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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묵상 스크랩 교회없는 목사, 왕궁없는 다윗 (삼상27:1~12)
Timothy Choe 추천 0 조회 119 14.04.03 12:1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묵상본문


1 다윗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 아기스가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수는 개월이었더라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9 다윗이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10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11 다윗이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삼상27:1~12)



* 기도


아버지의 백성. 아버지의 아들. 아들됨이 곧 운명이며 소명인데. 아들다운 삶이 곧 소명인데. 말씀 가운데 만족한 아침입니다.



* 본문묵상


다윗은 변덕장이 사울왕의 반복된 추격을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들어간다. 자기와 함께한 수백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가드 땅의 왕자 아기스 밑으로 들어간다. 다윗의 생각은 맞아떨어져 사울왕은 더이상 다윗을 추격하지 않는다(삼상27:1~4).


문제와 사건이 자신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면 안심하는 것이 스스로 왕된 자의 모습인가보다. 본질은 폐위된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유지되고 있는 현상에만 관심이 있는 자. 바로 사울왕의 자리에 있는 자이다. 하던 사업이, 하던 사역이, 하던 무엇이, 갖고 있던 그 무엇이 계속 유지되는가가 제일 크게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는 사울왕이다.


한편, 다윗은 가드 땅의 왕자에게 청하여 다른 성읍으로 거처를 옮긴다. 같은 블레셋 땅이지만 감시의 눈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벌판으로 나아간다. 다윗이 간 곳은 시글락이라는 성읍이었다. 다윗은 아기스로부터 시글락 성읍을 하사받아 거기에 거주한다(삼상27:5~6).


다윗은 그 동네에서 1년 반 가량을 살았는데, 그는 수시로 이방 민족들에게 올라가 그들을 치고 무너뜨렸다. 그들은 이집트와 술(Shur) 광야로 가는 길목에 거주하는 민족들이었는데, 그들은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에 몰아낼 것을 명하신 민족들이기도 하다. 이 중 기르스 사람들이 누구인가는 성경에 잘 나오지 않지만 그술과 아말렉이 정복의 대상이었던 것을 감안하고, 이들과 동일한 지역군에 살았던 민족임을 고려할 때 다윗은 이들을 모두 동일선상에 놓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다윗은 이들을 수시로 침공하여 죽이고 노략하여 돌아왔는데, 그곳 군락을 모두 몰살시키고 한 명의 포로도 데려온 적이 없으므로 블레셋 왕자는 그때마다 "너 어디갔다 왔니?"라고 물어야만 했다.  다윗은 그때마다, "블레셋 변방의 유대땅 어디를 침략하여 그들을 죽이고 노략하여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블레셋 왕자는 "다윗은 이제 유대땅으로 못 돌아간다. 이제 다윗은 영원히 블레셋의 아들이다"라고 여기고 안심하기에 이르렀다(삼상27:7~12).


다윗은 왕관이 없다. 다윗은 왕좌도 없다. 다윗은 궁궐도 없고, 예복을 갖추고 아침마다 머리를 조아릴 신하들도 없다. 그런데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왕노릇 하고 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면서 명령하신 그 약속을 홀로 이행해 나가고 있다. 몰아내고 없애라고 말씀하신 그 민족들을 공격하고 있다.


사울왕의 전쟁이 국가수성의 성격이 짙었다면, 다윗의 전쟁은 수성이 아니라 공격이 많았다고 여겨진다. 사울왕적 삶이 문제해결과 상황유지에 몰두하는 삶이라면, 다윗왕적 삶은 명령준수와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몰두하는 삶이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울왕인가 다윗왕인가. 왕좌와 왕관과 궁궐과 창칼을 든 호위무사가 있어야 안도감을 느끼는 자인가. 아니면 손에 든 것 없고 누구도 경배하지 않아도 스스로 기름부으심을 따라 왕답게 살아가는 자인가.


나는 한 때, 교회가 있고 성도가 있어야 목사가 목사노릇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어떠한 사역을 하려면, 그에 준하는 어떤 준비된 상황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을 보며 확신하는 바. 그것은 나의 본질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남이 나를 목사로 여겨주지 않아도, 교회가 없어도, 성도가 없어도 목사는 목사이다. 수풀 가운데 다윗이 수풀 가운데서도 여전히 왕이었던 까닭은 그가 언젠간 궁궐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왕으로 기름부으신 하나님이 그 소명을 철회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을 증명하는 근거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목사는 여전히 목사이다.


그런데, 이 시대 이 땅의 많은 목사들이 신음하고 있다. 교회가 없고, 성도가 없고, 장소가 없어서 신음하고 있다. 마치 광야에 던져진 다윗과도 같다. 심지어 그들을 미워하고 견제하는 사울왕들도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윗을 바라보며 힘을 내고 정신을 가다듬기를 축원한다. 블레셋 땅에 거주하면서도 여전히 본질상 왕다운 삶을 살았던 다윗처럼,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복음의 선두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기를 축원한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나 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 안에서 아들된 모두에게 해당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먹고자며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다. 내게 주신 시간들을 행정홍보 담당자로만 여기고 살 것인가. 아니면 복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내가 아는 만큼의 복음을 겸손하지만 힘있게 전하며 보낼 것인가.


만일 이 곳에서의 시간이 끝난다면,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절망하며 누울 것인가. 아니면 사도 바울처럼 몸에 든 쓰라린 멍과 채찍자국을 달래며 다음 성읍으로 발길을 옮길 것인가. 이제 깨닫기는, 나의 소명은 어떤 자리도 아니고, 어떤 단체도 아니며, 어떤 상황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지나가는 과정이며 순간이며 도구들일 뿐이다.


나의 정체성은 오로지 복음대로 살아가는 아들이며, 그 복음을 전하는 사자다. 그래서, 내가 직장에 가면 그곳은 내가 복음대로 살아가는 현장이 되며 복음을 전할 회당이 된다. 내가 교회에 가던, 선교단체에 가던, 내가 집에 가던, 그것은 언제나 변함없다. 아들됨이, 바로 이것이 나의 본질이다.


여기가 망하면 저기에 세워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 여기서 거부하고 배척당하면 저기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복음대로 살아가고 있느냐와 복음을 전하고 있느냐이지 내가 어디 땅에 발 붙이고 있느냐가 아니다. 바른 소명이 상황과 위험을 뚫고 나갈 근거인 까닭도 바로 이와 같은 연유에서다.


그래서. 나는 나다. 아버지가 부르신 모습 그대로의 나다. 아버지가 기름부으신 그대로의 나다. 사울왕이 쫓아와도, 계곡 사이에 숨어 있어도, 세상에 빌붙어 사는 것 같은 삶이어도, 나의 기름부으심은 폐하여진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힘을 내라. 당신은 여전히 아들이며, 사명자이다.



* 기도


아빠. 아버지. 감사해요. 정말로요. 죄가 쇠주먹같이 나를 공격할 때 보혈은 창칼이 되어 그것을 무너뜨리시고, 절망감에 휘청거릴 때 십자가는 나의 지팡이가 되어 다시 서게 하시고, 나를 다시 아들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감사해요 아버지. 아버지 감사해요. 이 자유 주셔서 감사해요. I pray in Jesus name. Amen.



2014.4.3. Timothy C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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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4.03 13:38

    첫댓글 아멘!
    부르심대로,복음전하며 살면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인데..
    여기서 막히면. 저기에서 전하고..
    주일 모임을
    영생의 지체가 있는곳으로 옮기려는데,
    사인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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