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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焚書坑儒)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하여 죽인다는 뜻으로, 진나라의 시황제가 학자들의 정치 비평을 금하기 위하여 경서를 태우고 학자들을 구덩이에 생매장하여 베푼 가혹한 정치를 이르는 말이다.
焚 : 불사를 분(火/8)
書 : 책 서(曰/6)
坑 : 묻을 갱(土/4)
儒 : 선비 유(亻/14)
(유의어)
갱유분서(坑儒焚書)
진화(秦火)
출전 : 사기(史記)
이 성어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하여 죽인다는 뜻으로, 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학자들의 정치 비평을 금하기 위하여 경서를 태우고 학자들을 구덩이에 생매장하여 베푼 가혹한 정치를 이르는 말이다.
진시황(秦始皇) 즉위 34년에 진시황은 함양궁(咸陽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박사(博士)들 70여명이 앞으로 나와서 수(壽)를 빌었다.
복사(僕射)인 주청신(周靑臣)이 앞으로 나아가 황제의 위덕(威德)을 칭찬하여, “폐하께서 천하를 통일하시고, 제후들의 땅으로써 군(郡)과 현(懸)으로 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은 다 즐거움에 편안하고, 전쟁의 걱정이 없으며, 그 덕을 만세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예로부터 폐하의 위덕을 따를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말했다.
진시황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박사인 제(齊)나라 사람 순우월(淳于越)이 앞으로 나아가서,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은(殷)나라와 주(周)나라가 왕하기를 천여년, 자제(子弟)와 공신(功臣)을 봉(奉)하여 번병(藩屛)으로 삼았다고 하나이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셨으면서도, 자제들은 아무런 벼슬도 없는 필부(匹夫)에 불과합니다.
만일 갑자기 제(齊)나라의 전상(田常)이나 진(晋)나라의 육경(六卿)과 같이 왕실을 빼앗은 역신(逆臣)이 나타날 경우, 황실을 보좌할 제후가 없으면,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나이까? 모든 일은 옛날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서는, 능히 오래도록 보존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나이다.
지금 청신(靑臣)이 앞으로 나와, 폐하의 잘못을 거듭하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나이다. 이런 자는 충신(忠臣)이라고는 말할 수 없나이다.”
진시황은 순우월의 주장을 신하들에게 토의시켰다. 승상인 이사(李斯)가 논하여 말했다. “옛날의 오재(五宰)라고 불려지는 사람들과, 하(夏), 은(殷), 주(周)의 삼대 정치는, 어느 것이나 전공(戰功)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시책으로써 치적을 올린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 도가 상반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폐하께서는 대업을 일으키시어, 만대에 전할만큼 공을 세우셨지만, 이런일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선비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순우월의 말은 하(夏), 은(殷), 주(周)의 3대를 이야기한 것으로, 법도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과거의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에는 유세하는 선비를 초빙했다. 지금은 이와는 달라 천하는 이미 정하여졌고, 법령은 하나로 나오고 있다.
백성들은 집에서 농사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을 배워 금하는 법령에 저촉되지 않도록 힘쓰고 있다. 그런데 여러 학자들은 지금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옛날을 배워, 이로써 현대의 정치를 비방하여 백성들을 당황시키고 있다.
옛날에는 천하가 혼란해져도 능히 이를 통일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후들이 아울러 일어나서, 말은 옛날을 빌려 지금을 배척하고, 거짓말을 꾸며 진실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은 모두가 각자 배운 것만을 선으로 삼고, 위에서 정한 것을 배척했다.
지금은 이와는 달라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고, 흑백을 분명히 밝히시어, 존중해야 할 법도를 오직 나로 정하시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배운 것으로써 서로 모여 법령을 배척하는 자들은, 법령이 내려온 것을 들으면, 각자가 그 학문의 입장에서 미(味)를 토론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이를 비난하거니와, 밖에 나와서는 거리에서 이를 비판한다.
임금을 받드는 일을 자랑으로 삼고, 의(義)를 부르짖는 것을 고상하다고 하여, 제자들을 이끌어 비방케 한다 이와 같은 일을 금하지 않는다면, 위로는 임금의 권위와 세력을 저하시키고, 아래로는 무리들이 세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금하는 일이야말로 몹시 중요하다.”
이사(李斯)의 논의는 점점 구체적으로 들어갔다. “신이 청컨대, 사관(史官)은 진(秦)나라 기록이 아닌 것은 다 불사르라. 박사의 벼슬이 직무상 취급하는 것 이외에, 천하에서 감히 시경(詩經)과 서경(書經)과 백가(百家)의 책을 간직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모두를 군(郡)의 수위(守衛)에게 제출하여, 그 모두를 불사를 것,
감히 시서(詩書)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시서(詩書)를 저자(低資)에 버릴 것, 예로써 지금을 그르다 하는 자는 집안을 모두 사형에 처할 것, 관리로서 이상에서 말한 금지사항을 침범하는 자를 알면서 검거하지 않는 자도 죄는 같다.
명령이 내리고 30일 이내에 불사르지 않는 자는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성을 쌓는 형벌을 처한다. 버리지 않는 것은 의약과 점과 농업의 책이다. 만일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로써 스승으로 삼는다.”
진시황이 이를 채택하여 행한 것을 분서(焚書)라고 한다. 한편 갱유(坑儒)는 다음 해인 35년의 일이다.
진시황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원하여 신성(神性)의 재주를 익힌 방사(方士)를 사랑했다. 그 무렵 특히 눈을 끌어 후대한 것은 후생(候生)과 노생(盧生)이었다. 그러나 재주의 효험이 나타날 경우 그 대접이 대단한 만큼, 그렇지 못할 경우의 위험도 컸다. 두 사람은 받을 것을 받아버리자, 진시황의 부덕을 마구 말하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지금까지 한중(韓衆)이나 서발(徐㧊)과 같은 방사(方士)에게, 큰돈을 사기 당한 진시황은, 이번에 다시 노생(盧生) 등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격노했다.
때마침 함양(咸陽)의 시중(市中)에 내보낸 첩자로부터, 괴상한 언행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학자들이 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화가 난 진시황은 어사에게 명하여 학자들을 남김없이 심문케 했다.
학자들은 죄를 서로 전가시켜, 다른 사람을 고발하고, 자기 자신을 도우려 했다. 그 결과 금령을 범한 사람이 460여명이 있어, 이들을 모두 함양(咸陽)에서 굴을 파고 묻어버렸다. 널리 천하에 알리기 위한 정벌로 한 것이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기원전 222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 시대를 마감한 진(秦)나라 시황제 때의 일이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 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郡縣) 제도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로 개체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 농업)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不老長壽)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한 뒤 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다.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갱유(坑儒)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儒生)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焚書)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秦)제국에서 유가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며, 한(漢)제국이 BC. 191년 새삼 협서율(挾書律; 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을 폐지할 때까지 원칙상 유가의 고전이 자유롭게 학습될 수 없던 것도 사실이라면,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
갱유(坑儒)는 바로 학자들이 자초한 사건이다. 발단은 불로장생(不老長生) 약 때문이지만 진 시황제의 독단을 학자 입장에서 논리적, 학문적, 정책적 반대 의사를 펴 왔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중국은 물로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겼고 있다.
기록이 없는 역사상의 주 내용은 신화(神話)로 구전된다. 그리고 신화는 대부분 세상의 창조에 대한 무문자(無文字)의 구전 기록이다. 창조에 대한 기사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다라서 현재의 역사는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유사 시대에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있었다면 유사 이전엔 신화 날조가 있었다. 고대와 같이 제정일치(祭政一致)의 국가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재편하는 것과 아울러 신화를 날조하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는 일이 이전의 기록들을 모두 불태우는것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5만권의 저서는 전쟁통에 모두 다 태버렸다.
수메르가 서기 2000년 무렵 멸망하고 마르둑이 바빌론에서 신위(臣位)에 오르자, 처음으로 서둘러 행했던 일은 신년 경축의식 아키투(Akitu)였다.
이것은 우주의 생성 신화와 아눈나키 하늘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로 조작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는 의도에서 베풀어진 새해 첫날의 축하연이었다.
창조의 서사지(敍事誌)는 그런 이유로 마르둑이 날조했던 가장 큰 신화였다. 맹주인 12번째 행성 나비루란 이름이 마르둑으로 바뀌어 우주 최고의 신이 된것이다.
1933년 독일의 히틀러도 정권을 잡자 제일 먼저 행한 일이 그들에게 건전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책들을 태우는 일이었다.
한인(漢人) 한웅 단군시대(檀君時代)로 이어져 오던 한민족의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은 BC 238 년 47대 고역가 단구의 폐관(廢館)으로 없어지고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삼국시대가 열리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맞이한다.
단군조선 이후 현 중국의 첫 왕조로 알려진 진시황도 막강한 힘을 휘둘러 주병의 6개국을 복속시켜 진(秦)나라를 세웠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 역시 책을 태워 없애 버렸는데 그것이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이때 동이족(東夷族)의 역사를 감추려고 고대사(古代史) 책을 불사르고 학자 460명을 생매장하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부터 우리 역사는 감춰지기 시작했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도 마찬가지다. 고구려 역사와 전통문화 등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를 중국 변방 제후국 문화식민지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래서 동북공정은 현대판 중국의 문화침략이고 제2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간도(間島)와 북한(北韓) 등에 대한 영토분쟁에 대비한 사전 정비작업으로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함으로써 유사시 북한땅에 대한 중국 개입의 근거를 만들려는 것이다. 중국은 백두산(白頭山)에 이어 두만강(豆滿江) 유역의 나진항(羅津灣)을 북한으로 부터 50년간 개발 사용권을 계약하고 개발중에 있다.
또한 발해사(渤海史)에 이어 단군조선과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고 버젖이 고조선사화(古朝鮮史話), 부여사화(夫餘史話), 고구려사화(高句麗史話) 등의 날조한 역사서적을 내 놓았다.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민족(漢民族) 조상들의 혈통까지 통째로 빼앗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 문화가 중국것이 되면 단군 이전의 역사는 자연히 중국 역사로 편입되며 이 지역의 뿌리는 중국이 된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진시황이 민간의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인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로 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데 황제(皇帝)는 여기서 따왔다. 최초의 시황제(始皇帝)는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의 영정(嬴政)이 스스로 칭해 진시황(秦始皇)이 됐다. 성군인 삼황오제의 기운을 잇는다고 한 진시황은 최초의 통일제국 완성, 군현제 실시로 강력한 중앙집권정책 시행, 이민족을 물리치고 만리장성 건설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덮고 진시황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폭정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해 책을 불태우고(焚書), 유생들을 한 구덩이에 묻어 죽인(坑儒) 일이다. 진시황을 가리킨 조룡지학(祖龍之虐)이나 진화(秦火)라 해도 같다.
이 두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은 아니고 '사기(史記)'나 '전국책(戰國策)' 등 여러 곳에서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219년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초(楚) 출신의 지략가 이사(李斯)의 건의로 군현제를 실시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다스렸다. 몇 년이 지나자 권력에서 멀어진 왕족과 세력가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사가 상소를 올려 이전에는 천하를 통일할 강력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군웅이 할거했으나 이제는 강력하게 단속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설을 막으려면 의약과 농업 등 필수적인 것을 제외하고 불태워야 한다고 했다. 진언을 옳게 여긴 황제는 죽간과 목책 등을 모두 수거한 뒤 불을 질렀다.
시황제가 나이가 들어 불로장생의 신선술에 관심을 갖고 방사들을 초청해 후대했다. 서복(徐福)이라고도 하는 서불(徐市)은 불사약을 구한다며 사라졌고,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하고서 진시황의 부덕을 비난했다.
분노한 진시황은 비방하는 서생들을 함께 몰아 460여 명을 함양(咸陽) 성 밖의 구덩이에 산채로 묻어버렸다. 서기전 212년의 일이었다. 각각의일이 성어로 한곳에 쓰인 것은 전한(前漢)의 학자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서(尙書序)'라 한다. "선대의 전적을 모두 없애고 서적을 불태웠으며 유학자들을 산 채로 묻어버렸다(滅先代典 焚書坑儒)."
학정을 숨기고 불평불만을 잠재우려는 권력자의 학정이 종종 여기에 비유된다. 최근에는 당나라 시인 장갈(章碣)의 '분서갱(焚書坑)'이 화제가 됐다. '죽간 비단의 연기 없어지자 제국도 허공으로(竹帛煙消帝業虛)' 사라졌는데 정작 뒤에 나타난 '유방과 항우는 원래 책을 읽지도 않았다네(劉項元來不讀書)'라며 막아도 소용없다는 비유였다.
이 글을 올린 중국의 기업가가 권력자 시진핑(習近平)을 비판했다고 해석돼 온갖 압박을 받았다. 아무리 입을 막고 눈을 가리려 해도 음모는 드러나니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 焚(불사를 분)은 회의문자로 燓(분)은 본자(本字), 炃(분)과 燌(분)은 동자(同字)이다. 火(화; 불)과 林(림; 나무)의 합자(合字)이다. 나무를 태워 사냥함의 뜻이다. 그래서 焚(분)은 ①불사르다(불에 태워 없애다) ②타다 ③불태우다 ④넘어지다 ⑤넘어 뜨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불사를 작(灼), 불사를 소(燒)이다. 용례로는 몸을 불사르는 것을 분신(焚身), 불에 타서 죽음 또는 그 일을 분사(焚死), 향불을 피움을 분향(焚香), 집안의 재산을 다 없애 버리는 것을 분탕(焚蕩), 문권을 불살라 버림을 분권(焚劵), 단향을 피움을 분단(焚檀), 불 살라 없애 버림을 분이(焚夷), 불을 지르고 약탈함을 분창(焚搶), 불 살라 태움을 분훼(焚燬), 아궁이를 분구(焚口), 태워서 죽임을 분살(焚殺), 읽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책을 불살라 버림을 분서(焚書), 부처 앞에 향불을 피우고 불도를 닦음을 분수(焚修), 옛날에 죄인을 불에 태워 죽이던 형벌을 분형(焚刑), 불을 사름 또는 그 활활 타는 불을 분화(焚火), 불에 태움을 소분(燒焚), 옥과 돌이 모두 불탐을 구분(俱焚),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하여 죽인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자기의 몸에 불을 질러 목숨을 스스로 끊음을 분신자살(焚身自殺), 적을 치러 가면서 배를 타고 물을 건너고 나서는 그 배를 태워버린다는 뜻으로 필사의 각오로 싸움에 임함을 제하분주(濟河焚舟), 옥과 돌이 함께 불타 버린다는 뜻으로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함께 망함을 이르는 말을 옥석구분(玉石俱焚) 등에 쓰인다.
▶️ 書(글 서)는 ❶회의문자로 书(서)는 간자(簡字)이다. 성인의 말씀(曰)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글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書자는 ‘글’이나 ‘글씨’, ‘글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書자는 聿(붓 율)자와 曰(가로 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聿자는 손에 붓을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붓’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말씀’을 뜻하는 曰자가 더해진 書자는 말을 글로 적어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曰자가 먹물이 담긴 벼루를 표현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書(서)는 성(姓)의 하나로 ①글, 글씨 ②글자 ③문장(文章) ④기록(記錄) ⑤서류 ⑥편지(便紙) ⑦장부(帳簿) ⑧쓰다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월 문(文), 글 장(章), 문서 적(籍)이다. 용례로는 책 또는 경서와 사기를 서사(書史), 편지를 서신(書信), 글 가운데를 서중(書中), 남이 하는 말이나 읽는 글을 들으면서 그대로 옮겨 씀을 서취(書取), 책을 넣는 상자 또는 편지를 넣는 통을 서함(書函),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을 서가(書家), 글방을 서당(書堂), 글씨와 그림을 서도(書圖), 책의 이름을 서명(書名), 대서나 필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서사(書士), 글자를 써 넣음을 서전(書塡), 책을 보관하여 두는 곳을 서고(書庫), 남편의 낮은 말서방(書房), 책을 팔거나 사는 가게서점(書店), 이름난 사람의 글씨나 명필을 모아 꾸민 책을 서첩(書帖), 글씨 쓰는 법을 서법(書法), 유학을 닦는 사람을 서생(書生),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를 서동(書童), 글씨와 그림을 서화(書畫), 문서를 맡아보거나 단체나 회의 등에서 기록을 맡아보는 사람을 서기(書記), 글씨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을 서도(書道), 책 내용에 대한 평을 서평(書評), 글자로 기록한 문서를 서류(書類), 책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을 서재(書齋), 문자의 체제를 서체(書體),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는 서불차인(書不借人), 편지로 전하는 소식이 오고 간다는 서신왕래(書信往來) 등에 쓰인다.
▶️ 坑(구덩이 갱, 산등성이 강, 구들 항)은 형성문자로 坈(갱), 阬(갱)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텅 빈 데의 뜻(空; 공)을 나타내기 위한 亢(갱, 항)으로 이루어졌다. 큰 구덩이의 뜻이다. 그래서 坑(갱, 강, 항)은 (1)구덩이 (2)갱도(坑道) (3)사금광(砂金鑛)에서, 퍼낸 물을 빼기 위하여 만든 도랑 (4)구덩이에 묻음, 따위의 뜻이 있다. ①구덩이(땅이 움푹하게 파인 곳) ②광혈(鑛穴: 광물을 파내기 위하여 땅속을 파 들어간 굴) ③갱도(坑道) ④뒷간 ⑤(구덩이에)묻다, 그리고 ⓐ산등성이(강) 그리고 ㉠구들(방바닥을 만들고 불을 때어 난방을 하는 구조물), 온돌(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구덩이 감(坎), 구덩이 참(塹), 해자 호(壕)이다. 용례로는 갱내나 갱도에 버티어 대는 통나무를 갱목(坑木), 중국의 진시황이 수많은 유생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을 갱유(坑儒), 땅 속에 뚫어 놓은 길을 갱도(坑道), 갱도의 들머리를 갱구(坑口), 광산이나 탄광 따위의 굴의 내부를 갱내(坑內), 광산이나 탄광 따위의 굴의 바깥을 갱외(坑外), 갱도의 출입구에 설치해 놓은 문을 갱문(坑門), 광산의 갱내에서 채굴 작업에 종사하는 인부를 갱부(坑夫), 구덩이 속에 산 채로 잡아넣고 묻어 죽임을 갱살(坑殺), 길이가 짧고 방처럼 된 갱도를 갱실(坑室), 굴 속으로 뚫린 길을 갱지(坑地), 모래땅으로 이루어진 갱을 사갱(沙坑), 석탄을 파내는 구덩이를 탄갱(炭坑), 광물을 파내기 위하여 광산에서 굴을 뚫음을 개갱(開坑), 광물을 캐기 위해서 판 구덩이를 광갱(鑛坑), 광산이나 탄광에서 수직으로 파 내려간 갱도를 수갱(垂坑), 광산에서 땅 속에 수평으로 판 갱도를 횡갱(橫坑), 드러나지 않게 몰래 파 놓은 구덩이를 은갱(隱坑), 갱내의 붕괴를 방지하는 일을 보갱(保坑), 탄갱이나 광산을 폐지함 또는 폐지된 탄갱이나 광산을 폐갱(廢坑),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하여 죽인다는 뜻으로, 진나라의 시황제가 학자들의 정치 비평을 금하기 위하여 경서를 태우고 학자들을 구덩이에 생매장하여 베푼 가혹한 정치를 이르는 말을 분서갱유(焚書坑儒) 등에 쓰인다.
▶️ 儒(선비 유)는 ❶형성문자로 伩(유)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은덕(恩德)을 베풀다의 뜻을 가지는 需(수, 유)로 이루어졌다. 덕(德)을 가지고 사람에게 은덕(恩德)을 베푸는 사람, 학자(學者), 특히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儒자는 ‘선비’나 ‘유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儒자는 人(사람 인)자와 需(구할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선비란 학식이 있는 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이 유교를 이념적 기반에 둔 이후 유교나 선비는 조선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됐었다. 儒자에는 그러한 의미가 잘 담겨있다. 儒자에 쓰인 需자는 ‘필요하다’나 ‘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필요하다'라는 뜻을 가진 需자에 人자가 더해진 儒자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儒(유)는 ①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학자(學者) ②유교(儒敎), 유가(儒家) ③난쟁이 ④억지로 웃는 모양 ⑤나약(懦弱)하다, 유약(柔弱)하다 ⑥너그럽다, 부드럽다 ⑦어색(語塞)하다 ⑧짧다, 키가 작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선비 사(士), 선비 언(彦)이다. 용례로는 유도의 도를 닦는 선비를 유생(儒生), 검은 베로 만든 유생의 예관을 유건(儒巾), 유생들이 쓰던 관을 유관(儒冠), 유교와 불교를 유불(儒佛), 선비 출신인 장수를 유장(儒將),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를 유종(儒宗), 공자의 도를 배우는 전통적인 선비 공부로서의 동양 철학을 유학(儒學), 유도를 닦는 학자들을 유림(儒林), 유생들이 정한 벌칙을 유벌(儒罰), 유생들이 입는 의복을 유복(儒服), 유가에서 쓰는 책을 유서(儒書), 유생이 연명하여 올리는 상소를 유소(儒疏), 유교식으로 거행하는 제사를 유제(儒祭), 유적에 든 유생으로 편성된 패를 유패(儒牌), 유생의 모임을 유회(儒會), 이름난 유학자를 거유(巨儒), 늙고 덕이 있는 선비를 숙유(宿儒), 이름난 선비를 명유(名儒),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를 우유(迂儒), 세상일에 통달하고 실행력이 있는 유학자를 통유(通儒), 언행이 일치하지 아니하는 유학자를 도유(盜儒), 견식이 좁고 마음이 간사한 선비를 벽유(僻儒),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운 선비를 돈유(惇儒), 생각이 낡아 완고하고 쓸모 없는 선비를 부유(腐儒),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하여 죽인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 나이가 많고 학식이 풍부한 선비를 노사숙유(老士宿儒),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일을 배불숭유(排佛崇儒)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