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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신앙의 해와 성체에 대한 묵상
말씀: 베드로 전서 1:13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서 준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때에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욕심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하느님께 복종하십시오. 성서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 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여러분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신앙(믿음)의 해 라는 단어가 깊이 자리하여 울리고 있음을 믿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지 생각해 봅니다. 신학적으로는 믿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그동안 많이 들어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자가 아니며 신학이나 종교 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므로, 성령으로써 여러분께 말하고자 하며, 여러분이 그 것을 이해하 시리라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안에 성령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으며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실 때 우리 모두 그것을 듣습니다. 그것이 꼭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을 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성령」으로 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성령」이심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초자연적인 은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도유함으써 믿음의 은총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창조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 우리의 삶의 신비등, 그 모든 신비를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 하는 것이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은 귀중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많은 때에 서로 이해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사랑합니다. ㅎㅎㅎ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사랑한다면 아주 곤란하죠…ㅎㅎ 인생은 이해 하기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해 하기 때문에 삶을 사는 것도 아니구요.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하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으로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도유되었지만, 우리와 같이 도유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십니다. 그 들 역시 그 들 안에 하느님의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들도 성령으로 창조하셨으므로 그 들 안에도 성령이 있으며 그 들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삶이 무엇입니까? 삶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 자체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들의 믿음은 우리와 달리 초자연적으로 도유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들은 우리가 갖는 책임(의무) 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면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도유로서 책임이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 도유를 받은 우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더 가졌지만,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같은 삶을 받았고 삶은 하느님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다른 단계의 하느님이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에게 하느님이 더 많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이 더 많이 있지 않다는) 그것은 다른 단계 (차원) 를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교회에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 평신도가 있듯이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같으나 다 각기 다른 책임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말 하고자 할 때 신뢰(trust,의탁) 를 말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비의 예수님을 잘 묵상하면 아주 큰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이 시대에 성녀 파우스티나를 통해 이 메세지를 세상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신비가나 성인들을 찾아보면 하느님께서 교회 역사 안에서 오래 전에도 이 자비의 메세지를 여러 다른 신비가들에게도 주셨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오상을 받았던 어떤 수녀에게도 주님께서 이 메세지를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수녀를 통해 주님께서 주신 말씀도 같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바칩니다…” 같은 성령을 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예수님의 피와 고통을 봉헌 하는 같은 내용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고 희망이 없다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화가 나 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믿음도 없습니다.
크리스챤의 신비로서 우리의 믿음은, 특히 성체를 모시는 카톨릭 신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도, 꿈꿔보지도 못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았으나 또한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배워야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성체를 통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인류의 보속의 도구로서 초자연적으로 도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체로서 보속의 도구가 되는가? 우선 우리는 아주 강한 훈련으로 단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양심을 넘어서 매우 자신의 성화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내가 거룩한 것과 같이 너희도 거룩해지라고 말씀하신다고 전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룩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 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충실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내에게 충실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과 결혼하여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다면 초자연적으로 도유받은 은총을 부정하고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가리옷 유다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은총을 저버렸습니다.
가리옷 유다와 성체 사이에 큰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체성사가 마지막 만찬 때 세워진 것임을 교회로 부터 배웠습니다. 그 것에 많은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에게 빵을 포도주에 적셔 주시고 ‘가서 할 일을 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성서는 그 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가 먹은 것이 성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빵을 먹였던 마지막 만찬에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 갔을까요?
그가 죄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가서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우리가 믿음을 저버렸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제를 통해 우리에게 성체를 주십니다. 그 때 예수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말씀 하십니다. “가서 할 일을 하여라” 그리고 여러분이 그 곳을 떠날 때 대죄 상태에 있다면 사탄은 여러분에게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정확하게 말합니다. “ 올바른 마음 가짐 없이 빵을 먹는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분별하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1:27-31)」)
어떤 사람들은 성체 성사가 상징이라고 말합니다만, 사도 바오로가 그에 대해 그 토록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어떻게 그 것이 상징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상징이라면 준비가 안된 채 빵을 먹어서 단죄 받게 된다는 것이 무슨 뜻 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되어지지 않은 채 성체를 모시면 사탄은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여기에 또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처음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때 배반자인 가리옷 유다도 그렇게 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악령도 내보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도구 (중재인-우리-) 에 관계 없이 하느님은 언제나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때로 우리 카톨릭에서 중재인에 대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종교 개혁을 했을 때 그들은 이 중재인을 없애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교 개혁 자체를 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이고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에게 성사가 없다면 성체의 도구로서의 우리의 중요한 의무를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고백 성사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체를 이야기 할 때 고백 성사를 이야기 하여야 합니다. 고백 성사가 없이 우리는 성체를 모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체가 무엇입니까? 성체는 용서입니다. 화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어, 우리의 생명 자체를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과 성체는, 죽음의 운명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화해하여, 죽음의 운명과 영원한 삶 사이의 다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때 다리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낮추시어 죽을 운명인 우리가 그 위를 걸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그 것을 할 수 있으신 분입니다. 예수님 만이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많은 영웅들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웅(스타)을 그린 티셔츠를 입고 다닙니다. 영웅이 차 백미러에도 있고 차에도 있고 이 곳 저 곳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영웅들이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 아무도 그 곳에서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ㅎㅎㅎ 오직 무덤에 갔다 그 곳으로 부터 나온 사람은 예수님 뿐 입니다. 그러니 그 분만이 참된 영웅입니다. 저는 그 분의 티셔츠만 입고 싶습니다. ㅎㅎㅎ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티셔츠를 입기를 부끄러워 하지요? 별로 인기 있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그 분만이 유일한 진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판타지를 원합니다. 진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살아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안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이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시체를 지고 무덤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 것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안에서 깨어 나서 참으로 성체의 신비를 이해 한다면 우리가 그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지고 가야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 들에게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그 들에게 부활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크리스챤이란 「부활」을 말 합니다.여러분은 자신에게 얼마나 부활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한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죽을 운명의 크리스챤으로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순이지요. 세상에는 많은 죽을 운명의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여전히 죽을 운명의 크리스챤은 크리스챤의 삶을 이용하여 오직 부와 육체적인 건강과 모든 세상적인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오늘날엔 그것들이 아주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하셨다. 알렐루야! 그분의 피로써 모든 것을 갚으셨으니 걱정할 것 없이 주님께 건강과 부를 청하자! 알렐루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따라 갑니다.
그것이 크리스챤입니까? 아닙니다. 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적인 유익도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크리스챤으로서의 우리의 목표가 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부활입니다.
크리스챤이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귀양을 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읽은 성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이 곳은 귀양, 순례일 뿐입니다. 지나가는 곳입니다.
성서에 씌여진 구절 중 사람들이 별로 묵상하지 않는 것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만질 수 있고 보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내려 오셔서」 어떻게 우리를 떠나셨습니까? 「다시 올라 가셨습니다”」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나를 따라 오라」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디에? 「저 위에」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으나 우리가 있을 곳은 「위」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자,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부터 이곳까지 로프를 보내셨습니다. 그 로프는 십자가라고 불리웁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주어진 가장 강력한 선물 중 하나이며 교회에 대한 성령의 신비한 언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신비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저 종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집에 가기 위한 이 순례길을 가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부터 이 놀라운 무기에 대한 정보를 받게 되어 우리의 인생의 역경을 헤쳐 나가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집에 갈 수 있도록 견뎌 내게 해 줍니다.
십자가의 길은 신비의 사다리입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의 신비를 한 처 한 처 이해한다면 우리는 각 처 마다 그 신비를 뚫고 나갈 수 있게 되며 그것을 극복하고 그 다음 처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삶을 마치는 순간 영혼이 몸에서 나오자 마자 즉시 우리는 주님의 현존 안에 있게 됩니다. 어디 일까요? 산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직 산의 정상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올라가야 됩니다. 주님께서 사다리 꼭대기인 정상에서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곳으로 오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 온 삶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참된 십자가의 길을 걸었으며 얼마나 주님과 가까이 그 십자가의 길을 걸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그것에 따라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선고 받았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내려진 선고는 우리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빌라도가 우리에게 내린 선고이며 우리 모두 그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들은 조롱하고 모욕하며 채찍질을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할 때 그것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 친구, 주윗 사람들이 우리를 모욕하고 조롱할 때 우리는 그 믿음을 증거 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를 가지고 그 다음 처로 가야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수난의 삶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 산을 오르려면, 크리스챤의 삶을 이해 해야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 십자가의 각 처를 거쳐가야 하며 이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성체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번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였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부터 부활까지의 과정에서의 신비를 성체 안에서 보게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없어서는 안될 희생양으로서 당신의 길을 말씀하셨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갈바리에 오르며 빵을 준비하였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거룩한 여인들, 그리고 성 요한이 따르는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침 뱉고 가혹한 행위를 하는 가운데 산을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시어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그 생명의 빵이 부활하여 우리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방법은 우리가 「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모든 누룩(이스트) 을 빼내야 합니다. 모든 양념을 빼내야 합니다. 우리는 맛이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풀려져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누룩과 양념들이 있습니다. (웃음)
우리가 너무 맛이 있게 되어서 야수들이 우리들을 먹고 싶어합니다. 그 야수들로 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법은 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누룩을 빼어내십시오. 매력적이려고 하고, 인기를 끌려하고, 칭찬받으려 하며 인정받으려 하고 다른 사람을 콘트롤 하려하고…그 모든 것들이 누룩입니다…양념들…오~ 우리에게는 너무 많은 양념이 들어 있습니다…(웃음)
그러한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비워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든 도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전에 그 것을 해야 만 합니다.
(8.신앙의 해와 성체에 대한 묵상 계속입니다.)
우리는 모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역사에는 그러한 거룩한 예들이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 그는 로마로 후송되어 사자의 밥이 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나는 교회의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 사자에게 먹혀야 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는 정말로 사자에게 먹혀 순교 했습니다. 순교한 바로 그날이 더욱 많은 로마인들이 크리스챤으로 개종한 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사자에게 먹히었고 생명의 빵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생명의 빵이 되었으며 죽임을 당할 수록 더욱 많은 이교도인들이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수 많은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불에 태워지고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빵의 신비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성체를 이해하게 됩니다. 성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체를 영하며 성체와 자신이 하나라고 느끼셨습니까? 성체는 저기에 나는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까? 때로는 성체를 영하고도 여러분의 마음은 비어 있습니다. 성체와 하나가 되는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례적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 점 더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성체가 더 이상 힘을 발하지 못하고 영혼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제가 주님으로부터 성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간 제가 영하지 않은 성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고통은 여러분에게 표현할 수 조차 없습니다. 제가 그 해 동안 영성체를 했더라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었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체를 영할 때마다 주님께서 영혼들을 구하십니다.
제가 본 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피로서 갚음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라고 하시며 피를 언급하셨습니다. 그 피는 정의를 말합니다. 주님은 그 피가 역사를 따라 내려오도록 하셨습니다. 피는 많은 것을 상징합니다.
사탄 숭배자들도 사탄에게 피를 바칩니다. 제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많은 사탄 숭배자들에게 낙태는 사탄에게 바치는 가장 큰 제물입니다. 그것이 무죄한 피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큰 돈, 혹은 물질을 사탄으로부터 얻기 위한 값으로 피를 바칩니다.
우리가 성체의 도구가 되기 위해 우리는 「피의 값」에 대해 이해하여야합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하느님과 화해하고 성체를 모시면,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바꾸십니다. 우리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가 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피의 값」을 치루고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성체를 모셨다고 합시다. 여기서 참된 성체의 도구로서 거룩한 은총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순간 어디에선가 영혼을 잃어버릴 위험에 있는 누군가가 죽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순간 그리스도의 피가 된 우리로써 그 영혼을 구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면서 성체를 영할 때 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몸이 부패되지 않는 성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어떤 성인은 800 년전, 1000년 혹은 그 이전에 죽은 성인의 몸도 있습니다.
저는 바로 얼마 전에도 부패되지 않는 성 시메온을 보았습니다. 그는 크로아티아 자달 에 있는 성당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바로 성체 때문입니다. 오직 성체만이 그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 누구도 결코 여러분에게 부패되지 않는 죽은 몸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직 성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 큼 성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체 안에 예수님이 실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적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아주 많이 있습니다.
가능한 매일 영성체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교회를 떠난 카톨릭 신자가 죽어서 자신이 낭비한 모든 성체를 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잘 조절만 했더라면 멀지 않은 곳에서 미사를 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해야 할 것들을 완전히 거꾸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것을 똑 바로 해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되면 얼마나 완벽하게 (미사) 시간이 맞춰지는지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도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자리가 「영혼의 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체의 도구로서 예수님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성체」입니다. 그것이 방법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성체와 관련된 예를 들려주곤합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내려왔을때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베일 씌었던 대목을 기억하시지요?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나와 사람들이 얼굴을 처다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느님이 우리가 모시는 「성체」에 계시는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자, 여러분이 성체 조배를 할 때 어떤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살아있는 하느님 앞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태양과 같이 빛나는 하느님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그곳에 계십니다. 그때 여러분은 빛으로 채워져서 모세 보다도 더 빛나게 됩니다.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하므로 여러분은 볼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 당시 히브리인 (유대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육화하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위해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이집트를 떠납니다. 이교도의 삶을 버리게 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매일 예수님을 모실수 있는 성체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 것은 히브리인들이 받은 것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선지자들과 하느님의 사람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갖길 원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충분히 성체조배를 하고 나올 때 영(악령) 들을 눈멀게 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셔야합니다.
사도바오로는 우리가 싸울 대상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있는 영과의 싸움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둠의 영입니다. 그들이 이곳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묵시록 12장에 보면 천사의 (3 분의 1 이) 땅 위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화성이나 금성이 아닙니다. ㅎㅎㅎ 이 곳 지구입니다. (참고로, 마리노의 책에는 이 떨어진 천사의 자리를 우리가 천국에 가서 채우게 된다고 함. 상상만 해도 황홀~~) 이곳에 떨어진 사탄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몹시 화가나 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조심해라! 사자가 풀려났다.’(마리노의 흉내…ㅎㅎㅎ)
그것이 정확하게 사도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악마가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눈이 멀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원죄 때문에 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래, 너희들은 눈이 멀고 들을 수도 없어, 영을 볼 수 없으니, 너희에게 수호 천사를 주겠다’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보디가드가 필요한 사람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보디가드가 필요합니까?
사람들은 성서에서 하느님께서 수호천사를 주셨다는 것을 보면 “~와우! 좋으신 하느님께서 보디가드를 다 주시고…” ㅎㅎㅎ 사실 우리는 겁을 먹어야 합니다.ㅎㅎㅎ “왜요! 도대체 왜 수호천사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ㅠ” 해야죠. ㅎㅎ
사람들은 이곳이 파라다이스인 줄 압니다. 오우, 네..그래서 이곳에 큰 성을 쌓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둠에 있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적으로 둘러싸여 있고, 적들은 우리를 여기에 영원히 머물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곳을 나가야 합니다.
수호천사는 우리가 여기서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를 인도합니다. 수호천사가 우리를 안내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이 멀은 주제에, 순종도 하지 않습니다 .ㅎㅎㅎ 우리는….(마리노의 장님이 어쩡쩡하게 따라가다 말고 반대로 가는 흉내 ㅎㅎㅎ) 우리가 그렇습니다…. 죄를 지을 때 정확히 그러합니다. 수호천사는 (흉내) “저 멍청이가 어디로 가는거야?”ㅎㅎㅎ 수호천사로 부터 멀어져서는 여기저기서 넘어지고 부딪혀 상처입고는 “내 삶이 왜 이 모양이야!” 라고 합니다. ㅎㅎㅎ “네 삶이 왜 그 모양이냐구? 멍청하게 수호천사를 안 따라가니까 그렇지...ㅎㅎㅎ
우리가 그렇습니다. 수호천사로부터, 하느님으로 부터 멀어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잊어버립니다.
참된 믿음은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이 없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또한 「겸손」 하여야 합니다. 겸손하려면 매우 작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커져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 우리는 매우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주 거대합니다. 자만심은 거대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고, 명예가 있고, 게다가 집안이 좋다고 생각하면 오~ 최악입니다. 온갖 것을 쌓아놓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어깨에 힘들어간 모습 흉내) 모든 사람이 알아 주길 원하며 온갖 집안 자랑을 끊이지 않고 합니다. 집에 가면 모든 타이틀을 벽에 걸어놓고 그 위에 램프까지 밝혀줍니다. 그런 집에 가보면… (마리노: 작은 소리로 오우~) (웃음)
그 모든 것이 쓰레기 입니다. 그 것들이 우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전문가가 되거나 더 똑똑해지기 위하거나 배우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사명이며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을 하는 것은 좋은 것 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쓰레기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이 곳에 순례하며 잠시 머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아무도 “안녕하세요 박사님?” “카톨릭 신자 였군요.”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곳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 빛의 (삶의) 차원의 단계로 앞서간 곳입니다.
이곳은 놀라운 여정이 시작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학교」입니다. 그 여정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단계 (스텝 1)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차를 기다리며 역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과 사랑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기차가 오면 얼른 올라 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역에 집을 짓고 살려고 하지요.
이곳은 역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집에 데려갈 기차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다가 기차가 오면 얼른 올라타야 합니다. 기차는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기차의 이름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차를 타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티켓은 「성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기차에 탄 것이 아닙니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 선수들은 아주 강한 훈련을 받아야합니다. 승리하고 월계관을 쓰기 위해 출전한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느님의 「월계관」을 쓰기 위한 삶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것에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과 성체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들을 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책임이 있는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요한은 우리가 갚아야 할 죄를 갚는, (우리의 일시적인 형별의 사함) 우리의 회계 정산을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자선의 행위입니다.
교회로 부터 오랫동안 멀어졌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 왔을 때 그들은 하느님과 허니문을 보냅니다. 온통 어딜가든 하느님 이야기만 합니다. 생명으로 돌아왔기 떄문입니다. 누군가가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가져다 주었기 떄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해야합니다.
세포로 구성된 우리의 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공기, 산소, 해.. 등등 여러가지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와 같이 모든 인류의 영혼은 우리의 성체로서 영양을 공급해 줍니다.
자,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신의 영혼에게 성체가 공급되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성체가 공급되었습니다. 리가 매일 「모든 인류에 대한 성체」를 모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봅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모시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들은 죽으면 지옥에 가는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성체를 모십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체를 모십니까? 전 인류의 인구에 비해 적은 숫자 입니다. 나머지는요? 나머지는 우리를 통해 영혼의 영양을 줍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 안에서 수영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도 우리가 하느님의 바다에서 수영하고 있음을 모릅니다. 성체를 모시지 않는 그 사람들은 물 안에서 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도 물안에서 수영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물은 모태입니다. 그 물에서 부터 영으로 태어나기 위해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영적인 도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사람들은 모태의 물을 가르고 나온다고 말하지요? 우리는 육체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 큰 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 모태를 가르치십니다. 영으로 태어나는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어머니의 모태로 돌아가라는 말인가 하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곳, 육체적 삶의 모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것을 가르고 영적인 영역으로 나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 영적 영역으로 나오기 위한 준비를 위해 바로 성체가 우리의 영혼에 영양을 주는 것입니다. 성체를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보여드리죠. 매우 충만한 어떤 날, 우리는 가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걷고 있을때 갑자기 어디선가 어떤 모르는 사람이 미소지으며 빛이나며 다가 오는 것을 봅니다. 이유 없이 그사람을 통해 마음에 사랑이 쏟아지듯 환해지고 들여 올려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것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체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몇 만 배 더 강하게 주셔서 사람들에게 나누며 치유를 가져 오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고 나올 때 우리는 살아 있는 감실이 되어 놀라운 빛이 나오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경이로운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성체의 도구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사탄이 인류에게 끼친 가장 큰 손실은 교회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총인 성체를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로부터) 빼앗아 간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있는 모든 크리스챤이 성체를 모셨더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악이 적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 모든 것이 인류에 대하여 사탄이 행한 일입니다.
사탄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인류를 향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 성체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제의를 입고 미사를 준비하는 순간 모든 지옥이 벌벌 떱니다. 미사가 드리는 순간엔 모든 사탄은 달아나고 사탄은 모든 것을 중지합니다. 그러나 미사가 끝나면 다시 자신의 영역을 찾으려고 돌아갑니다.
전세계 어디서인가 24 시간 성체가 들여 올려지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습니다.
만일 미사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은 오래 전에 사탄에 의해 넘어졌을 것입니다. 미사는 끊임없이 사탄의 일을 저지 시킵니다.
사탄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들은 사제입니다. 우리는 정말 강하게 사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황님은 더욱 그렇습니다.
(8. 신앙의 해와 성체에 대한 묵상 계속입니다.)
우리는 사제 성소를 위해 아주 강력하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탄으로 인한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사제 성소의 감소입니다.
사탄은 다른 사람보다 사제가 실수를 할 때 그것을 세상의 큰 이슈로 만듭니다. 왜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사랑의 순례」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아실겁니다. 그 곳에서 저희는 항상 수도 성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가끔 수도성소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이 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들의 부모와 겪는 전쟁은 여러분이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들은 카톨릭 부모들인데도 왜 자신의 아이가 수도성소를 가지려 하는지 이해 하지 못하고 “우리 아이는 변호사가 되려 하는데…의사가 되고 싶어하는데…엔지니어가 되려하는데…. 의사가 되서 교회에 봉사하면 되지…” 왜 자신의 아이들을 가족과 떨어뜨리려 하느냐고 난리입니다.
수도성소가 적어지는 이유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크리스쳔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사제직에 대한 순종의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서 병자를 치유하시고 성전에가서 사제인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 궁금 하셨을겁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올바르지도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며 하느님께 대한 바른 믿음도 없는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을까요?
답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려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제직이 매우 중요함을 이해 해야합니다. 사제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를 존중하여야하고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사제를 찾아 다닙니다. 이 본당, 저 본당을 돌아다니고 2시간씩 운전해서 거룩하다는 사제를 찾아갑니다. 고백성사를 보기위해 거룩한 신부를 찾는다고 한다면 “당신의 죄를 감당할 신부를 찾나요?” (웃음) 그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영적 교만으로 도를 넘게 됩니다.
제가 처음에 가리옷 유다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가리옷 유다 역시 악령을 쫒아내고 치유를 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사제는 교회로부터 우리를 죄에서 구할 수 있도록 도유를 받고 힘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 사제가 대죄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에 복종해야 합니다. 사제의 상태는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문제입니다. 사제는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용서해줍니다.
죄는 사탄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우리의 죄를 풀어줄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모든 세례받은 크리스쳔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자들을 따로 불러 그것을 주시며 사람들에게 파견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직접 가지 않고 같은 인간이 중재인 사제를 통하여 고백성사를 보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중재인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제를 통한 고백성사를 세우셨겠습니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을 매우 빨리 무디게 합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길 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으로 인해 사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죄짓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사탄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사탄을 묶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약한 우리자신을 영적으로 만들기 위한 놀라운 힘을 가진 성사입니다. 매우 거룩한 것입니다.
(8.신앙의 해와 성체에 대한 묵상)
고백성사는 약한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만들기 위한 놀라운 힘을 가진 성사입니다. 매우 거룩한 것입니다. 고백성사의 힘을 이해 한다면 우리는 자주 고백성사를 볼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사탄의 아주 작은 점 하나라도 볼 수 있다면 결코 죄를 짓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도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교회 외에 다른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으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하루종일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회개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말하여도 사탄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크리스챤 신앙에는 좋든 싫든 교계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모든 품의 천사 가운데서 은총으로부터 떨어져 불순종의 군대 안에 모인 것입니다. 군대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군대 안의 계층(서열)에 따라 모여있 습니다. 그 군대는 교계제도에 맞서는 군대입니다. 사탄은 이 교계제도 외의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 악령이 들리면 악령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그 사람은 악령의 종이 됩니다. 이 때 구마의 권한이 없는 어떤 사람이 그 악령을 쫓아 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하고 아무리 해도 악령은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한으로 구마를 하면 악령은 복종합니다. 구마는 그 안의 구마자를 속이려고 드는 영과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대장의 이름을 밝히게 하여 그 대장을 불러 냅니다. 그러면 마침내 그 대장이 왜 이사람이 언제 어떤 이유로 악령이 들렸는지 등 아주 상세한 모든 것을 밝히게 됩니다. 그러면 구마자는 그 악령이 시작된 부분을 찾아 불러 내어 악령을 몰아냅니다.
그것 만이 방법입니다.
많은 크리스쳔들이 구마를 합니다. 악령들린 사람을 불러내어 기도를 합니다. 사탄은 기도를 참지 못하므로 저주하고 바닥을 구르고 토하고 결사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는 조용해 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악령이 나갔다, 주님께 찬미드려라”고 말 합니다. 나갔다구요? 노~ 그 악령은 세균으로 변하여 병을 만듭니다. 악령이 나갔어야 할 사람이 병을 갖게 됩니다. 악령을 절대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세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비 정상적인 크리스챤들이 사탄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러한 일들을 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들은 악마론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사탄을 본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세계를 다룰 힘이 없습니다.사탄이 어떻게 움직이고 힘을 갖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여러분을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운명을 알기 위한 별자리점이나, 매직, 이교 사상, 모든 동양 철학 등을 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무심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을 다루고 있는 것들입니다. 영의 세계는 심각한 것입니다.
자 이제 묵상시간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은 가장 놀라운 은총이며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이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며 하느님이 우리안에 사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충실할 때 우리의 삶은 이미 부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놀라운 기쁨입니다.
저는 항상 말합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신앙이 있다고 느끼신다면 여러분이 죽지 않는 사람임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고 모든 것에 급한 마음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마치 시간이 없는 것처럼 서두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빨리 결혼해야 하는데……빨리 더 큰 집을 사야하는데 …이게 늦고… 저게 늦고….
우리가 정말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사람이라면 뭐가 급합니까? 참 크리스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우 평화롭고 기뻐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야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누가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앗아가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아름다운 날이던 나쁜 날이던 힘든 날이던 그 누구도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기에 성체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은총입니다. 제가 배운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체조배…성체조배는 놀랍고도 놀라운 은총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체조배를 어떻게 할지 걱정을 합니다. …성체앞에 와서는 묵주기도 좀 하고 무언가를 조금 읽고…그리고… 졸기 시작합니다…(웃음)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서 성체가 무엇인지 다시 새겨 보셔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성체 안에 계심을 믿는다면 그 분앞에 나아가 그 앞에 앉아있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적당히 기도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이 성체조배의 조건은 아닙니다.
성체조배는 우리를 만든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만난다니.. 상상이 가십니까? 그저 우리를 창조하신 분 앞에 나가십시오. 그것을 이해하면 할수록 여러분의 성체조배는 침묵이 될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기도는 관상기도 아닙니까? 여러분 자신을 침묵 안에 놓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모여 있을 때 어린아이들이 굳이 부모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주변에 서로가 있음을 알고 족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 마음에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성체조배를 하고 그 곳을 걸어 나올 때 여러분이 놀라운 빛을 내게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사탄이 도망갑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여러분의 공동체를,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도시를, 여러분의 교회를, 그리고 인류를 위해 참으로 축복을 하고 싶다면 복된 성체 앞에 충분히 오래 머물러 계십시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을 하느님에게로 데려오고 싶다면 우리의 말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 때 그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성체를 통해 하느님이 하십니다. 그것이 은총입니다. 아멘!
책자로 나온 「마리노 레스트레포 증언」은 여기서 끝납니다. 며칠 후에 마리노씨의 다른 증언을 보내드리겠습니다~그동안 읽어 주시고 주님을 더 알고 사랑하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즈가리아 형제님~그리고 그라시아 자매님 기다리셨지요~~일단 그동안 좀 바빠서 한글본만 사람들에게 보내고 일본어 번역을 못해서 못올려드렸는데요 아직도 일본어 본은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매일 생명의 양식인 복음과 묵상글만 올렸었는데 오늘부터 좀 힘내어 볼까 합니다. 항상 일어본이 끝나면 한글본을 모아모아 한꺼번에 올렸었는데 그렇게 되면 한글본이 너무 늦어질것 같아서 먼저 사람들에게 매일 보내왔던 한글본 모아모아 올립니다~ 잘 읽어 주시고 많은 은총 받으시길요~~이렇게 그라시아 자매님이 이곳에 들러 주시니 정말 힘이 납니다~~^^감사합니다~~
지난 새벽 이 글을 읽으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고 번역하여 그 시간에 글을 올리시는 아녜스님께 무한 감사와 존경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가녀린 몸 어디에서 이토록 강한 힘이 샘솟을까요.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에 힘입음이겠지요.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南愛敬gratia 그라시아님 정말 정말 반갑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장엘리사벳님은 일어본 기다리고 계시지요? 금방 올릴께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뉴에이지의 위협에 머물러 있습니다. 건강 해치시지 않게 천천히 올려주세요.
오늘은 'スカフィラリオ....스카피라리오'가 뭔가했네요 ^^ '스카폴라'를..이렇게 읽더라구요 ^^;;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행복한 하루 되십시요~
@장 엘리사벳 네 외국어는 우리나라랑 조금씩 표현이 다를 경우가 있더라구요~^^뉴에이지...적을 알면 백전 백승이니 더욱 알고 알려야 할 부분이라 여깁니다~~^^これからも頑張って読んでくださいませね。感謝いたします~~^^
"우리가 성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방법은 우리가 「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고 나올 때 우리는 살아있는 감실이 되어 놀라운 빛이 나오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경이로운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성체의 도구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미합니다.
매일 미사로 실천 중입니다~~^^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주님의 피값으로 우리가 주님과 같이 되어, 그 순간 죽음을 맞아 잃어버릴 영혼을 주님은 우리가 성체를 영했음을 사용하시어 그 영혼을 구원하신다하니 정말 우린 영성체만 하는 것으로써 주님의 도구가 될 수있는 감격스런 사명을 가졌다고 하네요...감사할 따름입니다~ 함께 미사에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