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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설이 발표된 1955년 4월은 3년에 걸쳐 계속되었던 6.25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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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한 것은 김정일뿐만이 아니었다.
김일성도 냉엄한 사태에 대한 위기감이 점점 더하여 갔다.
1980년 조선노동당 제 6차 대회에서 김정일을 정식으로 후계자로 공표하고
서서히 구에게 권한을 이양하였다.
80년대 말에는 외교분야의 일부분의 일 이외는 모두 김정일에게 일임한 상황이었다.
집안일을 거의 자식에게 맡긴 집안의 어른과 같은 김일성이었으나
사태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김정일 혼자서 극복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또 한번 내가 나서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밀어닥치는 미증유의 위기 때문이었다.
1948년 9월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40여년 동안
이와 같은 위기는 일찍이 없었다.
최대의 후견자였으며 사실상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북한을 버린 것이다.
1958년 고르바초프 등장 이래 페레스트로이카 라는 슬로건 아래
모든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재정적 부담이 크고 귀찮은 분쟁만을 일으키는 북한의 소련으로서는 큰 짐이 되고 있었다.
1988년에 「앞으로는 북한에 무기원조를 하지 않겠다는 통고」를 한 것을 시작으로
무역결제의 수단은 이제부터는 국제통화 방식으로 하겠다는 통고를 한 것이 1990년이고,
다음해인 91년부터 실행되었다.
북한과 소련의 무역고는 예를 들면 1989년의 경우
소련으로부터 수입이 대략 16억4천만 불, 소련에로의 수출은 8억1천만 불,
북한이 8억불의 수입초과였다.
이 해의 북한 국가예산이 340억원,
달러로 환산하면 1억7천만 불 (원과 달러의 교환 비율은
공정가와 실세 사이에 큰 차이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실세로 하여 1$=200원으로 계산) 국가예산의 5배에 가까운 물품을
사실상의 원조로 받고 있었다.
이 구도는 북한 창건 이래 거의 변하지 않았다.
「자주의 나라이며 주체의 나라」라고 큰 소리 치면서도
실제는 소련에 완전히 기대고 있는 종속국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이 왠지 90년 9월에 북한으로서는 최대의 경쟁자인 한국과 국교를 체결한 것이다.
오랜 종주국과 같았던 관계를 버리고
새롭게 부상한 한국과 국교를 맺은데 대하여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달러 때문에 사회주의를 배신한단 말인가」라고 욕을 해 보았자
어차피 냉엄한 국제정세는 어쩔 수 없었다.
소련에 이어서 중국도 1992년에 한국과 국교를 체결하였다.
최대의 스폰사였던 양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의지할 곳없는 고립무언의 북한이
핵무기에 손대기 시작한 것이 이와 같은 환경에서였다.
무상원조를 받아 왔던 소련의 중유와 소맥 등
식량을 모두 돈으로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외화가 바닥상태에 있는 북한으로서는 살 능력이 없었다.
바로 에너지난, 식량난이 닥쳐왔다.
기름이 없으면 북한의 중유발전이 멈추게 된다.
석탄에 의한 화력발전소는 있지만 석탄을 채굴하려고 해도 전기가 없다.
공장은 쉬게 되고 출근해봤자 일거리가 없다.
배급식량은 감량되고 비실거리는 노동자가 직장 여기저기에 주저앉아 있거나,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이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내가 특파원으로 평양에 상주하고 있었던 1972년부터 73년은
북한경제가 순조롭게 전개되어 자신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우리들이 거주한 외국인 숙소에서도 한주에 한부 번 저녁 무렵에
1시간 정도의 정전이 있었다.
전기가 안 들어와 일을 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게 된다.
그것이 스파이 활동으로 의심받게 된 한 원인이 되었지만 말 이다.
그 당시 가로등도 켜 있었고, 중심부에는 부분적으로 네온도 켜져 있었다.
1990년경부터는 실로 암흑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라고 북한을 탈출한
김정일의 처 언니인 성혜랑이 「북한은 아직 멀었다」라는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
에너지난과 식량난이 90년부터 심각해졌다.
일반적으로 북한의 식량난과 아사자의 발생은
1995년의 대홍수가 원인이 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90년 가을수확 후부터 시작되었다.
이 문제는 제 3장의 1에서 자세하게 쓰겠다.
하루 두 끼 운동이나 허리띠 졸라매기 운동이
상부로부터 장려된 것도 1991년경부터다.
식량부족으로 도둑질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
월 2회씩 배급되는 식량배급소에서도 소란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탈북자의 말에 의하면 배급소에 가도 확실하게 배급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배급소에는 일정한 량의 식량이 확보되었다고는 하지만 과부족이었다.
「이제 없어졌다. 이 이상은 줄 것이 없다」라고 선언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기에 앞 다투어 줄을 선다.
새치기도 하고 열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생겨 질서가 문란하게 된다.
모두가 배가 고프니 싸움질까지 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배급 정도는 정확하게 내라」「윗놈들은 무엇들 하는거냐」라는
격화된 노성이 들려온다.
그러면 반정부적인 무드로까지 간다.
공동화장실에 식량부족에 관한 낙서가 무척 많아졌다고 한다.
김일성을 보고 「죽 장군」이라고 야유하기도 하고 봄에는 들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도토리를 줍기 위해서 열 지어 산에 올라가게 되는 데
이를 「개미의 행렬」이라는 음어로 말하고 있다.
협동농장의 작물에도 손대게 되고 배급소의 식량도 도둑질 해 간다.
배급증명서의 위조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식량을 뺏기 위하여
길가는 사람을 위협하고 금품을 약탈하는 행위도 각지에서 일어났다.
1991년 8월 27일에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는 신의주에서
4000여 명이 식량배급에 불만을 품고 시내에 띄어 나와 데모를 하였다고
일본의 산게이 신문이 보도한 바도 있다.
김일성 부자는 불안과 공포가 쌓이게 되고 심상치 않은 사태로 느꼈다.
이제는 통상적인 사회안전부의 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군대를 확실하게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인민들과 군대가 결속하는 것이다.
김 부자에게는 생각만으로도 무서운 악몽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군과 인민의 결합은 막아야만 한다.
김일성이 재빨리 치고 나온 필사의 생존 책을 살펴보도록 한다.
-계속-
(5)
군부 강화로 재빨리 움직인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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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직면한 김일성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소련의 원조가 끊어지자 이를 메꾸기 위하여 일본에 공작을 집중하고
90년 9월 28일 당시 김환신 자민당 부총재가 사회당의 부위원장을 평양에 초청하고
자민당, 사회당, 조선노동당의 소위 3당 공동성명을 만들어
일·북 국교정상화의 조기실현과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배상금 지불의 약속을 받아냈다.
91년 9월에는 방대하고 있었던 UN가입에도 응했다.
그해 12월에는 오랜 숙적이었던 통일교의 교주이며
국제승공연맹의 최고책임자 문선명을 평양에 초대하여
국빈 대우로 대접하고 거액의 재정지원을 받아냈다.
무엇보다도 군의 태세를 공고히 하는데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동구의 사태에서 보더라도 무엇보다 긴급한 것은 군의 강화였다.
군의 강화야말로 사회주의를 지켜내는데 있어서 결정적 열쇄가 되는 것이다.
군을 강화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차우세츠크는 처형된 것이다.
군과 인민이 하나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
군 장악에 대책을 확실하게 세워서 김정일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정일이도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김일성은 생각하였다.
김일성은 1990년 초부터 아들로 하여금
군을 장악시키려는 태세를 만들기 위해서 재빠른 움직임을 보인다.
그는 먼저 4년에 한번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6개월 이상 일찍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1990년 4월 22일로 앞당기어 선거를 실시하였다.
새로운 대의원 687명에 의한 제1회 회의가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평양의 만수대 의사당에서 개최되었다.
김일성은 중요한 제안을 하였다.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신설이었다.
언제나 만장일치의 투표장치인 국회를 통과시켰다.
지금까지는 국방위원회는 정무원의 산하에 있었고 인민무력부와 같이
국방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정부의 한 기구였던 국방위원회가
정부의 지휘 하에서 벗어나 독립된 한 기관같이 되었다.
헌법상의 규정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결정이었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발표문에서도 “국방위원회가 조직되었다”라고만 했다.
위원장 김일성, 제1부위원장 김정일, 부위원장에 오진우, 최광,
위원에는 전병호, 김철만, 이하일 등 7명이 임명되었다.
당의 직책만 맡고 있었던 김정일이 국가 기구의 중요한 포스트에 취임한 최초가 되었다.
이 결정이 그 후 북한의 정치체제 변경을 의미할 만큼
중대한 움직임이 시초인 것을 감지하는 사람은 당시에는 많지 않았다.
민중반란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은 군사력뿐이다.
김일성은 젊은 시절 구 만주에서 경험한 게릴라 투쟁에서
무력에 의한 억압통치방법을 배웠다.
「정권은 총에 의해서 수립되고 총에 의해서 지켜진다.」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었다.
군의 강화만이 생명이다.
동구 사회주의제국과 같은 체제변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반혁명에는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분쇄해야만 된다.
김일성이 군의 힘에 대해서 가일층 주목하게 된 것은
1989년 6월초에 일어난 중국의 천안문 사건에서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국의 청년 학생들은
소련대통령 고르바초프의 중국방문에 때를 맞추어 천안문에 천막을 치고 연좌하였다.
등소평은 이에 대해서 전차 다수를 동원하여 순식간에 밀어붙이고 밟아 죽였다.
사망자 2000명, 부상자가 3만 명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본 김일성은 역시 당의 군대란 저렇게 해야 된다.
반혁명 분자들은 한 순간에 때려 부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해 10월 중국 국경절에 김일성의 축전에는
「반혁명폭란」을 즉각 평정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되어 있다.
김일성이 다음에 취한 조치는
91년 2월 24일 자기가 오랜 동안 장악하여 왔던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의 직위를
김정일에게 이양한 것이다.
최고사령관의 축하피로연이라고나 할까 화려한 무대는
1992년 4월 25일의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의 군사 퍼레이드였다.
이때 김정일은 처음으로 군중 앞에서 한마디를 발표하였다.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있으라!」
소심공포증으로 사람 앞에서 연설을 싫어하고 피해 다니던 김정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도망치고 숨어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날 드디어 무대 중앙의 화려한 단상에 올라 즐비하게 늘어선 마이크 앞에 선 것이다.
주위에는 당 이나 군의 간부들, 내빈으로 참석한 캄보디아의 시아누크공 등이 있었다.
그 옆에서 김정일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는 김일성, 비디오의 영상이 그의 표정을 촬영했다.
「잘 할 수 있을까」소학생인 아들의 학예회를 지켜보는 부모의 표정은 걱정스러워 보였다.
단지 한마디였지만 김정일은 그런대로 그 장면을 견디어냈다.
김일성도 아마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김일성이 걱정되는 것은 김정일에게는 군 경력이 없는 정이다.
인민군의 최고사령관에 임명하였지만 그 방면의 경렬은 전무하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들여온다.
「군대경력도 없는 자가 최고사령관이야!」
1992년에 발생한 소련의 사관학교 후룬제 군사대학에 유학했던
인민군 젊은 간부들에 의한 쿠테타 음모사건도 김정일을 깔 본데서 일어난 것이다.
이 음모사건이란 지난 인민군 창건 60주년기념 퍼레이드 때에
전차로 김일성, 김정일 등 단상의 수뇌들을 포격하여 이를 일순간에 타도하는 계획이었으나
소련 측에서 정보가 누설되어 일망타진되어 처형된 사건이다.
영화나 연극에는 다소 재능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통솔하기에는 그것으로는 안 된다.
더욱 반혁명의 험난한 폭풍이 불어 닥칠 조짐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군사 면에서 만이라도 확실하게 혼자 헤쳐 나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일성의 다음계획은 헌법의 대폭 개정이었다.
1992년 4월 8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 9기 제 3차 회의에서
헌법을 20년 만에 개정하였다.
개정의 주된 것은 국가주석의 권한 축소와 국방위원장의 격상이었다.
이제까지의 「사회주의헌법」에서는 국가주석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92년의 개정으로 그것들을 삭제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절대적인 권한이다.
권한을 빼버린 주석의 지위는 이제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면 군의 통수권은 어디로 옮겨졌는가? 국방위원회이다.
90년 5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정부산하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킨
김일성의 의도는 이 헌법 개정으로 확실히 드러났다.
국방위원회를 주석보다도 강대한 권한을 갖는 기관으로 바꾼 것이다.
개정된 헌법의 조문에 의하면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111조)이며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은 모든 무력을 지휘 통솔한다」(113조)라고 되어 있다.
국방위원회의 활동은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116조)로 되어 있어
정부의 통제로부터 독립되었다.
김일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군에 대한 권한을 모두 아들에게 양보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의 대폭 개편에 의해서 1993년 4월 8일부터 1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김일성을 대신하여 김정일이 선출되었다.
명실공히 군 뿐 아니라 정부에도 군림하는 권한을 갖는 국방위원회 의장이다.
모든 것이 김일성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90년 4월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의 조기 실시로부터 시작하여
그해 5월에 국방위원회를 정부에서 분리 독립시킨 조치는
실로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정치체제를 완전한 군사독재체제로 변경하는 것과,
자기 자식과 군을 정부의 최고권력자로 밀어 올리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때에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에의 실질적인 권력의 승계는 끝난 것이다.
김일성만의 의도였는지 여부는 의론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91년 12월 24일에 김정일이 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에는
김정일은 아직 부친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뒤에 김정일 발언이 노동신문에 소개되었다.
「피눈물의 해가 저물어간 어느 날 경애하는 장군님(김정일-인용자)께서는
활동가들에게 열정어린 어조로서 말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수령님(91년)이 12월 24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자고 하신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12월 24일은 모친의 생일이다.
나는 수령님이 12월 24일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열고
나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에 추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2000년 12월 22일「정론, 백두의 총의 혈통」)」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김정일은
부친의 군 중시 방침을 깊이 감지하고 자기도 그것에 힘을 모아 부자
공히 북조선의 체제를 군부 중심으로 변화시켜 나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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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치밀하게 계산된 모험적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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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을 군의 정점에 앉혀 군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태세를 만들었다.
그러나 에너지난, 식량난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는 확산되고 있었다.
엄격한 언론통제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사회주의국가의 연속된 붕괴소식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필사의 생존책을 강구하고 있던 김일성에게 한 생각이 떠올랐다.
계엄령에 의하지 않고서도 군과 민간인의 접촉과 연결을 차단한다는 묘책이다.
핵무기 개발의 사실을 일부러 유포시켜 한반도의 “핵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미국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건 정책을 연출한 것이다.
핵 불확산조약(NPT)을 위반하여 미국을 화나게 하고 개입시켜
자칫하면 제2의 한반도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상황을 만들어 내어
인민의 불만을 반미운동으로 되 바꿔놓게 하는 교활한 기책이었다.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차이고 건국 이래 위기를 만난 김 부자는
핵을 이용하여 미국을 유인하여 “핵 대결”을 연출하였다.
이 술책에 미국이 감쪽같이 말려듦으로써 김 부자는 궁지에서 벗어났다.
식량부족에 대한 불평불만을 이와 같이 일갈로 눌러버린 것이다.
「미국이 지금이라도 쳐들어오려고 하는 판에 배곯는 것이 문제인가?
미 제국주의 놈들에게 목숨도 빼앗길 수 있다」며
인민의 불평불만을 미국 제국주의를 증오하는 것으로 돌려댔다.
계엄령을 발령하지 않고 전국토를 군의 통제 하에 두게 되었다.
인민의 반정부 행동에 군대가 가세한 루마니아와 같은 사태도 피할 수가 있었다.
병사들은 휴가도 없이 병영 내에 가둬 두었다.
원래 북한 인민군 병사의 병역의무는 10년이었으나 13년으로 연장되었다.
집에서는 부모들이 굶어 죽어가는 비참한 장면을 보지도 못하고
「인민은 모두 잘 생활을 하고 있다」라는 당국의 허위선전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김정일은 농민을 협박하여 그들이 얼마쯤 감추어 둔 식량까지도 약탈하여 가져갔다.
「전선에서 싸울 군대에 군용미 공급이 안 되어 배가 고파서 싸우지 못하게 되면
너희들도 노예가 되고 만다.」라고 공갈하였다. (週間文春 97년 4월 3일호)
「북조선의 참상을 인정한 김정일서기 비밀연설의 전모」
6.25전쟁의 비참한 경험으로 미국이 공격하여 온다면 북한의 인민은 무조건 단결한다.
참으로 교묘하고 교활한 기책이었다.
나의 견해를 2003년 3월에 낸 문춘신서 「납치와 핵과 아사의 나라 북한」에서
가설로 나타냈다.
이 가설은 많은 전문가로부터도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북한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현재 진행 중인 문제이고
앞서의 졸저와 약간의 중복되지만 가설에 이르는 경위를 기술하고자 한다.
핵 위기를 일부러 연출하였다는 것을 가장 알기 쉽게 알려준 것은
전 국제원자력기관 홍보부장의 吉田庸彦(길전용언)씨였다.
吉田庸彦씨 논문 「북한의 핵 의혹과 포스트 냉전기의 살아남기 전략」
「움직이기 시작한 한반도」(일본평론사 2000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美·佛(미.불)의 정찰위성이 촬영한 연변지구에서의 핵개발 의혹이 밝혀짐으로서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포스트 냉전기의 체제유지를 위하여 미국을 교섭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필사적이었으나
상대를 하지 않으니「핵 개발을 하고 있는 증거」를
하늘을 날고 있는 인공위성이 볼 수 있게끔 실력행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북한의 이 전략은 그 후 10년간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으며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이 시점에 있어서의 북한 「핵 개발 증거」는
순전히 “외교카드”였다는 것이 오늘의 상식이다.
북의 지도부는 미국의 핵전력 실태를 잘 알고 더욱이 핵 개발에는
막대한 자금과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미국을 교섭의 테이블에 앉게 하여
미·북 교섭으로 외로운 고립과 체제 존망의 위기를
한꺼번에 극복하려는 궁리를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워싱턴에서 처음 만나 친해진 차크 다운즈씨의 북한의 교섭전략에서도
이런 한 구절을 보았다.
북한의 핵 위기는 교묘하게 만들어 낸 것이며 그리고 잘 이용했다.
차크 다운즈씨는 1993년부터 4년의 「북한의 핵 위기 때에 국방총성에 있었던 간부였다.
지금은 북한 문제의 연구자, 상담역으로서 국방총성과 국무성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핵 위기는 교묘하게 조작된 것」이라는 내력에 대해서
나는 소위 핵 의혹은 북한에 의해서 고의로 조작되었다는 의미이냐? 라고
메일로 질문을 했다.
그는 곧 답변하기를 “그렇다. 1994년의 위기라는 것은 자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계획하고 조작해서 실행한 것이다.
미국을 위협하고 그것을 없앨 것을 이유로 돈과 물자를 요구하기 위해서다”라고 답하였다.
「납치와 핵과 아사의 나라 북한」이라고 하는 책에 썼으나
그 후 나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몇가지 설을 알게 되었다.
그 하나는 북한에서의 탈북자로서 지금 서울에 거주하는 박일씨의 논문이다.
탈북자 동지회의 회보 「망향」(현재는 탈북자들로 개칭)의 1999년 9월호 논문
-「차우세츠크의 말로가 김정일에게 준 교훈」이라는 것인데
박일씨의 말에 흥미 깊은 것은 핵 위기의 연출은
저권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독재정권은 국민의 정치사상과 생활에 대해서 통제와 지배를 통하여
사회적 단결과 결속을 도모하는 것을 체제유지의 필수 수단으로 하여 왔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단결과 결속이 통제와 세뇌만으로 어렵다고 판단되면
독재자가 취하는 수법은 외부에서의 위험과 압력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러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유발시켜
나라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해서 국민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핵 위기의 연출은 북한으로서는 살아남기 위한 기사회생의 방책이었다.
계속하여 박일씨는 이 논문에서 루마니아는 붕괴되었는데
북한은 왜 붕괴되지 않았는가라는 흥미 깊은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것은 루마니아는 외부에서의 위험을 가할 “필요 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변국이나 서방 세력으로부터의 어떠한 긴장도 느끼지 못한
평화의 분위기 속에서 루마니아 국민들은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래 사상적, 정신적으로 단결하여 외부세력에 대항하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체제붕괴에 따른 국민 개인의 운명의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이
생각대로 체제교대를 단행할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 등 외부세력과의 대결구도가
그 체제유지에 크게 역할을 해주고 있는 “혜택 받고 있는 상황”에 있다.
불행한 차우세츠크에 비하면 김정일은 외부의 봉쇄나 위협의 구실 뿐만 아니고,
홍수와 가뭄 등 책임전가의 자료가 많은 행운에 쌓여 있었다.
북의 사정에 정통한 탈북자이기 때문에 눈이 예리 하였다.
여담이지만 내가 특파원으로 북한에 상주하면서 최초로 알게 된 북의 기만이 이것이었다.
나라의 분단 상황에서 제일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이 김일성 체제였다.
말로는 남북통일을 일일천추의 생각으로 갈망하고 있다고 하면서
통일을 제일 싫어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통일이 되면 체제는 붕괴도고
일족은 다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가설에 가까운 또 하나의 말은 주 말레시아 한국대사관의 공사 등을 역임한
한국의 전 외교관 김경준씨의 이야기이다.
미의회 도서관에서 읽던 한국의 잡지 「북한」의 94년 9월호에 게재된 내용이다.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김일성의 정책은
고도의 정치적 배려와 치밀한 계산에 의한 북한정권의 살아남기 위한 모험적 게임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김일성 정권이 급격한 외부의 변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국내경제의 파탄, 후계자 문제 등 국내정치의 심각한 위기상황에 부딪치자
정권유지의 차원에서 핵 개발을 시도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치밀한 계산된 모험적 게임」이라는 말이 나의 추측을 뒷받침하게 되어서 기뻤다.
2003년 9월 서울방문 시에 어떻게든지 만나고 싶어 그 분을 찾았다.
언제나 서울취재 시에는 들려서 도움을 메일신문 서울지국의 직원 김선희씨가
PC로 즉시 찾아 주었다.
30이 지난 아주 총명한 여성이다.
“하기하라씨 말씀하세요.”지금 김경준씨가 전화에 나와 있다고 한다.
김경준씨는 곧 코리아나호텔 커피으로 와 주었다.
지금은 외무부를 정년퇴직하고 자택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400편 정도의 미국인 논문을 PC로 검색하고 매일 읽고 있다고 한다.
「치밀하게 계산된 모험적인 게임」이라는 분석에 크게 의욕이 생겨
그 관점으로 지금 새로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이전에 싸인해 둔 나의 문춘신서를 드렸다.
“영광입니다.”라며 감사히 받아 주었다.
김경준씨는 말하였다.
「북한은 이미 망한 나라다. 내버려 두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의 책략에 걸려들었어요. 말만 하는 것만이 외교는 아니다.
무시하는 것도 외교지요.」무시하면 되는 것을 클린턴 정권은 북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북에는 거래의 자료가 아무것도 없다. 자료가 없으면 누구나 쳐다보지도 않는다.
건덕지가 있어야 거래가 되는게 아닙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때에 “건덕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도중에 질문하거나 물어보게 되면 말의 흐름을 자르게 되어
뒷말이 이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는 다음에 나오게 될 중요한 말을 잊어버리게 하는 일도 있다.
그런 실패도 과거에는 몇 번 있었다.
취지의 철칙은 취재 도중에 말을 방해하지 않는 일이다.
나는 알아들은 척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냄비 속에 알맹이가 없으니 누가 식탁에 와 않겠는가?
그 건덕지에 해당되는 것이 핵무기라고, 김씨는 한국 사람답게 비유로 설명했다.
치밀하게 차려진 냄비가 있는 테이블에 어슬렁어슬렁 미국이 찾아왔다.
구 소련시대부터 북한 경제를 연구한 러시아인 나타리아바사노바 여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북한의 핵무기는 극동에 있어서 긴장을 높이기는 했으나
그 덕으로 북한의 전 지배계급에 도움이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인민들의 그날그날의 불평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함으로서
북의 지배계급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핵폭탄을 가짐으로써 인민을 두려워 떨게 할 수도 있고
그 결과 그들을 더 한층 유순하게 복종시킬 수도 있었다.”(북한의 핵문제 p136)
바사노바 여사는 핵무기에 의해서 인민의 불평불만을 따돌렸을 뿐만 아니라
김 부자 정권에 겁을 먹게 하여 인민들을 더 한층 유순하게 부려먹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전에는 북한 사람들은 “맹호출림”이라고 불렸던 강한 사람들이었다.
반세기 이상에 걸친 김일성의 통제와 세뇌에 의해 고양이처럼 길들여졌다.
그 위에 핵무기로 해서 사람들은 더욱 순하게 되었다.
바사노바 여사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핵무기를 가짐으로 김정일이 군부 안에서와 북한의 지도부 안에서
개인적으로 주가를 높이게 되었다.”」
이 바사노바 여사의 지적을 보고 나는 눈앞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핵 위기는 식량폭동을 반미운동으로 바꿔치기 하는 술책만이 아니었다.
군부 속에서 김정일의 주가를 올리게 하는 노림수도 있었다.
-계속-
첫댓글 제게 들어 온 메일 중, 혼자 읽기 아까운 내용들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황장엽님 강좌 시리즈는 내용이 좀 길지만, 충분히 읽어 볼 가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