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자가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예수는 이 부자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가난했다면 자기의 소유를 다 버리고 기쁨으로 예수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재물이 많으므로 자기의 소유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근심하다 그냥 돌아갔습니다(마19:16~22).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어떤 청년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 고승을 찾아왔습니다. 이 고승은 다짜고짜 그 청년을 방에 가두고 창호지를 바른 문에 바늘구멍만 하나 뚫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바늘구멍을 통해서 나오라”고 말하고 가버렸습니다. 이후로 청년은 “어떻게 하면 이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까?”라는 한 생각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렇게 한 생각에 몰입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화두를 붙잡는다고 말합니다. 이 화두를 통과해야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부처(해탈)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침은 자기(자아)가 죽고 부처(진아)로 해탈하는 사건으로 기독교에서 내가(육신)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영생)으로 거듭나는 신생과 비슷합니다(갈2:20). 육체는 바늘구멍이나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지만 영은 통과할 수 있습니다. 즉 재물이 많은 저 부자처럼 육체를 따라 육으로 사는 자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따라서 천국으로 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먼저 육체를 위해 사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갈5:24).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좁은 문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신자들을 말합니다(롬8:7~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8:10). 따라서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한 신자는 신앙 경력이 아무리 화려해도 불신자의 형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눅13:23~27) 바울도 자기의 믿음을 확증하라 했습니다(고후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