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과 그에 얽힌 전설의 의미
우리나라의 땅이름에는 여러 가지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선이나 선녀와 관련된 이야기, 충신, 효자․효부, 정절을 지킨 부인의 이야기,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 외에도 계급의 상하에 따른 갈등이나 일상사의 고뇌에 얽힌 이야기 등 그 갈래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들 전설은 우리들의 삶과 그에 따라 빚어지는 한을 담고자 하는 바람에서, 원래의 지명이 가진 뜻과는 거리가 멀어진, 가공의 사실로 윤색된 것이 많다. 이를테면, 아리랑 고개란 이름이 자기 정조를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아랑’ 낭자의 이름에서 왔다는 전설이나, 달래강의 이름이, 옷이 물에 젖은 누나의 모습을 본 남동생이 솟아나는 욕정을 참지 못하여 자신의 성기를 짓이기고 죽자, 그것을 본 누나가 어이없고 애석한 나머지, ‘달래나 보지’ 하고 말했다는 전설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하는 것 따위가 그런 것이다. 이러한 전설은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지, 실제 그 지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면 이러한 예에 속하는 지명 설화 몇 가지를 보기로 하자.
먼저 손돌목 전설을 들어보자.
손돌목은 경기도 김포군과 강화군 사이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여울 이름이다. 손돌목 전설은 이 지명에 얽힌 유래담이다. 손돌목은 원래 우리말로 된 지명인데, 사람들이 그 속에 담긴 말뜻을 잃어버리자, 손돌목을 손돌목(孫突項, 孫乭項)이란 어떤 사람 이름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갖다 붙여 만든 이야기가 손돌목 전설이다. 그러면 그 전설을 들어보자.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하여 초지(草芝 지명이다)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뒤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을 죽이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하여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 10월 20일이었는데, 그 뒤 이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에 의하여 매년 추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므로, 이를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하고, 이 여울목을 손돌목이라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어부들은 이날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지어낸 이야기다. 그러면 ‘손돌목’이란 말의 본래 뜻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손돌이란 지명은 ‘용비어천가’에도 나오는데, 한자로는 착량(窄梁)이라 표기하고 있다. 착량이란 ‘좁은 물목’이란 뜻이다. 손돌목의 ‘손’은 ‘좁다’의 뜻인 ‘솔다’의 관형사형이다. ‘멀다’의 관사형이 ‘먼’이고 ‘놀다’의 관형사형이 ‘논’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손’은 ‘좁은’이란 뜻이다. ‘바지통이 솔다’, ‘저고리 품이 솔다’ 또는 ‘버선볼이 솔다’와 같이 지금도 쓰는 말이다.
‘돌’은 물목이란 뜻인데 한자로 표기할 때는 량(梁 돌 량) 자를 쓴다. 울돌목을 명량(鳴梁)이라 하고, 노돌(강)을 노량(露梁)이라 적는 것도 이런 예에 속한다. ‘돌’은 현대어 ‘도랑’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목’은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한 통로의 좁은 곳’을 뜻하는 말이다. ‘길목, 골목, 나들목’ 등과 같이 합성어를 만들기도 하는 말이다. 그러니 ‘손돌목’은 ‘좁은 물목’이란 뜻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손돌목’의 이런 뜻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손돌(孫乭), 또는 손돌목(孫突項, 孫乭項)이란 사람 이름으로 둔갑시켜,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전설을 지어낸 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에 아차산현, 아차산, 아차고개, 아차섬 등과 같이 ‘아차’가 붙은 것들이 있다. 앞의 손돌목 전설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아차가 붙은 땅이름에도 그에 따른 전설이 붙어 있다.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에 있는 아차산의 전설을 들어보자.
조선시대에 용하기로 소문난 점쟁이가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사람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이 점쟁이를 불러들여 명했다.
“네가 그렇게 용하다면, 이 궤짝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맞혀 보아라.”
“이 안에는 쥐 아홉 마리가 있사옵니다. 전하.”
그러나 궤짝에는 단지 두 마리의 쥐가 있었을 뿐이었다.
“네 이놈, 역시 사기꾼이었구나. 백성을 현혹한 죄로 사형에 처한다.”
점쟁이가 끌려 나간 후, 왕은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저 쥐 두 마리가 암컷과 수컷이라면 …… ?’ 이런 생각이 든 왕은 서둘러 쥐의 배를 갈라보니,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새끼 일곱 마리를 밴 암컷이었다.
왕은 급히 형을 중지하려고 신하를 보냈지만, 이미 점쟁이의 목이 달아난 후였다.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왕은 크게 후회하였다.
점쟁이가 죽은 곳인 광나루 응화대를 끼고 있는 산을 그때부터 ‘아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아차고개에 대한 전설을 보기로 하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묘 마루터기로 올라가는 고개를 ‘아차고개’라 불렀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 때 영등포 남쪽 시흥에 살던 어떤 선비가 사육신을 처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민심을 대변하여 이를 막고자 도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은 이미 노들나무 건너 맞은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비보에 접하고, ‘아차! 늦었구나’ 하고 탄식하고는 울면서 돌아갔다.
그 뒤부터 ‘아차’ 하고 탄식한 고개라 하여 이 고개를 ‘아차고개’라 불렀다.
그런데 이 전설의 내용이 조선 때 유명한 점술사인 홍계관과 얽혀진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조선 명종 때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하였다. 한번은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니 아무 해 아무 날에 비운으로 죽을 운수였다. 그래서 살아날 방법을 궁리해보니 용상 밑에 숨어 있어야만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그런 뜻을 임금에게 올려서 그날 용상 밑에 숨어 있었다. 이때 마침 쥐가 한 마리 지나가자 임금은 홍계관에게
“마루 밑으로 지금 쥐가 지나갔는데 몇 마리였는지 점을 쳐보라”고 물었는데,
“세 마리인 줄로 아뢰나이다”라고 답하자, 임금은 홍계관이 임금을 기만했다 하여 노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홍계관은 도리 없이 새남터로 끌려갔다. 형장에 도착한 홍계관은 다시 점을 쳐보고 형관에게,
“잠깐 동안만 여유를 주면 내가 살 길이 있으니 사정을 들어 주시오” 하니 형관도 불쌍히 생각하여서 잠시 기다리기로 하였다. 임금은 홍계관을 형장으로 보낸 뒤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그 배 속엔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본 임금은 깜짝 놀라서 곧 승지를 불러 홍계관의 처형을 중지하라고 일렀다. 급히 말을 달려 간 승지가 당현 고개에 올라보니 막 형을 집행하려는 순간이었다. 승지는 크게 “처형을 중단하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그 말소리는 그 곳까지 들리지 않았다. 승지는 다시 손을 들어 중지하라고 손을 저었으나, 형 집행관은 도리어 그 시늉을 속히 처형하라는 줄로 알고 곧 처형을 단행했다.
승지가 그 사실을 임금께 보고하니, 임금은 ‘아차’ 하고 무척 애석해 했다. 그리하여 그 고개 이름을 ‘아차고개’라 부르게 됐고, 지금의 워커힐 뒷산을 ‘아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 전설을 보면 ‘아차’가 붙은 지명은 어떤 사람을 무지하게 죽인 데 대하여,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거나 후회하여 ‘아차’하는 감탄의 말을 한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하나의 전설일 뿐이다. ‘아차’의 원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차’의 뿌리말은 ‘앗/앛’이다. ‘앗’은 ‘작다, 새로, 덜 된’의 뜻이다. 이러한 말뜻은 얼핏 보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즉 ‘새로’ 된 것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덜 되어[미숙]’ 있고, 따라서 ‘작다’. 이러한 뜻을 가진 ‘앗’이 음운변화로 인하여 ‘아ᇫ, 앚, 앛’ 등이 되었고, 일본말의 ‘오토[弟]’도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작은 사람을 ‘아시>아이(아우)’라 하고, 작은어머니를 ‘아ᇫ어머니>아주머니’ 작은 아버지를 ‘아ᇫ아비>아자비’라 하는 것은 거기서 유래한 말이다. ‘아시빨래’, ‘아시갈이’도 마찬가지다. 처음 새로 하는 빨래가 아시빨래다. 처음 논을 가는 것이 아시갈이다. ‘아침’도 마찬가지다. ‘앗ᄎᆞᆷ’이 변한 말이다. ‘새로’ 시작되는 때가 ‘앗ᄎᆞᆷ>아침’이기 때문이다. 일본어의 ‘아사[朝]’도 ‘앗아’가 건너간 것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阿斯達)’도 ‘앗달’을 표기한 것으로 ‘새 땅’이란 뜻이다.
그러면 ‘앗’에서 변한 ‘앛’의 예를 보자. 세밑의 옛말이 ‘아ᄎᆞᆫ설’인데 이는 ‘작은 설’이란 뜻이다. ‘아ᄎᆞᆫ아들’은 조카이며, ‘아ᄎᆞᆫ딸’은 조카딸이다. 신라 때의 벼슬 이름인 ‘아찬(阿飡), 아비한(阿比干)은 ’앛찬, 앛한‘인데 여기서의 ’앛‘은 ‘작은’의 뜻을 지닌다. 즉 아찬, 아비한은 ‘작은 제상’의 의미다.
그러므로 ‘아차산’은 ‘앛아산’ 즉 작은 산이란 뜻이다. ‘앛아산’의 ‘-아-’는 문법적인 조음소다. 아차고개는 ‘작은 고개’이고, 강화도 서쪽에 있는 섬인 아차섬(阿次島)은 작은 섬이란 뜻이다.
아차산(阿嵯山․峨嵯山․阿且山) 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아차산을 ‘아끼산․액끼산․에께산․액계산․액개산’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는데, 이는 모두 ‘아기’를 세게 말한 데서 생긴 말들이라 생각된다. ‘아기산’곧 작은 산이다.
그러니 아차산과 아찬고개 전설은, ‘작다’는 뜻인 ‘앛(아)’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그 뜻을 잃어버리고, 감탄사 ‘아차’로 이해한 언중(言衆)들이 만들어 내었던 재미난 이야기다.
다음으로 달래강 전설을 보자. 달래강은 충주 단월동을 관통하고 있는 강이다.
옛날 오누이가 이 강을 건너다 소나기를 만났는데, 얇은 옷이 비에 젖자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누이의 드러난 몸매를 보고 남동생이 불측스런 정을 느꼈다. 동생은 이 욕망을 저주한 나머지 자신의 남근을 돌로 쪼아 죽고 말았다. 앞에서 가고 있던 누이가 남동생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되돌아가 보니 남동생이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전후 사정을 안 누이가 “달래나 보지. 달래나 보지.” 하고 울었다 하며, 그 후부터 이 강을 달래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달래강 전설은 달래고개 전설과 더불어 근친상간 모티프를 가지고 있는, 우리 광포전설(廣布傳說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전설)의 하나이다. 근친상간의 금기 때문에 오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로, 인간의 본능과 윤리적 가치관에 대한 갈등이 그 지배요소로 깔려 있다.
달래강 전설은 지금 전하는 종류가 20여 가지나 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서사구조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고 전체적으로 등장인물의 관계는 누나와 남동생인 경우가 많고 오빠와 여동생으로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소나기를 맞아 옷이 젖는 바람에 몸맵시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만 강물이 불어서 옷을 벗고 건너느라 몸을 보게 되는 경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 달래강의 원의미를 더듬어 보자. 먼저 달래강의 ‘래’를 보자. 이 ‘래’는 ‘내[川]’의 변한 말이다. 이 달래강을 덕천․달천․달천강 등으로도 부르는 것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달의꽃’이 달래라는 말에 이끌려 ‘달래꽃’으로 변한 이치와 같다.
다음으로 ‘달래강’의 ‘달’을 보자. ‘달’은 원래 고구려어로서 산이란 뜻이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들’이란 뜻을 함께 갖게 되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阿斯達)’의 ‘달’도 바로 그런 뜻이다. 이 ‘달’이 ‘땅’이란 말을 낳았다. ‘달’이 산이나 들 곧 땅을 의미했음은 지금의 ‘양달, 응달’이란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니 달내는 ‘들 가운데로 흐르는 내[천]’라는 뜻이다. 곧 ‘들의 내’라는 의미다. 이 ‘달내’가 ‘달래’로 변하여 ‘달래강’이 되고, ‘달래(나 보지)’란 말과 관련 지어 시대를 내려오면서 그런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으로 박달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달재는 조선조 중엽까지 이등령(二登嶺)이라고 불리었다. 이는 천등산(天登山)과 지등산(地登山)이 연이은 영마루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 박달재에는 비운의 전설이 숨어 있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영남에 사는 박달은 과거 합격이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을 찾아가다, 평동 마을의 한 농가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달 도령의 늠름하고 준수한 태도에 그 집의 딸 금봉이는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박달 도령도 금봉이의 절절하고 연연한 자태에 넋을 잃고 말았다. 뜻과 뜻이 맺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빛이 호젓한 밤 두 청춘남녀는 사랑을 맹세하고 장래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이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달 도령이 과거를 보러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박 도령은 금봉이가 싸준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달고, 이등령 아흔아홉 구비를 꺾어 돌며 과거 길에 올랐다.
한양에 도착한 박달은 만사에 뜻이 없고 오로지 자나 깨나 금봉이 생각뿐이었다. 연연한 그리움을 엮으면서 과거를 보았으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며칠을 두고 고민하는 날이 계속 되었다. 그리움이 내키는 대로 평동을 가자니 낙방의 초라한 모습을 금봉이에게 보일 수 없었다.
한편 금봉이는 박달을 보낸 날부터 성황님께 빌고 빌기를 석 달 열흘, 그러나 박 도령의 소식은 끝내 없었다. 금봉이는 아흔아홉 구비를, 그리운 박달의 이름을 부르며 오르고 내리다, 마침내 실신하여 상사의 한을 안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박달은 뒤늦게 금봉이의 삼우 날 평동에 도착하여 금봉이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실의와 허탈감에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뜬 박달의 앞에 금봉이가 애절하게 박달을 부르며 앞으로 지나갔다. 앞서가던 금봉이가 고개 마루 정상 벼랑에서 박달을 부르며 몸을 솟구치는 찰나, 박달은 금봉이를 잡았으나 그것은 허상일 뿐 벼랑에서 떨어지는 몸이 되었다.
이러한 전설을 배경으로, 반야월이 작사하고 박재홍이 부른 노래가 <울고 넘는 박달재>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그러나 이렇게 애틋한 사랑의 얘기를 담고 있는 박달재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 사실이 아니다. 박달재의 박달을 한 도령의 이름으로 각색한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의 ‘박달’은 우리말 ‘ᄇᆞᆰ달’에서 온 것이다. ‘ᄇᆞᆰ달’의 ‘ᄇᆞᆰ’은 ‘밝다’의 어근이다. 그리고 ‘달(達)’은 산 혹은 들을 가리키는 우리 옛말이다. 그러니 박달은 ‘밝은 산’이란 뜻이다. 단군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의 단(檀)은 흔히 ‘박달나무 단’ 자로 읽고 있는데, 이는 박달(ᄇᆞᆰ달) 즉 밝은 산[白山]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은 ‘밝음’을 지향한 겨레다. 단군신화의 태백산(太白山)도 ‘한ᄇᆞᆰ뫼’란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한’은 ‘큰’이란 뜻이니 이는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다.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동명은 ‘새ᄇᆞᆰ’을 표기한 것이고,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박혁’도 ‘ᄇᆞᆰ’을 표기한 것이며, 원효(元曉)의 이름 또한 ‘새ᄇᆞᆰ(새벽)’이란 뜻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백악산(白岳山)도 역시 ‘한ᄇᆞᆰ뫼’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신라 건국설화에 보이는 광명이세(光明理世)는 ‘밝음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처럼 ‘ᄇᆞᆰ’은 우리 민족의 가치 지향점이었다.
그러니 박달재는 아마도 아득한 옛날 우리 민족의 시원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성스러운 곳이라 생각된다. 박달은 결코 사람 이름이 아니다. 밝은 산이란 이름인 ‘박달’을 과거보러 가는 도령 이름으로 바꾸고, 이에 곁들여 금봉이라는 처녀와의 사랑 이야기로 꾸민 것이다.
다음으로 임진강의 한 갈래인 한탄강(漢灘江)에 얽힌 전설을 보자. 이 강에는 다음과 같은 두어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철원군의 넓은 들을 배경으로 거기다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는 국가를 세우고 나서 백성들을 위하기보다는 자만에 빠져 독선적인 다스림으로 군림하였다.
그가 남쪽으로 내려가 후백제와 싸우다 패해 철원으로 후퇴하던 어느 날, 이 강을 건너다가 강가의 돌들이 모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한탄하였다.
“아, 돌들이 모두 좀 먹고 늙었구나. 내 몸도 저 돌들처럼 늙고 좀 먹었으니 나의 운도 다했도다.”
그 후부터 이 강 이름을 한탄강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8․15 광복 후 월남하던 북한의 반공 인사들이, 이 강에서 크게 한탄했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6․25 전쟁 중 최대의 격전지였던 김화, 평강, 철원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를 흐르는 이 강에서 많은 생명들이 한탄을 하며 쓰러졌다고 해서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탄강은 이런 연유들에서 생긴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한탄강의 한탄(漢灘)을 다른 한자어 한탄(恨歎)의 뜻으로 생각하여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탄강은 원래 ‘한여울’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노인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으며, 옛 지도에도 한여울로 표기되어 있다.
이 한여울을 한자로 바꾸면서, ‘한’을 한자 ‘漢’ 자로, ‘여울’은 한자 ‘여울 탄(灘)’ 자로 옮겨 적었다. 그래서 한탄강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한여울’의 ‘한’은 고유어로 ‘큰[大]’이란 뜻이다. 그러니 한여울은 ‘큰 여울’이란 뜻이다. 한탄(恨歎)이란 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나라 지명에 얽힌 몇 가지 전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전설들이 실제의 땅이름이 갖는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공적 이야기임을 알았다. 이것은 본래의 지명이 갖는 의미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잊혀진 것이 일차적 이유가 될 것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명의 본뜻은 잃어버리고 전설이 주는 의미가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어떤 사물과 관련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곳곳에 만들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선인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그 속에 웃음과 눈물이 스며 있고, 슬픔과 회한이 배어 있다. 인생의 고뇌가 녹아 있는가 하면, 깨달아야 할 교훈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비록 지명의 원뜻과는 거리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의 깊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조상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지명전설로 정착시켜서, ‘이렇게 좋은 일을 후세 사람들은 본받아야 하느니라’ 하는 교훈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여기에 지명 전설이 갖는 유의미성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다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상상력으로 창작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그것을 한껏 즐기면서 소중히 보존하고 또 후세에 전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