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252 (7권 5. 김홍신. 펌글)
* 그만한 배경 *
밤늦게 은주 누나가 전화를 받더니 당황해서 뛰어 올라왔다.
"나 좀 병원까지 데려다 줄래?"
"무슨 일인데 그래? 누가 아파?"
"미경이네 애가 탈났나 봐."
"나 좀 잤으면 좋겠어. 누나가 운전하고 가지 그래."
"떨려서 운전을 못하겠다."
"남의 애 아픈데 누나가 떨리긴 왜 떨린다고 그래."
미경이라면 은주 누나와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친구였다.
시집을 늦게 간 데다가 애가 들어서지 않아 시집살이를 고되게 하다 지난 가을에 첫아들을 본 여자였다.
"엊그제 놀러가는 길에 이유식 몇 병을 사다 줬는데 그게 탈였나 봐.
병원에서 그러더래. 뭘 먹였냐구. 엄마 젖하고 이유식밖에 없다니까 이유식이 상했다고 하더래.
그럴 리가 없다고 우겼다나 봐. 슈퍼마켓에서 산 외제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의사 말로는 겁 주느라고 그러는게 아니라 조금 늦게 왔으면 애 죽을 뻔했다는 거야.
그래서 남편이 먹이다 남은 것하고 새 것을 갖다가 보여 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디서 샀느냐더래.
친구가 사다준 거라니까 확인해 보라는 모양이야. 가짜래. 그럴 수가 있니?
만약에 애가, 그애가 죽었어 봐라. 끔찍해 죽겠다. 어떻게 낳은 앤데....."
애를 낳기 위해 몇 년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간간 은주 누나편에 소식은 들은 터여서,
은주 누나가 떨려서 운전을 못하겠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의사가 지시하는대로 병원 옆의 여관에서 남편과 벌건 대낮에 잠자리를 마련한 뒤에,
의사의 처방대로 뒤처리를 한 채 병원으로 달려가 처치를 받는 짓을 여러 차례 거듭한 끝에 겨우 애를 가졌던 것이었다.
그렇게 귀한 아들을 친구가 사다준 이유식 때문에 잡을 뻔 했으니 은주 누나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동을 걸고 차고 밖으로 차를 꺼낼 때까지 은주 누나는 얼굴을 감싸쥐고 몸을 떨었다.
"누나가 떨고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냐. 좀 침착해봐. 애가 죽은 건 아니잖아."
"위험하단다. 애가 죽으면 어쩌지? 나는 어쩌란 말이냐."
"어디서 샀는데 그래?"
"가게 앞에서."
"슈퍼마켓 말야? 확인해 보고 산 거야?"
"그냥.... 포장돼 있는 걸 누가 먹어 보고 사겠니. 믿고 그냥 산거지."
누구라도 포장된 병 속에 든 것을 맛보고 사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맛 보고 살 수 없고 색깔을 보고 상품이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만큼 서로 믿음을 가지고 팔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아. 그리고 내가 반드시 추적해서 가짜 이유식을 만든 녀석들을 찾아낼게."
"사람 죽은 뒤에 찾으면 뭘 하니? 미경이가 불쌍해 죽겠다.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니?"
은주 누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나만 재촉했다.
대학병원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은주 누나에겐 멀게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병원에 가서 사실을 알아보아야 하겠지만 직감적으로 가짜 이유식을 만들어 파는 부류가 이땅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두부에 석회를 집어넣어 만든 친구들도 있었고 콩나물에 화공약품을 투여한 친구들도 있었으며,
수박에 물감주사 넣거나 애들 먹는 과자류에 독성 있는 물질을 넣어 만들어서 부자된 사내들이 수두룩한 판에,
가짜 이유식을 만들어 파는 녀석들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괘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항력이 있는 어른이 먹어서 설사를 해도 문제인데,
저항력도 없는 아이들이 먹는 이유식을 엉터리로 만들어 판다는 건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것이었다.
요 버러지 같은 자식들,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고 말 테다. 나는 이렇게 용심을 먹고 달렸다.
대학병원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주 누나는 낯빛이 변해서 몸을 떨었다.
"뭐라도 사 들고 가야 하는데....."
"칠 개월 된 녀석한테 뭘 사다 준다는 거야? 빨리 들어가기나 해."
"같이 좀 가줄래?"
"참, 누나도 어지간하네."
나는 못 이기는 체하고 누나를 따라 병실로 들어섰다.
꼬마는 격리되어 있었고 꼬마의 부모와 가족들만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꼬마의 어머니가 은주 누나를 데리고 복도 끝 쪽으로 갔다.
지켜보고 있는 식구들에게 어떤 창피라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멀거니 옆에 서서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지만 착잡한 표정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은주 누나가 얼마나 난처한 입장인지 감이 잡혔다.
나는 슬그머니 빠져 나와 은주 누나 있는 쪽으로 갔다.
의사 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짜 이유식을 산 사람이어서 의사 앞에 가서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았다.
한참 만에 두 여자가 의사 방에서 나왔다.
창백한 은주 누나가 나를 보더니 아주 쓰게 웃었다.
"어떻게 됐어?"
미경이라는 은주 누나 친구가 대신 대답했다.
"다행스럽게 일찍 와서 살았어. 누나가 너무 걱정해서 차마 못보겠다.
여기 있으면 불편할 테니까 얼른 모시고 가. 이젠 괜찮다니까."
"그 병좀 볼 수 없어요?"
"내 가방 속에도 있어."
"한 개만 주실래요."
"그러지 뭐."
"의사는 뭐래요? 무슨 성분이 들어 있고 어떤 독성이 있대요?"
"나는 잘 모르겠어. 정신이 없어서 새겨듣지도 못했고.... 우유가 부패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놈들이 그래도 우유는 넣었던 모양이죠?"
"퇴원은 언제쯤 하나요?"
"지금 상태로는 이삼 일 더 있어야 되나 봐."
"자세히 좀 알았으면 싶은데요."
"지금 정신이 없어. 가족들 기분도 그렇고.... 빨리 모시고 가봐. 여기 걱정은 안해도 되니까 누나 좀 안심시켜 줘."
"그러죠."
나는 은주 누나의 팔짱을 끼고 복도를 거꾸로 걸었다.
은주 누나는 자꾸 고개를 흔들었다. 충격이 컸던 것 같았다.
그렇게 귀한 남의 자식이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때 겪을 은주 누나 자신의 고통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은주 누나를 힘껏 안아 주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이 여리고 착한 여인이 버림을 받고 혼자 사는 걸 보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좀 앉았다 가자."
은주 누나는 내게 이렇게 사정했다.
우리는 복도와 복도가 꺾이는 산부인과 병동의 한쪽 구석자리에 앉았다.
내가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 은주 누나는 자동판매기에서 빼 온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나는 은주 누나를 달래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서성거리며 복도를 왔다갔다 했다.
조그만 유리창 앞에 섰다.
안에서 칠을 한 유리창인데 조금 벗겨 져 그 안을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산부인과 병동이어서 내 호기심은 칠 벗겨진 유리창 속으로 눈길이 갔다.
커다란 방 같기도 했고 복도의 연결된 부분 같기도 했다.
"어어! 저새끼들 봐라!"
내 목소리에 놀란 은주 누나가 뛰어왔다.
"뭔데 그래?"
"저놈 새끼들 카악!"
내 흥분된 목소리에 복도의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은주 누나가 나를 밀어내고 칠 벗겨진 유리창을 통해 쳐다보다가 두 눈을 가렸다.
"세상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문병 왔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안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나는 후닥닥 복도 바깥 쪽으로 뛰었다.
사람들이 모두 칠 벗겨진 창으로 안을 들여다 보고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산 기미가 있는 임산부가 발통 달린 높은 침대에 환자복을 입은채 누워 있었다.
푸른 빛깔 도는 가운을 걸친 두 명의 사내와 정장 차림의 젊은 사내가 다가서더니 뭐라고 히죽거렸다.
그러더니 임산부의 가운을 들추어 아랫도리를 번갈아가며 들여다보며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병실이나 수술실로 가기 직전의 대기실인 듯 싶은 그곳에서,
의사가 아닌 보조원과 전혀 의료인처럼 생기지 않은 젊은 사내녀석이 남의 부인의 환자복을 들추고,
손가락질을 해가며 낄낄거리는 모습은 차마 오래 지켜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임산부를 병실이나 수술실로 옮겨 가는 임무 뿐인 그들이 외부인과 합세해서,
여자의 가장 소중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번갈아가며 구경하고 낄낄거리는 장면,
생김새를 말하는듯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낄낄거리는 그들의 모습,
설사 그것이 담당의사라 하더라도 도저히 의료행위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 수밖에 없는 작태.
"여보쇼! 여봐요!"
누가 이렇게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뛰면서 물었다.
"왜요?"
"우리 마누랍니다. 저놈들이 누굽니까?"
비록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당하는 수모라고 하지만 남편까지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이었다.
"내가 잡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같이 갑시다."
임산부의 남편은 몹시 흥분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뛰어 넘어 아까 그 방 쪽으로 내달렸다.
철문을 열었다.
활들짝 놀란 사내들은 여전히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뒤따라 뛰어온 남편 되는 사람이 돌진해 들어갔다.
"누구요?"
푸른 빛깔의 가운 입은 건장한 사내가 물었다.
"저 사람은 그 부인의 남편이고 나는 염라대왕 심부름으로 네놈들 잡으러 온 사람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편 되는 사람이 그 사내의 멱살을 잡고 뒹굴었다.
"이 사람들이 돌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나는 껑충 뛰어 폼을 잡는 사내를 걷어차 버렸다.
남편과 드잡이를 하는 사내는 옹골지게 얻어맞고 벽에 기댄 채 두 손을 싹싹 비볐다.
"너는 뭐하는 놈이냐?"
신사복 입은 사내가 한쪽 구석으로 도망치다가 내 손에 잡혔다.
"저는 그냥.... 놀러온...."
"지금 무슨 짓했냐?"
"할 얘기가 있어서 면회 왔다가 얘기좀 하느라구요."
"뭘 봤냐?"
"보긴 뭘 봐요?"
아랫배를 움켜쥐고 바닥으로 신사복의 사내가 데구루루 굴렀다.
"아저씨, 이 새끼들을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십쇼. 제가 책임질 테니까. 대신 상처 안 나게요."
내가 걷어차서 넘어진 녀석들을 몇 대씩 갈기긴 갈긴 모양인데 더 때릴 생각없이 임산부 옆에 서서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임산부도 어렴풋이 이 못된 사내들의 짓을 알고 있었는데 말할 형편이 못 돼서 참았던 모양이었다.
"저런 놈들 때려서 뭘 합니까?"
남편 되는 사람이 힘없이 말했다.
"제가 버르장머리를 이제부터 고치겠습니다."
"......"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