 5만 8천명이 주둔중이었다. 성앞에 도착해 그는 '사나이,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가 이날이 아닌가'라며 태연한 척 나팔을 불고 행군하였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정기원 · 병사 이복남 · 방어사 오응정 등과 명군의 중군장 이신방 · 천총 장표 · 모승선 등 주민 6천여를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모두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 전투에서 용성관과 광한루를 비롯한 남원의 관아와 누정이 모두 불타고 성안에 즐비하던 민가가 17동만 남고 모두 잿더미로 변하였다.
남원은 천혜의 요새라로 할 수 있는 교룡산성(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이 있어 임진왜란 중에 이미 승병장 처영이 개축을 하는 등 전쟁 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 장수인 양원이 평지에서 말타고 싸우던 것만을 생각하여 교룡산성을 파괴하고 남원성을 개축하여 전쟁에 임하게 된 것이 가장 큰 패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원성이 아닌 교룡산성을 선택했다면 전쟁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역사란 것이 가정이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안타까움은 더해진다.
이복남은 죽음을 각오하고 접반사 정기원, 교룡산성별장 신호 등과 함께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15일간의 전투 끝에 병력 다수를 잃고, 그는 병사들에게 살고 싶다면 도망쳐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 볏짚단을 쌓은 뒤 병사들에게 불을 지르게 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타던 말이 이복남의 갑옷과 투구를 물고 경기도 광주(현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는 그의 집에 나타나 갑옷과 투구로 장례식을 치렀다. 바로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04년 선무 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숙종 때 다시 숭정대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1715년 충장공의 시호를 받았다.
첫댓글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러나 제군(諸君)은 부질없이 함께 죽을 것은 없다. 가고 싶은 자는 가도 되나, 남고 싶은 자는 머물러 있거라._이복남 장군
내가 탈출하면 군사들의 사기는 어찌 되겠는가? 나는 이 성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_이복남장군
※남원성이 결국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주변에서 탈출을 권유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성과 함께 장렬히 폭사(순국)하는 길을 택하며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