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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사모.
십자가(十字架)의 예수를 바라보자
히12:1-3절, 213.214.490장.3927 Bible 말씀연구소 카페 박봉웅 목사
1.오늘이 종려주일이며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에 깔아놓으면서 "호산나, 호산나"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모든 인간을 대신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이유에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입성하시면 ‘왕이 되실 것이다.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 라는 기대를 가지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이 왕권을 쥐시면 나도 한자리하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환영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하는 많은 굶주린 백성들은 기아의 고통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진정한 입성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올바른 모습으로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2.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하고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는 말이며 예수님을 롤 모델로 삼아 그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초등학교나 중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하는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나도 열심히 야구를 해서 박찬호 류현진 선배와 같이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들은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박찬호와 류현진을 바라보면서 야구를 하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나도 박찬호처럼 류현진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야구를 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들고 어렵고 고달파도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온전한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목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기록을 성경에서는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이 12살 때에 유월절을 맞아 부모님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데 예수의 부모들은 예수가 친척들 속에 있으려니 하고 예수를 찾지 않았습니다.
하루 길을 간 후 친척들과 아는 자들 속에서 찾아보았지만 아들 예수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큰아들 예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아들입니까? 큰아들이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자기들에게 맡긴 메시아 예수였습니다. 그 아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할 때도 예수의 부모들처럼 예수를 잃어버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는데 그의 삶 속에서 예수를 찾을 수 가 없습니다. 그의 말속에서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인격에서 예수의 향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대신에 물질과 명예와 권세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전혀 본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예수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까?
3.예수님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했습니다. 이 말을 새 번역 성경에서 보니까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 크신 은혜를 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완성되기 위하여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직도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더 성숙하고 더 강하고 더 합당한 믿음이 되도록 다듬어야 할 신앙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완성을 위해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의 믿음이 더 성숙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확실해집니다.
어린 아이의 신앙을 버리고 더 아름다운 모습 더 합당한 모습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러면 어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먼저는,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대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그것이 진정한 바라봄이며 올바른 바라봄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귀를 만진 장님은 커다란 부채같다고 했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뱀과 같다. 몸을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러나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죄를 위해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그것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장 올바른 자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르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아기 예수의 잉태를 예언하면서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다."(사53: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그의 임종 시에 "나는 나의 평생의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십자가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십자가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그의 삶 전체가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고 말씀했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목장 주인을 전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그 목장을 일찍 방문했습니다. 얘기 끝에 농장 주인이 목사에게 닭장으로 함께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둥지에 암탉 한 마리가 앉아 있었는데 그 날개 밑에서 새끼 병아리들이 뾰죽 뾰죽 밖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은 목사에게 암탉을 만져보라고 하였습니다. 암탉을 만진 목사는 그 암탉이 죽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농장 주인이 말했습니다. '머리에 난 상처를 좀 보십시오. 간밤에 족제비가 피를 몽땅 빨아먹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새끼들이 족제비에게 다칠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거죠. 정말 대단한 새끼 사랑입니다.'
그 때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움직일 수도 있었고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움직였더라면, 그가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십자가를 떠났더라면 선생님과 저는 영원히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농장 주인은 목사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올바른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죽으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주님을 닮아가지 못하면 올바르게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5.이렇게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가 있는 한 선교사가 어느 마을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입구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울을 건너오는 사람마다 큰 돌을 머리에 이고 건너와서는 그 돌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큰 돌을 머리에 이고 건너온 사람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돌을 내려놓고 대답을 합니다.“이 개울은 비록 얼마 되지 아니하는 폭이나 한 가운데는 물살이 대단히 셉니다. 이 돌이 없으면 물결에 넘어지기 십상이고 또 조금만 떠내려가면 깊은 낭떠러지가 있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 돌이 있으면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혹 넘어지더라도 돌만 잘 붙들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급류가 흐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종종 무거운 돌멩이의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다. 돌이 무겁다고 그 돌을 버리면 그 돌이 나를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아프다고, 내 몫의 십자가가 무겁다고, 십자가를 버리면 십자가는 나를 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일에 우리도 기꺼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할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주님의 종 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때까지 철저하게 낮아져 섬겨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던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 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이 가시를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바울을 괴롭히는 가시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에게 이런 가시가 있었다는 것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준 것은 그의 많은 은혜로 인하여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가시의 찌름이 없어서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 되었더라면 그가 받은 많은 은혜는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고난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붙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6.둘째는, 십자가 뒤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그 엄청난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십자가 뒤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십자가 뒤의 부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십자가를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습니다. 우리를 찌르고 괴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주님처럼 십자가 뒤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뒤의 즐거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주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셨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어 쓰도록 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독일의 한 봉건 영주가 우연히 주님의 십자가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었건만, 넌 나를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 그가 하루 종일 저녁 늦게까지 그 그림을 보는데, 점차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신비한 기운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강한 다짐을 합니다.
그 다음날 진젠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이 봉건 영주는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를 짓고,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 후 주님만 바라보는 이 아름다운 신앙운동은 모라비안 운동으로 일컬어졌고, 그 모라비안 교인들의 신앙으로 영국의 요한 웨슬레가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레로 말미암아 감리교라는 거대한 신앙공동체가 생겨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구원과 변화와 회개의 역사를 허락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고 십자가 다음에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시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7.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헛된 것을 기대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니까 오히려 "보따리 내 놓으라!" 고 소리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 보따리를 지나치게 찾는 분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보따리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항상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의 태인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주님가신 길을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댓글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