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8회 모던포엠 문학상 수상작
초록입홍합 외 9편
초록입홍합 외 9편
마경덕
홍합에게도 입술이 있구나
껍데기에 초록 테두리를 두른 곳까지 둥근 입이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 커다란 입술은
뉴질랜드 초록 바다를 보호색이라고 믿었을까
투명한 초록 물빛에 숨지 못해
그곳을 떠나왔을 것이다
붉은 입을 가졌다면
혹은, 검은 입을 가졌다면
누가 네 입을 맞추려 했을까
매끼 밥상에 오른 초록입으로
해안가 마오리족은 어느 부족보다 관절이 튼튼했는데
너는 살기 위해 플랑크톤을 잡아먹고
뼈가 무른 사람은 너를 잡아먹는다
어느 시인은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을 사슴이라고 했는데
나는 네 입이 초록이어서 다행이라고 쓴다
초록검색창에
초록입이 뜬다
네 입술과 내 입을 맞추면
너는 내 관절과 입을 맞추리라
차마, 예의가 아니지만
부실한 두 무릎을 초록입술에게 내민다
방음벽
돌진하는 새들
어디로 가는 중이었을까
봄부터 이어진 박새 참새 곤줄박이의 투신이 지역신문 헤드라인이 되려면 더 많은 새들이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
새들만이 아니었다
사차선 차도에서 튕겨 나와 벽과 충돌한 굉음은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신기루와 비행이 만나는 지점,
이곳은 묘지였다
질주하던 속도와 정면충돌한 사건이 중앙선을 넘고 벽을 뛰어넘었다
무단침입한 잡음은 아파트보다 높이 자랐다
최대한 키를 높여 달려드는 소리를 죽이겠다고
잠을 설친 의견들이 둘러앉았다
방음벽은 마지막 배수진
주민들은 새들 따위는 금방 잊었다
새의 죽음을 이야기한 시인이 있었지만 날아오는 화살에 곧 입을 다물었다
담쟁이를 심자던 숲해설가도 일조권에 밀리고 말았다
누군가는 새들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했지만 새들은 스스로 머리를 박거나 날개를 꺾지 않는다
하늘을 달리는 날개들은 머리를 들이박고 뼈가 부러진 소리들은 투명 방음벽 아래 수북이 쌓여간다
공중에도 로드킬이 있다
근육들
근육을 소비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소낙비, 근육이 빠진 어느 정치인의 공약처럼 바닥에 뒹군다
몸집을 키운 사내들이 괴물처럼 변해버린 육체를 전시 중이다 전봇대를 붙잡고 버티는 헬스클럽 광고지, 비에 젖은 종이의 근육도 만만치 않다
선거 벽보를 장식하던 노인의 이름에도 근육이 있었다 소나기처럼 찾아온 권력은 자주 뉴스에도 등장했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하늘이 있었다
화폐의 근육으로 터질 것 같은 금고들, 인맥이 촘촘한 저 노인도 화폐 속에 숨은 질긴 실처럼 자신의 전부를 은폐했다
바다의 근육으로 쫄깃한 모듬회가 나오기 전 쓰끼다시로 등장한 흐물흐물한 연두부, 이 빠진 노인 같다 입속에 살던 서슬 푸른 호령은 퇴화하고 혀의 걸음도 어눌한
기억은 누수되고 한도 초과인 노인의 카드에는 근육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해마다 근육은 감소됩니다” 의사는 그것도 병이라고 했다
하루치 근육을 다 써버린 태양이 서쪽능선으로 내려앉는다
뒤꼍
허공이 빽빽하다. 늙은 호두나무는 한 해 지은 농사를 전시중이다. 품꾼처럼 끝물 농사를 거들던 햇살이 매미울음에 구멍 난 그늘을 다 기웠다. 나무는 흔들리는 새소리와 그늘은 가지에 걸 수 없어 목록에서 빼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나는 직박구리 한 쌍과 멍석만한 그늘을 거저 받았다.
그동안 나무의 농사는 지붕위에서 벌어졌다. 나무는 약을 치듯 이파리마다 기름진 볕을 발라주었다. 지난봄, 바람의 고삐를 끌며 빛을 심는 것을 보았다. 그때 봄의 눈부신 쟁깃날에 지붕이 출렁거리고 우묵우묵 허공에 골이 파였다. 직박구리 부부가 울음으로 북을 돋우고 있었다.
우듬지에서 실족한 호두 한 알이 고요의 속살을 찔렀지만 고요는 곧 아물었다. 마당에 깔린 지붕만한 정적은 내 것이고 지붕만한 하늘은 호두나무 밭이다. 이삭 줍듯 그늘을 주워 깔고 앉으니 습하고 서늘하다. 나무농부가 사는 뒤꼍, 새참처럼 짧은 볕이 다녀간다.
만가(輓歌)
그 소리는, 이슥도록 갯가를 떠돌다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산동네에서 아랫마을로 내려와 밤바다를 철썩이며 선잠을 흔들던 청승맞은 그 기운은
언젠가 밤길에서 만난 혼불처럼 어둠의 틈새로 사라지고
어느 순간 소리에 꼬리가 돋아 그 꼬리를 붙잡고 가늘게 명줄을 이어 갔다
주거니 받거니
물보라를 일으키는 애끊는 리듬은,
풍랑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종오 엄마가 다리 뻗고 바닥을 치며 울던 젖은 곡조여서 사무치고 사무치는 것이었다
누구일까
폐병쟁이 황 씨, 노름쟁이 곰보 천 씨, 지게꾼 학출이 아버지도 그 길을 따라갔는데
또 누구일까
날이 밝으면
집 앞을 지나가던 꽃상여와 꽃잎처럼 붉은 울음과 노잣돈 없어 못 간다는 요령 소리가 귓전에 매달려
어린것이,
세상을 다 살았다는 얼굴로 눈물을 찔찔 흘리던 밤이 있었다
물컹한 돌
저 단단한 돌은
죽은 물고기 떼, 빙하를 따라 흘러온 암석의 파편
깨진 물거품, 바람과 파도의 부스러기
쌓이고 쌓인 부드러운 퇴적물을 공룡이 밟고 지나갈 때
물컹, 물컹, 육중한 체중이 찍혔을 것이다
뻘을 밟는 느낌이었을까
중생대 백악기의 발바닥에서 비릿한 냄새가 난다
짠물에 침식된 아득한 시간, 물컹한 것은 제 가슴에 발자국 본을 뜨고 있었다고
해안에 둑을 쌓고 뭍으로 올라와 증언한다
공룡을 버리고 뼈도 버리고
발자국만 품은 저 화석
그때 발을 빠뜨린 공룡은 발목을 들고 어디로 사라졌을까
깊은 어둠이 되거나 파도의 발길질에 사라질 하찮은 것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줄 공룡은 짐작이나 했을까
익룡까지 키운 까마득한 힘으로
숨을 쉬는 돌
누가 역사인가
거대한 것들은 지구에서 사라지고 밟히는 것들만 살아남았다
저 물컹한 것이 증인이다
측백나무 서재
황금측백나무는 책꽂이 형식
그 앞에 서면 마치 서재 같다는 생각,
제목만 보여주는 가지런한 책들처럼
줄기에 수직으로 꽂힌 납작한 이파리들 모두 측면이다
손을 밀어 넣기 좋은 딱 그만한
틈과 틈, 시집 한 권 몰래 빼낸 자리 같다
천지天地를 짓던 셋째 날
섬세한 잎맥도 그리고 잎새 둘레 톱날무늬도 새기느라
하나님은 돋보기까지 찾아 쓰셨다
돌려나기 뭉쳐나기 어긋나기 마주나기, 잎차례도 정해
조각조각 그늘까지 붙여 태어난 나무들
천 가지 만 가지 달라야하니 얼마나 머리가 아프셨을까
잠시 무릎을 펴고 둘러보니 사방천지
가로가로가로가로가로……
문득 생각을 뒤집고 측백나무를 설득했을 것이다
책 한 권 없는 부자보다 책이 넘치는 가난한 시인을 사랑한다고
황금이란 호를 덤으로 얹어
하나님은 그때 각별한 시 한 편을 측백나무에 꽂아두셨다
그리고 나는 그 시를 필사 중이다
환지통
잘린 나무는 어떻게 긴 밤을 견디는 것일까
없는 가지가 사무쳐 온몸으로 벅벅 허공을 긁는다는 말, 허공이 욱신거려
손목이 돋는 봄을 기다린다는 말
이것은 손톱에 때가 낀 나무들만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가 나게 허공을 긁어본
보기 좋은 나무들은 손목이 없다
그들이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마취제일까 진통제일까
교통사고를 당한 사내도 다리가 아파 못살겠다고
없는 다리를 만지며 엉엉 운다
의사가 말했다
사라진 다리를 기억하는 것은 뇌라고
걷고 달리고 걷어차던 습관을 뇌는 아직 붙잡고 있는 거라고
오래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홀아비도
없는 자식이 그토록 아프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처럼,
없는 다리가 아프고
없는 자식이 또 아프다
치장을 마친 정원의 나무들이 동쪽 허공을 문지르며 우는 밤이다
객짓밥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소금쟁이를 먹이려고
죽은 곤충을 연못에 던져주고
물위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쩍 벌어진 다리를
네 개나 달아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우리 엄마도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힘들면 편지하라고
취직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그냥 집으로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그 한마디에
객짓밥에 넘어져도 나는 벌떡 일어섰다
칼집
저 집이 고요하다
노련한 주인은 바람의 목까지벤 전적(前績)이 있다
팔을 휘두르던 무사(武士)는
끝내 집에 들지 못하고 칼만 제 집으로 돌아왔다
과업을 마치고 싸늘히 식은
침묵을 달아보니 사백년이다
저 잠을 깨우면 잠복한 살의(殺意)가 튀어나와
누군가의 목을 겨냥하리라
비명을 맛본 칼은 피맛을 잊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정확히 급소를 찾아낸 사내처럼
집이 열리면
단칼에 어둠의 목까지 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는 칼
칼집도 제게 꼭 맞는 몸만 모신다
둘은 혈연의 관계,
더러 길을 놓치는 천형(天刑)도 있어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늙은 어미처럼
빈 칼집은 불안하다
칼날끼리 불꽃을 토하는 칼
미쳐 날뛰던 기운도 집에 들면 온순하다
칼을 달랠 수 있는 건
칼집뿐이다
마경덕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그녀의 외로움은 B형』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제2회 북한강문학상 대상 수상. 두레문학상 수상. 제2회 선경상상인 문학상. 제18회 모던포엠문학상 수상.
심사평
「따듯한 감성을 예리한 지성으로 감싸 안은 언어 탐색의 도정(道程)」
김진석 시인, 서원대학교 명예교수
월간 모던포엠이 제정한 제18회 모던포엠 문학상 수상작으로 마경덕시인 「초록입홍합」 외 9편을 선정한다.
마경덕 시인은 사물과 존재에 대한 따듯한 감성을 예리한 지성으로 감싸 안아 형상화하고 있다. 시는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산문과는 다르다. 시를 쓰는 일이란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기 위한 언어 탐색의 도정(道程)에 다름이 아니다. 이 때 만나게 되는 ‘좋은 시는 산문보다 창조적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시가 그렇다. 이것은 언어의 논리를 넘어서 우리네 삶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더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적 대상에 대한 포괄의 힘과 극복의 정신을 조화롭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을 만나는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다.
이런 사실은 그의 자전적인 시론인 <편안함 속에 숨어있는 불편함>(초대석)만을 따라만 가 보아도 자명해진다. 이 진솔한 창작론에서 그는 시 쓰기를 “세상의 즐거움을 등지고 외로움에 말을 붙이는 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무의미하고 훼손된 말과 삶의 실상에 진실 되고 진정한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주술적인 행위와 맥락이 맞닿아 있다. 그는 시창작의 기본 원리를 “치열한 저항”의 담금질에서 찾고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일상의 언어는“”독자의 심장“을 겨냥하기 위해 디자인”된 “치명적인 진실”로 전환되고 있다. 독자를 향한 이보다 뜨겁고도 아름다운 활과 창은 또 어디에 있을까.
마경덕의 시세계는 시인과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진 상생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범박하게 말해 세상의 만물과 삶의 현상을 진지한 통찰의 눈으로 일구어낸 생명의 숲이다. 이 숲에는 정치, 경제등과 같은 거대담론이나 사자, 호랑이 등과 같이 약육강식의 정점에 서 있는 동물은 없다. 그 반대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목숨붙이들이 오히려 어깨를 펴고 활보하고 있다. 이들의 삶의 실상과 사랑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것에 발맞추어 시인은 기꺼이 몸을 낮추어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초록입홍합>의 홍합, <방음벽>의 새, “객짓밥‘의 소금쟁이 등과 같이 그의 시에 깃들어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현상은 이런 사물들에 대한 사랑이 단순한 연민의 정에 그치지 않고, 삶의 진정성과 존재의 본질을 깨우치고 밝히는 커다란 울림이자 아우라로 그의 시에 뚜렷한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제18회 모던포엠 문학상 심사 위원들은 마경덕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한국 서정시의 또 하나의 금자탑을 쌓아가는 시인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우리 문단에서 마경덕 씨처럼 독자들을 편안하고 낯익은 세계로 이끌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시의 향기에 흠뻑 젖게 하는 시인은 흔치 않다. 이 시인을 논하는 자리마다 중견 시인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듯 이미 그는 한국 시단의 한 꼭짓점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허나, 이 시인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은아직도 배가 고프다. 오랜 친구 같은 이 시인에게 더 많은 선물꾸러미를 기대하고 있다. 오늘의 수상이 그 여정에 든든하고 튼튼한 <신발>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마경덕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김진석. 엄창섭. 유창섭.