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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삶과 신앙의 특색과 공통점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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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홍 길 주
-13.09.17-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과 의미
본 연구의 목적과 의미는 일제 말기 한국 교회에서 모진 수난을 겪다가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고찰하고 연구하는 데 있다.
한국 교회가 120년을 지탱하며 놀라운 성장과 부흥을 이룬 것은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 기독교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어린 신앙투쟁과 헌신과 순교를 불사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그러한 신앙을 오늘날에도 본받기 위해서는 일제 때 환란과 핍박을 겪으며 결국은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으려다, 모진 고문과 학대 속에서 상상하기 힘든 고통과 수모를 당하다가 순교하신 신앙인들의 삶과 신앙을 뒤돌아보려고 한다.
특히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의 강요는 극심했기 때문에 신앙의 정조를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참된 신앙인들은 구속되어 감옥에서 고문과 고통을 당했다. 그 중에서도 결단코 신앙의 정조와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려다 끝내 순교해야만 했던 세 분은 신앙과 삶에 대해 조명하며 연구하려 한다. 주기철 목사, 박관준 장로, 최봉석(권능) 목사가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했던 대표적인 분들이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재임 시에 일경으로부터 4번씩이나 검속을 당하다가 끝내 감옥에서 장엄하게 순교했던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를 대표했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박관준 장로는 목회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의 최고 책임자인 조선 총독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직접 찾아가 그들을 책망하고 경고했던 마치 엘리야와 같은 심정을 가진 놀라운 신앙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는 초개와 같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특심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최봉석 목사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만큼 어디서든지 "예수 천당"을 밤낮으로 외치며 다녔다. 그가 회심 후부터 전도하며 세운 교회가 80여 곳이나 될 정도로 그는 최대의 전도자였다. 그도 신사참배라는 불의 앞에 조금도 타협하지 않다가 모진 고문과 수난 속에서 끝내 순교했던 것이다.
일제 말기 순교했던 이 세분의 일생이 어떠했으며, 그들의 신앙은 어떤 특색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의 특색과 공통점을 연구함으로써 그들의 진정한 신앙의 근원과 배경을 밝히고, 그들의 순교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또한 너무나도 편안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배우고 조명 받아야 할 삶과 신앙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본 연구는 일제 말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에 대하여 고찰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그들의 삶과 신앙의 특색과 공통점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일제 말기의 순교자들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주기철 목사, 박관준 장로, 최봉석 (권능) 목사, 세 분으로 한정하여 그들의 삶과 신앙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제 Ⅱ장에서는 일제 말기의 역사적 배경과 신사참배에 대해서 정리하려 한다. 1장에서는 일제 말기의 역사적 배경과 실상, 2장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와 한국교회의 현실을 살펴본다. 제 Ⅲ장에서는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의 특색에 대해서 연구하려 한다. 1장에서는 주기철 목사, 2장에서는 박관준 장로, 3장에서는 최봉석 목사의 일대기와 신앙의 특색과 대해 살펴본다. 제 Ⅳ장에서는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의 공통점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1장에서는 순교자들의 삶의 공통점, 2장에서는 순교자들의 신앙의 공통점을 연구하고자 한다. 제 Ⅴ장에서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Ⅱ. 일제 말기의 역사적 배경과 신사참배
A. 일제말기의 역사적 배경과 실상
1.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고조와 세계정책 공황에 의해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급격히 군사적 파쇼체제로 전환하고 침략전쟁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 1932년 상해 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또한 이러한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식민지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동원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였다.
일제는 식민통치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경찰과 군사력에 의한 폭력적 억압만으로는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에 식민지 민족의 정신 내부에까지 파고들어 민족의 독자성을 말살하고 일본화 시킴으로써 식민통치의 영구적 안정을 도모하며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말살의 '동화정책'은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방침이었으며, 1930년대에 들어 그들이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한층 강화시킨 것이 소위 '황국신민화 정책'이었다.
'황민화 정책'의 특징은 '천황 신앙'의 강제를 축으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아 민족성의 말살을 단기적으로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 등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한국인의 민족말살적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소위 '내선일체론'이었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 민족 속의 일부이며, 소위 흥아적 민족 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이며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니 '구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해방'이니 '흥아적 민족해방 전쟁'이니 '성전' 등으로 미화하여 아시아 지역의 민족해방 문제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 사이의 모순성을 은폐시켰다.
한국인에 대한 '황민화'는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보다 더 적극화 되었다. 즉 그해 12월 일본 각의에서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침을 결정 하였다.
1. 학교 교육의 '쇄신'에 의한 '황민화'.
2. 조선인 지원병 제도의 채용.
3. 신사숭경 (紳士崇敬)의 염 (念)의 함양.
1)국체관념의 명징 (明徵).
2)구래의 누습 (陋習)의 개선.
3)내지 (일본)의 양속 (良俗)의 채용.
4)국어 (일본어) 보급.
5)사상선도 등을 통한 황국신민의식 배양.
4. '반도주재 (半島駐在) 내지인 (일본인)증가 정착'에 의한 '내선융합의 강화'
조선총독부는 이상과 같은 방침을 더욱 구체화시켜 조선교육령의 개정, 육군지원병 제도 창설, '창씨개명'의 실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의 결성, 경찰서 주재소를 중심으로 한 각종 시국 좌담회의 개최 등을 강제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시국인식을 철저하게 한다는 구실로 전국에 일제히 실시된 시국좌담회는 1940년 1월까지 만도 그 개최 횟수가 연 30만 9천회로 참가 인원은 연 1천 6백 6만여 명에 달하였다.
1938년 7월 중일전쟁 1주년을 기념하여 결성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은 황민화의 중심적 기구로서, 하부조직으로 행정단위인 도(道), 부군도 (府郡島), 읍면 (邑面), 정동리(町洞理) 연맹 등의 지방 연맹과 관공서, 학교, 회사, 종교단체 등 각종 하부 연맹을 조직하고 그 아래 10호 단위로 '애국반'을 조직케 하여 민중생활의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 실천요목으로는 1)매조황거요배( 每朝皇居遙拜) 2)신사참배여행 (紳士參拜勵行) 3)조선제사여행 (祖先祭祀勵行) 4)기회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 서사 낭송 5)국기 (일장기)의 존중·게양 여행 6)국어 (일본어)생활의 여행 등 21개 항목을 정하여 실행케 하였다. 이러한 실천사항 중에서도 궁성요배와 근로저축은 당면의 '필행이목' (必行二目)이라 하여 특히 중요시 하였다. 전자는 천황제 이데올르기의 주입과, 후자는 인력 경제수탈과 관련된 극히 강제적 폭력적인 것이었다.
일제는 전시경제의 일환으로서 국민총력전에 의한 시국대책, 군사시설, 물자 생산 증강으로 세출입 총액은 거액으로 상승하였다. 총독부는 1938년 이래 전시재정경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한국민중에 대한 공제저축, 국채·채권할당 등 강제적인 저축운동을 실시하여 막대한 강제저축을 달성하여 전비로 유용하는 수탈을 하였다. 또한 중국침략전쟁을 계기로 대륙병참기지화에 따른 한국군사 공업의 육성하여 전력물자 생산증강에 매진하였다.6) 일제는 전선의 확대와 전세의 악화에 따라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하여 식민지 수탈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 수행과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의 경제적 자원 수탈과 함께 최대의 희생을 강요하였던 것이 인력 수탈이었다. 그들은 전선의 확대에 따라 부족한 병력과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조선 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7년), 국민 징용령(1939년), 학도 동원령(1943년), 징병령(1944년)을 공포하고 수많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였으며, 급기야는 여자 정신대 근무령(1944년)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여성 인력까지 동원, 전선의 위안부로 전락시킴으로써 막대한 비인도적 희생을 강요하였다.
2. 일제의 기독교 정책
일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첫째로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이데올르기가 기독교와는 조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다년간 신사행정에 관여하였던 오야마 (小山文雄)도 그의 저서에서 "국체는, 즉 신황신앙 (神皇信仰)위에 서 있다. 고로 국민으로서 국가적 신도를 거부하는 것은 국체를 무시하는 것이요, 국민으로서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라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으로서 수입교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국체신도를 받들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반국민적이다."라고 하여 기독교의 반일 성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이러한 한국의 기독교에 대하여 '백방으로 박멸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로, 한국교회가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과 깊은 연대를 가진 가장 큰 배일적 세력이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기독교 탄압의 선봉에 섰던 조선총독부 검사국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조선인 기독교도에는 왕왕 종교의 영향에 빠져서 민심을 움직여 불온사상 (不穩思想)을 고취하는 등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자임하는 풍조가 있고, 메이지 (明治) 43년(1910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에는 평북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책동하였고, 다이쇼(大正) 8년(1919년) 만세소요 사건은 평양·원산·정주·의주 등의 기독교도들이 천도교도와 함께 획책한 데에 기인하여 전선 (全線)을 모두 소요케 하였으며, 그 후에도 각종의 민족운동에 그들이 개제되지 않음이 없고, 전도회, 사경회 등에서도 누누이 불온의 언동을 하는 자가 있고, 또 그들은 최근 농촌의 교화를 표하고 지방 농민을 그 손안에 넣어 훗날에 대비하고, 혹은 장로파 미국인 선교사 등이 그 경양 학교 생도의 신사참배를 거부케하는 태도 같은 것은 통치상 경시(輕視)하기 어려운 것으로 항상 주의 중에 있다. 즉 현실적으로도 기독교가 각종 민족운동 내지 항일독립운동과 관련을 가짐으로써 일제의 미움을 사 철저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로, 기독교가 선교사들을 매개로 그들과 경쟁 내지는 적대 관계에 있는 영·미 서구제국과 연결되어 있고, 세계 여론에 연결되어 있어 통제 내지 예속화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1930년대 이전의 일제와 선교사와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영·미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외부의 지지 없이도 식민지 경영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자 선교사는 오히려 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차츰 선교사들을 적대시하여 한국교회와 분리시키려는 분열정책과 탄압정책을 실시하였다. 한국교회에 대한 선교사의 영향력을 배제시킴으로써 그들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이미 그들의 통제에 순응하는 일본기독교에 예속시키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신사참배문제는 결정적인 탄압의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1930년대 선교사 경영의 기독교계 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가 문제가 되자, 일제는 이를 선교사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 '완미(頑迷)한 외인 선교사'라 비난하면서 반선교사 여론을 부추기며, 한국교회와 선교사간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져 각 노회, 총회에 압력을 가하여 선교사들의 활동을 배제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 분열 공작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와 교육활동과 선교활동이 부진하게 되었고, 겨우 의료활동에서만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활동마저 1940년부터 탄압을 받아 대부분의 기독교 병원이 문을 닫았다. 뿐만 아니라 미·일 관계의 악화로 점차 모든 외국인들을 적성(敵性)국민으로 취급하여 감시 탄압하였고, 일부 선교사들은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결국 1940년 10월 일본의 미국에 대한 전의(戰意)가 표면화 되자,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철수하였다. 이후까지 남아 있던 몇몇 선교사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억류되어 갖은 탄압을 당하다가 1942년 포로 취급을 받아 일본인과 교환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에서 선교사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킨 일제는 교회에 대한 예속과 통제를 강화하여 그들의 통치에 이용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굴복한 친일적 기독교 지도자들을 포섭하여, 소위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이라 하여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고 '종교보국'이라 하여 전쟁협력을 강요하였다. 요컨대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탄압과 회유로 그들의 시책에 순응하게 하고,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국체에 적합한 야소교'를 만들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변질을 강요하여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코자 하였던 것이다.
B. 신사참배 문제와 한국교회
1.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는 한국교회
일제 말기는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가장 참혹한 수난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만큼 어려운 시련을 많이 당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단순히 기독교 박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민족전체를 말살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대두와 함께 신사참배가 정책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강요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여기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강요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물론 교육계였다. 일제는 신사신도를 국민적 애국교육정책의 기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충성과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훈련의 일환으로서 재학중인 모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학교들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다시 신사문제가 일어났던 것이다. 즉 1932년 1월 전남 광주지역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하였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13)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평양지역에서도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석하도록 도지사가 공식 통첩을 보냈으나 숭실전문학교를 위시한 10개교의 기독교계 학교가 불참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불참 저항에 대하여 행정기관을 통하여 강력히 경고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고 탄압을 가중하였다.
그 구체적인 예로 일제는 신사불참배 등 여러 구실을 붙여 사립을 공립으로 만들고, 교장이나 교무주임을 일본인에게 담당시켜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신사참배를 도구로 하여 기독교계 학교를 전면적으로 굴복시켰다. 일제가 이러한 저항적인 기독교계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게 된 것은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1935년 11월 14일 평남 도청에서 개최된 도내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도지사가 개회 벽두에 평양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이 회의에 참석하였던 숭실, 숭의, 순안 의명학교 교장은 기독교인으로서 교리와 양심상 이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함으로써 크게 문제가 되었다.14) 이리하여 전국에서 숭실, 숭의, 광주숭일 등 20여개의 학교가 폐교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15) 또한 평양신학교의 경우는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9월 2학기 개학을 무기 연기한 채 문을 닫게 되었고 졸업생들만 겨우 졸업식도 못하고 졸업증서를 1939년 3월 28일부로 만들어서 우편으로 각자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이즈음 일제가 제시했던 신사참배 강요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 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제의 논리에 대해 한국교회로서는 종교적인 입장에서나 민족적 양심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한국교회에 대하여 총독부가 직접적으로 일본적 전향을 요구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황민화 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에서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 되어가자 이제 직접 그 강요의 마수를 교회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세워 일반 교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개의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 총회에까지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천주교와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 심지어 감리교18)가 신사참배를 교단적으로 이미 인정한 상황하에서 장로교단은 일제의 노골적인 위협하에서 1938년 2월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래 동년 9월 제 27회 장로회 총회가 개최될 때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만이 부분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신사참배 거부 교도 단호 검속'이라는 강경책과 함께 한국 교회 목사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이미 그들의 정책에 굴복한 일본 교회들을 돌아보게 하는 등 방책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총독부는 그해 9월 9일 제 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각지 경찰서장은 총회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첫째, 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 (動議)할 것 둘째,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을 지킬 것, 셋째, 앞의 두 가지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고 이에 불응하는 사람은 검속·투옥토록 하였다. 그리고 총회 전일에 친일적인 총대들을 포섭하여 이 안에 제안·동의·재청자까지 선정해 두고, 총대 선교사들을 경찰서에 초치하여 이에 관여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장로회 총회는 100여 명의 정사복 경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불법적으로 신사참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에 일제의 경찰력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였는지는, 그 이후 이 신사참배 가결 공작에 공이 큰 종로경찰서장을 비롯하여 89명의 평안남도 경관들이 표창을 받은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총회에서까지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일제는 이 결의문과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예배 순서에까지 이른바 '애국적 의식'을 넣도록 강요하는 한편, 예배당에도 가미다나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신사참배 문제는 자진 굴복의 치욕 속에 일단락을 고하였다.
2. 신사불참배 운동과 수난당한 사람들
1938년 2월 9일 사이에 한국교회 공적 기관들의 대부분이 신사불참배를 결의 실행하였으나 반면으로 개교회나 교직자들 신학생 및 신자들의 대부분은 신사불참배를 반대하였고 그들 중에는 얼마든지 개별적으로 신사불참배 운동을 힘있게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신앙적 과감한 투쟁의 역사를 밝혀 보기로 한다.
a.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반대 운동
1938년도 전국노회에 신사참배가 강요된 때로부터 신학교 학생들 간에 불참배 운동이 일어났다. 1938년 2월 9일 전국적으로 교세가 가장 크고 한국교회의 지도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는 평북노회가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 발표하자 평양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은 크게 격분되어 성토의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에 평북노회 소속학생 장홍련 (張弘璉)이가 신학교 교정에 있는 평북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벌목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타 노회 소속 신학생들이 결속하여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개하려고 일어났다. 이리하여 아직 신사불참배를 하지 않은 노회나 교회들은 끝까지 신사불참배 하도록 운동을 전개하려는 무렵 평양경찰서는 그 정보를 탐지하고 박형룡, 김인준 교수를 불구속 심문하고 신학생 다수를 검속 투옥하게 되었다. 그때 한창선 장홍련 장윤성 지형순 등이 검속 당한 바 있다. 이때 학생들 중에는 학교를 자퇴한 이도 많이 있었다. 1939년 7월에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b.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운동-(주기철 목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불참 결의를 한 후부터 당국은 교회가 회집할 때마다 교회 지도자와 직원들은 먼저 신사참배를 하고 소위 국민서사를 외우고 동경에 있는 궁성을 향하여 동방요배를 드리고 12시가 되면 죽은 영령들을 위한 묵도를 하도록 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양심을 저버리고 환란과 핍박을 모면하기 위한 지도자들은 일본 당국에 복종하여, 자녀 교육을 시켜가면서 무고히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신사 불참배하려는 신도들을 경찰에 고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택한 지도자들은 1938년 초에 이르러 평북 평남 경남 전남 만주 등지에서 신사불참배 운동을 크게 일으켜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북부에서는 주기철 목사가 평양신학교의 부흥회에서 '일사각오'라는 유명한 설교를 통해서 신사참배 반대의 신앙적 자세를 천명함으로 학생들에게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 2월부터 네 차례나 검속되었고, 1944년 4월 21일에 평양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7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주목사는 1931년 부산 초량교회에 목사로 있으면서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부를 제안하여 가결시킨 때부터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후에 평양 산정현 교회를 부임한 뒤로는 참배 반대 결의를 더욱 굳게 하고 동지를 모집하여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산정현 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총본산이 되었다.또한 주목사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대표적 인물이며, 한국 개신교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순교자22)가 되었다. 주목사의 힘겨웠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후반기를 소개하면 이렇다. 1938년 8월 20일 제 3차로 검거되어 이때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어떤 때에는 온 몸이 상처와 피투성이가 되어 간수에게 업혀 나올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혹독한 고문 끝에 기절하여 차디찬 마루 위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 한채 몇 시간씩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를 못했다.
이러한 고문을 7개월 동안 계속 당했다. 1940년 2월 초 잠시 석방되어 본 교회에서 사랑하는 교우들과 예배를 드릴 때 설교 내용은 "다섯가지 나의 기도"라는 제목 하에서,
①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② 장기의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③ 노모와 처자와 교우들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④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⑤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였다.23)
1940년 8월 제 4차로 검거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때에 평양노회는 신인 공노할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1941년 3월 20일 소집된 노회는 일본 총독부의 앞장이 노릇하는 평양 친목회의 일방적인 의견과 주장에 의해서 역사적인 4가지 안건을 결의 하였으니
① 주목사를 파면함.
② 동역자 편하설 선교사는 산정현 교회 출입을 금지함.
③ 현직 7장로는 장로직을 정지함.
④ 당회원은 노회에서 선택하고 수습위원 7인을 택정함 이었다.24)
이 7인의 수습위원들에 의해서 두가지 사건이 처리되었다. 먼저 1941년 4월 23일 부활주일 아침에 산정현 교회는 수라장이 되었다. 다음날 예배당 문에다가 망치로 못을 박아 교회문은 봉쇄되고 말았다. 예배당에 못을 박은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던 오윤선 장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외치기를 "평양 노회야, 주기철 목사를 파면한 악당들아, 산정현 교회를 폐쇄시킨 썩은 목사들아 회개하라."고 외쳤다.
음 1941년 11월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사택에서 강제로 추방한 일이다. 당시 신사참배를 하고 신학교 교장이 되었던 채필근 목사가 정기 노회 석상에서 "산정현 교회 목사관은 신학교 교수 사택으로 사용케 해 주시오"하고 청원서를 제출하자 한마디 토의도 없이 "허락이요"라고 가결하므로 이 결의안에 의하여 노회장 및 시찰장, 당회장 등 세 목사가 찾아와 주목사의 가족을 내어쫓고 주목사 가족이 거처하던 사택문을 아주 봉쇄해 버렸다.
끝까지 발버둥치다가 이인식 목사에게 끌려나온 주목사의 80세 노모는 추운 겨울 대문간에 거적대기를 깔고 앉아 3일 동안이나 대성통곡을 하였고 이때 주목사는 감옥에서 경찰들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참대 꽂이로 손톱을 찔리었고 네모난 각목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눌림을 당했으며 가죽끈으로 매를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코에 물을 넣어 혼수 상태에 빠졌으며 심지어는 머리카락을 묶어 온몸을 천장에 매달고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소생시키는 등 고문을 계속했다. 이 참혹한 옥고를 7년 동안 치르던 주목사는 1944년 4월 21일 오후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잡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옥중에서 운명하였다.
최권능 목사로 더 잘 알려진 최봉석 목사도 주목사와 같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으면서도 교회와 민족을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다가 그 힘이 다 소진된 채로 석방되어 평양 기흘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1944년 4월 15일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는…" 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교하였으니 주목사가 순교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전국에 주도적인 인물들은 평북에 이기선 목사 평남에 주기철 목사, 경남에 한상동 목사, 전남에 손양원 목사, 만주에 한부선(헌트) 선교사 등이었다. 이들이 주장하고 나섰던 신사불참배 운동의 요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사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현실 교회와 노회를 약체화 내지 해체 시킬 것.
둘째 신사불참배 신도들과 동지를 규합하여 따로이 예배를 드리게 하고 그들을 육성하여 교회 및 새 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불참배하는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지 말 것.
넷째 신사불참배한 목사에게는 세례를 받지 말 것 등이었다.
이러한 기본 방안을 내걸고 신사불참배 운동을 구체화시키고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만주 평북 평남 경남 지방에는 신사불참배 교회들과 신도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미국의 키신저와 같이 만주와 평양 부산 등지로 왕래하면서 신사불참배 운동의 실황과 정보를 전달하며 격려하는 역할을 평양의 이주원 전도사가 담당했다.
1940년 3월 28일 한상동 목사는 이주원 전도사와 더불어 전국적 확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평양의 주기철 목사의 석방 기회를 이용하여 전국 운동자들의 회집 당시에 구체적으로 토의할 것을 상약하였다. 1940년 4월 주기철 목사가 석방되자 동월 2일 한상동 목사는 평양으로 와서 만주의 운동자들과 먼저 신사불참배 노회를 전국적으로 재건하자고 맹약을 하였다. 그 다음날 채정민 목사집에서 주기철 목사를 중심한 전국 신사불참배 운동자 연합회에서 신사참배하지 아니하는 노회를 재건하기로 하고 앞서 신앙동지 획득과 그 확장으로 현 노회 해체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불참배 운동을 전개해 나아가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물심 양면으로 원조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신사불참배 운동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평양의 해밀톤(F.E. Hamilton) 선교사와 말스버리(D.R. Malsbuly) 선교사는 운동자금을 지원해 주었으며 만주 홍경에 주재하던 한부선(B.F. Hunt) 선교사는 신사참배 반대 이유서를 인쇄 반포하는 등 만주 지방의 신사불참배 운동을 전적으로 지원하였다.27)
c. 평신도들의 반대운동-(박관준 장로의 활동을 중심으로)
신사 불참배 운동에 나선 지도자들을 따라 목숨을 걸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였던 무명의 평신도들도 많았으니 그 숫자는 부지기수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그룹운동에 가담하지 아니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고향산천을 떠나 만주지방이나 혹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신앙을 파수한 평신도들도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심같이 신사에게 굴하지 아니한 지도자와 신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이중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은 박관준 장로를 중심으로 하여 안이숙 선생과 박영창 선생의 참배반대 운동이라고 하겠다. 1937년 박관준 장로는 신문에서 평양 三崇(崇專, 崇中, 崇義女中)이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폐교의 위기 직전에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신사참배 문제가 장차 한국교회 전체를 유린할 우려가 있음을 깨닫고 정부 당국과 합법적으로 싸워 한국교회를 구출할 결심을 가졌다. 이러한 결심은 새벽기도시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하는 음성을 듣고 "납니다"라고 대답하고 나니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정병을 뽑는다"고 하면서 그 명단에 박관중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계시를 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신사참배가 철두철미 종교 행위임을 밝혀서 신사참배의 강요는 곧 신교자유(信敎自由)를 허락한 일본 헌법에 위반됨은 물론 신의(神意)를 불복종하는 오만한 행위이므로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국가가 될 뿐 아니라 신의 형벌을 받아 패망하게 될 것을 정부요인들에게 인식시켜서 신사참배 강요를 철회시키려 하였다. 그는 곧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가지고 니시모도(西本) 평남지사를 위시하여 우가끼(守恒) 총독, 아라기(荒木) 문무장관 등에게 보냈다. 그 진정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여호와는 唯一眞神이다. 둘째 그는 천지만물을 창조 지배하시며 그의 섭리 아래 인류역사가 전개된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나라는 그의 축복을 받아 번성하였고 그를 섬기지 않는 나라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넷째 한국 신도들에게 일본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다. 다섯째 그러므로 한국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치 말라. 여섯째 무고히 검속되어 있는 한국 신도들을 곧 석방하라. 일곱째 만일 당신이 신의 뜻을 순종치 않으면 신은 불원에 일본을 멸망시킬 것이다. 여덟째 당신이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임을 믿기 어렵거든 하나님이 참 신인가 혹은 天照大神이 참 신인가 시험해 보자. 그 시험의 방법은 나무 백속(百束)을 쌓아놓고 그 위에 나를 올려 앉히고 불을 질러서 내가 불타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일본의 신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그는 우가끼 총독과 미나미 총독에게 면담 권고하기 위하여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종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39년 1월 그는 신사참배 문제로 선천 보성여학교의 교사직을 사퇴한 안이숙 선생의 안내로 일본 중앙정부를 찾아갔다. 동경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 그의 아들 박영창과 안이숙 선생의 도움으로 전조선 총독 우가끼의 문무대신 아라기야다(八田) 등 일본정부 요인들을 방문하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들은 박장로의 진지한 태도와 성의에 감동되어 협조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때는 일본 제 74회 제국국회가 개회중에 있었고 신 종교법안이 상정되어 일본 종교계의 관심이 의회에 쏠려있는 시기였다. 신 종교법안이 심의되는 일자를 골라서 의회석상에 나타난 박장로는 2층 방청석에 자리잡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종교법안이 상정되어 동 심의의원 야스후찌(安藤)가 부대설명을 위하여 단상에 올라 왔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이다"라고 일본말로 크게 외치면서 진정서가 든 묵직한 큰 봉투를 단상을 향해 던졌다. 의회장은 일시 큰 소란을 일으켰고 박장로는 즉석에서 검속되어 32일간 경시청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본정부에 알리고자 한 신사불참배 문제는 잘 알려졌다. 박장로는 그 뒤 귀국하여 "우리 3인이 주를 위해 죽으려고 해도 죽음이 피하니 할 수 없구나" 하면서 신앙동지들과 함께 신사불참배 운동을 계속하시다가 검거되어 6년간의 옥고를 겪으시다가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에 평양 기독병원에서 운명하셨다.28)
3.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결과 및 의미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조직적 집단적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동시에 소규모의 개인적 차원의 반대운동이 전국 어디서나 일어났다.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하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였다. 그러나 아직 연구의 부진으로 그 명단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대동아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국에서 목숨까지 버리며 일하고 있던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 투옥하고 고문까지 가하는 일을 서슴지 않다가 결국 모두 추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29) 이러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 하였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자를 민족주의지로 규정하여 치안 유지법·보안법·불경죄 등을 적용 탄압하였던 것이다.
Ⅲ.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A. 주기철 목사의 삶과 신앙
1.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
a. 주기철의 출생과 학생시절
주기철은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주현성 장로와 조재선의 넷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주기철이 어린 시절을 보내 며 신앙 생활에 인도되었던 웅천교회는 1906년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주 기철은 이곳 주일학교에서 기도와 경건을 몸에 익히며 8살 때에 고향의 웅천 개통학교 보통고등과에 입학하여 7년간 수학했다.31) 그는 이 학교 선생들로부터 강력한 민족애를 배우게 된다.
주기철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안질이 있어서 고통을 당하였지만 활발하고 총명하여서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그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계몽 강연을 하고 있었던 이광수와의 만남으로서 1913년 대표적인 민족 교육의 학교인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주기철이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크게 영향을 받았을 훌륭한 선생들이 있다.32) 그는 오산학교에서 그의 순백한 영혼과 정신의 심지(心地)는 일세의 문인이요 자유분망한 지식의 방랑자 춘원 이광수, 규칙과 엄격의 신앙인이요 기묘의 인간 유영모, 민족 자본의 웅대한 경륜과 기독교적 신앙을 민족주의의 열정 가운데 조화시켜 불타게 한 남강 이승훈, 그리고 실생활로서의 신앙 전개를 역설하고 경제적 자립에 의한 민족 구원을 염원하던 역사의 참여적 기독교인이요 민족주의자이던 고당 조만식, 이런 당대의 둘도 없는 민족사 선도의 대선각들과 스승, 그리고 예언자들을 만났던 것이다.33)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곧 그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한다. 그가 연희전문학교를 입학하였던 사실은 그의 신앙에서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역사가 되었다. 그는 이 때 실제 평양에서 순교하게 되는 신앙의 노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갈 길이 아니었다는 역사 변천이 특히 그의 신앙에서 시시각각 드러나고 있었다.34)그는 도진 안질과 병세의 악화로 인해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 일년도 다니지 못한 것이다.
b. 고향에서의 생활과 성직을 향한 결단
1916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4년 반을 우거한다. 주기철이 만 20세 되던 해 김해의 안갑수와 결혼하여 오남 일녀의 자녀를 낳았다. 주기철의 내적 생활의 변화를 촉진시킨 두 명이 있다. 바로 이기선(1878- ?)과 김익두(1874-1950)였다.
이기선은 김해읍 교회를 시무하던 목사였다. 이기선은 신앙이 얕은 주기철을 계속 격려하고 신앙상의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기선의 신앙적인 영향력은 그의 신앙 구조 속에 오랫동안 남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주었다. 이기선은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되었고 해방과 함께 출옥하여 출옥성도들과 함께 산정현교회에 모여 한국교회의 순수한 법통 계승의 방향을 위해 애썼던 인물이다. 그는 기성교회 교권층의 회개의 미진을 보고 기성교회를 떠나 결국 '재건교회'를 설립하였다.35) 그러한 신앙심과 거기에 대한 자각적 태도가 주기철에게 심어진 것이다.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하였다. 주기철은 이 집회에 참석하여 전에 없던 신앙의 깊은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생애를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완전히 전환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그의 성직으로의 지향은 민족산업을 통한 구국 이념이나 시대적 방황의 정신적 실향자로서의 길에서 뛰쳐 나와, 전적인 헌신과 종으로서의 삶으로 결단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신학을 하려는 길이 모색되었다. 그는 성직에의 다짐을 결심하고 목사가 되기 위해 1922년 3월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36)
c. 주기철의 목회시대
(1) 부산 초량교회(1926-1931)목회
주기철은 1925년 9월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목회 행정에서 교회운영에 합리성을 추구 하였다. 이것은 주기철을 이해하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중대한 요소이다. 경건과 정통으로 역사나 기구를 경시하거나 간과하는 신비주의가 없었다는 뜻이요, 신앙 양심의 철저를 기한다고 하여 간혹 경과해야 하는 사소한 절차나 과정 그리고 합리적 판단이나 사회적 억제력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게 행동했다는 말이 된다. 주기철은 목회를 체계 있고 투명하게 관리하였다. 목회의 효율 지향성과 선교신학 정립 및 엄격한 재정관리의 체계적 규격화는 그의 목회 행정의 특징이다. 주기철의 순교는 이러한 그의 철저한 '역사 내 목회의식'에서 이해해야만 비로서 고귀한 깊이를 제 모습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순교는, 이 세상을 미워하고 등지며 경건주의적 비전으로만 의(義)를 실현하고자 한 신령금욕(神靈禁慾)적인 몰입이 아니었음이 이런 데서 새삼 놀랍게 입증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누가 복음적인 역사의식, 선교의 종말론적 윤리의식, 그리고 명쾌한 현장감각을 책임과 헌신으로 연결할 수 있었던 신앙인이었다.
주기철의 목회에서 눈에 띄는 형태 하나는 상(喪)에 대한 목회이다. 초량교회는 상여 한 대를 신설하기 위하여 연보한 일이 있고, 상여위원을 임명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인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그 앞에서 살아가는 진지성과 경외, 심각함을 품지 않으면 안된다. 주기철이 남달리 이런 목회에 심혈을 기울였던 신학이 바로 순교에까지 가게 한 깊은 경건의 신학이었다. 그가 부활주일 아침 찬송을, 찬양대로 하여금 새벽에 높은 언덕에서나 십자로에서 부르게 한 것도 다 그런 신학의 표현이었다.
(2) 마산 문창교회(1931-1936)목회
주기철의 목회의 기본적인 스타일은 초량교회 시대와 동일했다. 주일학교를 강화했고 교회의 목회 행정, 재정 관리를 철저히 시행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의 엄격한 생활지도는 여기서도 변하지 않았다. 신비주의자인 이용도계의 소등 예배의 영향을 받아 여자 교인과 함께 방에 예배당에 와서 불을 끄고 기도하거나, 여자 교인과 밤늦게까지 같은 방에 있었던 현용택이란 남자에게 건덕에 방해가 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몇번 주의와 경고를 했다. 그러나 듣지 않자 소년 면려회 지도자와 주일학교 교사와 찬송가 지휘자직을 사임시키기도 했다. 이성 교제에 신중하지 못한 교인을 무기 견책한 일도 있었고 불신 결혼한 교인을 권찰직에서 해직해서 3개월 동안 근신시킨 일도 있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불신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유아 세례 명부에서 제명되었다. 간음의 죄를 범한 어떤 교인은 무기 견책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와같이 주목사가 죄에 대한 단호했던 점은 이후의 신사참배에의 철저한 반대를 생각할 때 극히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교회의 덕을 유지하는 면에서 방해가 되고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일에 민감했다. 이 점에서 주기철은 적절한 시대 감각과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기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 엄격한 법 감각, 탁월한 시대 감각과 역사 의식이야말로 신사참배 반대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회를 참으로 세워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초량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주기철은 문창교회에서도 상여 하나를 마련해 놓았다. 그것은 교회 전용으로, 상여 보관고도 마련하였다. 교인들의 초상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교회에서의 교회의 연보, 구제부에서의 부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그가 비록 엄격한 목회행정의 체계적 수행자였지만 항상 '죽음'이라는 사건을 그 목회 중심에서 내버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기철은 문창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인 1933년 5월에 안갑수 부인이 소천했는데 이때부터 죽음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하게 되었다. 그는 1934년 8월「종교시보」(장로교, 종교교육부 발행)에 '죽음의 준비'라는 설교를 기고했다. 12월 평양신학교의 사경회에서는 저 유명한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3)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목회
주기철은 경남 출신이었으나, 한국교회의 실질상의 중심지, 평양의 실질상의 중심 교회인 산정현교회로 초빙되어 갔다.
조선교회에는 큰 환난이 닥쳐 왔으니 조선교회를 지키려면 평양을 지켜야 한다. 산정현교회 목사를 구하는 것보다 평양 지킬 목사, 조선교회를 지킬 사람이어야 한다.
주기철 그가 그러한 사람이라 본 것이다. 박형룡 역시 "길선주 목사 가신 뒤, 그 유업을 이어 보수할 이는 주목사 밖에 누가 있겠는냐"고 해서 주기철의 목사 청빙을 강력히 추진하고 권고하였다는 것이다. 주기철은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예배당을 건축했다. 독특한 것은 그가 1937년부터 십일조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의 한국교회의 전통에서는 십일조가 강조된 것은 거의 없었다. 십일조를 바치는 이유로서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명과 헌금을 하는 책임, 이 두가지를 강조했다. 이때에 신사참배의 강요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37년 가을부터 기독교계 잡지에는 이른바 "황국신민의 선서"가 실리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는 일본 황실에의 저항을 하나님께 대한 범죄로까지 왜곡하던 교회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해 12월 그는 "성신 받으라"는 설교를 통해 성신을 통해서만이 "예수의 교훈대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십년, 이십년 예수 믿노라 하여도 성신 받지 못하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지옥 갈 것이니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는 예레미아와 같이 곡읍 (哭泣)하며 외치는 예언자 였다. 베옷과 상복을 입고 외치던 예레미아와 같은 예언자였다. 왜냐하면 그의 심정 깊이에는 하나님, 그 분에 대한 너무나 큰 사랑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동기인 두려움의 선포는 실상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받은 사랑과 은총에 대한 우리들 인간의 불실 (不實)에 대한 두려움이요, 긴장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거기에 죄인이 하나님께 사유받고 구원 얻은 즐거움, 한량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여기에 주기철의 신앙적 특성이 다시 뚜렷이 나타난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죄 지을 수 없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구원을 받고 용서를 받은 이들이 마땅히 바쳐야 할 충성에 대한 동기로서의 의미가 컸다. 감사와 찬양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그에게도 신앙의 감격과 즐거움은 기독교 본래의 복음으로서 그의 신앙 중심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이 감격이 아니었던들, 그의 생애가 처절한 순교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는지 모른다. 감격의 체험에 욕 돌릴 수 없다는 긴박한 결단력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정죄를 선포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주기철은 "순교의 기쁨, 이 얼마나 거룩한 기쁨이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이다."고 말했다. 그는 1937년 말에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순교의 죽음이 고통스럽지 아니함이 아니었으되, 그는 그것을 '기쁨'이라 말했다. 금욕도 책임도 아닌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순교의 동기의 성격을 말해 준다. 기쁨과 감사가 아니면십자가의 아픔, 순교는 동기가 순수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것 하나로도 그는 우리 교회 신학사에서 빛나는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d. 네 번의 투옥과 옥중생활
1938년 산정현교회는 마침 2월 8일을 헌당 예배일로 작정하고 감격의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미 있었던 기념 식수 도끼 사건 (평양신학교)을 중대시하여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의논이나 작용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조치를 취할 계략으로, 헌당예배를 며칠 앞두고 주기철을 연행하였다. 첫 검속이 있고 나서 27일째 되던 날 주기철은 일단 석방되었다.
1938년 8월, 주기철은 예비 검속의 형태로 두번째로 검속되었다. 예수교 장로회 총회 개최 이전의 일이요, 총회 소집을 앞둔 모종의 정치 음모의 일환으로 자행되었다. 특히 두 번째의 투옥때는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태형을 맞으며 신문을 받았고 최후는 기절하기까지 그는 심문중에 모두 열번이나 고문을 받았지만 양보하지 않았다. 1938년 9월 10일 조선 예수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주기철은 약 7개월 간의 구속을 마치고 1939년 2월에 대구 경찰서에서 석방되었다.46) 석방되어 돌아온 날은 주일이었고 주기철 목사는 저 유명한 '5종목의 나의 기원'을 설교했다. 이것은 7개월간의 옥중에서 준비한 설교이었다. 내용은 ①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②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③노모와 처자와 교우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④의에 살고 의에 죽게하여 주시옵소서, ⑤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47)였다. 그해 3월 23일에는 종교단체법이 가결되었다.
주기철이 세 번째 투옥되었을 때는 1939년 9월의 장로교 제 28회 총회를 눈 앞에 둔 때였다. 주기철이 평양 경찰서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안이숙48)이 주기철을 보았다고 한다. 안이숙이 주기철을 보았을 때 주기철의 인상은 다음과 같다.
주목사의 길어진 수염과 머리털 사이에, 희고 부드럽게 보이는 얼굴은 바로 성자상과 같았다. 그 경찰의 악착스런 고문을 당하고 시달린 그의 형상은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얼굴을 상상케 하였다.49)
주기철은 1940년 4월 20일 경에 잠시나마 석방되었다. 그는 4개월 남짓 풀려나와 있다가 1940년 8월 다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 후에 약 4년동안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옥중 생활을 보냈다.
e. 주기철의 순교
최후의 옥중 20일 동안 실제로 아무것도 못먹게 되었고 극히 쇠약한 상태였다. 간수가 죽을 지경에 있었던 주기철을 면회 오라고 집으로 연락했다. 주기철은 그의 아내와 형무소 소장이 입회한 상태에서 최후의 유언을 하고 있었다. 간수들이 유명한 분의 유언이니 일본말로 해서 우리도 들어 보자고 했다. 유언은 이러했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 앞으로 갈 것 같소.
아! 어머님이 보고 싶소. 어머님을 잘 부탁합니다.
어린 자식들을 잘 부탁합니다.
따스한 슝늉이 먹고 싶소.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 주시오.
나를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주오.
내 어머님도 세상 떠나시거든 내 곁에 묻어주오…
4월 20일 어머니의 꿈속에 주목사가 나타나서 주기철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 오정모는 최후의 면회를 했다. 그 때 오정모는 명확하게 말했다. "여보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주기철은 말했다. "어머님을 보고 싶소. 나 대신에 불쌍한 어머님을 잘 돌봐 주세요."51) 다음날 4월 21일 밤 9시에 주기철은 옥중에서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는 죽을 때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죽었다고 한다. 너무 큰 소리였으므로 방 전체가 흔들렸고 가까운 곳에서 듣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 놀랐다고 한다.
2. 주기철 목사의 신앙의 특색
a. 보수적 신앙
주기철은 평양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신학교는 한국에서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육 기관이었고 4대 (미국남, 미국북, 카나다,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각각 선교사를 파견하여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신학적으로는 장로교회의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주기철은 여기에서 신학을 배웠기에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1930년대에 한국 교계 전체에 신학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곧 진보적 신학과 무교회주의, 신비주의의 대두가 그것이다. 이 신학적 변화는 보수적인 교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주기철은 이와같은 자유주의, 신비주의와 철저히 싸웠다. 교회내의 이런 운동 대신 성경공부, 교리강의나 강좌 그리고 치리의 집행으로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다. 주기철은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고 보수적인 장로주의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상규 (李象奎) 교수에 따르면 주기철의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인물로서 신앙적 순결과 정결을 강조'했다. 그는 성경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은 '축자 영감'에 서 있기 때문에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에 이는 십계명의 제 1계명, 제 2계명에 반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것이다.
주기철은 "민족 운동, 마지막 항거의 자세"도 아니었고 "강한 민족의식의 전통을 지닌 기독교"의 상징적 투쟁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한국교회 보수주의 흐름의 맥을 주도한 인물로서, 다만 구약적인 선민 사상과 철저한 십계명 준법의 신앙, 복음적 구속신앙의 깊이에 충실하려 한 경건한 신앙인에 지나지 않았다.
주기철은 참된 신앙이란,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모시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는"는 신앙밖에는 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경험과 감사, 그것이 주기철의 신앙 골수였다. 죄악의 결과가 한 개인에게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이 그의 신앙의 틀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속죄가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민족의 해방에 앞서 그것이 경험되어야 했다. 속죄의 방법에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는 인간의 방법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하나님의 방법이외다. 그 무삼 방법이뇨. 죄인을 구속하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그 한가지 방법이외다. 그는 죄인을 구속하려 오셨고, 죄인의 죄를 위하여 친해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 뿐입니다.……다만 예수께로 와서 그 능력을 의지하는 자만이 이 무거운 짐을 벗고 죄악에서 완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56)
이것이 바로 복음주의 신학의 진수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기철을 순교까지 이끌고 간 성실한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한 구원의 감격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의 맥(脈)에 연결되는 감격이요, 따라서 그러한 길을 꼭 같이 가야 한다는 결의를 낳게 한다.57)고 한 것처럼 그의 신앙의 민족이나 정치운동의 일환과는 관계가 먼 복음에 바탕을 둔 보수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b. 일사각오의 신앙
주기철은 대표적인 설교 일사각오에는 그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설교는 세가지 '일사각오'를 말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은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예수를 환영하던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두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
그는 시대의 위기와 변화 앞에서 일사를 각오한 비장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화평의 때에도 그렇겠지만 수난의 때에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둘째로 남을 위하여 하는 일사각오이다. 주기철의 경건이 기독교적 정통의 골수인 요한복음에 기초한 것은 그가 '나'로서가 아니라 '우리', 곧 '교회'로서의 사랑으로 집단화한 데에서도, 훌륭하게 시위되었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탄강(誕降)하신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 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다. 남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결코 직접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반드시 그리스도가 매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대상인 까닭으로만이 우리의 사랑과 헌신, 일사각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는 부활진리를 위한 일사각오이다. 죽음은 반드시 부활에 이른다. 이 일사각오의 행렬에서 도마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목도하고, 부활의 진리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주기철이 관념적 신비주의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부활의 신학이다. 부활을 확신하고 소망하고 있었기에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일사각오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신앙은 이러한 세가지 형태의 일사각오의 신앙의 특색이 있다고 본다.
c. 정의로운 신앙
주기철이 목회하던 교회에서도 잘 보여주듯이 그가 행한 공정한 치리와 단호한 권징은 그의 정의로운 신앙의 모습을 잘 말해준다. 그의 목회역정에서 볼 수 있듯이 합리적이고 투명한 행정을 통하여 정의를 추구하였다. 그가 신사참배를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도 바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정의로운 마음이 분연히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죽음도 달게 받았던 것이다. 그가 사모 오정모의 굳건한 신앙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정의로운 성격과 불의에 대하여는 타협 없는 자세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수난과 순교는 근본적으로 그의 신앙적 결단이라고 본다. 그에게는 정의에 반한 행동을 하자고 마음먹고자 해도, 흐릴 수 없는 신앙적 양심이 곧 정의에 불타는 신앙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의의 하나님을 알라. 구약의 신앙이 있은 연후에 신약의 신앙이 있고,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연후에 복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있은 연후에 구원의 중생이 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앙이 일제 말기의 양심을 대표한 신앙이었다. 그의 신앙에는 두려움이 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설 수 있는 길이 꼭 하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신'이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죄 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감사와 찬양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마음이고 근본적으로는 그가 느낀 두려움은 신앙의 감격과 즐거움에 기초한 두려움이었다. 이것이 그의 신앙 중심에 자리 잡아 정의를 위해 헌신하게 했다.
B. 박관준 장로의 삶과 신앙
1. 박관준 장로의 일대기
a. 출생과 젊은 시절
박관준은 1875년 4월 13일 평안북도 연변에서 부호인 박치환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들이 모두 한두 살 때 사망해서 박관준은 자연히 외동아들이 되고 말았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스물한 살 때 어머니를 여윈 박관준은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박관준은 어릴 때 애지중지 소중하게 자라났지만 퍽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자유 분방한 생활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색향인 강계고을에서 방탕 생활을 2년여간 하던 중 마침내 건강을 잃고 수개월 동안 병상에 드러눕게 되었다. 박관준은 아내인 이관선은 열녀였다. 수 개월간 죽을 병을 앓던 남편에게 단지 (칼로 손을 베어 피를 받는 것)를 하여 먹임으로써 그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b. 회심
박관준은 일찍이 성현들의 많은 경전을 외우고 유교와 불교와 선도의 경전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 같은 교양과는 별도로 난봉생활은 계속되었다. 박관준은 1907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의 전도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서학이라며 거부했다. 그당시 그의 인생관은 내세의 일보다는 우선 살아 생전에 인생을 어떻게 하면 쾌락하며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진 철저한 현실쾌락주의자였다. 그의 나이 삼십에 접어들었을 때 세속과 종교, 육과 영, 욕정과 성화의 갈등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공중에서 높은 음성을 듣게 된다. "絶壁 唯危면 血壁立하라!" 그는 곧 그 뜻을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 뜻은 "이제부터 절벽과 같은 위험한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십자가의 피 묻은 벽에 서야만 살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후 인생관이 백팔십도로 전환되었다. 지금까지 유교와 불교에 집착했던 종교관에 크나 큰 변화가 온 것이다. 이와같이 박관준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선교사들에게 전도를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남달리 열렬했다.
c. 새출발
박관준은 1912년 격동하는 새 시대에 적응하는 새로운 직업을 가지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서 3년동안 서양의학을 삼년간 공부하여 조선 총독부로부터 개업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된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영변군 구장시에 처음으로 서양 의학 전문의로서 의원을 개업했다. 그는 각 부락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며 열심히 전도한 결과 많은 신자들을 얻었고, 이 지방에 최초로 교회당을 창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신앙태도를 표방하면서 자신도 그와 같은 신앙 사상을 가질 것이라고 늘 말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만나는 사람에게 열렬히 전도하는 사람이 된다. 박관준은 그의 나이 마흔살 때 애타게 기다리던 외아들 "영창"을 낳게 된다.
d. 박관준의 특이한 신앙체험
박관준은 아브라함에게서 자신과 같은 세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말을 가끔 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를 자주 받은 점이고, 둘째는 간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 드린 점, 셋째는 고향 갈대와 우르를 떠나 지향 없는 여행생활을 많이 한 점이라고 했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새 인물들과 교제하여 사상적 동지와 신앙 동지를 많이 얻고자 하였고, 언제나 가난한 환자에게는 무료로 치료 해 주었다.
박관준은 평북 구성 조악동 금광 지대에서 개업하던 어느 겨울에 아내가 얼음판에 넘어져서 늑골이 두 대씩이나 부러졌다가 영적 환상의 계시를 보고 그날 밤으로 전쾌한 신유의 사실과 평남 개천읍 교회의 담임목사 황구학 목사가 갑자기 병석에 들게 되었는데, 그는 자기가 삼일 후 금요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죽을 것임을 예언한 후 정말 그의 예언한 대로 정확하게 운명하는 것을 보고는 깊은 감격에 잠겼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현대에도 살아 계셔서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체험한 후 박관준은 그의 나머지 생애를 정의에 살고 진리에 죽어야 한다는 신념을 더욱 굳게 하였다.
박관준의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뿐이었을 뿐, 누구나 이러한 체험을 할 수 있다든지 또는 누구나 이러한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을 피하거나 부인하는 소위 신비주의자나 신비 추구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일생을 통한 신조였다. 그러기에 입산 기도를 하고 몇가지 신비한 체험을 얻었다고 떠들며 돌아다니는 당시의 사이비 인사들과 비성경적이며 지나친 신비주의만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을 경계했고, 기적은 인위적으로 추구하거나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구할 것이 아니라고 늘 강조했다. 그가 몸소 체험한 일체의 영적 사건도 그 스스로 힘을 쓰거나 간구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피동적으로, 초과학적인 놀라운 은총을 위로부터 값없이 자연스럽게 받은 것이었다. 기독교의 계시는 성서 한 권 속에 완전히 영감되어 있으므로 또 다른 계시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앙의 간증은 했으나 결코 신앙의 교만은 부리지 않았다.
박관준은 어느 날 밤 홀연히 공중에서 광채나는 불덩어리와 불꽃을 받게 된다. 이 성령의 불이 너무 강렬해서 화상을 입어 병원의 치료를 받게 된다. 그는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항거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더욱 더 신사참배에 대항하여 정의와 진리를 사수할 것을 굳히게 된다.
e. 하나님이 내린 특별한 사명
그는 1935년 어느 날 밤 환상을 보았다. 교회 강대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흰 옷을 입은 이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내가 피를 흘리겠습니다." 그가 크게 대답하고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거룩한 이가 어떤 두루마리 종이를 들고 들여다보며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흰 옷을 입은 거룩한 이 앞으로 나가서 조심스레 그 종이를 넘겨다 보았다. 흰 두루마리 위에는 사오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제일 첫 줄에 '박관준'이라고 분명히 씌어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본 환상때문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성경을 펼쳐 들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6:8). 이 말씀을 읽고 그는 큰 감명을 얻었다. 그는 "만약 우리 조선 기독교회에 위기가 닥쳐 온다면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먼저 제일선에 나서서 투쟁하겠사오니 명령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어떤 희생이 뒤따를지라도 감연히 달게 받으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35년 들어 신사참배는 평양에서 벌써부터 일반 관리들과 시민들에게 널리 실시되고 있는 황민화 운동의 기본 시책으로 대두되고 있었는데, 박관준은 이때부터 일본의 고관과 총독을 찾아 다니면서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말하고 강경하게 항의했다.
박관준은 언제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느헤미아 선지자가 동포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금식 기도 한 것처럼 그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박관준은 지금 조선 기독교회와 동족이 겪는 시련과 역경을 눈앞에 놓고 어떤 투쟁을 전개하기에 앞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오직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신앙은 낙망과 불안한 현실 소에서도 오히려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
1938년 9월 9일 장로회 제 27회 총회가 평양시 서문밖 교회에서 소집되었는데 이때 신사참배 가결이 선포되었다. 일제는 이 행사 전에 신사참배를 가장 열렬하게 반대하고 있던 신앙의 용장인 박관준 장로,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등에게 미리 예비 검속을 단행하여 이날 참석하지 못하도록 사전 조치를 해 놓았기 때문에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이 사실에 매우 통분함을 느껴 이때부터 조선 총독과 일본 중앙정부를 상대로 결사적으로 투쟁을 감행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선 그는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까기 총독과 미나미 총독을 면회하여 강제된 신사참배를 격렬히 경고하였다. 또한 여러차례 서신을 통해 충고했을 정도로 대담하여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가 미나미 총독에게 전달한 경고문의 일부를 공개한다.
하늘에 순종하여야 복을 받을 것이며, 하늘의 섭리에 반역하면 화를 받을 것이다.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 (久遠)한 장래를 내다보신다. 인간은 겨우 눈앞의 사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 거듭 말하는 바는 조선 기독교에 야기된 신사 참배 문제는 자유에 방임시키고 결코 정부 당국으로서는 강요치 말기를 거듭 경고하는 바이다.
그리고 추고로 이런 문구도 있다.
하나님의 지시가 나에게 있기를
1. 표시하라(정부 당국에).
2. 북을 쳐라(정부 상대 투쟁의 선전 포고로).
3. 명치(明治), 대정(大正) 2세보다 소화(昭和) 3세는 불경이다(여호와 하나님 에게)이 같은 명령을 본인이 직접 받았으니 심사숙고하시라.
이는 전시하의 시국에서, 더구나 강점국인 일본 총독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는 실로 놀라운 경고문이었다. 이와같이 박관준의 신앙은 거칠 것이 없는 강직하고 사실적이었다.
f. 박관준 일행의 일본에서의 사명수행
박관준은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일본 중앙 정부를 상대해야 해결이 빠를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선천 보성 여학교 음악교사로 있던 안이숙 선생76)을 대동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선승허락을 받는 도항증명서도 없이 배를 탔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기하게도 전혀 검사를 받지 않고 무사히 동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박관준은 아들의 숙소에 기거하면서 안이숙과 아들 박영창과 더불어 세계적인 종교가인 가가와 도요히꼬 (賀川豊彦), 일본 구세군 사령관인 야마무로 중장 (山室軍平), 전 조선총독 우까기 대장, 히비끼 중장, 마쯔야마 대의사와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교회와 지도적 크리스챤들을 만나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반대 운동에 호응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그 성과가 미미함을 느꼈다. 이같은 여론 환기의 합법적 투쟁에 일종의 환멸을 느낀 그는 좀 더 대담하고도 큰 파문을 던질 만한 비합법 투쟁을 결심했다. 박관준의 방법은 이러했다. "마침 지금은 제 74회 일본 제국국회가 개회중이고, 더구나 바로 내명일에 종교법안이 상정되는 날이라고 하니 우리 세 사람은 중의원 방청석에 입장해서 일본 국가 흥망에 관한 최후 통고의 폭탄 선언서를 던지기로 합시다."78) 그리하여 1939년 3월 24일 제 74차 일본 제국 의회의 개회를 기해 "에호바 가미사마노 다이시메이다(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고 외치며 2층 방청석에서 국회 중앙 의석에 폭탄적인 경고 선언문인 두루마리를 투하하였다.
박관준과 아들 영창, 안이숙은 일경에게 체포되어 40일간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박관준의 신앙과 인격은 감옥에서도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어느 날 하루 종일 사상 조서를 쓰고 들어온 박관준에게 수감인인 사또오가 물었다. "선생 일행 3인은 불경죄로 사형을 받게 된다는 말을 밖에서 들었는데 지금 심경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박관준은 오히려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대답하였다. "우리는 언제 죽어도 후회 없이 죽을 결의가 일찍부터 되어 있소. 이번 일로 사형을 받게 된다면 영광이겠소. 아무 염려 없소."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어느 날 식사시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같은 감방의 일본인인 어느 젊은 죄수가 박관준이 한참 감사 기도를 하는 동안에 밥과 국을 모두 훔쳐 먹었다. 눈을 뜬 그는 앞에 놓아 둔 목함 속에 밥이 없어진 것을 보고도 웃으면서 "요로시이, 요로시이(좋다. 좋다)"만 연발하였다. 노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죄수는 크게 감동했다. 그 다음부터는 식사 시간에 박관준이 밥을 안 들고 옆에 있는 수감인에게 내어 주는 것을 보고 사또오가 또 크게 감동을 했다. 그래서 그는 감방에 새로 들어오는 죄수들이 박관준에게 실수를 하면 모질게 기합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g. 박관준의 옥중생활과 순교
40일이 지난 후 그들은 일본에서 한국의 자기고향으로 압송되어 풀려났다. 그는 고향에서도 도지사를 만나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옥에 갇혀 있는 기독교 목사와 신도들의 석방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 검속되어 평양형무소의 차디찬 독방에 수감되어 6년동안 옥고를 치루게 된다.
박관준이 형무소에 있을 때 우연히 안이숙의 언니 안정숙 여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피폐한 몰골로 안정숙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안 집사, 울지 마시오, 나를 보고 울지 말고 조선 교회의 현실과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해서 울어 주시오." 그리고는 "명년 1945년 8월에는 일본이 망하든지 조선이 독립되든지 간에 끝장이 날 터이니 나는 그때에 나가겠소."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1945년 봄 평양형무소로부터 박관준이 위독하다는 통보를 받고 그의 아내와 안이숙의 언니와 어머니는 달려가서 박관준을 기독 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 침상에서 박관준은 다시 한번 "1945년 8월에는 일본이 망하여 우리가 다 출옥을 하게 되고 조선이 독립된다"는 말을 했다. 그는 감옥속에서 있었던 신비한 체험을 간증했다. 1945년 정월 그가 감방 안에서 홀로 기도를 하고 취침 중에 환상을 보았다. 앞에 큰 바위가 나타났는데, 돌연히 양쪽으로 깨지더니 샘(생명수)이 콸콸 솟아나와서 마음껏 마셨다.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더니 "이것은 생명 과실이다"라고 하면서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한아름 꺽어 가지고 와서 마음껏 따먹으라고 하여 마음껏 먹었다. 이런 영계의 음식물을 먹은 후부터는 이상하게도 시장한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감방에 넣어주는 관식을 전폐하고 더욱 금식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일본이 망하는 해라고 믿고 너무 기뻐서 40여 일 간에 걸쳐 금식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극도로 쇠약해져서 의식을 잃고 깊은 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는 삼일동안 병상에서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옥중에서 체험한 이야기와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매일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넷째 날과 다섯째 날은 고요히 쉬라는 계시가 있다고 하며, 이틀 동안은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고요히 휴식만 취하고 누워 있었다. 그는 출옥한 지 5일째 되는 날 아침에 똑똑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계시와 같이 나의 책임을 다하고 영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16절의 말씀대로 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고 한 후 낮은 목소리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을 고요히 부르다가 향년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 정각이었다. 그의 임종은 너무나 평화로왔다. 그것은 죽음이라기 보다는 영광 어린 영의 승천이며 빛나는 혼의 승화였다.
박관준의 장례식은 그 이튿날에 거행되었다. 별세한 지 하루 만에 장례를 서둘러서 하게 된 이유는 일제 경찰이 권고하는 화장을 모면하고 토장을 하기 위함이었다. 일행은 서로 갈라져서 장지에 모이기로 했다. 그리고 예전에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교직자와 교우들에 대한 경찰의 주목과 탄압이 심했던 관계로 이 장례식은 친구와 교우들에게 널리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거행하기로 했다. 이 장례식은 주기철 목사의 미망인인 오정모 집사가 직접 집례를 했다. 그녀는 비장한 조사를 했다. "지금 이 곳에는 신앙의 승리를 하신 순교자 박관준 장로님의 육신의 장막이 고이 안식되어 있습니다. 박 장로님으로 말하면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엘리야라는 칭호를 듣던 조선 교회의 선지자이자 신앙의 용장이시며, 특히 역대 총독과 일본 제국의 흥망을 경고하신 경고자로서 다니엘과 세례 요한에 비길 만한 위대한 신앙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먼저 가신 순교 성도들의 뒤를 따라 우리들도 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박관준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안이숙을 처음 찾아 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이같이 원수 놈들의 핍박이 심할 때 하나님이 평안할 때와 같이 가만히 계시면 어데게 믿는 자들이 이 무서운 핍박을 견디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 주님!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강한 방패요 높은 산성이시니이다." 이 놀라운 그의 믿음의 말은 들은 안이숙은 박관준의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태도 때문에 그의 태도를 고쳤다고 한다. 박관준의 강직하고도 굳건한 믿음의 성품은 그가 안이숙에게 말한 고백에 있다. "나는 내 평생의 소원이 약을 먹고 주사를 맞다 병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 이름으로 칼에 맞아 죽든지, 스데반 같이 돌에 맞아 죽든가 기름 가마에 던지움을 당하든지 해서 단번에 죽도록 해달라고 기도해 왔어요. 그런데 아마도 내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인지 주님이 나를 단번에 죽게 하려고 하는가 보지요. 죽으면 개도 뜯어 먹지 않을 이까짓 썩어질 몸을 바쳐 주님 위해서 단번에 죽는다면 아! 그 영광스러운 순교의 기쁨을 어찌 다 감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박관준은 순교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꾸준히 드리고 있었고, 순교의 순간을 기쁘게 맞아들일 수 있는 깊은 믿음과 담대한 마음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2. 박관준 장로의 신앙의 특색
a. 하나님의 계시를 자주 받은 체험적 신앙
박관준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누가 전도를 하거나, 스스로의 종교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의 신앙의 처음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에게 찾아 가 주셔서 그를 만나 주심으로 인해서 그를 회심하게 하셨다. 하루는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공중에서 높은 음성을 듣게 된다. "絶壁 唯危면 血壁立하라!" 그는 곧 그 뜻을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 뜻은 "이제부터 절벽과 같은 위험한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십자가의 피 묻은 벽에 서야만 살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후 인생관이 백팔십도로 전환되었다.
박관준의 신앙은 이 체험을 한 후 심지 굳은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후 아내가 늑골 두 대가 부러지고도 하루 밤 사이에 쾌유한 것, 개천읍 교회의 황구학 목사가 정확히 자기의 죽을 날짜와 죽을 시간을 예언하고 죽은 사실, 몸에 성령의 불로 심한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한 것, 조선이 해방될 해와 달과 자기의 죽음을 예언한 것 등 그는 영적 환상이나 놀라운 계시를 많이 받았다. 본인 스스로의 입으로도 "하나님의 계시를 자주 받았음"을 가족들에게 가끔 시인하였다.
그의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께 자주 받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살아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고,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는 다는 믿음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간증은 했으나 결코 신앙의 교만은 부리지 않았다. 그가 안이숙과 함께 일본으로 신사참배를 경고하러 갈 때 도항증이 없이도 무인지경처럼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무모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항상 동행해 주신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담대하게 조선 총독이나 도지사에게 직접 찾아가 신사참배의 부당함을 역설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일본 의사당 한 복판에 폭탄과 같이 '일본흥망에 대한 최후 선언문'이 든 두루마리를 투하할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을 자주 체험해서 견고해진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결단과 헌신에서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그에게 늘 계시해 주시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생하고도 굳건한 신앙의 결과였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기피하거나 부인하는 소위 신비주의자나 신비 추구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일생을 통한 신조였다. 그러기에 입산 기도를 하고 몇 가지 신비한 체험을 얻었다고 떠들며 돌아 다니는 당시의 사이비 인사들과 비성경적이며 지나친 신비주의만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기적은 인위적으로 추구하거나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구할 것이 아니라고 늘 강조했다. 그가 몸소 체험한 일체의 영적 사건도 그 스스로 힘을 쓰거나 간구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피동적으로, 초자연적으로, 초과학적인 놀라운 은총을 위로부터 값없이 자연스럽게 받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계시는 성서 한 권 속에 완전히 영감되어 있으므로 또 다른 계시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와같이 박관준의 체험의 신앙은 전적인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었기에 그는 교만하거나 자만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간구하거나 스스로 힘으로 얻은 체험이라면 그의 신앙이 겸손할 수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반석같은 신앙의 바탕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일방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사도 바울과 엘리야를 닮은 신앙
박관준은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의 광채나는 모습 앞에 거꾸러진 뒤부터는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이같은 공통점으로 인해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의 체험적 신앙을 흡모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읽고 새로운 감동과 감격을 체험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유불선 삼대 종교에 관한 많은 지식과 부유했던 가문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대신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신앙 태도를 표방하면서 자신도 그와 같은 신앙 사상을 가질 것이라고 늘 말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만나는 사람에게 열렬히 증거했다.
이와같이 박관준은 예수를 믿은 후 모든 생활이 변화였다. 사도 바울처럼 삶의 모든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께 두고 과거의 생활을 분토같이 버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 산 인생이었다. 의사생활을 하되 반드시 전도하면서 하였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사랑하여 돈을 받지 않았으며,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진정서를 작성하여 여러 차례 조선 총독과 도지사 등에게 보냈다.92)복음을 전파하다가 이스라엘 총독과 왕과 가이사 앞에 선 바울처럼 그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직설적인 책망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박관준은 엘리야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들과 일선 교역자들이 신사참배에 대해서 고민과 갈등은 했지만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조선 총독이나 일본 중앙정부를 상대로 강력하게 항의하거나 투쟁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우까끼 총독 시대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꼭 열 번에 걸쳐 격렬한 경고들을 그들을 직접 면회해서 전달하거나 문서로 충고했다. 그의 이같은 경고문은 전시하 조선 총독의 폭정을 규탄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극히 드물고 대담한 폭탄 선언들이었다.
또한 그에게 엘리야와 유사한 모습과 흡사한 것이 있다. 하나님이 예언자 엘리야를 우상을 섬기는 아합에게 보내어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맹세 합니다. 내가 다시 비가 오도록 기도하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땅에 비는 물론이고 이슬도 전혀 내리지 않는 무서운 재앙이 계속 될 것입니다."94)라고 경고 하였듯이, 하나님은 박관준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제국 의회에 보내어 "일본 제국은 패망의 저주와 번영의 복 중 어느 것을 자취하겠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95)는 폭탄적 경고 선언문을 의회 중앙 의석에 던지게 하셨다. 그 경고 선언문 중에 여섯 번째의 주장은 이러하다.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가 참된 종교라고 모두 주장하니,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과 가신(家臣) 바알 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도전을 한 것과 같이, 일본 정부 주최로 넓은 광장에 장작 백단씩을 쌓아 놓고 신도, 불교, 기독교의 대표를 그 위에 앉힌 후 일시에 불을 질러 그 속에서도 살아 남는 대표가 믿는 종교로써 국교를 창정하자.
이것은 곧 정의의 도전이요, 진리의 선전 포고문이었다. 이 같은 도전, 참 신과 거짓 신을 구별해 보자는 신앙전은 구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갈멜 산 위에서 바알 신의 제사장들과 치른 이후에 처음 제기된 현대판 엘리야의 신앙 도전이었다. 박관준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우리 민족과 기독교에 내려진 일제의 폭정이 분쇄된다면 자신의 목숨 같은 것은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지난날 성령의 불로 신기한 화상 사건을 체험하여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 같은 놀라운 제의를 과감히 할 수 있었다. 이같은 담대한 종교적 도전을 제의했던 그의 심경과 결의는 인간의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97)
이같이 박관준은 보통 신앙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엘리야와 흡사한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현대의 엘리야98)라고 불리워질 만큼 그의 신앙은 엘리야와 같이 특심했고, 그의 사명은 신도를 섬기기를 강요하고 있는 일본 정부를 향해 의분을 참지 못한 엘리야의 심정으로 도전하고 폭탄적인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자(경고자)이었고, 엘리야와 같은 방법으로 어느 신이 참 하나님인가를 결판내려 하였고, 엘리야와 같은 특심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때 미나니 조선 총독과 면회한 자리에서 "이 시대는 구약의 아합 왕과 엘리야가 살던 시대와 같은 시대입니다. 금년에 흉년이 들 것입니다."라고 첫마디부터 예언적인 경고를 던졌다. 그리고 일본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군사 반란인 2·26 사건과 과거 남경 함락을 예언해서 모두 적중시킨 바를 상기시켰을 정도로 그는 마치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였다. 구약의 불의 선지자라 불리는 엘리야의 심정과 신약의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워지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은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C. 최봉석 목사의 삶과 신앙
1. 최봉석 목사의 일대기
a. 출생과 젊은 시절
최봉석 목사는 1869년 9월 7일 평남 강동에서 최상린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상린씨는 강동 창장(지금의 세무서장)으로 오랫동안 봉직해 왔으며 생활은 풍족한 편이었다. 최봉석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떼고 23세 때부터 평양 관찰사 민영휘씨의 비서로 8년 동안 일하였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가엾은 사람들의 송사(頌辭)를 도와주고,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관찰사에게 바로 고하여 신임을 얻고 백성들로부터는 호감을 사게 되었다.
옳고 착한 일에는 앞장을 서고 진심으로 하는 최봉석 비서를 데리고 있는 관찰사도 마음 든든하고 모든 일을 믿고 맡길 수가 있었다. 최봉석은 벌써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관찰사의 총애을 받고 있던 최봉석은 관찰사에게 평양시장을 관리하여 소득을 얻을 수 있는 특권까지 가지게 된 고로 생활은 부유하였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사리분별에 명석하고 모든 행동이 면밀하고 지혜가 특출하여 젊은 선비로 관직에서 앞으로 촉망받는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최봉석이 30세 되었을 때 하루는 집에 다니러 갔는데 강동현감과 아버지가 세무관계인 사무 착오로 시비하고 있었다. 최봉석은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을 보고 참고 참다가 견디지 못하고 그만 젊은 혈기로 강동현감을 호되게 때려 주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관직에서 떠나 아내와 함께 삭주(朔州)로 정배를 가게 된다.
b. 회심
삭주에서의 정배 생활이라고는 하나 부자유하거나 누구의 감시를 받는 일이 없이 생활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삭주에는 이미 4년 전에 교회가 들어서 있었다. 한의사인 백유계라는 고을의 유지가 세운 교회였다. 하루는 백유계씨가 최봉석에게 찾아왔다. 그는 인사를 나눈 다음 정배살이를 하고 있는 최봉석에게 인생의 허망함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말했다. 최봉석은 그러지 않아도 따분하게 살아가던 참이라, 그의 말에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백유계에게 기독교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백선생, 나도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며 기독교에 귀의 하였다. 다음 주일에 최봉석은 아내와 함께 교회로 나갔다.103)
최봉석은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전력을 다하는 성격이라 그후부터 교회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믿음이 날로 깊어갔다. 그는 이듬해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4년 후에 영수가 되어 전서인으로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면서 성경과 찬송가, 그 밖의 종교서적을 파는 한편 전도에 힘썼으니, 이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노방 전도인으로 쓰신 것이다.104)
1907년 그가 예수를 믿은지 5년 만에 전도사로 임명되어 벽동교회에 봉직하였다. 이때 그는 38세의 중년으로 봉급은 30원이었다. 아들 광윤, 광선과 네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액수였다. 최전도사는 가가호호를 찾아 다니면서 전도에 주력하여 교회는 날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25평의 기억자 기와집을 교회로 신축하여 가운데 휘장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보이지 않게 막고 예배를 드렸다. 교인 수가 100명 가량 되었으니 당시의 교회로서는 상당히 큰 편에 속하였다.
c. 신학교 시절의 모습
1908년 최봉석은 목사가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그러니까 방학동안은 교회에서 학생 겸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공부를 한 것이다. 갓쓰고 핫바지 저고리에 무명 두루마기를 잘 차려 입고 벽동에서 평양까지 500리 길을 걸어서 신학교 입학을 하러 간 최전도사는 의기가 양양했다. 최전도사는 신학교에 입학한 며칠 후부터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평양 시내를 누비면서 전도에 열을 올렸다. 학업 성적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20점이 되든 0점이 되든 아랑곳 하지 않았다.
"최봉석 전도사는 공부 너무 안해서 걱정이군." 어느날 마펫 교장은 학교의 골치거리가 되어있는 최봉석을 불러서 주의를 시켰다. 최전도사는 세련된 교장에게서 인간 냄새가 많이 풍기는 것 같았다. 최전도사는 교장 앞이라 말은 못하고, 마귀들이 우굴거리는데 예수탄을 쏴야지 딴 총알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교수들이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타일러도 듣지않고 밤이 늦도록 길가에 오고가는 사람들을 잡고 "예수 믿고 천당"하며 큰 소리로 전도하였다. 최전도사는 2년 낙제해서 신학교를 5년간 다녔다. 최전도사는 신앙인으로는 만점인데 그만 전도에 시간을 보내고 피곤해서 공부 못하고 밤에는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해가 뜨도록 기도하고 공부시간에는 졸고 이렇게 되고보니 그도 육의 몸을 가진 사람이라 피곤하여 공부할 수가 없었다.
1913년에도 그는 또 낙제했지만 마펫 교장의 특별한 배려와 교수들에 대한 설득으로 졸업을 하고 그해에 평북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d. 평양에서의 전도 활동
최목사가 60세 전후에 전도자로서 목사로서 유명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평양시내에 나타나서 외치는 모습은 참으로 용감하고도 담력이 있었으며 하루도 변함없이 평양시내에 꾸준히 나타나서 전도하는 이것이 만주전도에서 귀국한 후의 일이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모습에 놀라며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교인들은 그 모습 그 음성을 듣고 볼 때마다 자기를 반성하여 자기 신앙을 한번 더 생각해 보고 신앙이 부족한 것을 뉘우치며 열심을 얻었으며, 불신자들에게는 많은 전도와 또 예수쟁이 전도한다는 소리를 하며 한번 더 쳐다보게 되었다. 최봉석 목사하면 평양 시내에서 누구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너무도 전도하는 모양이 유명하고 유달랐으며 열심도 누구가 따를 수 없었으며 음성도 남달리 컸던 것이다.
박관준 장로와 신사참배에 대해 경고하러 일본에 동행했던 안이숙이 우연히 전도하는 최봉석 목사를 만났던 이야기이다.
하루 저녁은 예배당에서 밤새 철야 기도를 하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 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그 것이 웬 소리가 해서 그 목소리를 찾아 가보니 평양 성내의 장작파는 장작터였는데 키가 조그마한 백발인 한 늙은이가 "예수 천당"하고 외치고 있었다. 때가 때인만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은 잡혀가고 그렇지 않은 성도들은 산으로 들로 도망다니고 숨도 크게 못쉬는 이런 험악한 시대에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분이길래 저렇게도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 늙은이를 쳐다보고 섰노라니 또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예수 천당" 이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위엄이 있었고 눈은 빛나는 자신이 번득이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한 손에 성경책을 쥐고 한 손에 지팡이를 잡았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저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했더니 그 말을 듣자 그는 성난 표정을 하고 나에게 큰 소리로 "예수를 믿으면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거요? 지금 모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데 입으로 밥만 먹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한단말이요. 응?" 나는 다시 놀랐다. 이 늙은 이가 어디서 이러한 담대하고 강한 힘이 생겨서 이렇게 겁도 없이 당당히 예수를 전할 수 있을까
최목사는 투옥되기 전날까지 날마다 쉬지 않고 평양 거리를 오르내리면서 "예수 믿고 천당"하고 외쳤다. 길선주 목사는 이것을 귀히 보고 "최목사의 외치는 소리가 끊어지면 평양이 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이유택목사에게 매월 최목사의 생활비를 대어주게 하였다. 이유택 목사는 최목사를 아버지같이 여겼다.
채필근 목사하면 한국 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유명한 분이었다. 키가 작고 얼굴도 작지만, 말 잘하고, 문필 좋고, 설교 잘하며, 재담 좋고 문학사요, 동경제대에서 명성을 떨친 천재로 한국 교계와 학계에서 그의 실력과 학식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게 유명한 대학 교수인 채필근 목사를 모르는 이가 어데 있으리요. 그런데 하루는 채목사가 책을 끼고 시내로 가고 있는데 최목사가 보았다. 채목사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입을 다물고 땅을 내려다 보면서 걷고 있었다. 별안간 뒤에서 큰 소리로 "예수 믿고 천당"하는 소리에 채목사는 깜짝 놀랐다. 옆을 보니 최목사였다. 최목사는 껄걸 웃으면서 "왜 그리 놀라?" 하였다. 채목사는 "목사님, 채필근목사 올시다"라고 대답을 하니까 "누가 채필근 목사를 몰라서 이름을 대나. 목사는 목사인데 벙어리 목사다"라고 책망을 했다. 채목사는 얼굴이 빨개져서 총총 걸음으로 걸어갔다. 목사이건 장로이건 간에 누구든지 입을 열지 않고 다물고 가면(전도하지 않으면) 벙어리라고 책망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도 평양 시내에 유명하게 전해졌던 것이다.
최목사는 새벽 4시만 되면 꼭 모란봉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하면서 몇번이고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평양시내가 고요하게 잠들었다가 최목사의 소리를 듣고 모두 깨는 것 같았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최목사가 이렇게 새벽마다 모란봉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믿는 사람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목사가 된 분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e. 굳건한 신앙적 소신
하나님을 무서워 하고 인간을 무서워 할 줄 모르는 최목사에게 어떤 일이 인위적일 때에는 두려울 것이 없이 반대하고 성사가 되기까지 투쟁하는 것이 그분의 성격이었다. 어떤 문제를 옳다고 인정되면 그 문제를 성경에 비추어 보고 또 신앙 양심에 비추어 본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인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마음으로 결정이 되면 열 사람 백 사람이 옳다고 인정해도 최목사는 반대하고 투쟁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오해도 받고 미움도 받았으나 후에는 과연 옳다고 칭찬을 듣고 인정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평양에서 목회하고 있는 교역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그 회의에서는 이런 문제가 나왔다. 평양 교회의 아버지요, 평양신학교 창립자요, 한국 교회의 은인인 마포삼열 목사의 동상 건립 문제였다. 마포삼열 목사의 교훈과 지도를 받아 자라온 평양의 목사들과 전국교회 목사들이 그를 항상 잊을 수 없어서 그리워하며 추모하며 그의 업적을 길이 길이 이 땅에 남겨둘 것을 생각하던 차에 모인 목사들 가운데 그의 동상을 평양신학교에 세우는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며, 일사천리로 제반 사항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최목사는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반대의견을 내 놓았다. "회장 의견 있소. 나 최목사는 동상 건립에 반대요. 왜냐하면 십계명 1, 2계명을 몰라서들 하는 말들이요"하며 얼굴을 정색하고 꾸짖듯이 회원들을 한 번 더 주시해 보고서 "나도 마포삼열 목사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존경하오. 그러나 우리 한국교인들은 옛부터 젖어온 습성으로 동상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하여 동상이 우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대요" 그러나 회장이 가부를 물으니 엄청난 수의 목사들이 기념으로 동상 건립에 찬성하는 것을 보고서는 일어나서 "여러분 목사님들은 동상을 세우시오. 나는 도끼를 들고와서 찍어 버리겠소" 그러나 동상건립안은 완전히 가결되고 말았다. 최목사가 먼저 나간 후 목사님들은 남아서 다시 의논하기를 최목사는 고집대로 할 터이니까 동상건립을 취소하고 기념관을 짓기로 결정키로 했다. 일본 경찰도 두려워 하지 않고 목사님들이 하는 일이라도 성경에 어긋나면 끝까지 반대하던 최봉석목사였다.
f. 교회설립과 쉼없는 전도 활동
최봉석은 교회를 많이 세웠다. 이 시기에는 교회 설립이나 개척교회를 그리 많이 세우지 못하였던 때였다. 목사가 된 1913년에서 3년 동안은 벽동교회에 있으면서, 위성, 자성 의주군 벽동, 삭주 지방에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개척교회를 세웠으며, 1915년 남만주 전도목사로 가서 1926년에 귀국할 때까지 11년간 만주를 중심으로 50여 곳에 개척교회를 세우고 당회장직 또는 남만 노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26년에 귀국하여 1939년 투옥될 때까지 13년간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순회하면서 노방전도를 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 땅에서 15년간 일을 하였으며 36개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하고 또 교역자를 파송하고는 딴 곳에 교회 세우고 하는 일이 그의 일생의 일이었다. 목사되어 옥중생활 5년을 빼놓고는 25년간 만주와 평안 남북도에 "예수 믿고 천당"하며 전도하고 교회 세운 곳이 80처라고 하니 놀라운 전도와 개척의 결과이다.
g. 신사참배 반대와 감옥생활
1930년대 후반부터 모든 국민에게 강압적인 신사참배를 일제는 강행했다. 최봉석은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죄악이라고 외치다가 평양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최목사는 개척교회의 강단에서나 공식 모임이나 사석에서 "신사참배 가결은 죄이다. 교회는 우상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일본의 태양신은 하나님의 원수요,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한국 장로교 총회는 사탄의 회의였다. 내가 아는 신사참배는 죄다. 그리고 감옥은 나의 집이다"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교인들은 마음에 큰 힘과 의지가 되었다. 최목사는 "신사참배는 죄"라고 외치고 다니다가 일본 형사들에게 잡혀 투옥시킬 위험성이 있는 것을 보고는 산정현 교회 교인들과 가정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서해의 고도 선미도로 피신하였다.
자기를 잡으로 온 일본형사인 것도 모르고 최목사는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며 큰 소리로 외치다가 잡혀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과 매를 맞아가며 신문을 받다가 한 달만에 풀려났다가 다시 전도를 하다가 다시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서 2년간 고문과 모진 매를 맞다가 평양형무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때 주기철 목사, 박관준 장로, 한상동 목사 등도 한 곳에 있게 되었다.
정주 경찰서에서 평양 경찰서로 또 대동 경찰서로 전전하면서 당한 고문과 모진 매를 맞았다. 고문 방법은 인간으로서는 견디지 못할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취조했는데 첫째 독립 운동을 하였다. 둘째 일본 천황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높였다. 셋째 선교사인 미국인과 연락하며 비밀 공작한다. 넷째 예수님이 재림하고 천년왕국이 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다섯째 교인을 선동하고 지방에 다니면서 민심을 소란케 하여 항일사상을 선전하고 있다. 여섯째 한국 교회 원로로서 후배를 괴롭히는 이유(왜 신사참배를 못하게 하고 한 사람을 괴롭히느냐?). 이것이 최목사에 대한 심문 내용이었다.
일본 형사들이 물을 때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 때리고 때리다 기절하면 물을 끼얹어 소생케 하고 정신이 들면 또 고문을 하곤 하였다. 최목사가 감방에서 간간이 시간과 날짜를 정하고 금식기도 하는 때가 있었다. 이때마다 같이 있는 죄수들이 최목사의 식사를 자기들이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최목사님 금식기도 아니 하십니까? 우리가 밥을 먹으려고 합니다"하며 같이 있는 사람이 농담삼아 말을 하면 최목사는 "금식기도? 당신이 원하다면 하지!"하면서 그 시간부터 몇일간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감방 6년동안 사람들과 접촉하고 대하였으나 그들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도 하였고 성경도 가르치고 기독교 도리도 말해주고 하여 그 방안은 마치 교회와도 같았고 예배보는 것과도 같이 경건하게 지냈다는 한다. 죄수들이 병들면 위하여 기도하고 병간호를 하여 주었으니 그들이 목사를 아버지 같이 존경하며 모시었으며 목사님께 대하여 함부로 말도 못하고 조심하였다. 그러나 목사님과 한방에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며 만족하였다.
h. 옥중에서의 40일 금식기도와 순교
최목사의 몸이 점점 쇠약하여 가고 감옥에서 견디기 힘든 75세 고령의 몸이요 앞으로 더 살 가망이 보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데려갈 것만 같은 때 최목사는 40일 금식기도를 결심하고 시작했다. 그때가 1944년 3월 1일이다. 가족이 면회를 와서 최목사의 금식을 만류했으나 거절하고 "내가 우리 하나님 품에 안기고 너희들도 꼭 나와 같이 즐겁게 저 낙원에서 살 때 땅에서 받지 못한 위로 하늘나라에서 받자"고 말하였다.
1945년 4월 10일 최목사가 작정한 40일 금식기도는 끝이 났다. 감방안에 사람들은 너무나 뜻밖에 일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75세의 고령으로 40일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생명이 그 몸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기적인 것을 믿고 의심할 수가 없었다. 40일 금식기도가 끝난 날 최목사의 집에 급보가 왔다. 목사님을 데리고 가라는 것이다. 목사님은 풀려나 평양 기홀병원의 차에 타고 병원으로 직행하셨다. 목사님이 병보석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산정현 교회 교인들, 서문밖 교인들 등 수 많은 교인들이 병문안 하여 왔다. 최목사는 찾아온 교우들 한 명 한 명을 손을 잡고 입을 적게 벌리고 서로 인사와 문안을 하였다. 그렇게 5일간 간호를 받고 찾아온 교우들을 만나 보시다가 1945년 4월 15일 오후 1시에 가족들과 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시면서 찬송가를 부르다가 웃으면서 잠드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4월 19일 오전 10시 30분에 산정현 교회의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양 기독교 공동묘지 돌박산에서 진행되었다.119) 임종순 목사의 주례로 시작한 장례식은 400-500명이 모여 슬피 애도하는 가운데 목사님이 평생 좋아 하시던 찬송 "예수 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와 운명시에 부른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 광명한 천당에 편히 쉴때"를 불렀다. 이 찬송을 계속해서 부르며 평양시내를 지나갔다. 이 광경을 본 일본 경찰과 당국은 당황하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2. 최봉석의 신앙의 특색
a. 전도열에 불타는 신앙
최봉석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가 노방에서 외치던 "예수 천당"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예수 천당"을 들으면 누구든지 최권능 (최권능)을 떠 올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밤낮없이 길거리에서 전하던 사람이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아시아, 유럽을 전도여행 다니며 항상 전도하였듯이 최봉석도 그러한 전도열에 불타던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에 미쳤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산간 벽지와 만주 대륙의 허허 벌판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다녔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에 그가 개척해 세운 교회가 무려 80군데나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사상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기록이다.120)
그는 새벽 4시에 평양의 모란봉에 올라가 "예수 천당"을 외쳤고, 길목마다 다니며 예수를 전파했다. "예수 천당"을 평양에서 뿐만 아니라 두메 산골의 화전민에게나, 만주 벌판에서도 외쳤다. 누구에게나 예수를 전했다. 불신자에게나, 평양 경찰서장에게나, 전도하지 않는 목사에게도 "예수 천당"을 외쳤다.
그에게는 "예수 천당" 그 외의 다른 잔소리가 필요 없었다. 긴 설명을 듣고 싶으면 성경을 펴 보라는 것이다. 그는 설교나 설득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성능이 강한 예수탄을 쏘아 올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 천당"을 외치는 최목사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결사적으로 분투할 때 주께서 같이 하셨던 것이다. "목사님, 밤낮 예수 천당… 그렇게만 외치지 마시고 다른 말씀도 좀 곁들여야 하시잖아요?" 그에게 이렇게 충고 비슷한 말을 하는 성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충고가 통하지 않았다. 잠든 영혼을 깨우려면 예수탄이라야 했던 것이다. 그는 예수 때문에 바보가 되었고, 예수를 제일 많이 드러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121)
신학교 시절도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평양 시내를 두루 누비면서 전도에 열을 올리느라 낙제도 2번 했을 정도로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 형사에게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천당"을 외쳤다. 그는 사도바울처럼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너무나 예수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안이숙이 "저도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했더니 그 말을 듣자 그는 성난 표정을 하고 나에게 큰 소리로 "예수를 믿으면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거요? 지금 모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데 입으로는 밥만 먹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한단 말이요. 응?"122)이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그에게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현실을 나의 가족과 친척에 대한 문제처럼 구체적으로 책임감 있게 느꼈던 것이다.
그 마음속에 오직 예수의 심정으로 가득했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불타는 전도의 사명감을 가지고 그는 온 세상을 다니며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b. 진리를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신앙
최봉석에게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떠한 신이라도 존재하여서는 아니 되었다. 최목사는 자기 집 신주를 때려 부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우상과의 싸움을 일생동안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그는 사신과 우상에 불을 지르면서 전도하다가 여러차례 죽을 위기를 당했다.
남만주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통화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산 마을을 지나면서 귀신당직을 불살라 버렸더니 어떤 부인이 달려나와 끝이 날카로운 부지깽이로 최목사의 옆구리를 마구 찔러, 몹시 상처를 입게 되었다.123) 최봉석이 하루는 큰 고목 아래서 기도하고 있었다. 우상을 섬기는 여인 하나가 몰래 다가와서는 뾰족한 막대기로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최목사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대었다. 옆구리가 터져 그만 기절을 하였는데도 여인은 계속 온 몸을 찔렀다. 피투성이가 된 최목사가 죽은 줄 알고 그제서야 여인은 가버렸다. 그때에 받은 상처자국은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의 흔적은 이렇게 늘어만 갔다.
평양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이 마포삼열 목사의 동상 건립에 대하여 절대 다수가 찬성했을 때 최봉석은 반대했다. "모두들 십계명 중 1, 2, 3계명을 몰라서 하는 말들이요? 나도 마포삼열 목사를 누구보다도 더 존경하며 사랑하오. 그러나 우리 조선의 교인들은 옛부터 젖어온 습성으로 틀림없이 동상 앞에 엎드려 절할 것이요. 그러면 그 동상은 우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요."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동상 건립이 가결되자 "여러분 목사님들은 동상을 세우시오, 나는 도끼로 찍어 버리겠소"라고 결연하게 말하고 퇴장해 버렸던 것이다.
이와같이 최권능은 누구보다도 우상을 싫어했으며, 우상이 될 소지가 있다고 해서 동상 건립도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진리(예수)가 아닌 우상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진리를 사랑하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 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것은 그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에게서는 "오직 예수"라는 진리 외에는 아무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반석같은 신앙의 특색이 있었다.
Ⅳ.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의 공통점
A. 순교자들의 삶의 공통점
1. 청빈한 삶
주기철, 최봉석목사와 박관준장로의 삶은 젊은 시절은 나름대로 여유있는 삶을 살았지만, 회심 이후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청빈한 삶을 영위했다. 주기철 목사는 교인들의 헌금이 충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합당하게 쓰여졌는지 살피고, 예산 집행과 교회 선교 방향과의 일치를 검토하며 예산의 쓰임새를 조정하여 과다 지출이나 차변(借邊)의 확대를 미리 견제했다. 그러나 자신은 청빈 (淸貧)하여 금욕을 방불할 정도의 목회자 생활을 했다. 처음 초량교회에 부임할 때 주거가 변변치 않아 이만식 집에서 하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28년을 즈음해서 아버지께 받은 유산을 다 써버리고, 부인이 친정에서 받아가지고 온 유산도 다 써버린 형편이었다. 하지만 주기철은 교회 목사로서, 교회가 겪는 경제적 곤궁을 몸소 겪기로 했다. 그래서 한 반년 가량 감봉을 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 다시 5월분부터는 그 전 수준대로 지급하게 한 일이 있었다.산정현 교회가 주기철이 순교한 후 유족을 위해 토지를 사주고자 하였을 때도 오정모 사모는 주기철 평생의 청빈 생활에 어긋나고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사양하였던 것127)을 볼 때 주기철의 삶이 늘 청빈했음을 알 수 있다.
박관준은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로 자라났기 때문에 가세가 넉넉하여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가 회심하기 전의 사생활은 방탕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새사람이 되 후 그는 전도하기 위해 황해쪽 어촌이 태향산(평남 안주군)이라는 곳으로 개척 전도의 길을 떠났다. 이곳에서 무료 의료선교를 하면서 추위와 빈곤과 싸우면서 가족들과 함께 3년동안 청빈한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어느 지방에서 의원을 개업하든지 언제나 가난한 환자에게는 무료로 치료를 해 주었고, 몇 해 동안 환자들과 거래했던 외상 장부도 그 지방을 떠날 때에는 전부 불살라 버리고 떠났다. 본래 부호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물질에 담담하여 경제면에 대한 애착심은 별로 없었다. 오직 성경 말씀에 "내일 걱정은 내일 할 것이요 오늘의 염려는 오늘에 족하리라"고 한 말씀 그대로의 생활 태도였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버지가 돈이 없어 염려 한다거나 몸이 괴로워서 근심을 한다든지 탁신하는 것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반면에 아버지는 정의감이 남달리 유별하여 언제나 공사(公事)에 앞장서기를 즐겨했다.
이와같이 박관준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봉사 하였고, 그 자신은 늘 공사 (公事)를 앞세우며 청빈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최봉석은 누구보다도 더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만주 벌판과 오지의 화전민에게 전도하러 다니면서 두벌 옷이 없었고 전대도 하나 없었다. 그의 만주에서의 전도할 때의 일이다.
이틀을 걸어가도 사람 한 사람 만날 수가 없었다. 인가(人家) 하나 보이지 않았다. 너무 피곤하고 허기져서 길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잤는지 깨어 보니 아침해가 높이 솟아 있었다. 저만치에 소가지나 가면서 누고 간 쇠똥이 보였다. 그 쇠똥 속에 희고 노란 것이 보였다. 콩알인 것이 분명했다. 최목사는 기어가서 콩알을 하나씩 집어내어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었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순식간에 쇠똥 속에 있던 콩을 다 먹어 치웠다. …… 만주의 긴 겨울 혹한은 참으로 무섭다. 방안에 꽃처럼 하얀 성애가 끼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꽃으로 된 방에 살게 하시는 구나" 최목사가 하는 말이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11장26-27쪽의 고백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한 것 같이 최봉석의 삶도 그와 유사한 것 처럼 보인다. 이와같이 최봉석은 엄청난 고생과 수고를 하면서 매우 청렴한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일제 말기 순교자들의 삶은 자기를 향해서는 엄격 했고, 이웃을 향해서는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기의 재산과 돈이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청빈한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2. 민족과 이웃을 위한 삶
주기철에게는 겨레에 대한 사랑이나 민족의 자주 발전, 그리고 그날의 핍박에서 해방되고자 한 민족의 염원이 전무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날짜 미상의 그의 설교에 "모세의 120년"이란 말씀이 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날 때의 심정을 읊어, 스스로 거기 동감하였던 주기철이다.
사랑하는 동포를 버리고 떠난 모세는 十里에 눈물이오, 白里에 울음이라, 미디안 지경에 넘어 서니 쓸쓸할사 광야로다. 이드로의 들잇 사위가 되니 대장부의 수치로다.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 모세는 복종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이시니……동포 운명 위급하니 죽더라도 가오리다. 주와 함께 가오리다.1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이오 불순종이오, 야간의 도둑질, 고라의 반역, 이 무슨 해괴며, 음란과 금송아지, 이 무슨 망할 것인가. 회개하라, 통회하라.
여기에 그의 민족 구원에 대한 신앙이 가야했던 바른 지표가 있었다. 회개와 겸손이 있어야 했다. 해방은 다만 그 결실이어야만 했다. 그는 민족주의들과는 관계가 멀었지만 민족을 위한 열성이 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신앙안에서 민족을 바로 세우고자했던 것이다. 민족을 향해 회개와 겸손을 주장하며 복음을 통하여 민족을 우상숭배에서 구하려고 했다.
박관준은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했고,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는 생전시에 도산 안창호 선생을 한 번 만났었다. "선생께서 국내에서 그같이 일본 총독을 상대로 경고 투쟁을 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133)라고 도산은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평소 순교자들을 깊이 생각했었다. 그래서 드디어 선열들의 뒤를 따르기로 비장한 결심을 했다. "없었던 나라를 건국하는 것도 위대한 일이다. 망한 나라를 독립 시키는 일도 존귀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이제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뒤따라 광야에서 유리하는 삼천만 동포의 구원을 위해서 민족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134) 그는 자신만이라도 목숨이 다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일제와 항쟁하다가 죽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교계의 최고 지도층에도 별로 대책이 없는 상황속에서 감히 일본 총독과 일본 중앙 정부를 상대로 민족과 신앙의 수호를 위해 투쟁하다 순교할 것을 각오했던 것이다.
최봉석의 삶에서도 민족 사랑이 잘 나타난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도하지 않아 지옥으로 가면 어쩌나 하는 불쌍한 마음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예수 천당"을 외쳤고 밤늦게까지 그렇게 전도하는 일이 많았다.
최봉석은 동족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만주에는 살길을 찾아 하염없이 우리 동족들이 흘러 왔고 의병으로 쫓기다가 망명한 독립군들도 많았다. 그는 만주에 와서 어렵게 살아 가고 있는 동족들의 형편을 눈물겹도록 심각하게 목격하였다. 그는 크고 작은 교회를 세워 동족들의 영혼을 돌보며 지탱하고자 했다. 고향에서 먹고 살 수가 없어 멀고 먼 이국땅에 왔지만 만주의 원주민들에게 천대를 받아가면서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고국 소식을 알려주고 또 예수 복음을 전하면 너무나 반가와 하였다.135)
최봉석은 일본을 미워하였고, 중국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주에서는 포악한 중국인 마적들에게 생명을 내대고 전도 하였으며 평양 거리에서는 일본인 경찰서장에게도 역시 전도하였다. 그는 예수를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으로서의 모든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려 하였으며 그 영생의 예수 복음을 만나는 인간이면 모두에게 소개하였다.136) 그는 동포들도 사랑했지만 뭇 영혼들 모든 민족들을 사랑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말기 순교자들은 자기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여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기도했다. 일제의 압제와 신사참배로 인한 민족의 우상숭배를 통탄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의 훌륭한 사표(師表)와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민족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라 민족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과 예수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었으며, 민족적인 위기를 당하여 기꺼이 고통을 당하며 목숨을 내어 놓기를 아끼지 않는 공통점이 있었다.
B. 순교자들의 신앙의 공통점
1.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은 신앙
주기철은 초량교회 목회할 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초량교회에서 목회할 때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가결시켰는데, 당시 부산의 일본인 발행「부산일보」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여 공박했다. "완매(頑昧)한 양귀(洋鬼) 끝내 신사참배 거부"라고 해서 일본의 조야에 충격을 주었던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한국교회가 감행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기철은 이후 신사참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4번씩이나 검속되어 무지막지한 고문과 취조로 고통을 당한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투쟁한 대표적인 목사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신앙은 충성과 정절의 신앙이었으며 불의와는 전혀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요셉과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죄 지을 수 없다고 하였고, 구원의 즐거움 때문에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이 있는지라, 죽음이 그 무엇이며, 천당의 즐거움이 있는지라, 세상 환난이 그 무엇이리오. 구원의 즐거움, 믿음의 대법열 (大法悅)이 있어 세상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주기철의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과 '구원의 즐거움'이 그를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신앙으로 자라게 했던 것이다. 박관준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시대인 일제말이 되자 이 어려운 시대에 자기 자신만이라도 목숨이 다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일제와 항쟁하다가 죽겠다고 결심했다. 이같이 크게 깨닫고 결의를 새로이 한 그는 비장한 기도를 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 몸으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우상을 섬기는 국가인 일본 제국의 폭정과 맞서 투쟁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뿌려 정의와 진리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단코 병으로 자리에 누워 편안히 생을 마치는 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죽는 시간에는 더욱 정신이 분명하여 명백히 나타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140)라고 새벽과 밤마다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
박관준은 우가끼 총독 시대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열번에 걸쳐 격렬한 경고를 직접 면회해서 전달하거나 문서로 충고했다. 이것이 잘 통하지 않자 그는 세례 요한이 헤롯 왕 앞에서 목숨을 걸고 담대해 충고한 것 같이 자신도 생명을 걸고 일본 제국의 정부를 상대로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141) 그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신사참배에 총독과 일본 정부에 경고하고 항의한 극히 드물고 대담한 신앙을 지닌 사람이었다.
최봉석은 "신사참배는 죄다. 교회는 우상을 들여 놓아서는 안된다. 일본의 태양신은 하나님의 원수다. 그리고 감옥은 나의 집이다!" 개척교회의 강단에서나 사석에서나 탄식처럼 울부 짖었다. 신앙의 갈등 속에 있던 많은 성도들이 힘을 얻고 의지가 되었다. 최봉석의 부르짖음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역자와 교인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경찰들은 최봉석을 잡아들여 자기들이 작성한 죄목에다 그가 시인하여 자백하기를 강요하였다. 부정하면 고문을 하였다. 기절하면 물을 끼얹었다가 깨어나면 다시 고문하였다. 그는 7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며 끝까지 투쟁하며 하나님께 신앙의 정조를 지키다가 1944년 4월 19일에 순교했다. 그는 "감옥은 나의 집이다!"고 외치며 결코 불의에 타협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진리에 죽고 진리에 사는 신앙인이었다.
순교자들은 모두 직접적으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투쟁하다가 죽었다.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일뿐 종교 행사는 아니다.'고 달콤하게 속이려 했을 때 그들은 결코 속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라는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란 불의 앞에 결코 동조할 수 없는 정의감과 진리에 불타는 신앙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신사참배에 동참케 하려 했으나, 고문과 죽음과 이 세상도 그들을 신앙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2. 보수적인 신앙
주기철은 신앙이라는 범주에 "민족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는 사람"의 경우, "인격을 높이며 도덕 생활을 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의 경우가 있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이제라도 이 자리를 나가시요"라고 했다고 한다. 주기철은 참된 신앙이란,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모시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는" 신앙밖에는 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경험과 감사, 그것이 주기철의 신앙 골수였다.
주기철은 이단 사설과 진리에 대한 도전에 대한 반발과 의분은 대단했다. "남(南鮮)교회의 무교파주의"를 치리하였으며, 불신자와 결혼한 교인을 권찰 직분에서 해직하고 3개월간 책벌하였으며, 어떤이는 간음죄로 무기한 채벌했으며, 제 7계명을 범한 두 교인을 한 사람에게는 무기 책벌, 다른 사람에게는 학습 명부에서 제적시키는 처벌을 내리는 듯 교회 치리에 엄격했다.144) 그는 문창교회에서 시무할 때 면려회 활동을 적극 장려했는데 이 면려회는 성경과 교리와 교회의 권위 절대 시인, 복음의 사회적 실천, 극좌경(極左傾)의 사회적 기독교의 동요 배척 등의 목표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주기철의 보수적인 신앙에서 기인한다.
박관준은 신앙에 입문할 때부터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여서 자칫 잘못하면 신비주의에 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박관준은 기독교가 과학이 아니요, 신령과 신비와 신조(神助)의 종교라는 것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을 피하거나 부인하는 소위 신비주의자나 신비 추구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일생의 신조였다. 그러기에 입산 기도를 하고 몇가지 신비한 체험을 얻었다고 떠들며 돌아 다니는 당시의 사이비 인사들과 비성경적이며 지나친 신비주의만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역설했다. 뿐만아니라 기적은 인위적으로 추구하거나 인간이 스스로 구할 것이 아니라고 늘 강조했다. 기독교의 계시는 성서 한 권 속에 완전히 영감되어 있으므로 또 다른 계시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145)
박관준은 언제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느헤미야 선지자가 동포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금식 기도한 것처럼 그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느헤미야는 자기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하여 그의 왕 앞에 나아갈 때, 그리고 적을 방어할 때와, 적의 방해를 받을 때에 기도로 승리하였다. 그와같이 아버지도 지금 조선 기독교회와 동족이 겪는 시련과 역경을 눈앞에 놓고 어떤 투쟁을 전개하기에 앞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오직 기도로 준비하는146)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내 던지는 신앙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은 것처럼, 그리스도와 조국과 정의를 위해서 그는 살 것을 결심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살려고 생각할 수도 없는 강한 정의감과 보수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최봉석도 회심 후 결단하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전도와 개척으로 80여개라는 경이적인 교회를 세웠고, 그의 신앙은 전도하지 않고서는 밥을 먹지 못하는 불타는 구령열이 있었다. 밤낮으로 "예수 천당"을 외쳤던 그의 신앙은 철저한 보수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남다른 행함이 따랐던 신앙이었다. 마포 삼열 목사의 동상 건립 반대에도 그의 보수적인 신앙이 잘 드러난다. 그 당시 풍습상 우상이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동상을 십계명의 말씀에 비추어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신사참배에 대한 철저한 반대에서도 그의 보수 신앙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순교자들의 모두 보수적인 신앙인들이었다. 보수적인 신앙은 낡고 경직된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며 주안에서 자유로운 신앙이다. 이 신앙이 있었기에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고, 기독교와 민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이 보수적인 신앙인들의 순교가 없었더라면 우리 민족과 기독교인들에게 해방의 그 날이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보수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고자 하는 열심과 간구에서 생겨난 것이다.
3. 순교의 영광을 대망한 신앙
주기철은 1939년 이른 봄, 순교를 눈 앞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죽음이 두렵고, 비참함을 눈 앞에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주님 위해 백 번 죽는 것이 가장 고귀한 것"임을 알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주기철에게서 하나의 신학을 찾는다면 '죽음을 향한 삶'이 있을 따름이었다. 주님의 가장 고귀한 십자가의 죽으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이외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감격하고 사랑하며 기꺼이 순교를 대망하는 신앙이었다. 주기철은 1937년 말에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순교의 죽음이 고통스럽지 아니함이 아니었으되, 그는 그것을 '기쁨'이라 말했다. 금욕도 책임도 아닌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하며 이렇게 예언한 것이다. "순교의 기쁨, 이 얼마나 거룩한 기쁨이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는 기쁨이다."고 말했다.
박관준은 영변군 태평시에서 전원속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면서 보낼때가 있었다. 그때 그는 매일 새벽과 저녁 두 차례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는 바로 "주여, 저로 하여금 병으로 죽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기도를 하기를 좋아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 몸으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우상을 숨기는 국가인 일본 제국의 폭정과 맞서 투쟁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뿌려 정의와 진리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단코 병으로 자리에 누워 편안히 생을 마치는 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죽는 시간에는 더욱 정신이 분명하여 명백히 나타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비장한 각오가 숨어있는 기도는 그의 새벽 기도와 밤 기도 생활에서 항상 마지막 결론으로 드리는 기도 제목이었다.
최봉석은 신사참배를 반대가 직접적인 순교의 원인이 되었지만은, 그 이전 만주 노방전도를 통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한 전도하면서 순교도 각오한 목사였다. 그는 일본 형사의 모진 고문에도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죽는 것은 영광이요. 나는 예수 한 분만 바라보고 죽기 위하여 오늘까지 너희 신을 경배하지 않고 살아왔소. 나는 죽으면 천당간다. 주님이 나의집을 예비하시고 나오기를 기다리신다."
일제말 순교자들은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 이 아니라 순교자의 반열에 들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영광스럽 게 받아 들였다. 그들은 모두 순교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고, 순교를 위해 밤을 세워 처절한 기도를 드릴때도 많았다. 그들이 대망하던 순교는 민족과 진리를 위함이었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 복음의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는 의미있는 순교였다. 그들의 순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늘 기도의 생활로 인한 성령의 도우심을 얻었고, 정의와 진리를 향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 문이었다. 그들의 순교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졌고, 그들의 마음속에 순교의 영광을 대망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필연적 사건이었다.
Ⅴ. 결론
지금까지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의 참혹한 현실과 그것을 거부하다 순교한 세 분의 삶과 신앙의 특색에 대해서 살펴보고 연구하였다. 주기철, 박관준, 최봉석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면서도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으며 누구보다도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신사참배라는 무서운 공룡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물맷돌을 돌리며 전진하는 다윗처럼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청빈한 삶을 살았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이웃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밤을 지세우며 고민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은 정의에 불타는 신앙을 가졌고, 하나님의 뜻을 명상하며 성경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려고 한 올 곧은 신앙인들이었다.
그들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순교하기를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순교를 대망하는 삶과 신앙을 살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의를 위한 죽음을 희구하며 순교자의 반열에 드는 것을 삶과 신앙의 지극한 목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그냥 병들어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으며, 십자가의 정병처럼 순교의 영광을 달라고 밤을 새우며 간구하였다.
순교자들이 가진 이러한 순교 정신은 그들의 마음의 신앙적 결단이나 죽고자 하는 비장한 각오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순교에의 꿈과 열망을 부어 주시어 그들이 순교의 삶을 살도록 준비하고 기도하게 하시며, 급기야는 폭풍우가 치는 듯한 냉혹한 삶의 불같은 시험 속에도 그들을 보호하시며,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곤경과 어려움을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훈련시키시며,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다가 순교하게 하시는 듯 하다. 주기철, 박관준, 최봉석은 그들의 평소의 삶과 신앙생활은 이웃과 민족을 사랑한 삶을 살았으며, 그들은 정의로운 삶을 살았고 진리를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한 강한 열심이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신앙에의 열정과 순교 정신을 오늘날에도 이어 받아야 하겠다.
일제 말기 순교자들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그들의 삶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겼으며, 이웃과 민족을 위한 깊은 애정이 있었다. 또한 그들의 신앙은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정의감에 불타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는 순교자의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믿음이 흔들리고 삶의 실천성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삶과 신앙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갖고 탐구하며 배워야 하겠다. 또한 그들의 모범적인 실천적이며 생명력 있는 삶의 모습과 순교적인 신앙의 자세를 지향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영광을 대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