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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그릿 시냇가를 묵상하면......
오랜 동료 한 분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우연히 길가에서 동료 목사님을 만나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안부를 물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길 위의 인생은
뭔가 특별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축 늘어진 어깨로
하늘 한번 보고 땅 한번 보고 그렇게 산다고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났지만 "하늘 한번 보고 땅 한번 보고"라는 말이
뇌리에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습니다.
감자 세 개로 네 식구가 한끼를 때웠다는 말은 어느 탈북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도시의 빌딩 숲에서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두 자녀를 둔 50대 후반의 개척 교회 목사님의 현제 상황입니다.
시내에서 1시간 거리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개척 교회 하는 건물 옥상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일용할 양식을 얻는다며 감사하였습니다.
맨 땅에 헤딩하여 열심히 개척교회를 돌보아
한 때는 5,60명까지 성도가 모였으나 한 두 가정 빠져 나가면서
지금은 할머니 한 분과 장애인 한 분과 그리고 멀리 의성에서 오시는 한 분만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니까
주변의 큰 교회로 갔다면서 이제는 애타게 전도를 하지 않고
애절하게 기도 하지 않는다며 한 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넘쳤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성경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화를 나눌수록 성경 저자의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성경 달인의 경지를 느꼈습니다.
성경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데
1시간 이상 성경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설교하면.......
성도들은 은혜 충만하여 교회가 부흥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더니
교회 부흥과 사이비는 비례한다는 사실을 개척의 실상으로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척 교회의 위기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삶의 가난한 환경은 인내의 믿음을 온전히 이루는 연단이라는 종말론적인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은
목회 사역의 현장에서 더욱 극대화 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는
감자 세 개로 네 식구가 한끼를 때우는 가난한 삶의 위로가 될까요?
부자의 눈에는 탐욕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의 눈에는 부잣집 대문간의 나사로가 눈에 보입니다.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를 묵상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한 가난을 새해로 맞으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사람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역자는 죽음의 그림자가 눈 앞에 어른거려도
엘리야의 생존비법을 찾아 어떻게든 살아 낼 것입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는 말은 비전의 욕망일 뿐.......
정작 배고픈 사람은 배 고프다는 말도 못합니다.
사역의 삶에서 찾아오는 가난은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를 묵상하면서 잠언의 기도를 할 것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산해진미로 가득한 진수성찬을 구하지 않고
호대광실 부귀영화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버킷 리스트로 하는 잠언의 절박한 기도는
잠언서의 그 모든 아름다운 교훈을 담아내는 의인의 기도요, 겸손하고 청빈한 삶의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종말론적인 기도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3:17-18)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선지자와 복음 사역자는
가난을 감내할 뿐만 아니라 고난과 핍박을 인내의 믿음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선지자에 대한 최초의 박해는
남 왕국 유다의 3대 왕인 아사 왕 때였습니다.
남왕국 아사 왕은 아람 왕을 의지하여 북왕국 왕 바아사를 공격하여 승리한 후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와 전리품으로 국방을 견고하게 한 아사왕을 향하여
선견자 하나니는 직언직설의 돌직구를 던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고 하였습니다.(대하16:7-9)
아사왕은 대노하여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고
또한 아사왕의 학정을 질책하는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이
참 선지자 미가야를 감옥에 쳐 넣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남왕국 유다왕 여호사밧과 북왕국 이스라엘왕 아합이 연합하여 아람 왕과 길르앗 라못의 전쟁을 할 때
선지자 사백 인쯤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물었습니다.
시드기야를 비롯한 사백여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찬성을 하였지만
여호사밧 왕의 추천을 받은 오직 미가야 선지자는 반대를 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며
아합의 죽음을 예언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폭행과 폭언을 하였고
이스라엘 왕 아합은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길르앗 라못의 전쟁으로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하였던 참 선지자 미가야는
사역의 댓가로 거짓 선지자에게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으며 왕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결국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아합은 길르앗 라못의 전쟁에서 죽었으나
예언 사역의 성공을 거둔 미가야 선지자는 감옥에 갇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었다는 것으로
사역의 끝이 났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인 아합 왕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아합과 이세벨을 상대로
엘리야 선지자는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 사람 엘리야는 아합 왕을 찾아가서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선전 포고는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왕가에서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신에 대한 도전이며,국가 경제에 대한 저주의 선언이었습니다.
아합은 대노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엘리야를 죽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위협과 살기를 피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그릿 시냇가로 도망하였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였던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로 숨어들었습니다.
엘리야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신탁을 수행하고 받은 혜택은
그릿 시냇가였습니다.
사역의 댓가로 보장받은 것은 산해진미로 가득한 진수성찬과, 호대광실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릿 시냇가의 메마른 물과 까마귀의 먹이였습니다.
까마귀를 자오라고 하며 또 반포지효라는 한자성어도 있지만
까마귀는 죽은 고기와 곡식을 다 먹는 잡식성입니다.
엘리야의 저주가 그대로 임하여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깊어 지면서
까마귀의 먹이도 떨어지고 그릿 시냇가의 물도 말랐습니다.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왕상17:5-7)
그릿 시내가 마르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릿 시내에서 시돈 땅 사르밧 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노새나 말도 없이 걸어서 몇 일을 굶어 시돈 땅에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왕상17:10-16)
물이 마른 그릿 시냇가의 대안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은
지독한 가난을 겪고 있는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연명은 하였지만
산해진미로 가득한 진수성찬과, 호대광실의 부귀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바알 신앙은 다산의 종교로
제의식의 매음 행위는 풍요와 번영을 기원합니다.
풍요와 번영이라는 바알 신앙의 정서와는 달리 여호와 신앙의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 과부의 정서를 가졌습니다.
푸른 니무 아래는 바알과 아세라의 제의식으로
매음 행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2:20 -21)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죽이는도다(사57:3-5)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는 바알 숭배의 극락적인 삶에 비해서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 과부라는 청빈과 금욕의 삶, 그 자체가 전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멜산 대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싸워 승리한 엘리야에게 주어진 보상은
이세벨 군대의 추격과 로뎀 나무의 절망이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고 하였습니다.(왕상19:1-4)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출발하여 이세벨의 군대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는
남왕국 최남단 성읍인 브엘세바까지 국가의 공권력과 마주한 개인의 생존 본능으로 질주하였습니다.
브엘세바에서 광야로 히룻길을 행하여 기진맥진한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죽음의 기도로 겨우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얻었습니다.
생명을 담보한 죽음의 기도로 응답 받은 것은
이번에도 산해진미로 가득한 진수성찬과, 호대광실의 부귀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의 굴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아주 바싹 마른 국민 약골의 몸을 가졌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한 끼의 식사로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호렙산의 굴에 들어간 이유는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9-10)
엘리야는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마시고
죽기 위해서 걸었는데 그것이 사십 주 사십 야가 되었고
호렙산 굴에 이르러 죽음의 장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죽음의 장소에 찾아 든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가늘고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 오셔서 엘리야를 위로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왕상19:11-18)
바알 종교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타락 시켰고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를 심판하는 공의의 표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푸른 나무 아래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곳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42세에 왕이 되어 17년 동안 다스렸는데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은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가나안 족속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습니다.
아하스는 나이 이십 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을 치리하였는데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록하면서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만히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저희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같이 그 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또 우상을 섬겨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라고
하나님의 탄식을 하였습니다.,(렘2:20-21)
엘리야의 바알 종교와의 전쟁은
고난과 핍박으로 얼룩진 예레미야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이어졌습니다.
바알 종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케 하였으며
남왕국 유대의 왕조와 성전과 백성의 총체적 타락으로 하나님 심판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가 심판 받을 때 종말론적인 선지자로 쓰임을 받으며
많은 환란과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고 선포한 말씀을 듣고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또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두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는 누명을 씌워
고관들에게 끌고 가서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토굴에 몇 일 동안 가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고관들이 시드기야 왕께 고하며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 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라고 진언하였습니다.
시드가야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하여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
곧 물이 없고 진창뿐에 곳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 던져 넣었습니다.
왕궁 환관 구스인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구출받은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집 제 삼문에서 시드기야의 요청으로 은밀히 만나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우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선지자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였으나
고관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며
고난과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말씀은 듣지 않고 심판의 말씀만 분노로 듣고 격동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를 핍박하고 또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선지자와 복음 사역자의 험로를
심판과 구원의 주체로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 같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며 탄식하였습니다.(마23:34-37)
부잣집 대문간의 걸인 나사로를 기억하시는 예수님은
사역의 열매로 보장된 사도 바울의 옥중 서신을 복음의 빛으로 계시하였습니다.
푸른 나무 아래는 바알 신앙의 실상으로가득한 풍요와 번영의 허상이요,
심판의 칼이 따르는 공의의 표적이지만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청렴과 청빈의 덕입니다.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 하는 자는
청빈한 엘리야의 특심을 상대해야 할 것이며 심판하려고 서신 하나님을 적으로 만날 것입니다.
바알 종교는 역사적으로 사라졌지만
바알 종교의 옷을 입은 사탄의 궤계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으로 종말론적인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와 인본주의 신앙은 바알 신앙의 정체성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바로 그 참된 복음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주적에 대한 분별이 없는 혼탁한 시대에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와 로뎀 나무와 호렙산의 굴은 가늘고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할 것입니다.
청빈하지 않는 복음 사역은
높은 산과 낮은 산의 푸른 나무 아래서 행하는 종교적 향연일 것입니다.
성공신화와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종교적 비전 신앙은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하는 하나님의 탄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