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두한(金斗漢·1918∼1972)은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 등의 영화나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11월21일은 그가 사망한 지 37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김두한이 김좌진(金佐鎭·1889∼1930)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미화될 수 있었을까. 김좌진 또한 그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다소 미화된 측면이 있다. 두 부자가 함께 우리 현대사에서 미화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사의 올바른 복원이 우리 시대의 과제일진대 이들에 대한 검증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 먼저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냐, 아니냐가 규명돼야 한다. 홍성의 안동 김씨 문중에서는 대개 인정하고 있지만 석연찮은 점도 없지 않다. 김두한이 출생한 시기를 전후해 김좌진은 복역 중이었다. 김두한이 태어난 1918년엔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또 김두한의 모친이 조선시대 상궁의 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김두한의 외할머니는 국왕의 은총을 받은 것이고 김두한의 어머니는 국왕의 딸이 되는 셈이다. 그럼 김두한은 조선 왕실의 외척이 아닌가. 김두한의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1963년)에는 7세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 김좌진을 만났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에 대한 감시가 철저한 상황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설에는 해방 후 김두한이 좌익 측이 조직한 학병이나 국군준비대에서 활약할 때 우익 측의 이범석(李範奭·1900∼1972)이 알려줘서 아버지가 김좌진임을 알게 됐고, 그때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반공투사가 됐다고 한다. 한국 독립전쟁사의 전설인 청산리대첩 하면 떠오르는 이가 김좌진 장군이다. 이범석은 ‘우둥불’(1971년)에서 청산리전투 직전 홍범도(洪範圖·1868∼1943) 부대가 비굴하게 탈주했고 자신이 소속된 북로군정서의 활약으로 일본군을 섬멸했다고 강조해 김좌진과 자신을 부각했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청산리대첩의 주인공 홍범도는 철저히 배제된 채 김좌진·이범석 두 사람만 미화된 측면이 있다. 김좌진은 고려공산당 박상실에 피살 그러나 일본 측 자료인 ‘간도출병사’(1921년, 조선군사령부)는 홍범도 부대의 활약이 일본군에게 훨씬 치명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최근 독립운동사는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회 산하의 독립군 등의 연합부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약관의 나이에 청산리대첩을 지휘한 이범석은 누구인가. 해방 후 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해 극우세력의 핵심이 됐고 대한민국 출범 당시 초대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또 부산 정치파동 때 내무부 장관이 돼 이승만의 독재를 공고히 하는 악역을 맡았고, 자유당 창당 당시 족청계의 총수로 주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도 노회한 이승만에 의해 자유당에서 축출, 숙청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좌진이 청산리대첩 후 일본군에게 피살됐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김좌진은 1930년 1월24일 중국 길림성 영안현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현재 해림시) 부근에서, 자신이 경영하던 정미소에서 1년간 일했던 박상실(朴尙實)에게 피살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