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은 문자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얘기된 은사로서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대신 말하는 것 곧 대언이다. 물론 그 말씀에 미래의 일을 담고 있을 때도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 말이다.
하나님께서 개인의 미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미리 알려주시는가? 지렁이의 기도엔 그와 같은 내용들이 나온다. 성경엔 그런 내용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신자 개개인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인가? 그렇게 볼 여지는 없다. 성경에 있는 경우는 계시 형성의 차원이고 지금은 계시가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계시와 계시가 완결된 이후는 외형상 같은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그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완결 이후엔 그 어떤 신자라도 그 생각이나 말이 계시와 같은 권위를 가지진 못한다. 개인 경험일 뿐이다. 또한 그 경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절대적 보장이 없다.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방언은 다른 지역의 말을 가리킨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요한 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인간 세계의 언어이고 후자는 방언 지지자들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천국 언어란다. 물론 지렁이의 기도에서는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두곳의 방언은 같은 의미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예루살렘에 모인 각 지역의 유대인들이 각기 알아듣는 각 지역의 말이었다(행 2:6).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구약의 성취로 얘기되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4:21). 이는 사 28:11 이하의 말씀 인용이다. 이사야서의 진술은 천국 언어를 가리키지 않는다. 다른 지역의 언어를 뜻한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모두 같은 의미이기에 다른 지역의 언어인 것이다.
방언은 다른 지역의 말로서 배도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한 표징이었다. 새 언약의 새 역사인 하나님의 새 일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그 지역 언어로 알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도하였으면서도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들을 통하지 않고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복의 통로였던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주후 70년에 집행된다. 예루살렘 멸망과 돌성전 파괴로. 그것을 기점으로 유대인들은 옛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지위를 상실했다. 그냥 한 불신 국가, 민족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의 표징으로서 방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지극히 당연하다.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언급한 것은 공예배 때에 방언으로 공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고린도 사람들의 공예배에서 다른 지역 언어로 공적 기도를 한 것이다. 당연히 회중은 알아듣질 못하고 그 기도에 참여하질 못한다. 잘못된 것이다. 개인 기도 때야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도 된다. 공적 기도 땐 통역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통역이 없을 땐 방언으로 공적 기도를 해선 안 된다.
구약과 신약에서 얘기되는 방언은 다른 지역의 언어이고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의 표로서 그 역할을 다한 시점 이후론 더 이상 지속될 이유가 없다.
이제까지의 진술만을 생각하면 은사중지론은 지극히 당연하며 지렁이의 기도에서 얘기되는 예언과 방언은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게 된다. 이제까지의 진술만을 생각한다면.
신대원 때 교의학을 가르치신 유해무 교수는 강의 중에 성경으로 성령의 코를 꿰려고해선 안 된다고 했다. 성경으로 성령의 코를 꿰려고 해선 안 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령은 3위의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그분이 사용하시는 검이다. 검이 검을 사용하시는 성령을 결정할 순 없다. 검을 앞세워 성령을 제한하려 해선 안 된다.
예언을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계시 완결 이후 시점에서 개인의 미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씀하실 수 없는가? 말씀 하시면 안 되는가? 개인의 미래를 알려주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가? 성경의 기록을 통한 방식 외에 직접적인 의사 표현 또는 소통은 불가능한 것인가?
은사중지론자들은 그렇단다. 과연 그런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신자의 삶에 있었던 그런 경우는 다 사탄의 역사라고 봐야 하는가? 나는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에.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일을 한다? 결코 아니다.
소위 천국언어라는 방언을 생각해보자. 다시 적지만 성경의 방언은 이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탄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랄 수 있는가? 인위적인 습득의 방식으로 하게되는 것은 성령과 무관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개인 기도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다 사탄의 역사일까? 백번 양보하더라도 나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앞의 예언과 동일한 관점으로. 그것은 신자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매우 유익하다. 그 유익을 바르게 누리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데에 강력한 힘이 있다. 그러한 역사는 사탄이 신자에게 행할 리가 없다. 오직 자기 자녀인 신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다.
다만 나는 현재 행해지고 있는 그 언어 소위 천국언어를 방언이라고 하진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그 근거를 성경에 두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성경의 방언과 같다는 절대적인 보장도 없다. 신학적으로 적절한 규정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하나님은 성경에 갇힌 분이 아니다. 성경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성경의 진술을 바르게 밝히는 것과 그것만이 하나님께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별개다. 성경이 하나님을 가두는 울타리일 순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성령께서 일하실 때 사용하는 검이다. 성령의 역사의 방편이다. 성령이 크고 높으시다. 그분은 성경에 갇혀 있지 않다. 가둘 수 없다. 가두려해선 안 된다. 그분은 성경을 뛰어넘어 일하시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를 헤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이 관점을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훼손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성경은 자체로 충분하다. 성경을 뛰어넘는 성령의 역사는 부족하여 채우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성경 시대 이후에도 신자들 가운데 일하시는 것이다. 시대가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 역사의 변화라고나 할까.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한. 신자는 감사함으로 받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으로 나아가면 될 것이다.
오늘날 신자는 삶의 현장에서 겪는 모든 일들을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인지 아니면 사탄으로부터 말미암은 일인지. 이를 위해선 고난도의 영적 감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럴 때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을 성경에 가두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성경에 뭐가 있다 또는 없다를 앞세워 지금도 그래야 한다는 건 잘못이 될 여지가 있다.
성령의 행하심을 막으려 말고 그분의 역사를 바르게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사족 1. 예언과 소위 천국언어(?)에 대한 김요한 목사의 체험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베푸신 은총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하다. 부럽다. 한국교회에 이런 목사가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과는 별개로 이론에 있어선 적절하지 못하다,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성경과 직결시킨다는 면에서. 앞으론 보완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은사중지론은 성경으로 성령의 코를 꿰려고 한다. 성경에 성령을 가두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라는 이는 개혁신학을 앞세워 칼춤을 추고 있다. 웨슬리가 이단이라느니 김요한 목사는 무당과 같다느니. 개혁주의라는 한 가지 사조에만 붙들려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것은 무식하여 용감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제발 이런 무식한 신자가 큰소리치는 교계에서 탈피하게 되기를 바란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