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와 타인(他人)’개념
(1723) 무아(無我)란 뭘까 이걸로 종결합니다 | 강성용(인문학자) | 화요열린강좌 '왜 여전히 불교인가' | 출가 문화 세계관 인도 가족 권위 언어 관점 이해 시야 집착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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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 무아경 (1) : 난다말라 큰스님 법문에 바탕한 무아경 (Anattalakkhaṇa-sutta) - YouTube
반야심경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f.청룡암 원영스님 [더 릴리전]
<‘무아’와 ‘para’의 공통점>
‘para’는 니까야에서 ‘(我나 我所와는) 다른 것’의 의미로 쓰이고 의인화했을 때는 ‘(마왕이나 마왕에 속한 것으로서) 타인’의 의미로 쓰이는데, 사전적 의미는 ‘저쪽으로, 넘어서, 나중에, 미래의, 다른, 낮선, 외부의, 타인의’ 뜻이다.
니까야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칭할 때는 ‘aññe(añña의 복수형)’라는 표현을 쓰거나, ‘para-puggala(paraṃ puggaiaṃ, 他人, 다른 사람)’[DN. vol.3. p.108]라는 정확한 표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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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kāye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Ajjhattaṃ vedanāsu …(pe)… citte …(p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 domanassaṃ. Ajjhattaṃ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dhammesu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DN. vol.2. p.216.]
어떠한 것이 넷입니까? 존자들이여, 여기 비구가 ‘世間에 대한 욕심과 근심을 버리고서 ․ 열심히 하는 자 ․ 잘 아는 자 ․ 사띠를 갖춘 자’로서 身(~法들)에 관련하여 안으로(ajjhattaṃ) 身隨觀(~法隨觀)하며 머뭅니다. 身(~法들)에 관련하여 안으로(ajjhattaṃ) 身隨觀(~法隨觀)하며 머물 때, 거기에서 [그는] 올바로 삼매에 들고 ․ 올바로 맑아집니다. 거기에서 올바로 삼매에 들고 ․ 올바로 맑아진 그는 밖으로(bahiddhā) 타인(para)인 身(~法들)에 관련하여 앎과 봄(ñāṇadassana)을 생겨나게 합니다.
위 인용경문에서는 ........ <안으로(ajjhattaṃ) 身隨觀(~法隨觀)하며 ............ 밖으로(bahiddhā) 타인(para) 인 身(~法들)에 관련하여 앎과 봄(ñāṇadassana)을..........>처럼, < 타인(para)>이라는 표현은 ........... <밖으로(bahiddhā)>라는 표현과 함께 언급되었다.
전체 ‘니까야’에서 .... 부처님의 말씀을 조명해 보면 ............ 부처님께서..........
"무아인 것, 독화살(인 것), 타인(para) 인 것, 질병, 악마 등등”으로 언급하신 것은 항상 <오온(五蘊, pañcakkhandhā)과 오취온(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ā, =sakkāya)>이다.
불교교학이 ....... 후대의 니까야나 주석서(註釋書)시대에는 ..........
<안으로(ajjhattaṃ) 밖으로(bahiddhā)>라는 표현이 <안으로(ajjhattaṃ) 타인(para)>이라는 표현으로 변천되었다.
(1723) 한 수 알려주는 유시민 - YouTube
첫댓글 ㅎㅎ 고인것은 나가 되면 안되는거에요? 강성용 교수의 풀리지 않는 의문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듯 합니다
이빨이 아플때 아프지마 하면 안아파야 하는데 안되니까 그건 나가 아니라고 하는건 됨 그런데 그건 왜 나가 아닙니까 할때 이유를 그건 고이니까 하는건 받아들일수 없나 봅니다 고인것은 나가 되면 안되는거에요? 이런 의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네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할것 같은데 집착 갈애가 원인이라고 아는것으로는 어렵나 봅니다
괴로움을 나 또는 나의것이라고 집착 갈애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그러한 이유로 괴로운것은 나가 아니다라고 경에서 언급하고 있는것으로 봅니다 그러함에도 나는 고인것들을 나 또는 나의것으로 하고싶어 하는자에게 부처님 설법은 어떤 의미도 없게 됩니다 난 윤회하고 싶어 하는사람들에게 윤회하지 말라고 하는것과 같은 말
요소[界] 경(S18:9)
요소경에 세존이 라훌라에게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허공의 요소, 의식의 요소에 대해서 무상한가 항상한가를 물어보고 무상하다고 답하자
“라훌라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허공의 요소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라고 하신다
ㅎㅎ 그러함에도 괴로움이 나가 되면 안되는거에요? 라고 묻는다면? ㅋㅋ
…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rūpa와 rūpagataṃ은 차이점이 있는 표현이다. 三昧상태에서의 오온은 항상 ~gataṃ이라는 표현을 쓴다.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i,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a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So tattha-ṭ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 初禪(~무소유처)을 성취하고서 머문다. 거기에서 ........ 비구는 ‘色 ․ 受 ․ 想 ․ 行 ․ 識으로 된’ 그 法들(dhammā)을 ‘무상 ․ 고 ․ 질병 ․ 종양 ․화살 ․ 재앙 ․ 고난 ․ 타인(para) ․ 부서지는 것 ․ 空(suñña) ․ 非我인 것’으로 隨觀한다(samanupassati, 合隨觀하다). 그는 그 法들로부터 心(citta)을 돌아서게 한다. 그는 그 法들로부터 心을 돌아서게 하고서, ‘불사의 界(amata dhātu)’를 위해 이 ‘一切行의 寂止(sabbasaṅkhārasamatho)
@아위자 ․ 一切우빠디의 포기 ․ 愛의 사라짐 ․ 離貪 ․ 滅 ․ 열반이라는 이것은 평화로움이고 최상의 것이다’라고 心을 향하게 한다. 그는 거기에 머물러 ‘번뇌들의 사라짐(āsava khaya)’을 성취한다.[MN. vol.1. pp.435~436]
@아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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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라는 것은 ‘초선 ․ 제이선 ․ 제삼선 ․ 제사선 ․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를 줄인 것임. 그런데,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를 설하는 해당 경문을 보면 오온이 모두 언급되지 않고 色이 제외된 ‘受 ․ 想 ․ 行 ․ 識’의 四蘊만 언급됨. 이는 無色處에서 色을 觀한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色蘊이 제외되는 것임. 따라서 ‘四禪은 오온을 온전하게 觀하기 위한 유일한 선정(Jhāna)’이라고 보아야 함. 四禪이 正定(올바른 三昧)인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