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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춘중하(盂春仲夏)
― 어느 족숙(族寂)의 근황
이 문 열
서(序) 백보 선생(白步先生)
선생은 옛 영해부(盈海府) 암포현(岩圃縣) 사람이다. 선생에게도 유서 깊은 성씨(性氏)와 역리(易理)에 물어 지은 이름이 있으나, 굳이 호칭을 백보(白步)로 대신하는 것은 그 아호(雅號)의 운치 때문이다. 일찍이 향리에서 잠시 선생에게 한학(漢學)을 가르친 바 있는 좌해공(左海公)은 그 아호를 내리면서 백(白)은 소박청정(素朴淸淨)을 뜻하며, 보(步)는 삶 또는 자취(蹟〕에 통한다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들은 백보. 선생이 무슨 특출한 인물일 것이라 지레짐작하실 필요는 없다. 대단찮은 사립 전문학교의 강사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 역시 한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고, 따라서 당신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백보 선생을 만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깨끗하나 값싼 술집에서 담담히 취해 가는 중년을 만나셨다면, 그리고 대체로 그의 얘기가 맹자보다는 순자가 더 잘 인간을 이해했다거나 하는 따위 당신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라면, 그는 아마도 백보 선생이다. 약간 구식이기는 하지만 잘 손질된 양복으로 정장하기를 좋아하며, 번번이 속으면서도 비가 예보된 날은 어김없이 우산을 들고 나서는 선생을 당신들은 어디선가 만나셨을 것이고, 저물어 가는 지하도 모퉁이 같은 데서는 엎드려 있는
걸인 모자에게 주머니의 동전을 툭툭 털기도 하는 선생 또한 당신들은 더러 보셨을 것이다. 며칠 전 좀 늦은 출근 버스에서 만나셨던 그 사람 일없이 꾸물대는 운전수를 호되게 나무라던 그 중년의 신사가 바로 선생일 수도 있고, 그리고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 지난 밤 자정 무렵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골목을 휩쓸다 당신 집 담벼락에 토물(吐物)을 쏟아 놓은 그 술꾼 역시 선생일 수 있다.
요컨대 백보 선생은 평범한 당신들의 이웃이다. 이 도시에 백 몇십 만이나 되는.
기일(其―), 봉춘(逢春)
그런데 그해 백보 선생이 봄을 보았노라고 공언(公言)한 것은 아무래도 좀 일렀던 성싶다. 유난히 그 겨울이 길었는 데다 때는 아직 이월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기어코 봄을 보았노란 것인데, 그 경위는 대략 이러하였다.
그러니까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바로 그친 일요일 오후였다. 무슨 일인가로 잔뜩 웅크린 채 중앙통을 걷고 있던 백보 선생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몇 발짝 뒤에서 자기를 미행하는 사람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철 아닌 바바리코트에 조그만 가방을 걸친 스무 살 남짓의 낯선 청년이었다.
그를 발견한 백보 선생은 갑작스레 이해할 수 없는 불안에 빠졌다. 매연으로 희뿌연 도회의 하늘마저 그런 선생의 불안을 확인하는 듯하였다. 백기청천(白氣靑天) 이면 필유천화(必有天袖)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선생은 자기가 미행당해야 할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선생이 무슨 고관대작이라서 증수회(贈收賄)에 관련될 일도 없었고, 또 무슨 대단한 기업주라서 탈세 혐의를 받을 리도 없었다. 50년 전 이 정부가 세운 국민학교에 좀 늦어 입학한 이래, 그 공민교육에도 충실히 동조하여 누구보다 건전한 사상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데다, 신호등이 고장 나서 다른 행인들이 함부로 횡단하는 네거리라도 푸른 불이 켜 있지 않는 한 건너가기를 망설일 만큼 소심한 선생이고 보면 형법의 다른 조항들과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선량한 시민의 안도감으로 막 돌아가려는 선생에게 문득 한 가지 섬뜩한 기억이 떠올랐다. 며칠 전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비분강개파인 동료 하나와 나눈 대화가 문득 떠오른 까닭이었다. 거기서 그 친구는 마침 신문에 난 국민소득을 놓고, 그럼 발표된 이 액수와 근로 대중의 실임금과의 차액은 어디에 있느냐, 실제 우리네 서민들의 평균 생활수준과의 차액 ― 적어도 일인당 오백 불은 어디에 있느냐 어쩌고 떠들었는데, 선생도 그만 취한 김에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무덤 속에 냉동기를 설치했지, 호화 주택도 짓고, 외국 은행에도 좀 넣었지, 미국 간 아들놈 도박 파티도 좀 시키고, 또·…‥ 하며, 그리고 기억에는 없지만, 그런 자리에서 흔히 하는 식으로 몇 가지 불온한 언사도 덧붙였다. 아아, 그것이었구나·…‥.
그런데 마침내 올 것이 왔다. 기회를 노리던 미행자는 사람의 왕래가 뜸한 골목길에 들어서자 행동을 개시했다.
“저어 선생님.”
그러나 백보 선생은 못 들은 체 걸음을 빨리했다. 제 김에 다급해진 선생은 여차하면 띌 작정이었다. 임시라도 모면해 보자는, 그만큼 절박한 심경이 된 것이다. 낌새를 알아챈 미행자는 민첩하게 달려와 선생의 앞을 가로막았다.
“선생님, 저 선생님예, 잠깐만예.”
이상한 것은 위압적이어야 할 미행자의 정지 명령이 다급하고도 흔해 빠진 사투리라는 점이었다.
“구두 뒤축이 이상하게 닳았임더. 참 보기 싫네예.”
그제야 퍼뜩 백보 선생은 자기만의 생각 ㅡ 모든 자유민에게 공통으로 잠재된 피해망상에서 당황하며 깨났다.
“아, 네. 걸음을 좀 이상하게 걸어 놔서…….”
그러자 청년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라믄 좋은 수가 있임더. 뒤축을 좌우로 바꿔 보시지예. 꼭 두배로 신을 수가 있음더. 구두 한 번 닦는 값으로예.”
이쯤 되자 선생은 이상하게 허탈한 심경에 빠졌다. 그러나 그 총중에도 문득 음울한 하늘이 개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래도 아, 나는 술자리에서의 사담(私談)조차 규제하는 정부를 가지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흥정은 우리의 백보 선생에게도 해로운 것은 아니었고, 그래서 약간 바람막이가 돼 주는 건물 모퉁이에 이제는 주객으로 바뀐 그들은 자리를 잡았다 선생이 청년의 조그만 가방에서 나온 샌들을 신고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는 동안, 청년은 역시 예의 그 가방에서 나온 신통하리만치 많은 대소 기구들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되느라고, 백보 선생의 구두 뒤축은 좌우가 엄청나게 차가 나서 바꿔 달 수가 없었다. 큰 쪽을 깎아 내어 맞추었지만, 작은 쪽을 늘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큰 쪽을 먼저 깎아 버린 청년은 무안한 얼굴로 선생을 올려다보았고, 선생은 선생 대로 뒤축 없는 구두를 신고 중앙통을 통과하여 집까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암담해졌다.
“할 수 없임더. 새걸로 가시지예.”
하지만 선생에겐 돈이 없었다. 그날의 잡비는 이미 탕진된 뒤여서, 주머니에 남은 것은 백 원짜리 동전 두어 개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서 요즘엔 드문 이상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청년이 먼저 외상을 제의했고, 응락한 백보 선생은 이왕에 좀 나은 것으로 뒤축을 갈았다. 갚는 방법에 대해서는 둘 사이에 한동안 논의가 있었지만, 이튿날 한 시에 바로 그 자리에서 하기로 합의했다. 고정된 점포가 없는 청년과 너절한 용건으로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오는 것을 꺼리는 선생 간에는 최선의 방법이었겠지만, 하여튼 그때부터 이 도시의 바람은 한결 훈훈해지기 시작했다고 선생은 부연했다. 그 젊은 녀석은 내 직장도 묻지 않았고, 보여 준 주민등록증도 흘낏 건네 보고는 그만이었어·…‥.
이튿날 백보 선생은 오전 강의가 끝나는 대로 서둘러 약속 장소로 떠났다. 버스로는 늦을 것 같아 택시를 타고. 그러나 막상 안달을 하며 기다려야 할 채권자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도 않고 있었다.
처음 십 분간 백보 선생은 은근히 그 청년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경우, 선생은 뒤축값을 물지 않고 떠나더라도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은 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십 분은 슬며시 화가 나서 기다렸다. 그 친구가 누굴 바보로 아나. 나는 지금 아무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돌아갈 수 있단 말이다. 그리고 다음 십 분은 기이한 느낌에 빠져 ― 이런 녀석들도 무사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다 사십 분이 가까워 오자 백보 선생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돈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어 보이는 녀석은 아니던데,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가.
그런데 녀석이 히죽히죽 웃으며 나타난 것은 꼭 사십 분 하고도 칠 분 후였다.
“쪼매 기다렸지예? 한 시 뉴스를 들었는데, 오다가 고만 손님을 두 사람이나 받느락꼬. 뒤축 하나, 염색 하나예. 그라고는 곧장 뛰어오는 길임더.”
백보 선생이 봄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선생은 보았노란다. 녀석의 텁수룩한 머리 위에서 훈훈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그 훨씬 위로는 눈이 부시도록 맑아 오는 푸른 하늘을, 그리고 이웃 상점 진열장의 조화 줄기에서는 마디마디 피어오르는 꽃송이를.
“망할 자식. 옛다. 삼천 원. 나머지 육백 원은 꼭 사십칠 분 기다린 값이다.”
그러나 사실 그 육백 원은 녀석이 보여 준 봄에 비하면 엄청나게 싼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고 얘기를 마친 백보 선생은 허허거리며 웃었다. 생어차세상(生於此世上)이 불역락호(不亦樂乎) 아.
기이(其二), 망매지귤(亡妹之橘)
창랑(滄浪)이 맑으면 내 갓끈을 빨 것이오, 창랑이 흐리면 내 말을 씻으리라……. 기차는 밤을 지나고 백보 선생의 흥은 도도하다. 선생은 지금 상경 중이었다. 무엇 때문이냐고? 어리석은 물음 여우도 한세상 살다 보면 멀리 소혈(巢穴)을 떠나 낯선 산굽이를 배회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더러는 그게 더 흥겨울 수도 있지 않은가
불행히도 기차는 애초부터 자정이 넘어 출발한 것이어서 백보 선생의 흥에 화답하는 사람은 차 안에 없었다. 허나 무슨 상관인가. 문을 나서면 만리의 객(客), 가우(嘉友)를 만나기는 쉽지 않거늘. 오직 그 밤의 선생에게는 춘료(春喙) 다함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일단 기차가 서울에 도착하고, 그래서 아무도 배웅 나오지 않은 그 거대한 도시의 입구에 홀로 내려서자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도하던 선생의 흥은 금세 막막함으로 바뀌었다. 물론 예상치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은 어둠에 싸인, 누구를 방문하기엔 너무 이르고 여각(旅閣)의 한 방을 차지하기엔 너무 늦은 그 새벽 네 시 몇 분의 시각은 참으로 선생에게는 난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간밤 내 눈 한번 붙이지 않았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과
아직 쌀쌀한 사월의 새벽 공기는 이내 선생으로 하여금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하였다.
그때 한 중년의 여인네가 마치 그런 선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선생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피곤한데 좀 쉬었다 가세요.”
“깨끗하고 조용한 방 있소?”
“그럼요. 지금 따뜻해요.”
“해장국도 시킬 수 있소?”
“물론이죠. 이 근처선 아주 이름난 집이에요.”
그렇다면 백보 선생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선생은 종종걸음 치는 그 여인네를 따라 조용한 새벽 도로를 가로지르고, 아직은 잠에서 덜 깬 골목 굽이를 돌았다.
그러나 막상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선생은 잠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낱 궁한 선비로 서울 거리를 동가숙서가식하던 십칠팔 년 전의 고학 시대를 제하면, 별로 기억에 없는 무허가 하숙집이었던 까닭이다. 당장 가까운 곳에서는 그럴듯한 여관이나 여인숙의 간판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과, 기껏해야 세 시간만 머물면 된다는 생각만 아니었던들, 선생은 결코 그 여인네가 끄는 대로 못 이기는 체 따라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은 약속대로 따뜻하고 깨끗했다. 이상하게 배어 있는 값싼 지분 냄새와 울긋불긋한 벽지의 색조가 다소 역겨웠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 ‘세 시간만’이 선생으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감수하게 했다.
다행히도 해장국은 비위에 맞아 주었다. 꼭두새벽에 용케도 그런 걸 팔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면서 식사를 마친 백보 선생은 역시 그 지분 냄새가 끈적끈적 묻어오는 듯한 이부자리에 하반신을 묻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오래잖아 의외의 방해자가 나타났다. 아슴푸레 잠이 들었던 백보 선생이 돌연한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서슴없이 들어선 것은 낯선 젊은 여자였다. 그러나 분홍빛 잠옷에 짙은 화장을 한 그녀를 본 순간, 선생은 그녀가 이 방의 주인 ― 그 느끼한 지분 냄새와 역겨운 분위기의 주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괜히 놀란 척 말아요. 기다려 놓구선.”
그러는 그녀의 말투는 다 안다는 듯한, 그리고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한 그런 것이었다.
“아, 이게 색시 방이오? 그럼 실례했는데·…‥.”
“능청스렵긴 ― 자, 이 옷 벗으세요.”
여자는 스스럼없이 선생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넥타이를 풀려고 들었다. 선생은 황황히 그런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질책하듯 항의했다.
“이봐요. 이거 너무 심하잖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요?”
그제야 여자도 백보 선생의 기분을 알아차린 듯 머쓱해져 퉁명스레 대답했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요? 아저씨는 손님이고 나는 손님을 받으러 왔죠.”
“내가 언제 색시의 손님이 됐소? 잘못 안 거요. 나는 잠을 자러왔소. 그리고 ― 당신들은 잠도 안 자오?”
그러자 여자는 이번에는 다소 서글픈 음성으로 대답했다.
“왜 안 자요? 지난밤을 공치지만 않았다면.”
“그러나 내일도 모레도 있지 않소?”
“하지만 그때는 또 그땐걸요.”
그러는 여자의 얼굴은 비록 짙은 화장에 감추어져 있기는 하였지만, 의외에도 처음 볼 때보다 훨씬 앳돼 보였다 그것이 선생의 마음을 얼마간 누그러지게 했다. 선생은 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주인을 불러요. 나는 잘 방이 필요할 뿐이니까.”
그러자 여자는 힘없이 일어나며 갑자기 처량하게 말했다.
“필요 없어요. 그럼, 그냥 주무세요.”
그런데 문께로 가는 그녀의 붉은 맨발이 문득 선생에게 가련하게 비친 것은 방 안의 따뜻함 때문에 되살아난 열차 안에서의 취기 탓이었을까. 이미 그럴 철은 지났는데도 잠옷에 싸인 그녀의 여윈 어깨마저 추워 움츠린 듯, 떨리는 듯 보이는 것은.
“이게 색시 방일 텐데.”
“제 방 같은 건 없어요. 지금이라도 아줌마가 호남선 열차에서 손님을 받아 오면 그게 바로 제 방이죠.”
“그런가 ― .”
백보 선생은 막연히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떠오른 어떤 생각으로 문을 나서는 여자에게 말했다.
“잠깐. 그런데 얼마면 색시가 이 방에서 자두 되나?”
“싸게 해 드리죠. 삼천 원만 내세요.”
“들어오게. 그럼 여기서 자.”
거기서 선생은 진작부터 먹은 마음이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불쑥 받았다. 그리고 뛰어들 듯 방 안으로 들어온 여자에게 돈을 꺼내 말없이 건넸다.
“옷, 안 벗으실 거예요?”
“이제 두어 시간이니 그냥 자겠어.”
“옷을 입구?”
“그래. 자 ― 이리 와.”
선생은 오히려 그녀를 끌어당겨 팔베개에 누인 뒤 지그시 껴안았다.
그러자 여자는 문득 선생의 표정에서 무슨 이상한 걸 발견한 듯 놀라 물었다.
“그럼, 그냥 주무실 거예요?”
“그렇지 않고 ― 자, 너도 한숨 푹 자는 거야.”
하지만 의외로 여자의 반응은 맹렬했다. 꽉 껴안은 선생의 팔을 벗어나려 버둥대면서 그녀는 성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싫어요, 이런 동정. 이거 놓으세요. 나는 거지가 아니에요.”
백보 선생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팔에다 더욱 힘을 주며 부드럽고 자상하게 그녀를 불렀다.
“얘야 ― .”
잠시 요동을 멈춘 여자가 기이한 듯 선생을 올려 보았다.
“내가 누군 줄 아니?”
“·…‥?”
“내가 바로 네 오라비란다. 너를 잃고 얼마나 애태웠는지 ― 그러나 반갑다. 네가 이렇게 건강하고 또 정직하게 살고 있으니…….”
여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하지만 이 오라비는 말이다. 두어 시간 후면 ― 또 너를 버려두고 떠나야 한다. 이 힘없고 가난한 오라비는…… 그러니 ― 그동안이라도 푹 쉬어라…….”
여자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한동안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정말로 오래오래 인생의 어둠을 방황하다 지쳐 돌아 ― 온 누이처럼 선생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선생도 걷잡을 수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백보 선생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이미 아홉 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여자는 가고 없었다. 대신 선생의 머리맡에는 노란 귤 몇 개가 깨끗한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 귤 ― 모든 일이 틀어져 우울해야 할 귀로에서도 여전히 선생에게 흥겨운 술잔을 들 수 있게 한 그 귤은, 바로 그 잃어버린 누이가 ㅡ 우리 모두의 가련한 누이가 남기고 간 것임에 분명하였다.
수탁창랑(雖濁滄浪)이라도 오불탁족(吾不灌足) 하리라, 오불탁족(吾不灌足) 하리라 ― .
어찌 선생이 흥겹지 않으랴.
기삼(其三), 면방가전(面方假傳)
그러나 백보 선생도 때로는 분노한다. 그해 오월 어느 날에 무엇 때문인가 늦어진 선생은 야간 강의 시간이 임박하여 허둥대며 강의실로 달려간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어 보니 예순 명이 넘어야 할 수강생들이 여학생 셋으로 줄어 있었다. 마침 바로 그 시각에 권투 선수 아무개의 세계 타이틀전이 있어 모두 텔레비전 중계를 보러 갔다는 것이었다.
고려 문학에 대해 멋진 강의를 하려고 준비했던 백보 선생은 굴욕감과 비분으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텅 빈 그 강의실에서 분연히 붓을 들었다 제(題)하였으되, ‘면방가전(面方假傳)’.
면방(面方)은 성(性)이 태을(太乙), 명(名)은 비(丕), 자(字)는 광문(廣聞)이요, 면방(面方)은 그의 특이한 용모를 보고 세인이 붙인 별호다.
그 시조는 옛적 반고(盤古, 중국 신화의 창조주)가 큰 도끼로 우주의 벽을 허물 때 그 노한 눈초리와 고함 소리에서 나왔다 하나, 서정(徐整, 삼국사기의 적 술가) 의 삼오역기(三五曆記)가 오래되어 믿을 수 없고, 혹 신녀 화서씨(華胥氏) 와 뇌신(雷裨)이 저 뇌택(雷澤)에서 어울려 낳았다 하나 또한 복희씨(伏羲氏)가 와전(訛傳) 된 듯하다.
조상 뇌공(雷公) 은 그 누이 뇌조(雷祖, 黃帝의 妃) 를 황제(黃帝)에게 출가시키고 자신도 그를 도와 탁록(琢鹿, 중국 하북성에 있는 현의 싸움) 에서 치우(蚩尤, 황제에게 대항해 싸운 거인족) 을 토평함에 공이 컸으되, 왕공(王公湫)을 사(舍)하고 물러난 이래 대대로 구름과 산곡을 벗하며 인간을 잊고 지냈다.
면방(面方)의 아비 전공(電公)대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출곡(出谷) 했다. 때는 건륭(乾隆) 연간(淸 高宗의 재위 시기), 전공은 중원이 오랑캐의 창칼에 억눌려 있음을 보고 멀리 떠나 아미리견(亞美利堅), 영길리(英吉利) 등 태서(泰西) 지방을 표랑했다. 그 후 전공은 기려(羈旅)의 신(臣)으로 여러 양이의 조정에 출사했으나, 연 불혹(不惑)이 넘도록 중용을 입지 못하더니, 저 두 번의 천하대란을 겪는 동안 그 이름이 현저함을 얻었다.
특히 라사복(羅斯福, 루스벨트) 을 도와 일이만(日耳曼, 게르만족)의 역(役)을 평정함에 혁혁한 공을 세우니, 만년 그 관작은 공후(公侯)의 열에 올랐다.
면방(面方)은 그의 삼자(三子)로 일찍 아비 전공을 따라 출사했으나, 벼슬은 겨우 종6품 진용교위(進勇校尉)에 그쳤다. 그 지모와 용력이 아비를 따르지 못함이라.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치사한객(致仕閑客)을 자처했다. 그러나 조상의 고구(故丘)로 돌아가지 않고, 저잣거리에 자리 잡아 세인과 가까이 하더니, 마침내 그 잡박한 견식과 기이한 재주로 세상의 사랑을 얻었다. 때에 족인(族人)으로 라대오(羅大吾) 란 가객이 있어 일시 면방과 허명(虛名)을 다투었으나, 오래잖아 모든 걸 면방(面方)에게 넘겼다.
면방(面方)이 세인의 이목을 오로지하매 그의 문전은 아당하는 자와 추종하는 무리로 성시를 이루었다. 비록 왕홀(王笏)이 내린 권세는 아니었으되 세상은 그와의 시비를 꺼렸고, 군자도 소인도 한 가지로 그의 설단(舌端)을 두렵게 여겼다 대저 군자는 무사의 창끝과 문사의 봇끝과 변사의 혀끝을 피하는 법이오, 소인은 숨겨야 할 것이 많은 까닭이다.
일찍이 면방(面方)은 축융(祝融, 火裨) 의 후인으로 작배(作配) 했으나 석녀인지라, 서류(庶類) 예(藝) 의 딸을 유처취처(有妻娶妻) 하였다. 예 씨(藝氏)에게서 아들 류(流)와 현(賢)과 허(虛)와 탐(貪)과 경(輕)을 두었다.
장자(長子) 류(流) 는 용모가 당당하고 언변이 능했으나, 위인이 용렬하고 성품이 간교 음란하여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그가 이적(夷狄)의 폐풍과 악습을 전하니, 부녀자가 그 허벅지와 배꼽을 드러내놓고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고, 천한 유속(流俗)을 퍼뜨리니 자식이 늙은 부모를˙내치고 아내가 그 남편을 능멸했다. 심하다, 류(流)가 변설을 농함이여. 선비가 책을 버리고도 슬퍼할 줄 모르고, 군자가 이(利) 를 도모하면서도 도리어 당당하며, 여염의 부녀가 외간 남자와 작간회음(作剔裏淫) 하기를 상사(常事)로 여김이 모두 그의 궤변에서 비롯되었다. 그 죄가 해를 가리더니, 끝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엄한 국법에 혀와 귀를 잘리었다. 『예기(禮記)』의 이른바 네 가지 사죄(死罪)에 해당되나, 아비 면방의 그늘이 미쳤음이라 차자(次子) 현(賢)은 비록 청출어람(靑出於藍)에 이르지는 못했으되, 그런대로 넓은 견식과 방정한 언행으로 아비에게 효도했다. 형류의 행악(行惡)을 매양 힘써 말리더니, 그가 복주(伏誅) 되자, 그로
인해 병든 풍속을 순화하며 비뚤어진 세인의 심상을 교정하는 데 신명(身命)을 다하였다. 또한 여러 세상의 소식에도 고루 정통하여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기지와 재담으로 한세상의 무료와 시름을 달래 주매, 세인이 비로소 면방에게도 아들 있음을 알았다. 장차 면방의 가운이 재흥함을 이룰지면 이는 모두 이 현의 덕이리라.
삼자(三子) 허(虛)는 원래 성품이 온후하고 근검하여 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허나 장성하며 점차 형 류의 전철을 밟아, 시서(詩書)를 버리고 가무(歌舞)를 취하더니 마침내 황음, 탐락으로 몸과 이름을 함께 망쳤다. 주악(周樂)을 정음(鄭音, 음란한 음악)으로 바꾸니 사대부가 등을 돌리고 팔일(八佾, 제후의 뜰에서 추는 正舞)을 난무로 고쳐 추니 제후(諸侯)가 노하였다. 후에 몸둘 곳을 잃어 저자에서 춘화를 팔고 선정(煽情)의 곡으로 홍등가를 전전하다 비루한 생명을 일찍 노상에서 마쳤다.
사자(四子) 탐(貪)은 불의한 재물로 몸은 잘 길렀으되 아비를 슬프게 하기에는 류나 허와 한가지였다. 아비의 이름을 시정의 장사치들에게 팔아 만금(萬金)을 모았으나 어찌 할꼬. 개구리의 오줌을 선약(仙藥)이라 하고 독을 푼 술을 명주(銘酒)라 속였으니, 머지않아 불의로 살찌운 그 고기는 반드시 시궁창을 뒹굴리라.
오자(五子) 경(輕)은 그 재주가 놀라웠다. 학문은 일찍 고금을 통달하고 경륜은 가히 천하를 종횡할 만하였다. 장차 그 아비를 현저케 하는가 싶더니, 그 또한 면방의 가운인가, 선비의 도를 버리고 뜬세상의 공명을 구하였다. 곡학아세(曲學阿世) 하여 누추한 의복과 험한 음식을 면하는 대신 더러운 이름을 샀고, 일찍 당상(堂上)에 올라 위로 임금을 기망하고 아래로 민의(民意) 를 왜곡하여 살신(殺身)의 업(業)을 쌓았다.
선비의 올바른 공론을 형옥(刑獄)으로 다스리고 기린을 사로잡아 상서로움을 꾸미니 선비의 탄식과 획린가(獲麟歌, 공자가 지었다는 노래)가 거리를 메웠다. 또한 어리석은 세상의 이목을 잡희(雜戱)로 가로막고, 세인이 한낱 양이(洋夷)의 투기(鬪技)나 손재간 발놀림에 혼백을 앗기게 만드니, 그 모두가 가히 하늘에 죄를 얻을 만하였다.
하늘에 죄를 얻음이여, 빌 곳이 없어라. 후에 소요를 만나 난민에게 사지를 찢기었다.
가련하다. 현을 제하면 모두가 호부(虎父)에 견자(犬子)라, 그 끝이 한가지로 참혹하니 어찌 두렵지 않으리오. 면방 죽어서도 차마 눈감지 못하리라.
각설 ― 면방은 시하 세인이 텔레비전이라 하여 조석으로 상종하는 물건을 의인화한 것이니, 내 비록 천학비재이나 그 아들들을 들어 그릇됨을 특히 세인에게 경계하노라.
기사(其四), 욕기 (浴沂)
백보 선생은 지금 물속에 잠긴 자기의 발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지난 학급 야유회 때 봐 두었던 금호강 상류의 한적한 곳이다.
푸른 정맥이 비치는 선생의 희고 얇은 발은 그날따라 육신의 일부라기보다는 무슨 낯선 물건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 이물(異物)스러움은 파랗게 민 젊은 이승(尼借)의 머리를 대할 때 젖게 되는 어떤 애련함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몇 년 만인가. 딱딱한 구두와 화학섬유에 싸여 아스팔트 위의 지정된 코스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던 이 발이 늦어 돌아온 밤의 희뿌연 형광등 아래 소독된 수돗물 속에서가 아니라 쨍쨍한 햇볕 아래서 자연 그대로의 흐름 속에 잠긴 것을 보는 것은.
선생은 위무하듯 자신의 두 발을 가만히 감싸 잡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고향의 산하가 무슨 한 폭의 선명한 산수화처럼 떠올랐다. 한둘은 운 좋게도 중견 관료로 진출했고, 또 몇몇은 수익 좋은 현대 기업의 경영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도회의 전망 없는 봉급생활자의 무리나 척박해진 고향의 흙 속에 묻혀 버린 얼굴들까지도 2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되살아왔다. 강한 바람에 실이 끊겨 가뭇없이 사라져 간 연과, 쫓기던 고기 떼의 은빛 비늘도.
그때 한 노성한 목소리가 선생의 그런 상념을 깨뜨렸다.
“욕기(浴沂)를 나오셨구려.”
그러면서 빙긋이 웃고 있는 것은 단장을 짚은 도회풍의 중늙은이였다. 거기다가 시절은 어느새 유월이어서 계절적으로도 꼭 합당한 것은 못 됐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인사가 그 노인에게는 잘 어울리고 있었다. 글쎄, 욕기, 욕기라…….
그 아침 이었다.
“새들이 왔어요. 새들이 ― .”
흔치 않은 아내의 수선스러운 목소리에 백보 선생이 잠을 깬 것은 아흡 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보세요, 저기. 새들이 왔어요.”
밖은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선생이 눈을 비비며 말갛게 닦인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몇 마리의 멧새가 한 그루뿐인 마당의 후박나무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선생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무감동하게 말했다.
“곧 갈 테지…….”
“아니에요. 아침 내내 거기 있는걸요.”
곁에 서서 함께 밖을 내다보던 아내는 전에 없이 강경하게 부인했다.
“원, 사람도 하릴없기는…….”
선생은 여전히 무감동하게 말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담요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고향에 있을 때 아내는 많은 새를 길렀었다. 그곳 고가(古家) 뜰에는 백여 년 이상 된 향나무를 위시해 많은 나무들이 300평 가까운 뜰을 덮고 있었다. 거기다 아내는 새집과 모이통을 달고 멧새들을 청해 들였다. 어린 훈이 놈도 낮은 해당화 덤불이며 앵두 숲에 곧잘 모이통을 달고 모이를 채웠다. 덕분에 고향집은 이름 모를 멧새들과 그 울음소리에 파묻혔다. 특히 겨울철이 심 해 ― 참새가 방 안으로 날아들고 때로는 딱따구리가 기둥을 쪼을 때도 있었다. 10여 년 전 ― 비교적 조혼을 한 선생이 공부다 취직이다 하며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동안, 아내 혼자 어머니를 모시며 고향집을 지킬 때의 일이었다.
그 후, 한번 도회지 생활이 시작되자 아무리 백보 선생이라도 별수 없었다. 이미 재산이라고는 상품 가치 없는 그 고가 한 채와 손 댈 수 없는 위토(位土) 몇 마지기뿐이어서 선생도 도리 없이 셋방살이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꼭 10년이 걸려 변두리에 그 대지 마흔 평 남짓한 집 한 채를 마련했다. 이사 첫날, 아내가 맨 먼저 한 일은 통조림 깡통을 잘라 모이통을 만든 것이었다.
마당 가운데 후박나무 한 그루가 댕그라니 서 있는 것을 아내는 진작부터 눈여겨봐 두었던 듯했다.
“이 첩첩산중에 많은 새도 날아들겠다.”
그때 선생은 그렇게 아내를 비양거렸다. 그 뒤로도 아내는 몇 번이나 이미 곰팡이가 핀 모이통을 갈아 대는 눈치였지만, 새들이 와서 먹어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는 아직도 창가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왠지 그런 아내에게 신경이 쓰여 선생은 다시 담요를 젖혔다. 아내는 이미 창밖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가 버렸어요. 모두…….”
그런 아내의 얼굴에 서린 까닭 모를 애수가 왠지 선생의 가슴을 짜릿하게 했다.
“또 오겠지 ― .”
선생은 부드럽게 위로했다.
“그런데 훈이는 어딜 갔소?”
“나갔어요. 요즘은 통 밖에서만 사는걸요. 뭐, 오늘은 반 아이들과 야구 구경을 하기로 했다던가…….”
초산 이후 아내는 까닭 없이 단산이었다. 그래서 늦게까지 어미의 치마 꼬리에 달려 다니던 훈이 녀석도 중학교에 가면서부터는 도무지 집 안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거기다가 학교라고는 별로 다니지 못한 아내고 보면 동창이라는 게 있을 리 없고, 친정이 가까워 자주 드나들 처지도 못 되었다. 언젠가 아내는 양춤 배우러 다니기보다야 낫겠지 하여 가야금을 배우러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갔던 그 길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다 그렇고 그런 여자들뿐이더란 것이 아내의 포기 이유였다.
잠시 후 아내는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아침상이라도 들이려는 것이리라. 그런 아내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보 선생은 돌연 형언할 수 없는 연민에 젖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그대도 나도 혼자여라…….”
물론 그런 감상은 불혹을 넘은 남자에게는 다소 엉뚱한 것이리라. 그러나 또한 그것은 가끔씩 대면하게 되는 우리의 진실이다. 아, 당신들은 빼고, 고독이 무슨 독랄한 채찍 같은 것이라서,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당신들의 그 대단한 실존을 후려쳐 아파 죽겠다고 떠드는 당신들과, 반대로 그런 것은 전혀 감정의 사치며 애초에 그런 것은 없노라고 단언하는 철판 같은 둔감의 당신들은 빼고.
아침상을 대강 물리고 난 백보 선생은 결국 무슨 중요한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집을 나서고 말았다. 아내와 바둑이라도 몇 판 두어 주고, 술상이라도 청해 허허거리며 긴치 않은 살림 얘기라도 물어 주려고 생각해 보았지만, 왠지 그날따라 자신이 없었다. 지금껏 그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호도(糊塗)해 온 자기가 갑자기 부끄럽고 끔찍스럼게까지 느껴졌다.
그리하여 집을 나온 선생은 마치 전부터 계획했던 것처럼이나 두 시간 이상 걸려 이곳에 도착했다.
관자(冠者)도 동자(童子)도 없이 ― 이렇게 우리의 백보 선생은 기수(沂水)로 떠났다. 이제 곧 선생은 무우(舞雩)를 노니리라.
기오(其五), 귀거래혜(歸去來兮)
“아아, 돌아왔노라. 전원이 장차 묵어가거니 어찌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비록 마음을 육신의 노예로 삼았으되 어찌 추창(倜愴)하여 홀로 슬퍼하고만 있을 것인가. 지나간 일은 탓하지 않으려니와, 앞일은 가히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진실로 길을 잘못 들었으니, 그리 깊이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 옳음을 깨달으니 지난날이 그릇됨을 알겠노라·…‥.”
백보 선생은 마침내 고향 옛집의 뜰에 서 있다. 족제(族弟)에게 맡긴 그 10년 사이에 고가(古家)는 형편없이 퇴락해 있다. 세월의 비바람에 뒤틀린 대문, 그을음 낀 회벽, 돌담은 허물어지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정답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오랜 망설임 끝에 돌아온 옛집이기 때문이리라. 사표와 함께 천하의 둔재들만 모아 두고 가르쳐야 하는 괴로움은 끝났다. 퇴직금과 살던 집을 팔아 장만한 토지도 단출한 가족의 구복(口腹)을 다스리기에 족하다. 그 허망한 도시에 연연해할 무엇이 더 있단 말인가. 선생은 다시 읊조린다.
“아아, 돌아왔노라. 내 돌아왔노라. 요컨대 남과의 사귐을 그만두고 즐기며 노는 것을 그치리라. 세상과 나는 서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친척들과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기고 거문고와 책으로 시름을 끄리라…….”
아내는 도우러 온 친척 아낙네들과 분주히 집 안을 치우고, 훈이 놈은 대청 구석에서 벌써부터 낚싯대를 매만진다. 선생이 이웃에서 농구(農具)를 빌려 마당의 잡초를 캔다.
그때 오래 보지 못했던 옛 친구 하나가 나이보다 훨씬 늙어 찾아온다. 선생은 반겨 맞으며 아내에게 술상을 청한다. 내온 술상을 받아들고 둘은 서실(書室) 툇마루에 자리 잡는다. 잊혀진 것들이 기억되고 사라진 것들이 되살아나고 ―. 술 한자리 끝나는 사이에 10년이 흘러간다.
오래잖아 옛 친구는 돌아가고 얼큰해진 선생은 혼자 툇마루에 앉아 앞일을 계획한다.
천수답(天水畓) 닷 마지기엔 과수를 심고 텃밭 200평에는 채전을 일구리라. 뒤뜰 빈터에는 염소나 몇 마리 묶어 둘 일이고, 앞마당엔 병아리나 한 배 풀어 흘어진 곡식을 줍게 하리라. 선생의 계획은 점점 흥겨워진다.
봄이 오면 밭을 갈아 씨를 넣을 일이다. 한 알을 뿌려 열 알을 원치 않으리라. 두 알로 족하다. 꽃 지기 전에 화전(花煎) 부쳐 종일토록 취하리라.
여름 시비(施肥)는 낫 갈아 풀 베어 되는 대로 넣어 주고, 김 내기야 길게 자란 잡초나 듬성듬성 뽑아 줄 일이다.
두벌 맨 논두렁에서 비 갠 하늘이나 바라보고, 해 질 녘 병암소(屛岩沼)에서는 마음도 씻으리라.
가을걷이 끝난 들에는 보리를 묻을 것이요, 동쪽 울타리에 국화꽃 피면 아내 시켜 술이나 빚으리라. 달 뜨는 시월에는 율(律)이라도 지으리라.
겨울 들어 한가하면 훈이 놈에게 황정경(黃庭經)을 깨우쳐 줄 일이오, 찾아오는 어린 족질(族姪) 들에겐 연이나 접어주리라.
먼 곳 벗이 피로해 찾아들면 익은 국화주 내어 명정(酩酊)에 잠기고, 눈 내리는 아침은 아내와 더불어 묵화라도 한 폭 뜨리라…….
그러나 모든 것은 생각 같지 못하다. 손이 부르트도록 일해도 거두는 것은 언제나 모자란다. 훈이 놈의 교육은 점점 큰 부담이 되어 땅을 줄여 나가고, 아내는 점차 수심에 싸인다. 노역과 고통의 낮이 계속되고 슬픔과 번민의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선생의 나이는 어느새 오십을 넘기고 학문두 쇠퇴하여 도회는 더 이상 선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보았자 도회에서는 집 한 칸을 마련하기도 어렵다. 암담하다…….
그때 구원이 왔다.
“여보, 이젠 그만 일어나지 않으시겠어요.”
아내의 목소리에 퍼뜩 눈을 뜬 백보 선생은 그곳이 좀 늦은 월요일 아침임을 깨달았다. 어제 무우(舞雩)를 노니느라 좀 피로했던 듯 했다. 시계를 본 선생은 서둘러 수돗가로 나갔다.
세수를 하고 아, 그 번잡한 도회와 성가신 일상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다. 문밖에는 어느새 여름이 뜨겁게 다가와 있었다.
(1979년)
2016년 11월 2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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