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 감상]
나, 그대 어깨에 단비로 내려 그대 영혼을 깨우리라.
비
김정란
어느 하늘을 돌아왔을까
내 쓸쓸함의 새 집 짓는 소리
살과 살 사이에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그 집 창가에 오래도록
머리 기대고 울지 않는, 우는 여자 하나
나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한
새.... 머무는 새...
젖는 날개
언니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용연향“ 나남출판, 2001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 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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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 ㅅ 낯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문장” 23호, 1941.1, “정지용 전집” 민음사, 1988 개정판 2003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 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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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장만영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아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다.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김희보 엮음, “한국의 명시”, 가람기획 증보판, 2003
“양” 자가본, 1937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 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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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김억
포구십리 (浦口十里)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 한나절을
모래알만 올려 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漁泳島)라 갈매기 떼도
지차귀가 촉촉이 젖어
너훌너훌 날아를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리
배를 타면 어데를 가노
남포 (南浦) 사공 이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메노
“안서시집 (岸曙詩集)” 한성도서, 1929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 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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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문인수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 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뿔” 민음사, 1992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 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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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황인숙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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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천상병
부슬부슬 비 내리다
지붕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도...
멀고먼 고향 소식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득한 곳에서
무슨 편지라든가...
나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저 하나님 생각에 잠긴다.
나의 향수여 나의 향수여
나는 직접 비에 젖어보고 싶다
향(鄕)이란 무엇인가
선조의 선조의 선조의 본향이여
그곳은 어디란 말이냐?
그건 마음의 마음이 아닐런지...
나는 진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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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이형기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일모 (日暮)
텅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빗속에서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서 살아서
청명과 불안기대와 허무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리니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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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이승훈
갈매기 하나 유리창에 부딪쳐 피를 흘린다.
비 오는 날엔 술을 파는 상점에서도 술 대신 비를 팔고,
비 오는 날 거리로 나가는 건 나가지 않는거나 같다.
벌판에 서 있는 정신병원만 유독 비에 젖는다.
비 오는 날에 누가 찾아와도 이내 떠나버린다.
그가 떠나버린 자리엔 그의 레인코트만 비에 젖을 뿐
아아 육체는 어디 갔는가
정신은 기아는 빵은, 모르겠다.
비 오는 날의 빵은 비, 술도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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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이병기
짐을 매어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나리는 비
내일도 나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나리는 비
저윽이 말리는 정은 날보다도 더하오
잡었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 눈을 도로 감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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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백석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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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김사인
가는 비여 가는 비여
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
미루나무 무심한 둥치에도
가는 비여
스물도 전에 나는 이미 늙었고
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
여윈 등 지고 가는 비
가는 가을비
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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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김남주
어떤 비는 난데없이 왔다가
겨울 속의 꿈을 앗아 가지만
봄비는 나물 캐는 소녀의 까칠한
손등을 보드랍게 적시지 않는다
어떤 비는 폭군처럼 왔다가
들판을 마구 휩쓸어 가지만
여름비는 두레질하는 농부의 금간
논바닥을 다물게 하지 않는다.
어떤 비는 살며시 왔다가
채전을 촉촉이 적시어 주지만
가을비는 김장하는 아낙네의 벌어진
손바닥을 아물게 하지 않는다.
어떤 비는 당돌하게 왔다가
젊은 날의 언덕을 망가뜨려 놓지만
비의 계절에 미쳐버린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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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1
이성복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 넘어
온 몸을 적십니다.
시집 “그 여름의 끝” 문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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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정환웅
나는 천사입니다.
시들어 축 처진 꽃잎들도
나를 만나면
배시시 웃을 수 있습니다.
가뭄에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도
내가 그의 얼굴에 단물로 내리면
보드랍고 차진 흙이 됩니다.
사람들은 나를 몹시도 기다립니다.
하지만 나는 악마입니다.
내가 잠시 한눈이라도 팔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수마(水魔)라고 하면서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고추나 참깨, 콩을 햇볕에 널어
말리던 어느 늦은 여름날
내가 소나기가 되어 새차게 내립니다.
둥둥 떠내려가는 곡식을 보는
농부 마누라의 거친 욕설을
내 한몸으로 받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무척 싫어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천사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할까요?
2004.07.15
마로니에
from Cafe 마로니에 그늘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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