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구속사 강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본 야곱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경험은 야곱으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인물이 되게 하였다. 가나안을 떠나 올 때의 미숙하고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이제는 그 누구라도 능히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꾸어 부르게 함으로서 야곱이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증해 주셨다.
1.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준 의미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경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야곱의 인생은 단순히 역사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개의 개인적인 삶의 연속이 아니었다. 야곱의 인생은 명백한 하나님 나라의 연속이었고 그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야곱은 자신의 생존에 대하여 섣불리 대처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생존이 곧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야곱의 인생은 그 당시 인류 사회를 대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가족들과 재산은 유형적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실체였던 것이다.
얍복강을 건넌 야곱은 에서가 사백 여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마주 대하여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야곱은 가족들을 셋으로 나누어 분리한 후 자신이 앞장서서 에서를 맞이했다. 야곱은 에서를 보자 일곱 번이나 몸을 굽혀 최대의 예우를 했다. 에서는 20여 년 만에 동생을 만난다는 감격과 이미 야곱이 보낸 선물들로 인해 마음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었는지 야곱을 보고 달려와 서로 안고 입을 맞추며 그동안 숨겨져 있던 형제간의 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고 반가워했다. 야곱은 자기들의 식구들을 차례차례 에서에게 소개하고 에서를 위해 준비한 선물들을 받아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아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창 33:10-11)라는 야곱의 강권에 대하여 에서는 극구 사양했지만 야곱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였다. 야곱은 에서에게 그동안 자신이 받은 복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빠뜨리지 않고 강조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에서가 야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만큼 자신의 생존에 대하여 조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받아 달라고 요청한 말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창 33:11)라는 야곱의 말을 해석할 경우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낌없이 에서에게도 나누어주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야곱은 에서의 환심을 얻기 위해 예물을 준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에 에서가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기 위해 예물을 주는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에서가 야곱으로부터 예물을 받는다는 것은, 그 예물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은혜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에서 역시 야곱의 그늘 아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에서에게 나누어주는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장차 모든 인류가 자신의 그늘 아래 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 28:13-14)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야곱으로서는 모든 족속이 장차 야곱의 그늘 아래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을 예표하는 의미에서 에서가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본 야곱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에 도착하였다. 요단강을 건넌 야곱은 가나안의 중심부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여 길을 가던 중 세겜 성에 이르렀다. 야곱의 식솔은 당시 사람들의 개념으로 볼 때 상당한 무리였다. 그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이주한다는 것은 기존 주민들에게는 기득권에 일종의 위협의 요소로 보일 수 있었다. 한정된 거주 공간에 갑자기 외부에서 상당한 수의 이주민이 들어오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에 대하여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산업이 발달하고 왕래가 잦은 시대라면 몰라도 당시는 정착지를 중심으로 경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겜 성에 갑자기 나타난 야곱의 일행은 세겜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야곱은 굳이 세겜 사람들과 생존권 때문에 다툴 필요가 없었다. 야곱은 세겜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소를 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샀다(창 33:19). 야곱이 잠시 거주할 땅을 삼으로서 세겜 사람들과의 분쟁거리를 없앤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야곱이 가나안 사람들과 얼마나 평화를 유지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장차 그 땅은 야곱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질 약속의 땅이었다. 이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가나안은 이미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소유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성을 쌓고 경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야곱이 그들을 향하여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자신에게 준 땅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께서 새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구체적인 일을 하시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때문에 야곱은 원주민들이 누리고 있는 기존의 생존권을 위협하지 않고 그들의 경제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땅을 구입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장막을 짖고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하실 일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야곱은 세겜성의 주인인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그 땅을 산 후 그곳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후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창 33:20). 이 말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야곱이 가나안에 들어와 얻은 땅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나 그 땅의 이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라고 부른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었다. 사실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세겜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뒤돌아본다면 결코 손쉬운 길이 아니었다. 이삭이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28:3-4)고 축복하였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 축복과 같이 야곱이 성공하여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장담할 수 없었음에도 야곱은 그 축복대로 되어 어려운 길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야곱이 가는 길은 어디든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은 큰 식솔과 재산을 거느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야곱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고 서원한 것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제일 먼저 가나안에 들어와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강력하신 권능으로 이삭으로부터 받은 야곱의 축복이 성취되었음을 고백하고 이제부터 하나님에 의해 그 땅에 새로운 나라가 건설될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야곱이 그곳에 장막을 친 것은 장차 가나안이 모두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질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곱은 비록 손바닥만한 땅을 얻었으나 장차 하나님께서 그 모든 땅을 주실 것을 믿고 강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기념하기 위해 그 땅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