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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꿈에서 친구와
다정하게 기쁨을
나누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꿈의 기억이
즐거워서 그 친구를 만나 그 꿈에서
어떠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친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꿈을 꾸었던 이는 고민에
빠졌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꿈을 꾸는 그 순간이 어느
방 어느 잠자리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는데, 중 하나는
꿈에서 보여지는 모든 내용인
몽경(夢境)이 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기가 어느
잠자리에 누워있는 자기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상아
(床上我)라 한다. 이것을 꿈의
특징이라 하여 몽식(夢識)
이라 한다.꿈속에서
이루어 지는
일들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몽자성(夢自性)이라 하여
꿈에서 스스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또 꿈꾸는 순간에 꿈을
꾸고있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망견(妄見)이라 하여
허망한 것이다.이같이 꿈에 의해 알지
못하는 것들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에 비로소 알게되어진다.
이것을 각조(角調)라 하여 몽식과
반대되는 것이다. 꿈에서 보면
꿈에서 깨어 각조하는 것이
허망한 것이 되고,
현실에서 보면
꿈이 허망한
것이 된다.
진짜는 무엇인가?
크게보면 망견의 범위가
꿈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보는
것이 모두 망견이다. 망견의 반대
의미로는 진견이 있는데, 삶과 죽음을
다 봄을 진견(眞見)이라 하며, 삶만 보고
죽음을 못 보는 것을 망견이라 하겠다.
꿈 속에서
같이 있던 사람은
없는 것이지만 보고,
침상에 누워있는 자신은
있는 것이지만 못본다. 그래서
망견이다. 있는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없는 것을 없는대로 보는 것이 진견,
정견이다.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정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망견에서 나온다. 이를 공포라
하고 전도몽상이라 한다.전해져오는
말씀 중에도 꿈에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광수의 소설 중
‘꿈’에서는 낙산사의
조신스님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글이다.
이분은 꿈을 심각하게
꾸고난 후 그 갈등이 해소되었다.
스님은 세속적인 욕구와 구도적인
욕구의 갈등이 심했었다. 세속적인
욕구는 한평생이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데서 시작하며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함으로 생긴다.
살아 있음으로
해서 보이는 현상에
얽매여 생기는 욕구이다.
참다운 세계를 깨닫고자 하는
욕구는 구도적인 욕구인데, 수행자에게
이 두 가지 욕구가 동시에 일어나면 갈등을
느끼게 된다.이러한 고통을 조신스님은
꿈속에서 해결하였다는 것이다. 꿈
속에서 50년에 걸쳐 겪어야 할
일들을 꿈속에서 겪고, 그
허망함을 깨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밀양에 아랑각이
있는데, 그기에
얽힌 얘기도
중요한
의미가 있어보인다.
아랑이라는 처녀가
치한에게 겁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아랑은 그 억울함
때문에 원혼이 되었고, 마을원님께
그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찾아가지만
원님은 죽게된다. 부임하는 원님들 마다
모두 죽게 되었다.하지만 어느 한 원님은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찬찬히 살피게 된다.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죽게된
원님들은 하나같이
아랑의 모습에 놀라서
죽게되었다. 모든 일이
놀라면 꼬이고, 살피면
풀리게 되어있다.이 원님은
실체가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
아랑의 억울함을 듣고 그 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한은 모든
사람이 인정해주면 풀리게 되어있다.
이 이야기에서의 핵심은 아무리
무서운 일이 닥치더라도
침착하게 살피라는
것이다. 흔히
미리 놀라서
어쩔줄
몰라하는 경우가 있다.
살피는데서 실체가 보이면
진견이고, 참다운것이 보이면
정견이다. 그러면 해결되는 것이다.
모든 윤회와
고통은 망견에서
생기고, 모든 평화와
행복은 진견에서 생긴다.
우리는 대부분 망견과 몽식속에서
살고있다. 그래서 참선과 기도,명상
등으로 그 실체에 들어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120년 전
월창거사라는
분이 쓴 술몽쇄언
(述夢?言)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십인동침에 각성일몽이라(十人同寢 各成一夢).’
열명이 한방에서 같이 잠이 들었는데 각각 꿈을
꾸었다.
‘일실 십세계(一室十世界)’
한방에서 열가지 세계가 펼쳐진다.
‘갑몽이 부지을몽하고 을몽이
부지병몽(甲夢不知乙夢
乙夢不知丙夢)’
갑이 을의
꿈을 알지 못하고,
을도 병의 꿈을 알지 못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꿈을 꾸고있고,
또 시대마다 또 다른 꿈을 꾸고있다.
예전 동아시아
산악지역에서는
자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첫째는 숭배요
다음이 예찬이었다. 산신과
용왕에게 숭배하였고, 시 등으로
자연을 예찬하였던 것.하지만 오늘날은
자연에 대한 시보다 생활에 대한 시가
대부분이며, 또 자연은 생활속에서
이용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갖고있다.
나에게 도움이 될 때 자연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같은 맥락으로,
예전에는 나이든
사람은 그것
만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지금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 나이든
이가 대접을 받던 시대를 보고 살아온
이가 자신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때와 같지 않은 대접을
받을 때 혼란스러워 진다.
또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이 들기도 한다.
이미 세상의
가치가
변하였는데
그기에 매달려
있다면 이것이 망견인
것이다.현실을 살펴서 할
일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
과거에 젖어있거나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공포를 갖고 있다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이든 사람도 나이
들어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잘 살펴서 일을 하면
되는데, 젊었을 때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같은 현실이라도 망견으로
본다면 불행할 것이며, 정견으로 본다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살펴서 바로보면 어디나 기쁨이고,
잘못보고 놀라기만 하면 어디든
지옥이다. 죽음도 잘 보면
태어남과 다를바가 없다.
인생에는 태어남과
죽음이 같이
있는데,
죽음을
거부하는데서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우리는 일상에서
화를 얼마나 자주 내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행복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공포와 분노가 줄어야 행복이
늘어날 수 있다.화는 왜 나는 것인가? 흔히
누군가가 잘못해서 화가 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잘못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항상 잘 해주어야
한다’는 욕심에서 화가 나는 것이다.
욕심이 없다면 화가 나지 않는다.욕심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아집이라고 한다. 나는 과연
영원하고 모두가 나를 위해
살아줄 수 있는 것일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아집이 드러날 수
있는데,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깊이
살피고 또 살펴서
아집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도이며,
해탈이다. 아집이 사라지면 욕심이
사라지고, 욕심이 사라지면 분노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혜가 높다는 것은
아집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노인의
재산이라면 이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높은
지혜를
가지게 될 때
노인의 참다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혜를 닦고, 여유를 갖고,
삶의 의미를 챙기며 살 때 깊은 맛이
드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젊을
때는 꿀이라는 말만 듣고 살았
지만, 나이가 들면 실제로
꿀의 맛을 보는 것이다.
인생의 참 맛을 깊이
체험한 사람에게는
힘이 있다.
지혜와 경험의 힘이 생긴다.
정견으로 살피고 또 살펴서
오늘도 좋아지고, 내일도 좋아져서
행복한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