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2022 얄라차
김인기
화설(話說),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주장에는 허실이 있는 듯하다. 어쩌다 마(魔)가 끼었거나 중도에 오해가 있었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심심찮게 나타나는 변괴들을 납득할 수 없다. ‘이른바 사필귀정이라 할 철리가 있어요, 어차피 강물은 바다로 흘러듭니다.’ 그렇더라도 눈앞의 현상을 해명하자니 고통스럽다. ‘이건 허깨비야. 다 무시하자!’ 이거야 불성실한 태도이겠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그렇지, 일단은 느긋하게 지내는 게 좋아.
이 나라에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런 만큼 지도자의 책무가 막중하니, 너도나도 함부로 나섰다가는 본인은 물론 남들도 망친다. 그런데 저런 인물이 이 엄중한 시기에 저 자리에 있다니! 이 사회의 부조리와 미성숙의 증표이기도 하다. 유권자들 다수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너무 지친 탓이었을까? 혹시 비대면 환경에서 반동세력의 선전선동에 휘둘린 건가?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정권이 새로 들어서고 석 달이 지났다. 마지막 방송토론회에서 당선자는 흉악범 이야기로 경쟁자를 이기고자 했다. ‘서른일곱 번이나 찔러서 잔혹하게 살해하고…… 회칼로 난자하고…….’ 나는 경악했다. 저런 말을 저렇게나 스스럼없이 저 자리에서 하는 저 인물이 과연 못할 짓이 있겠는가. 저 후보자는 단지 무지한 것만이 아니구나. 그래도 다수의 투표자들은 판단이 나와 달랐던가 보다. 갑자기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이봐요, 대통령님! 지금이라도 물러나시는 게 어떻겠어요? 어차피 감당도 못하실 거잖아요? 그러니 본인한테도 좋고 남들한테도 좋은 선택을 하세요.”
아직은 덕담을 해야 할 시기인데, 더 볼 것 없다며, 이런 소리나 하다니! 이것부터가 한심스럽다. 시민들도 실망했다. 2022년 8월 현재 지지율이 형편없다. 더 기대할 여지도 없다. 이러니 고민이다. 선거를 또 치른다는 것도 부담이다.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어? 아, 아니지. 이러다가 왕창 망할라. 의구심이 무럭무럭 자란다. 본인이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일거수일투족이 논란거리이다.
코로나19 유행은 큰 충격이었다. 그나마 여력이 있는 각국 정부들이 재정지출을 확대했다. 이러면 불가피하게 폐해도 따른다. 기자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물었더니, 국정의 최고책임자라는 인물의 답변이 귀를 의심하게 했다. 물가와 금리가 불안하다. 비록 재난의 수준이 동일하다 해도, 저마다 형편이 달라 피해의 내용이나 정도가 다르니, 곳곳에 정부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악연을 맺어 상대가 몹시 싫더라도 판단은 올바로 해야지. 자신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나름의 예의는 꼭 지키도록 하고.’ 이런 평소 내 지론이 무색하다. ‘까짓 거, 수틀리면 잡아다가 족치면 그만이지, 별거 있어?’ 이게 암흑가의 관행일지언정 공직자의 태도일 수는 없다. 기실은 암흑가에도 배신자가 설 자리는 없다. 저들한테 미래가 있을까? 농담도 심하시다. 몇몇은 괜찮지 않을까? 차라리 기적을 바라시라.
도처에 많은 걱정거리가 있다. 이게 새삼스럽지도 않아. 우리들이 직면한 과제들이고. 아무도 이것들을 수긍해야만 할 숙명이라거나 영원히 숨겨야 할 비밀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국민들을 상대로 일부 정치세력이 수작을 부린다. 그래봤자, 실상이 뻔하다. 봐라, 저들이 집권하고도 국리민복을 위해 뭘 하겠다는 게 없다. 오로지 긁어 부스럼만 만든다. 저들이 한동안 어울리지 않게 꼴값을 떨더니 흐지부지 꼬리를 내린다.
때때로 차마 ‘말씀’이라 하기 어려운 ‘말씀’도 빛을 발한다. “에라, 이런 망할 놈의 족속들아!” 그렇더라도 웬만하면 과격한 표현은 삼가는 게 좋다. 후유증이 남아. 아, 영천에서 복숭아농사를 짓는 소주가구충제다 시인은 빼고. 며칠 전에도 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기룡산(騎龍山) 산돌배나무가 얼마나 느꺼운데, 자기 고향에 있는 그것도 모르고, 저 지랄이냐! 말하자면 이런 ‘말씀’이었다. 언즉시야(言則是也)라.
흔히 나토(NATO)라고 칭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는 과거 소련에 대항하여 만든 군사협의체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나토회의에 왜 갔을까? 국익으로 따지나 명분으로 따지나 해괴하기 짝이 없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현재 두 세력이 전쟁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에 끼어드나? 아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들이라면 다 이구동성으로 터무니없다며 말렸을 터인데, 지도자가 앞장서서 이런 짓을 저지른다.
현재 자국의 안보를 위해 대한민국이 최우선으로 선택해야 할 동맹국은 미합중국이다. 그렇다고 한반도에 미군이 꼭 주둔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양국의 국익이 상충하는 만큼 어느 일방이 하자는 대로 할 것도 아니다. 정치력이 이래서 필요하다. 한두 걸음만 더 나아가보자. 중근동이나 서남아시아 나라들한테 한국은 참 괜찮은 상대이다. 자기들이 원하는 기술과 경험이 다 있어. 요모조모 따져보니 그렇잖아. 더군다나 무슨 원한을 맺은 일도 없다.
침략자들이 수탈과 착취만 한 게 아니라 갈등과 분쟁의 씨앗도 심었다. 나중에 미국인들이 들어왔고. 상처들이 아물기는커녕 덧났다. 중근동이나 서남아시아의 역사를 돌아보면, 내가 이쪽 사람이었어도 나 역시 이들과 속내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저것들이 뭔데? 몇 백 년 전만 해도 야만인이었던 것들이!’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들이 꽤나 괜찮은 존재일 수 있다. 만약에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안목과 의지가 있다면, 모두에게 귀한 중재자로 활약할 여지가 충분하다.
한국은 코로나 위기에 훌륭히 대응했다. 무엇보다 방역담당자들이 고생했다. 정보통신 인프라와 국민들의 호응이 이룬 성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걸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들이 뭐 저래? 그네들이 그렇게나 ‘정치방역’이라 떠들며, 자기들은 ‘과학방역’을 한다더니. 앞날이 불안하다. 확진자수가 폭증한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그렇게나 촛불정권을 헐뜯던 기자들도 검찰정권을 만나자 그지없이 다소곳하다. 역시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 ‘기레기’가 뜬금없이 생긴 게 아니다.
정권 출범 100일을 맞은 8월 17일에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통령의 자화자찬에 국민들이 어리둥절했다. 횡설수설과 동문서답은 모두를 지루하게 한다. 이러다 보니 시청자들도 회견장의 모습에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다. ‘왜 기자들은 볼펜을 들고 저러나?’ 우와, 노트북컴퓨터가 반입금지물품이었다니! 하기야 누군가는 변명거리가 생겨 좋았겠다. ‘취재환경이 나빴다.’ 이래야 믿거나 말거나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때로는 기생하고 때로는 공생하는 관계라고나 할까. 어차피 격조와 수준이 있는 질의응답이 불가능하다.
이른바 ‘엘리트’라는 부류가 있다. 언론인이나 법조인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도 치열한 경쟁과정을 거쳐 합격한 분들인데, 아무려면 일반인들보다 낫겠지. 이 나라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전통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이들 대다수가 명문대 출신이잖아. 일단 믿어 보자. 이런 정서인데, 웬걸, 실상은 처참하다. 으이그, 이들 중 상당수가 개차반이다. 저러고도 뭐라고 행세하자면, 그것도 무척 고달프겠다. 심지어 이런 동정심마저 유발한다.
누군가 대통령을 두고 ‘엘리트 검사 출신’이라고 했다. 그런 분이 그 나이에 이르도록 최저임금제의 내막도 몰라? 근래 아이들의 취학연령 논란도 괴이하다. 관련자들이 전체 국민들이라 해도 좋을 사안을 두고도 의사결정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를 모른다. 기자들도 그래.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폐막 기자회견 현장으로 가보자. 한국의 기자들은 끝끝내 질문할 줄 몰랐다. 그 좋은 기회를 그렇게 날려버렸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도리어 당황했다. 이제는 뭐가 좀 나아지기나 했나? 이러고도 어찌 ‘엘리트’라 하랴.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커녕 현재를 이해하는 감수성도 없다. 그러니까 청와대라는 크나큰 자산도 아무렇게나 패대기치지. 이들이 막무가내로 매도하는 북한에서도 이러지는 않는다. 눈발이 휘날리는 백두산에서 평양의 젊은 지도자가 백마를 타고 내달리는 모습을 연출한다. 외부인들 눈에는 이런 행태가 기이하게 보일 수 있겠으나, 적어도 조선노동당 수뇌부에서는 이런 장면들의 의미를 인지한 것이다.
이러니까 저 동네에서도 ‘우리는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는 말이 나오지. 남북이 서로 으르렁대며 폭언을 퍼붓는 일이야 이미 익숙하다. 처지와 득실이 각자 다르고, 그간의 사연도 매우 각별하여, 대개 그 발언들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는 비방에 누가 ‘죽은 소는 웃을 수 없다.’고 응수하랴. 동일한 언어를 쓰는 동족이라 사이사이 숨은 감정도 알아차린다. 저쪽 사람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간혹 이렇게 엉뚱한 안도감에도 젖어들고.
오백여 년 이어온 왕조가 멸망하자 일본인들이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바꿔버렸다. 충신열사들을 기리던 성역 장충단 일대도 분내 풍기는 유곽으로 만들어버리고. 과연 청와대에 무시무시한 잡귀들이 득실대기는 하나 보다. 그러니까 아무개가 이렇게나 서둘러 국방부 청사로 들어가지. 기시감이 든다. 한국현대사의 주요무대 중 하나였던 장소가 행락객들의 호기심이나 채워주는 관광지가 되어버렸다.
집권자와 측근들의 몰상식과 몰염치가 극심하다. 이들이 속내가 뻔히 보이는 술책으로 뭘 하겠다는 것일까? 저러다가는 수렁에 빠질 텐데……. 인간들이 유유상종을 하다보면 착각하기 쉽다. 남들도 으레 자기들 같은 줄 안다. 수많은 난관들을 피눈물로 돌파해온 시민들의 존재도 잊어버린다. 마치 흉가에서 귀신을 봤다는 괴담처럼 모처에서 법사를 봤다는 목격담도 들린다. 설령 대통령 부부가 무당을 따라 작두를 탄다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을 듯하다.
혹자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다소 모자라는 작자여도 감투를 쓰면 그에 따르는 풍모도 자연스레 갖춘다나. 에이, 그게 아니지. 아무나 권좌에 오른다고 해서 권위가 덩달아 생길 리 있나. 실지로는 만인의 눈길 아래 갖가지 치부들이 몽땅 드러난다. 벌써 바다 건너 외국까지 소문이 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도자의 됨됨이가 그 사회의 수준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별일도 다 있다지만, 이 별일조차 그럴 만한 사정의 산물이다.
얄라차! 나는 평범한 삶이 아주 쉬울 줄 알았다. ‘바라는 바가 대단치도 않거니와 희소하지도 않으니, 내가 남들과 다툴 일도 없으렷다.’ 이게 오판이었다. 절해고도에 홀로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면서 어찌 이럴 수 있으랴. 한두 세대를 단위로 오늘날의 상황을 바라보면 지극히 무덤덤하겠으나, 당대인들의 심사는 착잡하다. 이것들도 오래 지나지 않아 망각에 묻혀버릴 일들이야. 그래도 지금은 나 역시 심란하다.
오늘날 우리들의 처지는 급박한데, 워낙 곡절 많은 시대를 겪다보니까, 나도 낙담에 앞서 웃음부터 나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누군가의 몸부림과 발버둥으로 삶이 조금씩 나아졌다는 진실도 깜빡 잊어버린다. ‘세상만사 절로절로 너나없이 절로절로…….’ 이렇게나 여유롭다. 물론 망상과 망발이다. 이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러니까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소임이라도 챙기자. 이러다 보면 길이 나겠지.’ 그래서 나도 이렇게 둔필을 들었다.
뭐라도 처음이 어렵지 다음이 어려우랴. 한국인들은 겁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인이 진작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물러나는 게 좋다. 법률로 정한 해임 절차에 따라 부적격자를 잘 인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도 직접 선출한 분인데…….’ 이게 아니다. ‘우리들의 신임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 다소 번거롭더라도 나서서 정리하자.’ 이건 완곡한 표현이고. ‘그만, 그만! 지긋지긋해!’ 이렇게 뜻을 꼭 표출해야 하나. 민심이 멀리 떠났고, 이를 되돌릴 수 없다면, 집권자도 억지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2022.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