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가을포도는 약이란 말이 있다. 어찌 가을포도만 약이겠는가? 서양 사람들은 일찌기 포도의 효능을
알아채고 생과일은 물론, 술과 잼, 건포도, 쥬스 등으로 다양하게 식생활 전반에 활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씨앗으로 기름을 짜서 쓰는 등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다 먹지 않는가?
우리가 포도를 기껏 쥬스나 생과일 정도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포도가 외래종이어서
가 아닐까?
이제 우리도 포도를 서양사람들 만큼이나 다양하게 식생활에 이용하고 있으니 이쯤으로 포도의
효능과 효용에 관한 얘기는 마무리를 하련다. 포도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요즘 부쩍
포도를 많이 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포도를 좋아해서 자주 사 먹기도 하지만, 갑작스레 포도선물이 많이 들어와서 포도를 입에 달고
사니 좋고 집안 가득 밴 포도향에 취해 사니 아늑하고 행복하기조차 하다. 작은 바구니에 담아
식탁에 올려 놓고 그 모양을 바라보자니 어린 날 포도에 얽힌 추억들이 하나 둘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친다.
고향 김제는 논도 많고 밭도 많은 넓은 평야로 이뤄진 지역이다 보니 경작하는 농산물의 종류가
다양해서 포도밭 또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포도밭 부근을 지나다닐 때면 멀리서부터 시큼 달큼한
포도향이 반기며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곤 했다. 초여름 작은 초록구슬 뭉치가 아그대다그대 열린
포도밭 풍경을 보고 침이 솟는 것을 느껴보지 않은 내 또래 친구들이 있었을까?
넓게 펼쳐진 들에 드문드문 보이는 포도 과수원들, 적쟎은 포도가 생산되지만 그것들을 양껏
먹는 일은 몇몇 부자들에게 허용된 특권이었을 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림 없는 일이었다.
포도가 그리 비싸진 않았지만 용돈이래야 고작 설에 받는 세뱃돈, 어린이날이나 소풍때 겨우
몇 푼 받는 게 전부인 조무래기들 처지에 무슨 능력으로 포도를 사 먹겠는가? 아무리 어머니 치맛
자락을 잡고 졸라도 내게 돌아오는 것은 '군것질 좋아하면 살림 망한다'는 속담 섞인 지청구 뿐.
그래서 여중학교 이상 연령대의 여자애들은 소위 '포도계'를 만들어 포도철에 몇 번은 이가
시리도록 포도를 먹곤 했다. 솔직히 나는 용돈을 흐뭇하게 받아 본 적도 없었고 어머니께서
간식을 소홀히 하는 분이 아니어서 포도를 많이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우리 언니는 달랐다.
취업을 해서 돈벌이를 했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끼리 포도값을 추렴해 포도밭에 가는 것
같았다. 워낙 부모 형제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언니는 포도밭에 다녀 올 때는 손에 포도
몇 송이를 들고 왔다. 그리고는 이가 시큰거린다며 포도는 원없이 먹었다는 말을 하곤 했다.
또 버스로 통학하는 내 친구들은 왕복 이십리도 넘는 길을 걸어다니며 버스요금을 모아서
포도밭에 다녀온 이야기를 자랑삼아 들려주었다. 그럴때면 포도를 원없이 먹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포도밭에 모여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기분이 어떨까 자못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포도밭에서의 추억을 만들지는 못했다.
단지, 월촌면에서 김제읍까지 통학하는 단짝 친구를 따라 그녀의 집에 가끔씩 가곤 했는데
그 길목에 포도밭이 있어 한 두번 강렬한 욕구를 느낀 적은 있다. 짱짱하게 십리길이 넘는
곳에 친구집이 있는 지라, 여름날 땡볕에 그녀와 함께 그녀의 집에 갈 때나 친구의 집에
갔다 혼자서 돌아올 때면 심한 갈증을 느끼기도 했는데 단내가 물씬 풍기는 포도밭을
지날 때면 포도를 따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손 닿는 곳에 포도송이가 있었다면 손을
뻗쳐 따 먹었을지도 모른다.
가시 울타리로 빈틈없이 둘러쌓인 포도밭, 버팀목에 의지한 포도나무들이 줄지어 선 사이에
빨래줄 처럼 긴 줄이 양쪽 기둥에 매달려 있는데, 그 줄을 타고 자란 덩쿨에 탐스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도 장관이지만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태양빛을 받은 영롱한 포도알들은
단순한 먹거리라기보다는 마치 보석같이 아름다웠다.
친구집에 갔다 와서 벌겋게 낯이 익은 얼굴로 어머니께 포도밭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김제에서 나는 포도는 신맛이 강해서 그닥 먹고 싶지 않지만 김제 장화에서 나는
포도는 아주 달고 맛있다며 장화포도를 사주겠노란 말씀을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따라 장화
포도밭에 가는 행운은 끝내 누리지 못했고 리어카를 끌고 포도를 팔러 온 포도장수에게서 산
포도가 장화포도여서 먹어 본 기억은 있다.
느낌뿐인지는 모르겠으나 달고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포도를 사면서 어머니가
어디서 난 포도냐고 물을 때 포도장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 보시면 모르겠소? 포도하면 장화지. 이 서슬 좀 보시오. 까맣게 익은 탱글한 알좀
보란 말이오. 한 알 자셔 보려오?"
어찌나 장담을 하던지, 어머니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 포도를 사고 말았다. 얼김에
나는 포도를 맛있게 먹었지만은 그 포도를 따서 입에 넣으시며 고개를 갸웃하시던 어머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첫댓글 포도 맛을 더욱 새롭게 합니다.
아련한 추억 속에 구수한 맛을 나게하는 옛 이야기 정겹게 느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