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간이역 승부역
우리나라 철도노선 중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곳 중 하나로 영동선의 봉화지역 구간을
꼽을 수 있다. 봉화, 춘양을 지나 탄광도시로 유명한 태백시의 철암역까지 이르는 구간으로 이곳은
낙동강의 최상류 지대에 속한다.
이곳에서 보는 낙동강은 흔히 떠올리게 되는 백사장과 넓은 강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한폭의 동양화같은 기암절벽의 수려한 협곡사이로 바닥까지 보이는 맑은 강물이 흐른다.
그 강물을 따라 기차도 느릿느릿 산골짜기를 돌아든다.
기차만 간신히 지나갈 뿐 도로는 거의 뚫리지 않은 오지라 사람사는 마을을 보기도 힘들다.
그래서 자동차로도 갈 수 없고 오직 기차에만 의지해 외부 세상과 소통하는 곳들이 아직도
영동선에는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승부역이다.
승부역은 이미 육지속의 섬과도 같은 대표적인 오지간이역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으로는 봉화군에 속하지만 위치상 태백시와 가까워 서울에서는 태백을 경유해
가는 것이 더 가깝다. 태백에서 봉화방향으로 국도를 따라가다가 석포를 향해 방향을 틀면
갑자기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련소 공장지대가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면 정말 사람구경하기 힘든 본격적인 산골짜기다.
더 이상 버스도 다니지 않으니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은 오직 기차뿐이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계곡에 더 가까운 모습이고
가파른 산자락에는 가을빛이 완연하다.
그나마 2차선 포장도로도 승용차 한대 간신히 지나갈만한 콘크리트 포장길로 바뀐다.
석포를 지나서도 근 12km를 달리면 도로는 끝나고 도보로만 건널 수 있는 현수교가 눈에 띈다.
그 다리 건너에 승부역이라는 작은 간이역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요즘은 조금 더 하류까지 길이 이어져 자동차가 건널 수 있도록 낮은 콘크리트 다리가 만들어져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승부역까지 유일한 연결수단은 이 출렁다리 뿐이었다.
그나마 물이 불어나기라도 하면 콘크리트 다리도 막혀버리니 상징적으로나
실제 건너는 느낌으로나 출렁다리에 견줄 바가 아니다.
아무리 자동차가 많이 보급되었다고 해도 소수의 노인들만 사는 이 오지에서는
기차가 유일한 외부로의 소통수단이다.
버스도 들어오지 않으니 이 지역 주민들은 하루 6회(3왕복) 멈추는 기차에 의지해 살아간다.
승강장 한복판에는 자연석에 새겨진 시비가 있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니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1950년대말 승부역 개통 초기 이 역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지은 글이라고 한다.
사방이 산과 강으로 막혀 기차아니면 빠져나갈 엄두도 낼 수 없던 곳,
어찌보면 천연 유배지에 갇혀 근무해야 했던 철도원의 절규로도 읽혀진다.
기차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인지라 1명씩 3교대 근무하는 직원들도 완행열차로 영주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그래서 규정에서도 예외를 적용해 근무교대시간도 저녁 8시라고 한다.
원래 저녁 7시 교대가 맞지만 승부역에서는 기차가 멈추는 시간이 곧 근무교대시간인 것이다.
홀로 역을 지키는 철도원은 절해고도의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와도 다름없다.
주변에 식당도 없으니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며 어쩌다 오가는 마을 노인들과 안부를 묻는다.
주말의 한낮이건만 승부역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직원 한사람만 홀로 역을 지키고 있었다.
침묵 속의 간이역은 새소리와 물소리만이 지배한다.
몇시간동안 산길, 물길을 따라왔건만 이제야 자연의 소리가 들리니 침묵의 힘은 위대했다.
정말 하늘도 세평으로 보일만큼 골짜기가 좁다.
그 좁은 틈을 비집고 기찻길과 물길이 벗하여 나란히 달린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비경이 숨어있는 곳이다.
승부역은 지리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오지에 속해 있고 그만큼 접근성도 좋지 않다.
주변에 이름난 관광지도 없는데다 기차말고는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간이역이지만
1998 '환상선 눈꽃 순환열차'가 운행되면서부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 열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인 추전역과 육지 속의 섬과도 다름없는 승부역을 거쳐
백두대간의 설경을 감상하는 관광열차였는데 발매 첫날부터
단 5분만에 매진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는 열차가 아니라 이름없는 간이역 탐방열차나 다름없음에도
사람들은 이 열차에 열광했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풍토에서는 특이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이 시대 도시인들이 때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한다는 뜻일 것이다.
승부역은 그런 갈증을 해소시켜줄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승부역이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사람이 없을 때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산 속에 파묻혀 물소리, 새소리에 젖어 들 수 있을 때라야만이
먼길 마다 않고 오지 속 간이역을 찾아온 보람도 있다.
아무리 고속철도가 서울과 부산을 두시간대에 이어주는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간이역은
특유의 존재가치와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